유원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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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 (🪂🪂🪂🪂 4.5) 높은 곳에 서는 이유는 추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람을 느끼며 도약하기 위해서이다. 


서사구조 간단 분석/요약

1️⃣ 발단 : 언니가 살려낸, 언니의 몫까지 살아내야 한다는 부담과 죄책감을 지고 살아가는 '유원'

2️⃣ 전개 : 자유롭고 주체성 있어 보이는 '수현'과 수현의 동생 '정현'을 만남

3️⃣ 위기 : 수현, 정현과 친해지는 한편 '아저씨'가 끊임없이 '나'와 가족들을 괴롭힘

4️⃣ 절정 : 아저씨와 수현, 정현의 관계가 밝혀짐. '나'는 더 이상 아저씨를 속으로만 혐오하는 소극적인 태도에 그치지 않고 거절함

5️⃣ 결말 : 높은 곳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정'을 이해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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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11) 아파트 8층에서 초등학생이 크리스털 트로피를 던져 길을 가던 육십 대 여성이 중태에 빠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2킬로그램밖에 안 되는 트로피에 맞았는데 중태에 빠졌다고?


🔖(p12) 언니의 생일과 기일은 사흘 간격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부턴가 언니의 생일만 챙긴다.


'나'(유원)는 어릴 적 사고로 인해 언니 '예정'을 잃는다. 담뱃불이 튀어 화재가 난 상황에서 언니는 '나'를 물에 적신 이불로 감싸 아파트 11층에서 던지는데, 나는 살아남고 언니는 연기에 질식되어 죽는다.

잃은 건 언니뿐만이 아니었다. 생전 언니를 알던 사람들은 유원에게 네 언니가 착하고 대단했던 사람이라고 말하며, 같은 학교 아이들은 사정을 알고 수군거리며 배려해준다.독립된 개인 '유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늘 언니의 모습에 투사된다. 예정언니의 친구 '신아'는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쓰기까지 한다.


🔖(p62) 원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울렁거린다. (...)순간순간 나를 놀라게 하는 건 원이의 목소리. 보고 싶었어, 하며 그 애가 나를 껴안았을 때 그 애 안에 예정이가 살아있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에게 예정언니의 모습을 요구하지 않는 인물도 있지만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아저씨'는 높은 곳에서 떨어진 '나'를 받아내다가 불구가 된다. 트럭 기사였던 아저씨는 경제적 능력을 상실하여 십 년이 넘도록 엄마와 아빠에게 돈을 빌리러 온다. '나'는 이런 주변사람들이 답답하고 혐오스럽다.


'유원'의 정체성은 늘 '사고'와 '언니'라는 키워드로 특정된다. 그런데 '수현'이라는 아이만은 달랐다. 옥상에서 우연히 만난 수현의 첫인상은 조심성 없는 발소리에 품이 큰 체육복을 입은 자유로운 아이였고, 유원을 그저 싱겁게 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p51) 그래도 신수현이 나를 김세진의 짝이라는 것 말고 그 이상으로 아는 체하지 않아서 약간 호감이 갔다.


유원은 점차 수현과의 관계에서 공유하는 이야기가 많아지고 덤으로 수현의 동생 '정현'과도 친해진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친구를 사귄 유원은 죄책감과 강박에서 조금씩 벗어나 정서적 안정을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뜻밖에도 수현이 아저씨의 딸이라는 사실을 밝히자 마음이 혼란해진다. 더 큰 문제는 아저씨와 수현과 '나'가 삼자대면하면서 불거진다.


🔖(p168) 지나칠 정도로 수현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나보다 더 아저씨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p183) "아빠는 왜 남들처럼 정직하게 살지 못하고, 누군가를 착취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지? (...)아빠는 그날 널 구하지 않았던 게 아빠 인생을 위해서 더 나은 일이었을 수도 있어." / 그러면 나는 죽었겠지. 잔인한 말이었지만 수현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아빠를 참아왔듯이 수현이 나라는 존재 또한 참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 유원은 아저씨를 만나 오랜 관계를 청산하고, 아저씨와 수현은 다른 사람임을 깨닫는다. 


🔖(p195-196) "제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서 다리가 으스러진 거 잖아요. 죄송해요. (...)그런데 아저씨가 지금 저한테 그레요. 아저씨가 너무 무거워서 감당하기 힘들어요." (...)아저씨는 저런 눈을 하고 있구나. 목소리만큼 크고 위협적이지 않았다. 누렇고 흐리멍덩해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무거워서 휘청거릴 때마다 수현은 나를 부축해주었다.


또한 유원은 '아저씨를 대하는 태도'를 전환하는데, '정현을 대하는 태도'와의 대조가 특히 '우산'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p198) 아저씨는 종이 백에 있던 접이식 우산을 펴 내게 건넸다. 우산살이 하나 부러져 한쪽이 구부러진 우산이었다. 손잡이 부분은 녹슬어 있었다.


🔖(p200) 정현은 파라솔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커다란 우산 속에 있었다. (...)비가 사선으로 내리니 피할 수가 없었다. 울고 있어도 하나도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정현 역시 수현만큼이나 자기 아버지를 증오하고 멀리하는데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그리고 잊으려고 노력한 게 기특한 한편 안쓰럽기도 하다.


🔖(p215)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우리 주위에도 종종 있잖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냥 돌멩이 같은 거라고 생각해. (...)뾰족뾰족하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것들. 그냥 그런 상태인 거야. (...)거기에 내가 넘어져서 긁히고 베여도 화를 내는 게 무의미한 거야. 내가 돌멩이를 이해하려는 노력도 무의미한 거고, 돌멩이가 내 감정을 이해해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더 무의미한 일인 거야."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나'의 생일에 맞추어 수현과 정현은 생색을 내며 '나'를 남해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무서움 대신 설렘, 기대감, 전율을 깨닫는다.


🔖(p221) 높은 곳에 서려면 언제나 용기가 필요했다. (...)다리가 후들가리고 식은땀이 나는 건 잠재의식 속에 사고에 대한 감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에 서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이런 걸 무서워하지 않는구나. 나는 오히려 이런 걸 좋아하는구나.


🔖(p223) 패러글라이더와 함께 나는 10미터 가량을 달렸다. (...)주춤할 틈도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차, 하는 순간 나는 이미 날고 있었다. 어딘가의 바깥에서 드디어 안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온전히 내가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p224) 나는 처음으로, 그리고 진심으로, 언니의 용기를 닮고 싶었다. 이 모든 것들을 누리게 해 준 언니를. 나는 새롭게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천천히 지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허탈하지 않았다. (...)수현과 정현이 나에게로 달려왔다. 무사히 돌아온 나를 부둥켜 안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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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건 상당히 힘빠지는 일이다. 유원은 그걸 십 년 넘게 당해왔으니, 만성적인 피로와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다. 공부를 해도, 그림을 그려도 늘 언니와 비교하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니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이런 일상에서 수현이 구원자처럼 등장하고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이, 아저씨와의 불편한 관계를 끊어내고 어깨를 편 유원이 기특하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유원의 독백이 달라지는 걸 느끼며 뭉클하기까지 했다. #패러글라이딩 은 유원이 수현, 정현과의 관계를 통해 내면이 성장했다는 징표이자 비유로 보인다.


🔖(p117) 나는 엄마의 하나 남은 딸이자, 언니가 선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품이다. 이미 끝난 언니의 삶을 연장시키며 보조하는 존재.


🔖(p216) 우리는 각자가 각자의 자리에서 건강하게 자라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p223-224)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거추장스러운 장비를 풀어서 밑으로 던져 버렸다. 몸이 더 가벼워졌다. 공중에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잠시 빙글빙글 돌았다. 바다 표면과 부딪칠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가까스로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여담으로 사전서평단을 신청할 때 제목 '유원'의 뜻을 유추해보았는데 '신아'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p160) "예정이가 너 오랫동안 기다렸거든. 유치원 때부터. 한자로 원할 원에다가 영어로도 원트는 바라다라는 뜻이라면서 꼭 유원이어야 한다고 했어.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기다림에서 시작했지만 파생되었다기보다는, 이제는 독립된 '유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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