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린 헌트 지음, 조한욱 옮김 / 새물결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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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의 사건이 여려 종류의 인과관계로 설명될 수 있듯이,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사건 또한 다양한 관점으로 언제나 재해석될 수 있다는 점은 당연하다. 이러한 다양한 관점들 중에서 린 헌트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사적인 영역이라 여겨지는 가족과 어떠한 상호작용을 전개해 나갔는지, 또 그 와중에서 여성은 어떠한 지위의 변화를 겪었는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왕을 국부로서 내세우는 구체제는 부권을 최상위에 두는 가족모델과 당시대에 상상적 조응을 이룬다. 혁명은 왕을 단두대로 보냄으로써 아버지 없는 사회, 즉 형제애라는 감정 속에서 형제들로 이루어진 가족모델과 조응을 이룬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에서 프로이트적 설명에 문제를 제기 하는 것이 바로 여성들의 지위이다. 여성은 뒤늦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서 보여지듯이, 남성들 중심의 정치사회에서 늘 불안의 요소로 자리잡고 있었던 바, 개인의 천부의 권리라는 선언에도 불구하고, 정치에서 여성의 지위는 점차 배제되어 나가기 시작한다. 프랑스 혁명의 가장 급진적인 사적생활의 모델을 제공하는 사드의 작품에서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부차적인 권한만을 지닌다. 결국 남성들의 불안감 속에서 혁명 프랑스는 점차 또 다른 형태의 가족을 복구시켜 나가며 나폴레옹은 다시 부권 중심의 가족 모델을 확립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역할은 전과 같지 않으며,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기에 자수성가하는 아이들이라는 상상체계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헌트의 분석은 풍부한 자료 제시는 물론 프로이트와 지라르의 이론적 틀의 유연한 적용, 곳곳에 스며있는 역사학적 합리성과 판단력으로 빛나고 있다. 또한 거시적으로 19세기 서구 민주주의 운동의 발생과 대중사회의 등장에 따른 특징들이 그 분석의 저변에 깔려 있어 독서의 깊이를 더해준다. 이러한 설명방식을 통해 헌트가 무엇보다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어떠한 이론적 원리가 마주치게 되는 여러 다양한 현실적 경험의 틀들이다. 즉 헌트는 혁명의 성과보다는 그 성과가 날아가기 위해 박차고 나온 습관의 대지와 혁명이 서투른 날개짓으로 허공 속에서 마주치는 불안감을 보여주고자 한다. 일면 이러한 입장은 근본적으로 철저한 혁명의 가능성을 회의하게 만든다. 어찌되었든 현실 속의 인간인 이상 그 무엇이든지 혁명으로 바꿀 수 없는 각질화된 습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보건대, 이러한 입장은 혁명을 이상화시키지 않고 인간이 이루어낸 일로 정당하게 환원시키는 건전한 모습을 지닌다. 인간사의 이중성은 우리를 회의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신중한 판단을 자극한다. 혁명의 남성중심주의를 비판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거리를 두는 헌트의 언급은 인간사의 복잡함에 대한 신중한 판단에서 나온 노련한 역사가의 입장에 다름 아니다. 혁명에 있어서 이상 또는 원칙과 사실들을 구분하되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양자간의 불가분의 관계를 늘 염두에 둘 것, 그러나 혁명의 이상 그 자체를 기만이나 순전한 허구로 돌리지는 말 것. 베르그손이 말하는 modus vivendi란 이러한 것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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