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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비행기 1
박인식 지음 / 생각의나무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작가 박인식씨는 나그네다. 다른 책에서 읽은 그(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나그네는 길 위에서 나이를 먹는다고 한다. 그래서 길 위에서는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그를 존중해 준다 한다.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그는 그의 또래보다는 현실에서의 나이가 어리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일까,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의 구성은 마치 어린 시절 상상으로 놀던 공상의 세계와 닮았다. 너무 인상적이고 감동적인 만화 혹은 책을 읽고 나면, 자기 마음대로 그 이야기의 뒷편을 상상해 보거나, 주인공들만 데려와 다른 환경 속에서 움직거려 보는,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이 그 작품의 세계에 뛰어들어 주인공의 역할을 맡거나 새로운 역할을 부여해서 이야기를 만들어보는 그런 공상말이다.
어린 날의 상상처럼 그럴 듯하게 바꾸어놓은 주인공들도 그러하거니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자의성과 우연성도 그렇다. 게다가 마치 신탁처럼 초현실적인 무언가가 주인공을 이끌어 주기도, 외면하기도 하는 듯한 비현실성까지.
유치하다(생각이나 하는 짓이 어리다)라는 단어를 굳이 상대방을 비하시키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하자면, 그의 플롯은 유치하다. 하지만 그 유치함 속에는, 어느샌가 오랜 삶의 노정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노회함이 배어든다. 그래서 어릴 적의 일기에 휘갈겨놓은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한마디에도 기어코 떠올라버리는 착잡함과 서글픔이 묻어나, 어릴 때의 일기임에도 더이상 어릴 때처럼 읽어낼 수 없는 이야기가 되어버리듯, 어린날의 공상이 더이상 어린날의 공상일 수 없게 만든다.
박인식씨의 글은 언제나 여정이다. 그래서 현실 속에 밀어넣은 작가와 닮은 사내(이 책의 주인공-고독)역시 늘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마치 기차를 기다리는 플랫폼에서 설 자리를 잘못찾은 것은 아닌지, 잘못 찾은 것이라면 반드시 바로 찾아 떠나야 할것처럼... 그리고는 기어이 다른 플랫폼을 찾아 떠난다. 고갱과 고호와 고야의 고씨를 이은, 특히 고갱을 이은 그는 언제나 남태평양의 어느 외딴 섬을 꿈꾸며 버리지 못한 화가를 이루기 위해 떠난다. 비록 어린날에 꿈꾸던 이상향은 더이상 없음을, 그가 기어이 발을 내디딘 화가의 세계가 얼마나 지독한 현실이 되어 돌아올 지도 모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다 종국에는 그의 삶이, 종이비행기에 담은 그의 꿈인지, 종이비행기에 담긴 그의 염(念)이 그려내는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함만을 남긴채 종이비행기처럼 산화해버리고 만다.
어릴적에 하늘을 향해, 바다를 향해 그리고 잃어버린 어머니나 누이 또는 벗을 향해 쏘아올린 종이비행기. 수많은 꿈과 그리움을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 하지만 기어이 떨어지고야 마는 서글픔 또한 놓을 수 없는 종이비행기. 그리고 작가가 어른이 되어 다시금 접어 보내는 종이비행기. 이 책은 장난스럽게, 조심스럽게, 무심하게, 간절하게 접어 날린 종이비행기를 땅에 닿기 전에 집어낸 것 같다. 본의아니게 비행기의 항로를 훼방놓아버린 미안함과 서글프게 땅에 떨어지기 전에 종이비행기에 담은 마음을 받아낸 뿌듯함이 동시에 떠오르는 그런 종이비행기를 받아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