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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지팡이 - 소설 쓰는 철학자 보르헤스 다시 읽기
양운덕 지음 / 민음사 / 2008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보르헤스의 소설들이 가지고 있는 힘, 그것은 그의 소설들이 바로 20세기에 가능한 모든 인문학적, 철학적 사유들의 실험실이었다는 점에 있다. 어떤 한 유파가 아닌 단 한 사람의 뇌-우주 속에 그리도 다양하고도 창조적이며 독특한 사고 실험들이 행해졌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들은 경이롭다. 남미의 분위기 속에 녹아난 인류의 보편적 철학적 주제들은 이미 알려져 있듯이 수십 년 전에 유럽의 많은 현대 철학자들, 인문학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으며, 그의 불교강의는 아마도 유럽과 아시아와 떨어진 신대륙에서 두 대륙을 다시 이어주는 가교가 되고 있다.
많은 문학적 비평들 중에서도, 이 책은 보르헤스가 어떻게, 즉 어떠한 방식으로 현대 철학의 주요문제들을 제기하고 풀어나가고 있는지를 보르헤스의 책 속에서 길을 잃기 쉬운 독자들에게 차근차근 지팡이가 되어 짚어주고자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지팡이가 필요한 이유는 비단 우리의 보르헤스가 장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잃고 맹목적으로 일상을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보르헤스가 사유의 숲에서 짚었던 지팡이는 거꾸로 뒤집어 무심한 도시의 일상에서 우리가 짚어야 할 지팡이가 된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바로 두 개의 지팡이들이 되어 그 굽은 손잡이들을 서로 걸어 보르헤스와 우리를 이어주는 소통의 끈이 된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 책이 단순하게 보르헤스 소설집『픽션들』의 철학적 주해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이 책의 5페이지에 제시된 목차를 보면 눈치챌 수 있는 바일 것이다. 『픽션들』의 목차와 전혀 다른 작품의 순서들은 저자가 보르헤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현대 서구철학의 논리적 여정, 또는 20세기 철학의 문제제기와 답변들의 역사이다. 「진리의 침묵」은 사람들로 하여금 「혼돈의 도서관에서 진리 찾기·만들기」의 과정을 이끌어 내고, 이는 곧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진리와 질서의 세계가「우연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점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으로 점철된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 더 정확히 어떠한 의미를 갖고 살아야 하는가? 「새로운 ‘돈키호테’의 모험-글쓰기 또는 읽기의 모험」은 긍정적 의지를 통한 삶의 끊임없는 반복과 차이의 풍요로운 만개를 이야기 하며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방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것이 인식론적 가상의 기만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 실패를 맛보게 한다면? 그래서「실패의 기록으로 본 문화적 차이와 허구적 존재론」은 인식론과 존재론의 ‘피드백’ 식 구성과정으로 독자들을 안내한다. 이를 통해 나타나는 진리 아닌 진리, 또는 윤리 아닌 윤리, 그것은 「진리의 문턱에서 만난 새로운 질문-‘끝없는 여행의 이야기」로 제시된다. 마지막으로「형이상학이 환상 문학의 하나라면-관념들로 빚은 또 하나의 세계에서」, 우리는 또 다른 세계의 가능성들을 맛보게 되며 새로운 의미론들로 빚어진 여러 우주들을 엿보게 된다.
이렇게 이 책은 스스로 반복하는 차이를 만들어 내고 보르헤스의 존재를 우리의 인식으로 이어서 다시 우리의 삶에 새로운 물음을 던져 보라고 권고한다. 보르헤스의 우주와 더불어 또 다른 세기의 우주들을 꿈꾸어 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