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 장대한 동슬라브 종가의 고난에 찬 대서사시
구로카와 유지 지음, 안선주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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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우크라이나가 왜 이 사태를 겪고 있는지 당최 모르겠어서 책을 샀다. 고대/중세사보다는 근현대사가 도움이 될듯해서 바로 5장 "러시아,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부터 읽었다.

우크라이나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약 120년 간 영토의 80%는 러시아, 20%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의해 지배당한 바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를 겪었기 때문에 일부 공감하며 읽을 수 있었다. (근데 저자가 일본인이라는 게 흠좀무;) 흐름은 대충 이해했는데 세부적인 건 아직 머릿속에서 정리가 덜 됐다ㅠ 그래서 서평까지는 아니고... 그냥 책을 읽으면서 눈길이 오래 끌렸던 문장을 늘어놓겠다.

🔖(163쪽)러시아 제국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어가 러시아어 방언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따라서 진실하고 고상한 것은 러시아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다.

🔖(165쪽)셰브첸코는 농민의 구어와 방언, 고대 교회 슬라브어를 통합하여 힘 있는 우크라이나어를 창조했다. 셰브첸코의 출현으로 우크라이나어는 비로소 고도의 내용, 복잡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지위를 얻었다.

🔖(167쪽)셰브첸코는 사후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우크라이나 독립 후에는 우크라이나 최대의 위인으로 평가되어 거리와 시설 곳곳에 그의 이름이 새겨졌다. 최고 단위의 지폐인 100흐리브냐에는 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181쪽)러시아 제국 말기에 우크라이나 동남부는 제국 최대의 공업지대로 발전했는데, 이 과정은 당시 유럽 전체로 봤을 때도 가장 급속한 공업화였다(...) 중공업이 급성장하자 공장 노동자가 필요했지만 이는 근교의 농촌에서 인원을 충당할 수 있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의 도시는 이전부터 폴란드인, 유대인, 러시아인이 살던 곳으로, 그들의 언어와 생활 양식은 농촌에 사는 우크라이나인과는 크게 달랐던 탓에 농민들에게 도시는 살기 불편한 이질적인 세계였다.

1917년 러시아 페트로그라드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고 차르가 퇴위함으로써 제정이 끝났다. 키예프에서는 3월에 우크라이나 민족 해방을 바라는 이들이 모여 '우크라이나 중앙 라다(평의회)'를 결성했다. 당시 러시아 임시정부는 제한적으로나마 우크라이나의 자치를 인정했는데, 10월 (볼셰비키)혁명에서 레닌이 임시정부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소비에트 정부를 세워버린다. 임시정부 소멸에 따라 중앙 라다는 11월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 창설을 선언했다.

🔖(194-195쪽)사실상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이었다. 실제로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중앙 라다가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점부터 독립국 우크라이나가 존재하기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제3차 우니베르살을 통해 주창된 우크라이나 국민공화국의 원칙은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포함하지만 매우 민주적인 것이었다. 즉 언론, 출판, 신념, 집회, 시위의 자유, 개인의 불가침, 사형 폐지, 정치범 사면, 소수민족의 자치 권리, 8시간 노동, 토지의 사유 제한, 생산수단의 규제, 전쟁의 종결 등이다.

🔖(199쪽)볼셰비키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당연히 러시아의 틀 내에 두어야 한다며 중앙 라다의 내셔널리즘은 반혁명의 부르주아, 분리주의자로 간주했다. 곡물, 설탕, 석탄, 금속 등의 산업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있어 불가결한 존재이며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분리하는 것은 왕정파든 공산주의자든 러시아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26쪽)1922년 12월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이 성립됐다(...) 각 공화국의 공산당은 실제로는 러시아 공산당의 지부에 지나지 않았다(...) 러시아 제국에서 소련으로 이름은 바뀌었어도 똑같이 러시아인의 지배라는 점에서는 결국 혁명 전이나 후나 그다지 달라진 게 없었다.

🔖(233쪽)(스탈린은) 농민을 자신이 생각하는 사회주의 체제에 편입시키기 위해서는 거친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수단이 된 것이 1928년에 시작되어 1929년부터 강제화된 '농업 집단화'다(...) 농민을 토지에서 분리하여 농업 노동자나 프롤레타리아트로 바꾸는 것이었다.

🔖(234쪽)집단화는 스탈린과 당 지배의 영속화에는 이바지했을지언정 우크라이나에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했다. 그 결과가 바로 1932~1933년에 일어난 대기근이다.

🔖(236쪽)이 기근의 첫번째 특징은 강제적인 집단화와 곡물 조달로 인해 발생한 인위적인 기근이며(...) 두 번째 특징은 러시아 자체는 이 기근을 거의 겪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 번째 특징은 이 기근이 소련에서는 가능한 한 감춰져 있었다는 것이다.

(* 어느 학자는 당시 우크라이나에서 300~600만명이 아사했을 것으로 추계했다.)

🔖(262쪽)(1964~1989년) 우크라이나에서는 러시아어의 사용이 장려되고 우크라이나어의 사용에는 간섭이 뒤따랐다(...) 당국은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열등의식을 심으려 했고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인텔리는 반체제 운동가로 의심을 받았다.

🔖(270쪽)우크라이나에서 소련 체제에 대한 불신이 처음으로 고조된 계기는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다(...) 소련은 생산지상주의로 그동안 환경 문제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문제가 일어나도 감추기만 했다. 우크라이나는 소련의 제1중화학 공업지대라고 자랑했지만 실상은 공장과 광산이 배출하는 오염물질이 흘러넘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는 소련 유수의 오염지대가 되어 주민들의 건강 문제가 심각해졌다.

🔖(273쪽)1989년 9월, 긴 세월 민족주의를 억압해온 셰르비츠키가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의 지위에서 해임되고(...) '페테스트로이카(재건)을 위한 우크라이나 국민운동'(*루흐)이 결성됐다. 이들은 인권과 소수민족의 권리, 종교의 보호, 우크라이나어의 복권을 요구하는 온건한 조직으로, 독립까지는 주장하지 않았으며 소련이 주권국가의 연합체가 되기를 원했다.

🔖(274쪽)1990년 3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의 의회인 '최고회의'의 선거가 이루어졌다. 그사이 급진화된 루흐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275쪽)(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거의 만장일치로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훗날 이날은 독립기념일이 된다.

(* 우리나라로 치면 3월 1일 만세운동 기념일?)

🔖(278쪽)독립은 유혈을 수반하지 않고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소련이 스스로 붕괴해가는 과정에 무임승차한 면이 강하다.

🔖(280쪽)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유지하고 안정되는 것은 유럽, 나아가 세계의 평화와 안정에 있어 중요하다. 이는 미국과 서유럽의 주요국이 공유하는 인식이지만 중, 동유럽 국가의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소련 치하에서 크림 전쟁, 제1,2차 세계대전을 겪고 영토가 분열되면서도 민족주의를 계속 끌어안고 결국 독립선언을 했다는 점이 놀랍다. 처음에 인용했던 것처럼 시인 셰브첸코가 현대 우크라이나어로 작품을 발표한 것이 우크라이나 민족의 정체성을 선언한 셈이 되어 후대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는 저자의 말을 곱씹게 된다.

이 책의 일본어 버전은 1999년에 쓰였고 따라서 21세기의 우크라이나는 담겨 있지 않다. 가장 최근의 역사와 정치에 대해 알고 싶어서 집어든 책이었는데... 아쉽지만 그건 다른 매체를 통해 알아봐야겠다🙄

셰브첸코는 농민의 구어와 방언, 고대 교회 슬라브어를 통합하여 힘 있는 우크라이나어를 창조했다. 셰브첸코의 출현으로 우크라이나어는 비로소 고도의 내용, 복잡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지위를 얻었다. - P165

볼셰비키 정부는 우크라이나를 당연히 러시아의 틀 내에 두어야 한다며 중앙 라다의 내셔널리즘은 반혁명의 부르주아, 분리주의자로 간주했다. 곡물, 설탕, 석탄, 금속 등의 산업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있어 불가결한 존재이며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에서 분리하는 것은 왕정파든 공산주의자든 러시아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P199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최고회의는 거의 만장일치로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훗날 이날은 독립기념일이 된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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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크리틱 2
김은실 외 지음, 김은실 엮음 / 휴머니스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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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은 여러 논문의 초록들만 모아서 묶어놓은 책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이 시국을 진단하고 해결방법까지 알려주는 친절한 글이 아니라, 화두'만' 던지고 끝난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열세 명의 글쓴이가 각자 열쪽 정도의 분량을 써냈는데 주제가 다 다를 정도니, 얕고 넓은 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용까지 가벼운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은 화두를 던진다. 그 이야기가 너무 추상적이라 답답할 수도 있다. 어떤 글은 주제에서 드러나는 글쓴이의 가치관이 별나라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질문에 대한 답 또는 반박근거를 대며 생각하는 사이에 우리는 고정관념을 넘어서 코-시국과 페미니즘을 좀 덜 감정적으로, 좀 더 합리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페미니스트‘ 역시 규범적 여성과는 구별되는 성차별에 관해 정치적으로 자각한 여성에 대한 호칭이다. - P25

여자대학은 주류 서회 전반에 대한 급진적, 대항적 문화정치 투쟁의 장으로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고등교육에 접근할 기회에서 성평등이 이루어진 지 이미 오래된 상황인데도 현재 여대가 존립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 대항적 공공성에 있다. - P55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배타적인 여성 범주에 기대어 누군가를 배척하는 운동은 여성을 차별과 위험에서 해방해 평등하고 안전한 세계로 이끌지 않는다. 그건 여성을 성기로만 축소해온 가부장제의 낡은 세계관을 답습함으로써 여성을 피해자의 자리에 고착시키고 또다시 가부장제의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결과를 불러오기 쉽다. - P61

재난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가 확인하는 진실은 인간이란 돌봄과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이고, 개인의 희생이 아닌 협력적 공공의 개입을 통해 돌봄이 이뤄질 때 가장 공평하다는 것이다. - P79

돌봄과 무관한 인간은 없다. 무관한 척 살도록 허용하는 부정의한 구도가 있을 뿐이다. 코로나19의 경험은 인간의 취약함과 서로에게 건강을 빚진 연결성을 환기함으로써 이 오래된 돌봄 부정의를 변화시키는 공적인 계기가 돼야 한다. - P96

‘어떤 피도 우리를 멈출 수 없다‘도 맞지만, ‘피가 나면 멈출 수 있어야 한다‘도 맞다. - P121

사람들은 페미니스트를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여성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은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들은 시대의 규범을 뒤흔들기로 작정했고, 그런 점에서 욕을 먹는 것을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 - P149

우리의 페미니즘은 어디로 가는가? 나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공한 ‘나쁜 여성‘이 아니라, 세상에 도전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길 바란다. - P156

페미니즘은 여성이 배제된 경험을 통해 성장했기에 그 어느 사상보다도 ‘폭넓다‘. 차별, 대상화, 착취와 폭력은 성별 제도 외에도 다른 사회적 모순과 교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여성해방을 넘어 약자와 공존하는 법, 자연과 공생하는 법을 모색한다. ‘여성만의 문제‘는 존재할 수 없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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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에 걸려버렸다 - 불안과 혐오의 경계, 50일간의 기록
김지호 지음 / 더난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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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도 치료제도 아직 없던 시기,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은 마치 사회에서 영원히 격리되어야 할 것만 같은 존재, 위생적으로든 도덕적으로든 더러운 존재로 취급받았다. 지금은 모두(?)가 합심해서 정부를 욕하지만 당시만해도 SNS상에서 비감염자들은 감염자를 대상으로 한 두려움, 혐오, 분노를 여과없이 뱉고 퍼뜨렸다...고 기억한다. 특히 종교집회, 클럽, 시위에 다녀와서 감염된 사람들이 엄청나게 질타당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때 감염자의 이야기에 귀기울인 적이 있긴 했던가? 사이비 종교 집회에 참석하지도 않고 클럽에서 흥청망청 논 것도 아닌데 그냥 재수없게 걸려버린 사람은 어땠을까? 우리는 그동안 너무 두려움에 질린 나머지, 입에 방아쇠가 달린 것마냥 부정적인 말을 떠들어대고 귀는 닫아버리지 않았나? 그래야만 불안을 해소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코로나에 걸려버렸다』는 실제로 코로나19에 감염되어 2020년 늦봄부터 여름의 끝자락까지 감염자의 입장에서 코-시국을 기록한 것이다. 저명한 학자가 아니라 일반적인 20대 직장인이 썼기에 어려운 내용도 없고 잘 읽힌다.

저자는 예상치 못하게 코로나에 감염되어 국립중앙의료원에서 50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매일매일 업데이트되는 확진자수 그래프에 드러나지 않는, 감염자의 일상과 심리를 글로 남겼다. 구급차를 타고 이송되는 순간부터 병실 내부와 식단을 찍은 사진까지 들어 있어서 눈길이 갔다.

🔖(81쪽)누구든 걸리고 싶어서 걸린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손가락은 나에게, 확진자에게, 우리를 향한다. 자신도 걸릴까봐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두려움'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죄를 병마와 싸우고 있는 확진자들에게 씌운다.

🔖(11쪽)두려움이 우리의 민낯을 드러냈다.

밀접접촉자로 분류되어 2주간 자가격리를 했기 때문에 월급을 날린 헤어디자이너, 클럽에 다녀온 뒤 확진되어 회사에서 잘린 친구의 이야기도 저자의 목소리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이 격리해제되고, 완치되면 위생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사회는 이들에게 경제적 불이익을 선사한다. 저자도 퇴원 후 회사와 헬스장에 나가지 못하는 상황을 겪었다고 한다. 한 발 물러서서 보면 뭔가 이상하고 께름칙하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바이러스로 보는 듯한 분위기가 만연했던 것이다.

작년 말부터 방역패스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을 때도 본질은 같았다. 미접종자들이 식당이나 카페에서 출입금지 조치를 당할 때, 사람이 아니라 바이러스 취급을 받는 것처럼 느꼈다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관련한 모든 발언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에 주목해야 한다. 방역패스처럼 경계를 나누고 차별하는 적극적인 행위를 가능케 한 요인은 무엇일까.

핵심은 이것이다. 저자 김지호가 수차례 지적하듯이, 이 시국의 주된 문제는 코로나19 그 자체가 아니라 공포에 질려 이성이 마비된 상태, 그래서 서로 배려하는 법을 잊고 이기심을 자유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의 태도다. 코-시국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물론 치료제나 집단면역 같은 요소가 필요하겠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영영 상흔을 지울 수 없을 것이라는 섬뜩한 느낌까지 든다.

백신도 3차까지 접종하고, 먹는 치료제도 도입한 2022년의 우리는 2년 전에 비해 얼마나 성숙해졌는가? 상황이 나아져도 우리의 인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재난은 언제든 다시 찾아올 것이다. 잠시 멈춰서서 여태까지의 행동과 말을 돌아봐야할 때, 이 책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두려움'을 더 깊이 파고들고 싶다면 마사 누스바움의 책 『타인에 대한 연민』(알에이치코리아, 2020)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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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것이나 당신의 것은 아닌 - 서울과 파리를 걸으며 생각한 것들
정지돈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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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되게... istp 같으시다 (아님 말고... 근데 딱 잇팁의 바이브 그 자체임)


플라뇌르라는 키워드를 던지는 책에 걸맞게, 나도 특별한 목적 없이 읽으며 휘뚜루마뚜루 페이지를 넘길 요량으로 책을 집어들었다(리뷰를 작성하겠다는 생각은 언제나 기저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무목적 상태는 아니었지만...).

이 책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이름은 금정연, 오한기, 이상우, 그보다 자주 등장하진 않지만 무게감 있는 이름은 발터 벤야민, 버지니아 울프, 리베카 솔닛 등등... 나머지는 기존 배경지식이 없어서 그런지 빠르게 휘발되어 버렸다...(한 번 더 읽어야 할지도).

말줄임표와 괄호가 많아서 정제된 에세이집이라기보단 블로그 글모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게 싫다는 건 아니고... 후루룩 읽혀서 오히려 좋아... 중간중간에 걸리는 자갈(혹은 조약돌) 같은 문장도 괜찮아서 적어 두었다... (플라뇌즈와 모던걸을 묶어 사유하는 방식은 처음 봐서 흥미돋)

정지돈 작가님과 마주 앉아서 2시간 동안 조용히 떠들며 즉석 떡볶이 한 냄비를 해치운 기분이다(근데 이제 금정연, 오한기, 금정연, 오한기, 발터 벤야민, 금정연, 오한기를 곁들인...). 떡볶이는 아무래도 소울푸드니까... 나중에 또 찾아 오겠지 아마도?


도시를 가로지르고 표류하고 발견하고 점거하고 걷기 위해서는 도시를 배워야하고 배우기 위해서는 발화-보행해야 한다. - P16

문학의 주된 원료는 망함이다. 좀 더 그럴듯한 단어로 하면 파국, 몰락. 쉬운 단어로는 실패, 패배. - P30

플라뇌르의 산책은 흔히 거북이의 속도와 비견된다. 게으르고 느린 구경꾼의 시선, 산업화의 속도를 거부하는 완만한 속도. 그러나 사실 플라뇌르가 거북이 속도로 걷는 이유는 실제로 거북이와 함께 걸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튀기 위해 가재나 거북이에게 목줄을 묶어 산책했다. - P81

미래가 존재하지 않는 유예된 공간에 기거하고 싶은 욕망(...) 산책은 이럴 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 P90

백인(남성)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세계가 자기 집 앞마당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들은 두려울 게 없고 두려운 게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라고 믿는다(그런 의미에서 플라뇌르적 산책을 실천하는 데 가장 최적화된 것은 백인(남성)이다). - P128

차별과 혐오는 예외적인 행위가 아닌 일상적인 상태에 가깝다. 그러므로 저항도 그래야 한다. 저항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가져야 할 상태다. - P133

발터 벤야민의 야심 또는 꿈이 가장 잘 실현될 수 있는 것은 도보도 자동차도 아닌 전동 킥보드다. - P163

모던걸들은 왜 플라뇌즈로 개념화되지 못했을까. 그들이 자주 비판받은 요인 중 하나가 여성은 상품 소비문화의 수동적인 노예에 불과하다는 시각이었다. 플라뇌르 역시 동일한 문화에서 탄생했지만 남성들이 관찰자이자 소비자로서 양가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반면 여성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모던걸은 허영과 사치를 일삼는 성적 방종의 상징이었다. - P187

자동차의 애칭은 ‘등대‘. 그녀는 동생과 함께 넓은 공터에서 운전을 배웠지만 운전 실력은 평생 늘지 않았다(울타리를 몇 번이나 들이받았다). 그럼에도 버지니아 울프는 드라이브를 사랑했다. - P199

진정성은 자유주의 같은 거라서 결국 문제는 윤리와 경제, 두 차원으로 환원된다. -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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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이동호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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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는 제8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받은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책을 펼치기 전부터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문구다. 과연, 저자 이동호는 '글빨'이 굉장한 작가이다.


1부 '공장과 농장 사이'는 돼지 3마리를 직접 키우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엮은 것인데, 돼지를 처음 마주하고 축사로 데려오는 장면들이 맛깔나게 서술되어 있어서 낄낄거리며 읽었다. 거의 모든 장에 삽화가 들어가 있어서 그림을 토대로 축사를 상상해 보기도 했다.


저자는 공장식 축산업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돼지를 돼지답게 키우고 싶어서, 그리고 그 돼지를 잡아 먹음으로써 육식을 대하는 자세를 제대로 알고 싶어서 꽤나 정성스레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73쪽)과수원에서 적과한 새끼 사과를 모아 돼지에게 주었다. 사람이 먹지 않는 오디와 벌레 먹은 자두도 주었다. 돼지는 이 모든 걸 아주 맛있게 먹었다. "츄릅 츄릅." 동네 빵집에서 팔고 남은 빵을 가져다 주었다. 내가 일하는 목장의 비품 요구르트를 섞어 주기도 했다. 고구마 쭉정이, 상처 난 감자 같은 농부산물은 계절을 돌아가며 나왔다.


다른 축산업자들이 으레 하듯이 곡물 사료를 먹이지 않고 굳이 이런 식으로 먹이를 구해다주는 경험을 통해 저자는 "별도의 에너지 투입 없이 생긴 먹이로 돼지를 기른다는 뿌듯함은 물론 돼지가 무엇을 먹고 좋아하는지를 보며 느끼는 순수한 즐거움"(75쪽)을 발견한다. 심지어는 땀샘이 없어 더위에 취약한 돼지들을 위해 여름 마당에 구덩이를 파고 물을 부어 '워터파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103쪽)돼지들은 하마가 되었다. 그날 이후로 돼지들은 물에서 하루를 보냈다. 밥 먹을 때, 잠시 어슬렁거릴 때를 빼고는 물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밥그릇도 수영장 물 위를 떠다녔다. 물을 흠뻑 묻히고 나와 개처럼 몸을 털었다. 아이들 웃음소리에 배부르다더니, 돼지들이 물에서 펄쩍펄쩍 뛰는 모습에 내 더위도 가시는 것 같았다.


유쾌하고 마음이 시원해지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쯤에서 이 책의 주제가 '행복한 돼지의 삶'이 아니라 '돼지 키우고 잡아 먹기'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처음의 목적대로, 돼지를 잡아야 하는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2부 '생명과 고기 사이'는 결국 돼지를 죽이고 얻은 고기를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이야기이다.


(115쪽)나는 돼지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여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는 관계가 달라질 위험이 있다. 유일의 존재가 되고 애정을 갖게 될 것 같았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고 몇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필요 이상의 친밀함을 나누지 않기 위해 이름도 붙여주지 않은 암퇘지 한 마리를 잡기로 약속한 날 새벽, 저자는 돼지를 기절시키기 위해 망치를 들었다. 그러나...


(137쪽)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려칠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함께한 시간이 떠올랐다거나 추억 같은 상념에 젖은 건 아니었다. 내 몸의 저항을 주도하는 정체는 살아 있는 생명을 망치로 내려친다는 것, 생명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거북함이었다. 내려칠 수가 없었다. 돼지도 생각이 있고, 피가 흐르고, 숨을 쉰다는 그 동질감이 거부감이 되어 나를 압도했다.


도축 일정 자체를 취소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망치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돼지는 갈라진 비명을 지르다가 죽는다. 살아 있는 동안에 아무리 행복한 돼지였다고 하더라도 "천사들이 내려와" 돼지를 죽인 사람의 "죄를 사해주지"는 않는다.


(139쪽)생명을 거두는 데에는 어떤 책임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도축장에 맡겨둔 우리의 책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저자는 책을 마치며 꼭 비건이 아니더라도 돼지와 사람을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아무런 의심 없이 1++ 등급 한우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여기거나,  여행의 꽃은 고기라며 삼겹살과 목살을 구워 먹는, 여태까지의 몰지각했던 습관을 바꾸면 된다


(163쪽)작은 선택으로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뒷다릿살을 먹는다면 돼지의 전체 사육 마릿수를 줄일 수 있다. 자연 양돈 방식으로 기른 돼지고기를 먹는다면 돼지의 고통을 줄일 수 있다. 마블링 없는 3등급 소고기를 먹는다면 옥수수 생산을 줄일 수 있다. 옥수수가 줄면(...)아마존을 지킬 수 있다.


탈육식의 문턱 주변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그러나 비건이 되기는 두려운 이들에게 감히 조언해주고 싶다.


(186쪽)고기 이전에 돼지가 있고, 돼지는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고기를 먹을지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이면까지 알고 선택할 때에야 비로소 진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돼지의 이름을 짓지 못했다. 아무 이름이나 갖다 붙여도 이름을 부르는 순간부터는 관계가 달라질 위험이 있다. 유일의 존재가 되고 애정을 갖게 될 것 같았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고 몇번이나 속으로 되뇌었다. - P115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내려칠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함께한 시간이 떠올랐다거나 추억 같은 상념에 젖은 건 아니었다. 내 몸의 저항을 주도하는 정체는 살아 있는 생명을 망치로 내려친다는 것, 생명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거북함이었다. 내려칠 수가 없었다. 돼지도 생각이 있고, 피가 흐르고, 숨을 쉰다는 그 동질감이 거부감이 되어 나를 압도했다. - P137

측정할 수는 없지만, 생명을 거두는 데에는 어떤 책임이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도축장에 맡겨둔 우리의 책임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 책임은 외면하면 그만인 책임인 걸까? 하루 평균 7만마리씩 도축되는 돼지의 넋은 누가 위로해줄까? 효율화라는 이름으로 쪼개지고 흩어진 우리의 책임이 어디로 가는 건지 생각해본다. - P139

고기 이전에 돼지가 있고, 돼지는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 어떤 고기를 먹을지 선택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지만, 그 이면까지 알고 선택할 때에야 비로소 진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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