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물리학의 합리주의적 활동 대우학술총서 구간 - 과학/기술(번역) 117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 민음사 / 1998년 8월
평점 :
절판


바슐라르라는 20세기 초의 프랑스 철학자가 한국에 소개된 모습은 주로 문학비평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불문학자들을 통해 소개된 이러한 모습들이 그의 전체 모습은 아니다. 사실 문학비평과 이웃한 상상력의 철학자라는 후기의 모습 이전에, 그를 이미 유명하게 만든 모습은 20세기 초반에 벌어진 일종의 '과학혁명'에 대한 철학적 성찰, 즉 후기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보이는 냉철한 과학철학자의 모습이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과학활동의 업적들이 가능하게 된 조건에 대한 탐색을 통해, 바슐라르는 20세기의 철학은 이러한 구체적 과학성과들을 바탕으로 그 인식론을 구성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흔히 인문학에서 비판하는 과학의 모습이 경험에서 획득한 표상을 통해 축적한 법칙의 귀납적 도출로 요약된다면, 바슐라르는 이렇게 인문학에 의해 비판받는 기존의 통속적인 경험과학의 모습이 사실은 지금까지 전개된 과학활동에 핵심적인 사항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특히 과학실험 조건이 보다 정교해진 20세기 이후에 더욱 타당해지는데, 그에 따르면 20세기에 이룩된 과학적 법칙들은 일상적인 경험 표상들의 귀납적 도출된 것들이 아니라, 이미 선험적이라고 할만한 사유의 틀의 설정과 이 문제틀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성되어 일상과 단절된 과학적 실험을 통해 획득된다. 바로 여기에서 바슐라르의 핵심적인 개념인 '문제틀'과 '인식론적 단절'이 등장한다.

이미 토마스 쿤이 미국에서 '패러다임'이라는 과학사적 개념을 고안하기 훨씬 이전에, 바슐라르는 이 '문제틀problematique'라는 개념을 통해 기존의 과학사가 단선적이고 목적론적인 진보의 과정이 아니라 각 시대마다 나름대로 짜여진 체계적 문제의식에 따라 답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론의 영역과 일상적 경험의 영역을 엄격하게 분리시킴으로써 과학적 활동을 엄밀하게 파악하게 해 준다.

물리학에 대한 설명으로 넘쳐나는 이 책은 자칫, 양자역학에 대한 개설서로 비춰질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이러한 활동을 기반으로 그가 적용하는 개념들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특히 이 개념들은 이후 구조주의와 후기 구조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중요한데, 알튀세르의 철학과 푸코의 사상의 기원들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볼만한 책이다.(도미니크 르쿠르의 '프랑스 인식론의 계보'와 게리 거팅의 '푸코의 과학적 이성의 고고학'을 참조해 보는 것도 좋다.)

역자가 한국 지성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불문학과 물리학을 모두 소화해 내었다는 점에서 본 역서가 바슐라르의 또 다른 모습 한 쪽을 그나마 잘 보여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