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그늘 아래
이혜경 지음 / 창비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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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씨와의 첫만남부터가 그래서였을까, 오랫만에 신작이 나와도 마치 오래전부터 서점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듯 태연스런 익숙함으로 맞이한다. 서점을 뒤지다 무심결에 발견하게 되는 그런 자연스러움 말이다.

그렇게 의뭉스럽게 재회한 이혜경씨는 말이 줄어있었다. 글자수와 무관하게,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남은 듯한 미진함을 남겨둔채 돌아서 버렸다. 10권이 넘어가는 대하소설을 읽고도 이거 이렇게 끝나도 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데, 단편이야 으레 그런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조금 다르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먹고도 성에 차지 않은 데서 오는 아쉬움이 아니라, 한가운데까지 뭉턱 베어먹은 아이스크림을 손에 쥐어든 휑함에 어리둥절한 느낌이랄까.

첫 단편을 읽고나니, 읽은 것도 없는 데 끝나버린 황망함에 다시 한번 확인해도 다음편 제목만 나온다. 그래서 아쉬움을 채울 심산으로 다음으로 넘어간다. 그렇게 2~3편을 보고나니, 그제서야 그녀가 말이 있어야 할 자리에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그늘이라기보다 빛이 있음 당연히 그늘 또한 지듯, 바람에 날리는 아름다운 여인의 사진 너머엔 분명히 선풍기를 돌려주는 일꾼이 있듯, 읽히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이야기의 그늘말이다. 그 그늘이 깊어진만큼 내뱉지 못하는 말들을 그냥 그렇게 머금어 버린 모양이었다.

아름다움이 눈부신 햇빛이 아닌 어둑신한 그늘 아래서는 제 색깔을 다 드러내지 못하듯, 추악함 또한 그렇듯 순화시켜버리는 짙은 그늘 덕분일까. 그녀가 그려내는 현실은 전작 '그집앞'에 비해 더욱 강팍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보여주던 삶의 신산스러움과 처연함이 뿜어내던 서늘한 기운은 한결 수그러들어 있다.대신 그보다 더한 아픔을 담아내면서도 그것들을 감싸안는 온화함이 훈기를 더한다. 그늘이 이렇게 훈훈했었고, 햇살은 그토록 서늘했는지... 그 역설에 그만 어리둥절해져버린다.

사실 작가가 자카르타-인도네시아에 다녀온 뒤에 쓴 글이라기에 그녀의 눈에 비친 이국의 풍경은 어떨까 내심 기대했었다. 그러나-바뜨, 그녀의 눈에는 한국이나 인도네이사아나 거기서 거기였나부다. 이국의 화려함도 뜨거운 열기도 서늘한 햇살 속에 밀어버린채, 훌쩍 떠나고도 끝끝내 버려지지 않는 아픔으로 어딜가나 다를바 없는 삶의 모습만 바라보다 온 모양이다. 그녀가 간 곳이 자카르타였는지 이어도 같은 전설이 남아있는 남해의 어느 섬이었는지.

오랫만에 만나봤으니, 이제 다른 데로 눈을 돌려야겠다. 그녀의 길고 차분한 호흡을 미뤄볼 때, 당분간 그녀를 다시 만나기는 힘들테니 다른 데 정신 파는 것이 현명하다.(오랫동안 각종 신간을 기다리다 터득한 방법이다.) 기다리는 것보다야 잊고 있다가, 다시금 만날 때면 천연덕스럽게 반가워하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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