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정치권력의 유혹을 두려워하여 카타콤에 숨어 있으면 안전할지 몰라도, 제자도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께충성하고 예수를 본받는 삶,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이는 확연히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기독교인과 다른 이들을 구별하는 요소는 언어, 음식, 복장, 관습이 아니라, ‘특이한 삶의 방식‘과 ‘하나님 나라 시민의 이상한 특성‘이다.‘ 원한다면 이런 차이를 믿음, 사랑, 소망, 미덕으로 요약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들은 신자가 공적 영역에서 세상을 위해 발휘하는 덕목이다. - P148

그런데 네 복음서 모두 이 사실을 단순화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이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 임한 일이며, 다윗의 진정한 아들이자 후계자인 ‘메시아께서 그 통치를 행사하신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의 죽음을 통해 임한다. 하나님 나라가 십자가에 의해 재정의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이다. 십자가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사건이라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한편으로 끔찍하고 잔인한 불의의 행위이며, 다른 한편으로 강력하고 구원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다. 이 두 가지 의미는 극적이고 충격적이지만 영구적 관계로 이어진다. 궁극적으로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재정의하는 예리한 칼날이며, 재정의된 형태의 하나님 나라도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궁극적 의미이다. - P154

그렇다면 사랑과 감사와 친절에서 나오는 모든 행위,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쁨에서 영감을 얻은 모든 예술 작품과 음악, 중증장애 아동에게 읽기나 걷기를 가르치는 모든 순간, 죽어가는 환자를돌보는 모든 행위, 난민을 위로하고 지원하는 모든 행위, 동료 인간을 위해 하는 모든 행위부터 창조 질서를 보존하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한 모든 일, 성령이 이끄시는 모든 가르침,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를 세우며 거룩함을 포용하고 구현하는 모든 행위, 마음의 소원을 아뢰는 모든 기도,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을 존귀하게 하는모든 예배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통해 그분이 언젠가 이루실 새 창조에 포함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선교의 논리이다. 하나님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그분의 놀라운 세계를 재창조하기 시작하셨고, 하나님의 백성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의 영의 능력 안에서 살아갈 때 재창조의 과정은 신비롭게 계속된다. - P161

우리가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하기 위해 지금 하는 일은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에 그 나라가 마침내 완성될 때 온전한 의미를 얻게 된다. 이것을 교회의 사명에 적용하면, 우리가 지금 여기에 그 나라의 표지를 세움으로써 하나님이 "모든 것이며 모든 것 안에 계실 때, 곧 그분의 나라가 임하고 그분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때, 모든 것이 어떤 모습일지 미리 보여주어야 한다는뜻이다. 새 창조의 백성은 그 나라의 경이와 아름다움을 바라보면서 강렬한 기시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한때 들었던 기도가 다시 떠오르고, 한때 보았던 긍휼의 행위가 다시 펼쳐지고, 한때 불렀던 노래가 온 사방에 울려 퍼지고, 이전에 들었던 예수에 대한 설교가 이제 살아 움직이고, 정의를 촉구하던 외침이 이제 응답되고, 이전에들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사랑이 나타난 것 같이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건설에 기여하는 이유는 우리가 왕을 위해 하는 일이 그분의 나라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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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 최초의 은수자들은 3세기 후반 이집트에서 나타났다. 처음에 사람들이 살지 않는 험한 땅으로 향했던 사람들은 세상의 유혹뿐 아니라 적대와 박해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 이후 수도자의 수는 교회가 사회적 명망을 얻는 것에 비례해 증가했다. 수도 생활을 향한 4세기와 5세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열정은 ‘사막이 도시가 되었다‘는 말로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 - P119

한 이야기를 보자. 악마들이 사탄의 궁전에서 사탄에게 경배하며 그들이 최근 행한 악행을 보고한다. 첫 번째 악마는 폭동과 전쟁을 일으켜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고 보고한다. 그러나 사탄은 그것이 한달이나 걸렸다는 사실에 악마를 태형에 처한다. 두 번째 악마는 바다에 폭풍을 일으켜 배들을 침몰시키고 여러 선원을 물고기 밥으로 만들었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그 일을 하는 데 20일이 걸렸다는 사실에 사탄은 두 번째 악마 또한 혹독한 형벌에 처한다. 세 번째 악마는 결혼식에 나타나 불화를 조장하고 결국 신랑을 죽음으로 몰았다고 보고하지만, 이 또한 열흘이 걸렸다는 사실에 사탄은 세 번째 악마의 나태함을 크게 꾸짖으며 채찍질한다. 네 번째 악마가 사탄에게 보고한다. 자신은 40년 동안 사막에서 수도자 한 명을 끈질기게 유혹한 끝에 마침내 그가 밤에 음란한 생각을 품게 했다고 보고한다. 이를 들은 사탄은 왕좌에서 일어나 네 번째 악마에게 다가가 입을 맞춘다. 그리고 왕관을 씌워주며 자신의 곁에 앉도록 한 뒤 말한다.

참으로 용맹한 일을 했구나. - P124

그리스도교 국가, 곧 대다수 거주민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할뿐 아니라 국교가 그리스도교이거나 그리스도교였던 국가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곳은 아르메니아다. 300년경 아르메니아 왕가가 세례를 받은 후 아르메니아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로마 제국이 밀라노 칙령을 공표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기 약13년 전의 일이다. - P129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전하는 이야기들은 과장되었을 수 있다. 토착 종교는 꽤 오랜 세월 아르메니아에 존속했다. 그러나 그리고르의 주도로 아르메니아에는 일정한 조직과 위계를 갖춘 국가교회인 아르메니아 정교회가 설립되었다. 각지에 교회가 건축되었고, 옛 신전들은 교회로 개조되었다. 수도원들도 들어서기 시작했다. 아울러 에치미아진에는 주교좌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증거들은 아르메니아에서 그리스도교가 성공적으로 뿌리내렸다는 것을 시사한다. - P132

451년 칼케돈 공의회 이후, 다른 ‘오리엔트 교회들‘과 함께 아르메니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과 로마의 제국 교회와 상통 관계를 단절했고, 506년에는 이를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이 분열로 인해 아르메니아 그리스도교는 고립된다. 7세기, 아르메니아가 이슬람 세력에 정복되자 교회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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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종려주일에 예수는 "올리브산 근처 벳파게와 베다니아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여 로마제국의 통치에 대항하는 공개 시위를 감행했다(마르코 11:1). 제국의 승전에 반대하는 입성으로, 그는 나귀를 타고 동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들어왔는데, 이는 말을 타고 서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들어온 로마 총독 빌라도의 입성에 대한 상징적인 반대 시위였다. 빌라도는 해안 도시 가이사리아의 본부에서부터 필요하면 유월절 군중을 진압하려고(overpower) 들어왔다. 예수는 갈릴래아로부터 그 똑같은 군중에게 가능한 한 힘을 주려고(empower) 들어왔다. - P25

예수의 대답, 즉 "카이사르의 것들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주라"는 말씀의 의미는 "그래, 너희가 갖고 있는 카이사르의 은전은 너희가 갖고 있다가 세금을 내라" 혹은 "아니야, 카이사르의 은전은 되돌려주고-그럼 너희는 세금을 낼 수 없으니-세금은 내지 말라"는 뜻일 수 있다. 만일 당신이 카이사르의 은전을 용납하지 못하면, 어떻게 카이사르의 세금을 낼 수 있는가? 질문자들과(and)/이나(or) 관찰자들이 "그(예수)에게 경탄해 마지않았다"는 것은 당연하다(12:17c).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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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타인과 허물없이 지내면서 친밀감을 나누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하지만 그런 친밀한 관계에서 정서적 · 신체적·성적으로 다칠 위험이 가장 클 수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 과감히 믿었던 사람에게서 씻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어릴 때 그런 정서적 외상emotional trauma을겪고 나면 우울증에 취약해지기 쉽다. 어른이 되었을 때 정서적 회복력이 떨어져 인간관계를 맺고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정서적 외상은 자아상에 부정적 영향을 끼침으로써 나중에 자해 행동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 P73

세심한 걸까, 아니면 너무 예민한 걸까? 나는 겉으로는 강철처럼 단단한 척했지만 그건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속은 두부처럼 물렁했다. 상처를 너무 쉽게 받았고, 세상 사람들 특히 가족과 상대하면서 입은 상처가 마음에 흉터로 남았다. 남들의 말이나 행동에 담긴 뜻을 늘 지나치게 고민하는 버릇이 있었다. 힘든 대화를 하고 나면 악의 없는 말에 상처받고 이미 지나간 말을 오랫동안 곱씹곤 했다. 주변 사람들의 기분 변화를 무척 예민하게 알아챘지만, 혼자 생각에 잠겨 내 말과 행동을 하나하나 분석하느라 정작 남들 눈에는 뻔히 보이는 것들, 이를테면 친구가 안경을 새로 맞췄다거나 머리 스타일을 바꿨다거나 하는 외모 변화는 못 알아보기도 했다. 남들의 환심을 사려고 기분을 맞춰주려 애쓰면서도, 그 때문에 내 뜻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개하곤 했다. 초조한 마음에 말을 내뱉고는 나중에 후회하고, 또 그 행동을 마음속으로 골똘히 분석하기를 거듭했다. 민감한 성격 특성이 있는 사람은 남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하기 때문에 ‘매사에 너무 진지하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 사람이 심하게 우울해지면 남들에 대한 걱정이 편집증적 사고로 확대될 수 있다. 남들이 자신을 정말로 싫어하고 뒤에서 자신을 실제로 흉본다고 믿기 시작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라면 더 그렇게 되기 쉽다. - P74

한번은 어느 지인이 나에게 왜 어머니를 자주 보지 않느냐고 물었다. 엄마와 내가 같이 있으면 서로 힘든 사이라는 걸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한다‘고들 보통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세상에 넘친다. 부모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두들겨맞고 괴로워하고 상처받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간혹 분위기가 좋을 때는 엄마가 나처럼 생기고 나처럼 말하는 누군가를 사랑하는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온전한 정신으로는 내가 도저히 그런 사람으로 살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엄마와 나는 끝없는 전투를 치렀다. 서로 상대에게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그 앙갚음으로 서로를 계속 벌주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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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리 이자는 일반적으로 일정 기간 금액이 고정되는 지대와 달리, 또 생산에서 생기는 이윤과도 달리, 대출자에게 계속 증가하는 불로소득을 안겨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지속 불가능한 일이다. 이자율이 경제성장률보다 낮지 않은 한, 부채는 결국 상환 불가능한 수준까지 늘어날 것이다. 어떤 물건이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 마지막에는 위기가 찾아온다. 자연을 보면, 어떤 개체는 일정 기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지만, 나중에는 증가세가 둔화하다가 마침내 멈추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암세포의 증식처럼 예외도 있다. - P105

정부 부채는...... 보통의 납세자들에게서 부유한 증권 보유자들에게로 소득을 상향 재분배하는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정부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과세하는 대신 돈을 빌리고 그들에게 이자를 낸다. 소비자 신용도 부자들을 더 부유하게 만든다. 임금 정체로 고통받으면서 비자카드로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맞추려는 사람들은 매달 해야만 하는 결제를 통해 채권자들의 지갑을 부풀릴 뿐이다. - P111

전통적인 경제이론에서는 저축이 투자(대출)를 결정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난센스다. 대출은 주로 신용화폐의 창조에 의존한다." 대출 여부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은 채무 불이행의 위험과 차입자가 충분한 담보를 가졌는지 여부다." 이 ‘신용화폐‘의 생산비용은 무시해도 될 정도라서, 이 경우 이자는 물론이고 원금까지도 분명히 노력 없이 생기는 돈이다. 은행이 다른 사람들의 저축을 차입자에게 대출함으로써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차입자가 은행으로 하여금 신용화폐(이자 형태로 불로소득을 얻는 원천)를 창조하게 함으로써 호의를 베푸는 것이다. - P118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마치 사람들이 평등한 존재인 것처럼 서로 빌려주고 빌리는 계약을 맺을 수 있어야 한다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사고에서 빌려주고 빌리는 것이 실제 동등한 관계라는 가정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맞다. 우리는 모두 빌리고 빌려줄 권리를 갖고 있고, 그 점에서 형식적으로는 평등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부채가 경제적 불평등에 의존한다. 어떤 사람들은 대출할 수 있는 여분의 화폐를 갖고 있든지, 아니면 은행처럼 신용화폐를 창조할 권리를 갖고 있든지, 하여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힘을 갖고 있지 않은가? 고리대는 그와 같은 불평등을 활용한다. - P122

많은 경우에 부유한 채권자들은 남는 돈을 지출할 생각은 없고 단지 대출해서 불로소득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여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은행은 기존화폐의 사용을 연기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신용화폐를 창조하는 데서 이익을 얻는다. 은행은 절제해야 할 대안적 행위가 없다. 어떻게든 하려고 하는 행위, 게다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행위에 대해 보상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런 보상은 대식가에게 밥을 먹는다는 이유로 보상금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쨌든 실제로 이자는 사람들이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에 호소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대출자와 차입자의 상대적 힘이다. - P123

우리가 위의 옹호론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들은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설명하지 못한다. 대출자들이 이자를 부과하는 것은 이자를 받을 자격이 있음을 입증할 수 있다거나 경제 전체에 좋다거나 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할 수 있어서 이자를 부과한다. 물론 대출자들은 통상 시장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이자를 부과한다. 어떤 옹호론을 내세우건,
그것은 우리가 내린 불로소득의 정의에 부합한다. - P129

저축예금을 이용하든 신용화폐를 창조하든 신용의 배분을 통제하는 사람은 상당한 힘을 갖는다. ‘경제의 지휘부‘를 통제하면서 경제발전의 양상을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민간은행에 이러한 권한을 허용하는 경우, 권한에 따르는 책임은 예금자(채권자)와 주주에게 돌아간다. 민간은행은 이익이 나고 주식 가치가 계속 상승하는 한 대출이 어디로 가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건 상관하지 않는다. 금융‘투자‘는 실물투자‘와는 거의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놀랍게도 오늘날 금융 엘리트들은 개인·기업·정부를 대상으로 이자를 추출하는 것이 부를 창출하는 한 형태라고 여긴다. 이들에게 돈은 돈일 뿐이니, 출처가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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