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진화 대우고전총서 11
앙리 베르그손 지음, 황수영 옮김 / 아카넷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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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만큼 사랑스러운 철학자가 또 있을까? 생명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창조적 진화는 철학사적 중요성 보다도 그 가슴 따뜻한 저자의 마음으로 독자를 울리는 작품이다. 화려한 문학적 기교도 없으며 뜬구름 잡는 듯한 형이상학적 논의도 없다. 생명에 대한 19세기 과학의 접근방식을 비판하면서, 생명이란 그러한 합리적 인식 너머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물론 베르그손이 이 과학적 틀을 비판하는 지점들은 과학사를 모르고 있는 현대의 독자들에겐 생소하고 난해할 수 도 있다. 이러한 독자들이여, 그러한 부분은 건너 뛰자. 왜냐하면 베르그손은 단순하고도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으로 다시 쉽게 독자들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기계론과 목적론으로 분류되는 과학적 방법론은 현대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식론적 틀이다. 가령 통일장이 가능하리라고 믿고 있던 아인슈타인은 얼마나 목적론적인지? 우리의 삶에, 우리가 사는 사회에 시간을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목적론과 기계론은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 미래를 위해 현재의 삶을 희생하라는 잔인한 목적론, 퍼부은 만큼의 결과를 에누리 없이 획득하고자 하는 각박한 기계론...그렇기에 베르그손의 후예들은 현대사회 분석에 그의 개념들을 발전시켜 적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개체로서의 생명과 그 개체를 넘어선 생명 일반의 운동의 만남, 끊임없이 펼쳐지는 생명의 활력, 발생부터 진화에 이르는 이 광대한 생명의 역사에 나의 소중한 삶이 함께 하고 있다. 들뢰즈가 말하는 생산적 욕망, 그것이 베르그손의 이 생명에서 착안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 논의들은 일반 독자들에 대한 배려를 무시하지 않는다. 생명활동은 파브르 곤충기의 쐐기벌레와 나나니벌의 예로 단순하게 표현된다.(실제로 가난했던 파브르를 뒤늦게 발견하고 그를 후원한 일군의 지식인들 중에 우리는 베르그손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개체의 보존을 넘어선 생명과 생명의 만남. 욕망의 접속? 근대 철학이 가정하고 있던 '무'에 대한 생각에 대한 비판은 그 복잡다단한 논의 다음에, 아무것도 없다고 상정되는 방이 사실 공기로 가득차 있다는 말로 간단히 예시된다. 내가 찾고자 하는 것이 없을 뿐, 나의 관심을 벗어난 다른 것들이 있다는 말이다. 근대사회가 부과하는 기율의 토대인 합리적 질서는 어지럽게 정리되지 않은 방의 예로 간단히 허물어진다. 엄마들이 잔소리하는 자식들의 지저분한 방, 폐인들의 방은 질서가 '없는' 방이 아니라 다른 질서가 '있는' 방이다. 그 다른 질서가 바로 삶이 이루어 놓은 삶의 질서다. 인위적 배치가 아닌, 나의 몸이 나 모르게 만든 질서다. 복잡하고 추상적일 수 있는 논의들은 그 마지막에 그냥 별다를 것 없는 삶의 대지에 가볍게 사뿐히 내려 앉는다.

프랑스 내에서 데까르트 이후 최고의 철학자라는 명성은 데까르트 비판에서 보다도 이렇게 삶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주장들, 과학을 모르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그의 주장들, 프랑스 철학의 독특한 특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후설 이후 현대 철학의 주요 영역은 현상, 이미지, 문화 영역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현상으로의 접근 이전에 서구 형이상학의 본질론을 부순 니체와 베르그손의 공로가 무시 될 수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현대 철학은 두 개의 커다란 생각들로 갈라진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모티브를 받아들이는 자들과 니체와 베르그손의 모티브를 받아들이는 자들의 차이. 리꾀르, 레비나스와 푸코, 들뢰즈의 차이, 미시사와 구조사(또는 정치문화사)의 차이, 클리포드 기어츠의 해석 인류학과 끌라스트르의 정치 인류학의 차이 등....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우리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임시구분일 따름이다. 왜냐하면 베르그손이 말하듯, 생명현상은 순수생명이기에 앞서, 일종의 타협, 무기물과 생명의 타협이기 때문이다. Modus vivendi !, 살아가는 방식, 그것은 그 자체로 타협, 외부와 내부간의 소통, 자기조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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