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중세철학입문
에띠엔느 질송 지음 / 서광사 / 1989년 11월
평점 :
품절


  70여년도 더 된 질송의 강의는 오늘날에도 기본적인 기둥을 이루며 그 탄탄함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요즘에 와서는 질송이 그렇게 아껴마지 않던 토마스 아퀴나스보다는 14세기의 다양한 지적 흐름들과 12세기의 아랍철학이 이 고목나무의 화려한 꽃들과 보이지 않던 뿌리로 주목받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이 고목나무를 한국에 심는 과정에서 수 많은 오류들이 이 고목나무에 상처를 내고 있다. 물론 이 고목나무는 너무도 견고하여 이 상처들로 끄떡도 하지 않는 듯 보이는데, 그래도 어떤 자잘한 상처들이 있는지 되짚어 보자.  

p7, "단절된 역사는 문화의 허상을 만들어낸다.": 역사는 실재로서는 단절될 수가 없고 역사책으로서는 언제나 단절일 수 밖에 없다. 문장이 의도하는 바는 "역사에 대한 단절적 시각이 문화에 대한 허상을 만들어 낸다"는 점일 것이다. 문장의 표현이 아쉽다.  

p.23 기요옴: 중세에는 수 많은 장과 기욤들이 있다. "기욤 드 샹포"로 표기해 주자.  

p.24 강신술사(Sprituals): 강신술사는 무당이다. 프란체스코 교단이 무당일리가... 정확한 번역어는 아니지만 "영성주의자들" 또는 "성령주의자들" 정도가 아닐까?  또한 프란체스코를 설명한 역주부분에서 "기사의 이상을 품은 교육을 받았으며 1202년 페르시아와의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는 "기사도적 이상에 따른 교육을 받았으며 1202년 페루쟈(안정환과 나카타가 선수로 있던 그 이탈리아 도시, 이 당시에는 페르시아라는 나라는 없었으니...)와의 전투에 참여하였다가"로 바꾸자. 

p. 38 안셀무스를 설명하는 각주에서 독일어 사전을 참고한 결과 영국왕들을 독일사람으로 바꾸어 버렸다. '빌헬름 루푸스'는 '윌리엄 루푸스'로, '하인리히 1세'는 '헨리 1세'로 바꾸자. 그리고 교황 이름은 라틴어 표기를 따르는 것이 객관적일 듯 하다. '우르반 1세'는 '우르바누스 1세'로 바꾸자. 또한 라틴어 표기 책은 라틴어 발음대로 적어 두자. '모놀로기움', '프로슬로기움'으로... 물론 정확히는 희랍어 표기로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이지만... 

p. 39 '말브랑시'는 '말브랑슈'로... 

p. 45 '도세트쉬어'는 '도세트셔'로... 하단부에 로저 베이컨 설명 부분에서 한 음절만 집어 넣으면 이해가 더 쉬워진다. "우리들은 그가 침착하게 자신의 최고의 지성적인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서 수학을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p. 46 역주에 나온 카탈로냐 신학자 '라이문두스 룰루스'는 라틴어 발음으로 적어 주던가. 아니면 카탈란어로 '라이몬 유이'로 적어주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카탈란 어로는 Llull이라 쓰는데 L 두개가 되면 발음기호로 λ 표시의 발음이 난다.

p. 60 '서기관': 중세에는 서기관이 없었다. clerk의 번역인듯 한데, 그냥 일반적인 교회 '사제'를 총칭한다. 다다음 줄의 '조종'은 '통제'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듯...  

p. 64: '예술학부'... '인문학부' 정도로 번역하자. 'faculte des arts'의 번역인데, 여기서 '아트'는 예술이 아니라 철학, 문법, 수사학 등등을 말한다. 영어로도 인문학은 liberal arts 로 표현한다. 

p. 65, 여기에서 이 책 전체에 걸친 가장 큰 상처가 눈에 띈다. 13세기의 아베로이스트, '다키아의 보에티우스'는, 6세기 동고트 왕국의 철학자이자 '철학의 위안'을 쓴 '안키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가 절대 아니다 !.  

p. 66. "그와 같은 변형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랑스 철학자 존이었다. 그는 마르시글리오 디 파도아 회원으로서..."는 " ... 프랑스 철학자 '장 드 장됭 (Jean de Jandun)'이었다. 그는 마르실료 디 파도아 파로서...". p.68에  나오는 'Jaudun'은 'Jandun'으로 바꾸어야 한다. 현지 발음으로는 '졍당' 정도로 발음하나 외국어 표기법을 지키자.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는 사람이름이지 협회가 아니다. 

p. 69. '퐁테넬'은 '퐁트넬'로... 

p. 79.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대해서도"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로 줄이면 더 잘 이해간다. 

p. 81. redemption은 '보상'이 아니라 '보속' 또는 '구속'으로 보통 번역한다. 

p. 82. 그냥 '존'이 아니라 '후안 데 크루즈'로 표기하자. 

p. 85. " 그 유명한 저술의 저자는 분명히 철학이나 또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매우 존경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괄호 안 표현을 보충해 주어야 문맥이 이해가 갈 듯...

p. 87. '존 제르송'은 프랑스 사람이니 '쟝 제르송'으로... 또 "존 보스 데 후에스덴(Huesden)은 협의회를 남겨 놓았는데..."는 " 얀 보스 데 호이스덴(Heusden)은 강의록을 남겨 놓았는데..."로 바꾸자. 

p. 88. '페트루스 폰 아일리'는 프랑스 사람이니 '피에르 다이이(Pierre d'Ailly)'로 쓰거나, 라틴어로 '페트루스 데 알리아르코(Petrus de Alliarco)'로 표기하자. 

p. 101. 이상하다. p.19에서는 '툴리아누스'였다가 여기에서는 '테르리아누스'가 되었다. 그런데 테르툴리아누스가 라틴어 표기로 맞다. 

p.105. '법왕'보다는 '교황'으로, '이노센트 3세'는 '인노켄티우스 3세'로... 마지막에 프란체스코 교단의 주의주의는 로저 베이컨의 관찰정신의 사례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프랑체스코 교단은 이론적 도그마에 따른 연역적 사고체계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중간에 부가되어야 전체 설명이 그나마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p. 107. '옥캄의 면도'는 '오캄의 면도날'로, '반대의 일치'는 라틴어 원문대로 '대립자들의 일치'로... 

p. 108. 인노켄티우스 3세, 그레고리우스 9세, '카이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아비뇽 포로가 아닌 유수... 

p. 109. "독일어로 된 정신적 아이들에게라는 설교를 통하여"는 " '정신적 자손들에게'라는 독일어 설교를 통하여"로 하면 더 이해가 쉬울 듯... '프란치스카너'와 '도미니카너'라는 독일어 형용사는 '프란체스코 교단의'와 '도미니코 교단의' 한국말로... 

p. 112. '마기스터'는 라틴어이니 '마기스테르'로 .... " 삼분된 작품"은 '삼부작', '시트라스부르크'는 '스트라스부르그 (현재 프랑스...)'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질송의 강의록에 역자의 에크하르트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져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 나아가서는 각주까지 필요할 듯... 질송의 아퀴나스와 역자의 에크하르트는 어떠한 관계인지? 등등... 불교에 대한 논의는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닌지? 등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르헤스의 지팡이 - 소설 쓰는 철학자 보르헤스 다시 읽기
양운덕 지음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르헤스의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힘, 그것은 그의 소설들이 바로 20세기에 가능한 모든 인문학적, 철학적 사유들의 실험실이었다는 점에 있다. 어떤 한 유파가 아닌 단 한 사람의 뇌-우주 속에 그리도 다양하고도 창조적이며 독특한 사고 실험들이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경이롭다. 남미의 분위기 속에 녹아난 인류의 보편적 철학적 주제들은 이미 알려져 있듯이 수십 년 전에 유럽의 많은 현대 철학자들, 인문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그의 불교강의는 아마도 유럽과 아시아와 떨어진 신대륙에서 두 대륙을 다시 이어주는 가교가 되고 있다.

    많은 문학적 비평들 중에서도, 이 책은 보르헤스가 어떻게, 즉 어떠한 방식으로 현대 철학의 주요문제들을 제기하고 풀어나가고 있는지를 보르헤스의 책 속에서 길을 잃기 쉬운 독자들에게 차근차근 지팡이가 되어 짚어주고자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지팡이가 필요한 이유는 비단 우리의 보르헤스가 장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잃고 맹목적으로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보르헤스가 사유의 숲에서 짚었던 지팡이는 거꾸로 뒤집어 무심한 도시의 일상에서 우리가 짚어야 할 지팡이가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바로 두 개의 지팡이들이 되어 그 굽은 손잡이들을 서로 걸어 보르헤스와 우리를 이어주는 소통의 끈이 된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 책이 단순하게 보르헤스 소설집『픽션들』의 철학적 주해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이 책의 5페이지에 제시된 목차를 보면 눈치챌 수 있는 바일 것이다. 『픽션들』의 목차와 전혀 다른 작품의 순서들은 저자가 보르헤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현대 서구철학의 논리적 여정, 또는 20세기 철학의 문제제기와 답변들의 역사이다. 「진리의 침묵」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돈의 도서관에서 진리 찾기·만들기」의 과정을 이끌어 내고, 이는 곧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진리와 질서의 세계가「우연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점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 더 정확히 어떠한 의미를 갖고 살아야 하는가? 「새로운 돈키호테의 모험-글쓰기 또는 읽기의 모험」은 긍정적 의지를 통한 삶의 끊임없는 반복과 차이의 풍요로운 만개를 이야기 하며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식론적 가상의 기만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 실패를 맛보게 한다면? 그래서「실패의 기록으로 본 문화적 차이와 허구적 존재론」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피드백식 구성과정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를 통해 나타나는 진리 아닌 진리, 또는 윤리 아닌 윤리, 그것은 「진리의 문턱에서 만난 새로운 질문-‘끝없는 여행의 이야기」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형이상학이 환상 문학의 하나라면-관념들로 빚은 또 하나의 세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들을 맛보게 되며 새로운 의미론들로 빚어진 여러 우주들을 엿보게 된다.

    이렇게 이 책은 스스로 반복하는 차이를 만들어 내고 보르헤스의 존재를 우리의 인식으로 이어서 다시 우리의 삶에 새로운 물음을 던져 보라고 권고한다. 보르헤스의 우주와 더불어 또 다른 세기의 우주들을 꿈꾸어 보라고….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5-19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drianus75 2012-05-2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창조적 진화 대우고전총서 11
앙리 베르그손 지음, 황수영 옮김 / 아카넷 / 200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베르그손만큼 사랑스러운 철학자가 또 있을까?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창조적 진화는 철학사적 중요성 보다도 그 가슴 따뜻한 저자의 마음으로 독자를 울리는 작품이다. 화려한 문학적 기교도 없으며 뜬구름 잡는 듯한 형이상학적 논의도 없다. 생명에 대한 19세기 과학의 접근방식을 비판하면서, 생명이란 그러한 합리적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물론 베르그손이 이 과학적 틀을 비판하는 지점들은 과학사를 모르고 있는 현대의 독자들에겐 생소하고 난해할 수 도 있다. 이러한 독자들이여, 그러한 부분은 건너 뛰자. 왜냐하면 베르그손은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으로 다시 쉽게 독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계론과 목적론으로 분류되는 과학적 방법론은 현대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식론적 틀이다. 가령 통일장이 가능하리라고 믿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얼마나 목적론적인지? 우리의 삶에, 우리가 사는 사회에 시간을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목적론과 기계론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라는 잔인한 목적론, 퍼부은 만큼의 결과를 에누리 없이 획득하고자 하는 각박한 기계론...그렇기에 베르그손의 후예들은 현대사회 분석에 그의 개념들을 발전시켜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개체로서의 생명과 그 개체를 넘어선 생명 일반의 운동의 만남, 끊임없이 펼쳐지는 생명의 활력, 발생부터 진화에 이르는 이 광대한 생명의 역사에 나의 소중한 삶이 함께 하고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산적 욕망, 그것이 베르그손의 이 생명에서 착안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 논의들은 일반 독자들에 대한 배려를 무시하지 않는다. 생명활동은 파브르 곤충기의 쐐기벌레와 나나니벌의 예로 단순하게 표현된다.(실제로 가난했던 파브르를 뒤늦게 발견하고 그를 후원한 일군의 지식인들 중에 우리는 베르그손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개체의 보존을 넘어선 생명과 생명의 만남. 욕망의 접속? 근대 철학이 가정하고 있던 '무'에 대한 생각에 대한 비판은 그 복잡다단한 논의 다음에, 아무것도 없다고 상정되는 방이 사실 공기로 가득차 있다는 말로 간단히 예시된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없을 뿐, 나의 관심을 벗어난 다른 것들이 있다는 말이다. 근대사회가 부과하는 기율의 토대인 합리적 질서는 어지럽게 정리되지 않은 방의 예로 간단히 허물어진다. 엄마들이 잔소리하는 자식들의 지저분한 방, 폐인들의 방은 질서가 '없는' 방이 아니라 다른 질서가 '있는' 방이다. 그 다른 질서가 바로 삶이 이루어 놓은 삶의 질서다. 인위적 배치가 아닌, 나의 몸이 나 모르게 만든 질서다. 복잡하고 추상적일 수 있는 논의들은 그 마지막에 그냥 별다를 것 없는 삶의 대지에 가볍게 사뿐히 내려 앉는다.

프랑스 내에서 데까르트 이후 최고의 철학자라는 명성은 데까르트 비판에서 보다도 이렇게 삶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주장들, 과학을 모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그의 주장들, 프랑스 철학의 독특한 특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후설 이후 현대 철학의 주요 영역은 현상, 이미지, 문화 영역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현상으로의 접근 이전에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론을 부순 니체와 베르그손의 공로가 무시 될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현대 철학은 두 개의 커다란 생각들로 갈라진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모티브를 받아들이는 자들과 니체와 베르그손의 모티브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차이. 리꾀르, 레비나스와 푸코, 들뢰즈의 차이, 미시사와 구조사(또는 정치문화사)의 차이, 클리포드 기어츠의 해석 인류학과 끌라스트르의 정치 인류학의 차이 등....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임시구분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베르그손이 말하듯, 생명현상은 순수생명이기에 앞서, 일종의 타협, 무기물과 생명의 타협이기 때문이다. Modus vivendi !, 살아가는 방식, 그것은 그 자체로 타협, 외부와 내부간의 소통, 자기조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들뢰즈의 철학 - 사상과 그 원천 들뢰즈의 창 3
서동욱 지음 / 민음사 / 200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십대들의 팬레터 수준에 불과했던 기존의 들뢰즈 선전 팜플렛들과 달리 이 책은 정말로 들뢰즈를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는 저작이다. 단순한 짝사랑이 아니라 들뢰즈, 주변 철학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풍부하고도 왕성한 역량을 드러낸다. 이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저작에 대해 칭찬하고 있는 바다.

그럼에도 이 저작은 미완성의 저작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모든 저작들이 완벽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몇 가지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미완성이다. 먼저 첫번째 미완성은 저자에 대한 기대에 상응한다. 기존의 저작인 "차이와 타자"에서 저자의 사유도정에 동감하는 많은 독자들은 단순히 저자가 들뢰즈 개설서-아무리 충실하고 한국에 보기 드문 내용을 지녔다 하더라도-에 머무르는데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차이와 타자"에서 나타듯이 저자가 걸어갈 사유의 길은 궁극적으로 들뢰즈를 추종하는 데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독자는 레비나스와 들뢰즈 사이에서 서동욱의 철학으로 나아가길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두번재 미완성은 저자에 대한 실망에 상응한다. 들뢰즈 개설서라고 하기에는 미진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들뢰즈 초기 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베르그손에 대한 논의가 전무하다는 점이다. 사실 들뢰즈의 존재론은 베르그손에게서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데(마이클 하트의 개설서는 베르그손에서 시작한다), 굳이 "베르그손주의"라는 짧지만 간결하고 힘찬 들뢰즈의 저작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니체와 철학"만 보더라도 그 내용은 니체를 "베르그손화"하는 작업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베르그손 철학에 대한 누락은 라캉과의 비교에서 "실재"에 대한 논의를 빗나가게 만든다. 내가 볼 때에는 들뢰즈와 라캉은 이 개념을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에게서 실재는 베르그손의 "실재le reel", 즉 "생명의 지속(들뢰즈는 이를 차이화 하는 욕망의 일의성으로 본다)"을 계승하고 있다. 물론 베르그손은 "창조적 진화" 등에서 이 개념을 통해 칸트의 "물자체" 개념을 공격하고 있다. 반대로 라캉의 "실재"는 하이데거의 "존재", 궁극적으로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에서 칸트의 물자체를 자기 철학으로 끌어들인 이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실재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관점, 그러나 저자는 라캉과 들뢰즈가 이미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이 서술하고 있으며, 양자의 엇갈릴 수 밖에 없는 운명을 보지 못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etre"동사가 근원적으로 존재를  뜻하는지(하이데거)? 아니면 계사를 뜻하는지(베르그손)? 들뢰즈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후자를 밀고 나가고 있을 뿐이다. 

미완성은 완성을 전제한다. 하지만 완벽한 최후의 완성이란 당연하게도 불가능하리라. 그럼에도 불가능한 완성에 다다르려는 모습을 통해 즐거운 변신에 성공하길 기대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현대물리학의 합리주의적 활동 대우학술총서 구간 - 과학/기술(번역) 117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바슐라르라는 20세기 초의 프랑스 철학자가 한국에 소개된 모습은 주로 문학비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불문학자들을 통해 소개된 이러한 모습들이 그의 전체 모습은 아니다. 사실 문학비평과 이웃한 상상력의 철학자라는 후기의 모습 이전에, 그를 이미 유명하게 만든 모습은 20세기 초반에 벌어진 일종의 '과학혁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 즉 후기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냉철한 과학철학자의 모습이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과학활동의 업적들이 가능하게 된 조건에 대한 탐색을 통해, 바슐라르는 20세기의 철학은 이러한 구체적 과학성과들을 바탕으로 그 인식론을 구성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인문학에서 비판하는 과학의 모습이 경험에서 획득한 표상을 통해 축적한 법칙의 귀납적 도출로 요약된다면, 바슐라르는 이렇게 인문학에 의해 비판받는 기존의 통속적인 경험과학의 모습이 사실은 지금까지 전개된 과학활동에 핵심적인 사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특히 과학실험 조건이 보다 정교해진 20세기 이후에 더욱 타당해지는데, 그에 따르면 20세기에 이룩된 과학적 법칙들은 일상적인 경험 표상들의 귀납적 도출된 것들이 아니라, 이미 선험적이라고 할만한 사유의 틀의 설정과 이 문제틀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성되어 일상과 단절된 과학적 실험을 통해 획득된다. 바로 여기에서 바슐라르의 핵심적인 개념인 '문제틀'과 '인식론적 단절'이 등장한다.

이미 토마스 쿤이 미국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과학사적 개념을 고안하기 훨씬 이전에, 바슐라르는 이 '문제틀problematique'라는 개념을 통해 기존의 과학사가 단선적이고 목적론적인 진보의 과정이 아니라 각 시대마다 나름대로 짜여진 체계적 문제의식에 따라 답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론의 영역과 일상적 경험의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시킴으로써 과학적 활동을 엄밀하게 파악하게 해 준다.

물리학에 대한 설명으로 넘쳐나는 이 책은 자칫, 양자역학에 대한 개설서로 비춰질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그가 적용하는 개념들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 개념들은 이후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알튀세르의 철학과 푸코의 사상의 기원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볼만한 책이다.(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와 게리 거팅의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을 참조해 보는 것도 좋다.)

역자가 한국 지성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불문학과 물리학을 모두 소화해 내었다는 점에서 본 역서가 바슐라르의 또 다른 모습 한 쪽을 그나마 잘 보여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