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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9년의 대공포
조르주 르페브르 지음, 최갑수 옮김 / 까치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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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시작된 대공포는 지방민중들로 하여금 즉각적으로 혁명적 태도들을 확립시킨 급속한 사회적 움직임이다. 르페브르는 면밀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현상에 대해 두 가지 오류를 제거한다. 그 하나는 혁명적 선동에 의한 대공포의 창출이고 다른 하나는 대공포에 경도된 민중의 반인륜적 파괴와 타락이다. 사실 대공포 시기에 등장했던 여러 혁명 운동들은 전통적인 농민들의 태도를 기반으로 한 자발적 성격을 강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그 전개과정은 그렇게 파괴적이지 않았다. 이 두 오류는 이후로도 언제나 지배세력이 저항세력에 대해 뒤집어 씌우는 주요한 핑계거리들 중의 하나이다. 즉 민중운동은 몇 사람의 꼬드김으로 이루어질만큼 단순하지도 않으며, 스스로가 괴물이될만큼 어지럽지도 않다. 그것은 복합한 인간관계들이 교차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회적 과정이다.
  이러한 정치적 편견들을 걷어내면서, 르페브르는 대공포 시기의 움직임들을 그 이전의 반란들이나 비적들에 의한 공포상황과 현상적인 차원에서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주문한다. 즉 그의 치밀한 연구들은 이것들이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공포의 인과관계 속에 자리매김될 수는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수 많은 나비효과들이 긴장이 극도로 팽배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금새 혁명적 운동들을 산출한다. 그것은 달궈진 기름이라는 필연적 구조 위에 흩뿌려지는 작은 물방울들의 우연적 파열들의 연속이다. 저자는 어떻게 달리 될 수 없는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들과 구조들 속에서 우연이 사건을 창발시키는지를 실증적인 사료작업들을 통해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보론으로 첨부된 '혁명적 군중'이라는 소논문에서 개진된 '집단심성'이라는 개념 속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그는 아날그룹에서 종종 사용하게 될 '심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이들과 구분되는 연구자세를 보여준다. 그에게 '심성'이란 일반화된 이데올로기적 결과물로 주어지기보다는 세세한 의사소통 과정의 실증적 파악을 통해 그 다양성이 확인되어야 할 일련의 문제상황이다. 즉 '집단심성'이란 그 자체로 뭉뚱그려 수용되는 대표적 사회 이미지가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과 거대한 민중운동의 흐름을 매개하는 개념적완충지대로 그 복잡다단한 모세혈관들은 구체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심성, 즉 사회적 불안과 정치적 기대로 점철된 의사소통을 통한 정치사의 재구성. 이러한 관점이 바로 이 저작을 도식적인 유물론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보다 풍성한 학문적 효과를 산출하게 만든다. 이렇듯, 혁명의 과정을 획일화된 과정이 아닌 복잡 다단한 과정으로 그려 내면서도, 이를 단순한 우연으로 환원시키지 않고 그 구조적 구성요소들을 밝혀내는 그의 연구 방식은 역자가 강조하듯 혁명에 대한 전통주의 해석자들과 수정주의 해석자들 모두에게 풍부한 영감을 제공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작업은 민중과 대중의 정치적 운동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다시 한 번 가능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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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입문
에띠엔느 질송 지음 / 서광사 / 198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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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여년도 더 된 질송의 강의는 오늘날에도 기본적인 기둥을 이루며 그 탄탄함을 자랑하고 있다. 물론 요즘에 와서는 질송이 그렇게 아껴마지 않던 토마스 아퀴나스보다는 14세기의 다양한 지적 흐름들과 12세기의 아랍철학이 이 고목나무의 화려한 꽃들과 보이지 않던 뿌리로 주목받고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역시 문제는 이 고목나무를 한국에 심는 과정에서 수 많은 오류들이 이 고목나무에 상처를 내고 있다. 물론 이 고목나무는 너무도 견고하여 이 상처들로 끄떡도 하지 않는 듯 보이는데, 그래도 어떤 자잘한 상처들이 있는지 되짚어 보자.  

p7, "단절된 역사는 문화의 허상을 만들어낸다.": 역사는 실재로서는 단절될 수가 없고 역사책으로서는 언제나 단절일 수 밖에 없다. 문장이 의도하는 바는 "역사에 대한 단절적 시각이 문화에 대한 허상을 만들어 낸다"는 점일 것이다. 문장의 표현이 아쉽다.  

p.23 기요옴: 중세에는 수 많은 장과 기욤들이 있다. "기욤 드 샹포"로 표기해 주자.  

p.24 강신술사(Sprituals): 강신술사는 무당이다. 프란체스코 교단이 무당일리가... 정확한 번역어는 아니지만 "영성주의자들" 또는 "성령주의자들" 정도가 아닐까?  또한 프란체스코를 설명한 역주부분에서 "기사의 이상을 품은 교육을 받았으며 1202년 페르시아와의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는 "기사도적 이상에 따른 교육을 받았으며 1202년 페루쟈(안정환과 나카타가 선수로 있던 그 이탈리아 도시, 이 당시에는 페르시아라는 나라는 없었으니...)와의 전투에 참여하였다가"로 바꾸자. 

p. 38 안셀무스를 설명하는 각주에서 독일어 사전을 참고한 결과 영국왕들을 독일사람으로 바꾸어 버렸다. '빌헬름 루푸스'는 '윌리엄 루푸스'로, '하인리히 1세'는 '헨리 1세'로 바꾸자. 그리고 교황 이름은 라틴어 표기를 따르는 것이 객관적일 듯 하다. '우르반 1세'는 '우르바누스 1세'로 바꾸자. 또한 라틴어 표기 책은 라틴어 발음대로 적어 두자. '모놀로기움', '프로슬로기움'으로... 물론 정확히는 희랍어 표기로 '모놀로기온'과 '프로슬로기온'이지만... 

p. 39 '말브랑시'는 '말브랑슈'로... 

p. 45 '도세트쉬어'는 '도세트셔'로... 하단부에 로저 베이컨 설명 부분에서 한 음절만 집어 넣으면 이해가 더 쉬워진다. "우리들은 그가 침착하게 자신의 최고의 지성적인 목적을 향한 수단으로서 수학을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p. 46 역주에 나온 카탈로냐 신학자 '라이문두스 룰루스'는 라틴어 발음으로 적어 주던가. 아니면 카탈란어로 '라이몬 유이'로 적어주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카탈란 어로는 Llull이라 쓰는데 L 두개가 되면 발음기호로 λ 표시의 발음이 난다.

p. 60 '서기관': 중세에는 서기관이 없었다. clerk의 번역인듯 한데, 그냥 일반적인 교회 '사제'를 총칭한다. 다다음 줄의 '조종'은 '통제'라는 표현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듯...  

p. 64: '예술학부'... '인문학부' 정도로 번역하자. 'faculte des arts'의 번역인데, 여기서 '아트'는 예술이 아니라 철학, 문법, 수사학 등등을 말한다. 영어로도 인문학은 liberal arts 로 표현한다. 

p. 65, 여기에서 이 책 전체에 걸친 가장 큰 상처가 눈에 띈다. 13세기의 아베로이스트, '다키아의 보에티우스'는, 6세기 동고트 왕국의 철학자이자 '철학의 위안'을 쓴 '안키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가 절대 아니다 !.  

p. 66. "그와 같은 변형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랑스 철학자 존이었다. 그는 마르시글리오 디 파도아 회원으로서..."는 " ... 프랑스 철학자 '장 드 장됭 (Jean de Jandun)'이었다. 그는 마르실료 디 파도아 파로서...". p.68에  나오는 'Jaudun'은 'Jandun'으로 바꾸어야 한다. 현지 발음으로는 '졍당' 정도로 발음하나 외국어 표기법을 지키자.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는 사람이름이지 협회가 아니다. 

p. 69. '퐁테넬'은 '퐁트넬'로... 

p. 79.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대해서도"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도"로 줄이면 더 잘 이해간다. 

p. 81. redemption은 '보상'이 아니라 '보속' 또는 '구속'으로 보통 번역한다. 

p. 82. 그냥 '존'이 아니라 '후안 데 크루즈'로 표기하자. 

p. 85. " 그 유명한 저술의 저자는 분명히 철학이나 또는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매우 존경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괄호 안 표현을 보충해 주어야 문맥이 이해가 갈 듯...

p. 87. '존 제르송'은 프랑스 사람이니 '쟝 제르송'으로... 또 "존 보스 데 후에스덴(Huesden)은 협의회를 남겨 놓았는데..."는 " 얀 보스 데 호이스덴(Heusden)은 강의록을 남겨 놓았는데..."로 바꾸자. 

p. 88. '페트루스 폰 아일리'는 프랑스 사람이니 '피에르 다이이(Pierre d'Ailly)'로 쓰거나, 라틴어로 '페트루스 데 알리아르코(Petrus de Alliarco)'로 표기하자. 

p. 101. 이상하다. p.19에서는 '툴리아누스'였다가 여기에서는 '테르리아누스'가 되었다. 그런데 테르툴리아누스가 라틴어 표기로 맞다. 

p.105. '법왕'보다는 '교황'으로, '이노센트 3세'는 '인노켄티우스 3세'로... 마지막에 프란체스코 교단의 주의주의는 로저 베이컨의 관찰정신의 사례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프랑체스코 교단은 이론적 도그마에 따른 연역적 사고체계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중간에 부가되어야 전체 설명이 그나마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p. 107. '옥캄의 면도'는 '오캄의 면도날'로, '반대의 일치'는 라틴어 원문대로 '대립자들의 일치'로... 

p. 108. 인노켄티우스 3세, 그레고리우스 9세, '카이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아비뇽 포로가 아닌 유수... 

p. 109. "독일어로 된 정신적 아이들에게라는 설교를 통하여"는 " '정신적 자손들에게'라는 독일어 설교를 통하여"로 하면 더 이해가 쉬울 듯... '프란치스카너'와 '도미니카너'라는 독일어 형용사는 '프란체스코 교단의'와 '도미니코 교단의' 한국말로... 

p. 112. '마기스터'는 라틴어이니 '마기스테르'로 .... " 삼분된 작품"은 '삼부작', '시트라스부르크'는 '스트라스부르그 (현재 프랑스...)'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왜 질송의 강의록에 역자의 에크하르트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져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고, 나아가서는 각주까지 필요할 듯... 질송의 아퀴나스와 역자의 에크하르트는 어떠한 관계인지? 등등... 불교에 대한 논의는 없어도 되는 것은 아닌지?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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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로 본 새로운 역사 - 그 이론과 실제
린 헌트 엮음, 조한욱 옮김 / 소나무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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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서가 출간된 지는 이미 20 년이, 번역본이 출간된 지는 13년이 지났지만,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은 충실함으로 인해 지금에 와서도 진지한 일독이 요구된다. 물론 이제 내용들은 새로운 역사가 아닌 기존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는 상황이고 이는 다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새로운 판을 있는 이론과 철학들이 생산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과 연결된다. 어쨌든 본서에서 다루고 있는 역사이론 상의 논의들은 적어도 현재 서구 유럽의 역사를 공부하는 있어서는 필수불가결한 기본이 되어 있다. 이론 부분에서 부르디외와 연관된 부분이 미약하게 다루어져 있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이는 2부의 실재를 다루는 부분에서 로제 샤르티에의 글로 아쉽게나마 보충되고 있다. 또한 2000년대 이후 발간되기 시작한 푸코의 콜레쥬 프랑스 강의록의 내용들, 특히 근대국가와 통치성과 관련된 부분이 푸코 관련 항목에서 다루어지지 못한 점은 문화적 정치사회사에 강하게 경도되어 있는 본서에게 어쩔 없는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해석학적 전통이 강한 독일에서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미시사가 다루어지지 않은 또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현대 역사서술에서 현대철학에 의해 제기되는 날카로운 물음들을 역사가들이 어떻게 방법론으로 소화하고 있는지를 이론은 물론 실재의 측면에서 보여준다는 미덕을 자랑한다. 이러한 경향성들을 단순, 무식하게 ‘‘포스트 모더니즘’’이라고 낙인찍고, 이를 추종하거나 넘어서겠다고 추상적인 논의를 앞세우고 상표를 붙이기 보다는, 다양한 이론적 탐색을 살펴 보면서 역사서술에 있어 공과를 측정하고 역사서술에서의 실재를 보여주고 있다
 

    이에 따라 5장의 미국의 퍼레이드 연구는 3장에서 이루어진 기어츠 인류학의 한계와 살린스 식의 관점 하에서 읽혀질 있고, 6장에서 샤르티에가 서술하고 있는 독서문화사는 푸코와 E. P. 톰슨, 그리고 부르디외의 논의와 관련하여 사색될 있다. 7장의 19세기 인도주의의 탄생은 푸코의 논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8장의 이탈리아 만토바의 곤자가 궁정 연구는 실재와 언어적 해석 사이에 존재하는 불협화음을 보여줌으로써 헤이든 화이트와 도미니크 라카프라의 주장들을 가시화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연구들을 묶어내고 있는 범주는 바로 문화라는 단어로, 문화란 하나의 일관된 체계가 아니라 여러 다양한 삶의 결이 맺는 관계망이라는 점을 바로 다양한 방향의 연구들로 보여주고자 한다. 인간의 활동들이 결국에는 먹고 사는 일이라고 여겨지건,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질서와 진리를 향한 과정이라 여겨지건, 중요한 것은 누구나 자신의 삶이 어떠어떠한 점에서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문화사에 대한 탐구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현실에 대한 탐구이며, 지나간 삶의 표정들을 조금이나마 기억 속에서 더듬어 현재 삶의 다양한 모습들을 다양한 방식들로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본서는 현대 서구 문화사 방법론에 접근하고 싶은 역사학도에게 균형잡힌 시각을 소개한다는 점에서 큰 장점을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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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지팡이 - 소설 쓰는 철학자 보르헤스 다시 읽기
양운덕 지음 / 민음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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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헤스의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힘, 그것은 그의 소설들이 바로 20세기에 가능한 모든 인문학적, 철학적 사유들의 실험실이었다는 점에 있다. 어떤 한 유파가 아닌 단 한 사람의 뇌-우주 속에 그리도 다양하고도 창조적이며 독특한 사고 실험들이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경이롭다. 남미의 분위기 속에 녹아난 인류의 보편적 철학적 주제들은 이미 알려져 있듯이 수십 년 전에 유럽의 많은 현대 철학자들, 인문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그의 불교강의는 아마도 유럽과 아시아와 떨어진 신대륙에서 두 대륙을 다시 이어주는 가교가 되고 있다.

    많은 문학적 비평들 중에서도, 이 책은 보르헤스가 어떻게, 즉 어떠한 방식으로 현대 철학의 주요문제들을 제기하고 풀어나가고 있는지를 보르헤스의 책 속에서 길을 잃기 쉬운 독자들에게 차근차근 지팡이가 되어 짚어주고자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지팡이가 필요한 이유는 비단 우리의 보르헤스가 장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잃고 맹목적으로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보르헤스가 사유의 숲에서 짚었던 지팡이는 거꾸로 뒤집어 무심한 도시의 일상에서 우리가 짚어야 할 지팡이가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바로 두 개의 지팡이들이 되어 그 굽은 손잡이들을 서로 걸어 보르헤스와 우리를 이어주는 소통의 끈이 된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 책이 단순하게 보르헤스 소설집『픽션들』의 철학적 주해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이 책의 5페이지에 제시된 목차를 보면 눈치챌 수 있는 바일 것이다. 『픽션들』의 목차와 전혀 다른 작품의 순서들은 저자가 보르헤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현대 서구철학의 논리적 여정, 또는 20세기 철학의 문제제기와 답변들의 역사이다. 「진리의 침묵」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돈의 도서관에서 진리 찾기·만들기」의 과정을 이끌어 내고, 이는 곧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진리와 질서의 세계가「우연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점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 더 정확히 어떠한 의미를 갖고 살아야 하는가? 「새로운 돈키호테의 모험-글쓰기 또는 읽기의 모험」은 긍정적 의지를 통한 삶의 끊임없는 반복과 차이의 풍요로운 만개를 이야기 하며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식론적 가상의 기만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 실패를 맛보게 한다면? 그래서「실패의 기록으로 본 문화적 차이와 허구적 존재론」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피드백식 구성과정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를 통해 나타나는 진리 아닌 진리, 또는 윤리 아닌 윤리, 그것은 「진리의 문턱에서 만난 새로운 질문-‘끝없는 여행의 이야기」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형이상학이 환상 문학의 하나라면-관념들로 빚은 또 하나의 세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들을 맛보게 되며 새로운 의미론들로 빚어진 여러 우주들을 엿보게 된다.

    이렇게 이 책은 스스로 반복하는 차이를 만들어 내고 보르헤스의 존재를 우리의 인식으로 이어서 다시 우리의 삶에 새로운 물음을 던져 보라고 권고한다. 보르헤스의 우주와 더불어 또 다른 세기의 우주들을 꿈꾸어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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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5-19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hadrianus75 2012-05-20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린 헌트 지음, 조한욱 옮김 / 새물결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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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사건이 여려 종류의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있듯이,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 또한 다양한 관점으로 언제나 재해석될 수 있다는 점은 당연하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 중에서 린 헌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사적인 영역이라 여겨지는 가족과 어떠한 상호작용을 전개해 나갔는지, 또 그 와중에서 여성은 어떠한 지위의 변화를 겪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왕을 국부로서 내세우는 구체제는 부권을 최상위에 두는 가족모델과 당시대에 상상적 조응을 이룬다. 혁명은 왕을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아버지 없는 사회, 즉 형제애라는 감정 속에서 형제들로 이루어진 가족모델과 조응을 이룬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에서 프로이트적 설명에 문제를 제기 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의 지위이다. 여성은 뒤늦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서 보여지듯이, 남성들 중심의 정치사회에서 늘 불안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었던 바, 개인의 천부의 권리라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정치에서 여성의 지위는 점차 배제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프랑스 혁명의 가장 급진적인 사적생활의 모델을 제공하는 사드의 작품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부차적인 권한만을 지닌다. 결국 남성들의 불안감 속에서 혁명 프랑스는 점차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을 복구시켜 나가며 나폴레옹은 다시 부권 중심의 가족 모델을 확립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역할은 전과 같지 않으며,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기에 자수성가하는 아이들이라는 상상체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헌트의 분석은 풍부한 자료 제시는 물론 프로이트와 지라르의 이론적 틀의 유연한 적용, 곳곳에 스며있는 역사학적 합리성과 판단력으로 빛나고 있다. 또한 거시적으로 19세기 서구 민주주의 운동의 발생과 대중사회의 등장에 따른 특징들이 그 분석의 저변에 깔려 있어 독서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러한 설명방식을 통해 헌트가 무엇보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이론적 원리가 마주치게 되는 여러 다양한 현실적 경험의 틀들이다. 즉 헌트는 혁명의 성과보다는 그 성과가 날아가기 위해 박차고 나온 습관의 대지와 혁명이 서투른 날개짓으로 허공 속에서 마주치는 불안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일면 이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철저한 혁명의 가능성을 회의하게 만든다. 어찌되었든 현실 속의 인간인 이상 그 무엇이든지 혁명으로 바꿀 수 없는 각질화된 습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보건대, 이러한 입장은 혁명을 이상화시키지 않고 인간이 이루어낸 일로 정당하게 환원시키는 건전한 모습을 지닌다. 인간사의 이중성은 우리를 회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신중한 판단을 자극한다. 혁명의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거리를 두는 헌트의 언급은 인간사의 복잡함에 대한 신중한 판단에서 나온 노련한 역사가의 입장에 다름 아니다. 혁명에 있어서 이상 또는 원칙과 사실들을 구분하되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양자간의 불가분의 관계를 늘 염두에 둘 것, 그러나 혁명의 이상 그 자체를 기만이나 순전한 허구로 돌리지는 말 것. 베르그손이 말하는 modus vivendi란 이러한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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