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의 책 《미시경제학》과 《경제학 원론》은 새로운 이론보다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정론과 원칙에 입각한 정확한 해설로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바이블’로 통하며 국내 저자가 쓴 경제학 교과서 가운데 독보적인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서울대학교에 재직해온 지난 26년 동안 언론사 인터뷰를 비롯한 외부활동과 거리를 두고 강의와 교과서 집필에만 전념해 왔다. 그런 그가 지난 2006년부터 자신의 홈페이지와 언론에 시론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보수층의 목소리만 지나치게 커지고 이를 진실로 받아들이면서 합리성을 상실한 우리 사회를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우리 사회의 보수, 그리고 그들을 대변하는 현 정부는 거의 우파 이념의 포로가 되어 있는 듯 행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 어느 나라의 보수도 우리나라처럼 이념적으로 경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변명하듯, 10년 동안의 좌파정부하에서 그런 태도를 갖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쌓였던 분노가 우리 사회에서 좌파의 잔재를 모두 쓸어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 동기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유연성을 상실한 과격 이념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 유연성의 상실이 현 정부가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점입니다. (…) 제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며, 그 때문에 현 정부 출범 이후 줄곧 비판적 자세를 유지해온 것입니다. - 10~11쪽
이준구 교수의 글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 경제학의 정설과 원칙에 입각해 한국 경제를 진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준구 교수는 정부가 정책 집행 근거로 삼은 경제적 타당성이나 경제 이론이 경제학 정설에 비춰봤을 때 어떤 오류를 범하고 있는지를 낱낱이 파헤친다.
《이준구 교수의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는 26년 동안 강단을 지켜온 경제학자의 저서답게 경제 정책들의 타당성과 정당성을 가늠할 보편적 기준으로서 경제학의 정설들―조세정책의 원칙, 시장과 정부의 힘의 균형, 경제적 타당성 검토의 원칙―을 논거로 튼실하게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국가 정책에 따라 현재 삶의 질과 미래가 결정되는 국민으로서 쏟아져 나오는 경제정책들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인식의 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난 3년, 특히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부터 집중적으로 집필한 그의 글은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가로지르는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준다. 정책에서 주장하는 핵심이 무엇이고 그것이 경제적으로, 그리고 상식적으로 타당한지를 낱낱이 들춰냄으로써 경제를 읽는 눈을 제공한다.
책 속 내용 보기
뉴딜은 토목공사가 아니라 진보적 사회정책이다
뉴딜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이 정부가 싫어할 만한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 연방정부의 개입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히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며,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를 새로 도입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퇴보라고 평가될 만한 프로그램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 50쪽
주택문제는 더 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는 집을 많이 짓는다고 해서 주택가격이 안정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 볼 때 주택가격 안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매물로 내놓는 집의 양의 증가다. 그렇기 때문에 주택가격 안정이란 관점에서 보면 매물로 나오는 주택의 양을 늘리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 66~67쪽
종부세는 공평과세에도 유리하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공평한 과세라는 측면에서 종부세 같은 재산 과세가 갖는 장점이 특히 두드러진다. 최근 다시 문제가 된 바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고소득층의 탈세가 유달리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소득의 정확한 파악이 힘들다는 사실을 악용하기 때문인데, 종부세는 이와 같은 소득세의 문제점을 훌륭하게 보완해줄 수 있다. 소득을 감추기는 쉬워도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을 감추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 110쪽
누구를 위하여 종부세를 없애려는가
종부세가 재산세로 통합되는 순간 누진적 과세는 불가능해진다. 주택을 세 채, 네 채씩 갖고 있는 사람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길 수 있는 길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정부에서는 재산세율을 누진적으로 만들 뜻을 내비치고 있지만, 이것은 고도의 기만전략이다. 재산세율을 아무리 누진적으로 만든다 해도 전국 각지에 여러 채의 주택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 부담을 안길 방법은 없다. 재산세는 각 지방차지단체가 독자적으로 부과, 징수하는 세금이기 때문이다. - 145쪽
대학입시를 어떻게 바꿔도 사회적 이득은 없다
고교등급제와 관련한 상황은 완벽한 영합게임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높은 등급을 받게 될 학교의 학생들이 받는 이득은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을 받게 될 학생들이 받는 손실로 완전히 상쇄되기 마련이다. 대학은 좀 더 능력 있는 학생을 선발할 수 있다고 좋아하겠지만,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본 이득은 바로 0 그 자체다. 현 상황에서 B대학에 갈 학생을 고교등급제를 채택해 A대학에 배정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과연 어떤 이득이 오게 될까? - 200쪽
영어 공교육 강화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영어수업 시간을 더 늘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해야 하는 것들의 가치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만약 국어, 산수, 음악수업 시간을 영어수업 시간으로 대체함으로써 학생들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새 정부가 말하고 있는 영어 공교육 강화방안에는 그와 같은 고려를 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영어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더 좋은 것처럼 얘기되고 있는데, 그와 같은 논리는 시간의 기회비용이 0이라는 비현실적인 가정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 252쪽
한미 FTA는 체결하는 쪽이 이득이다
대부분의 예측은 한미 FTA가 가져오는 이득이 손해보다 더 크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고 있다. 사실 이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결과인데, 무역을 자유화함으로써 생기는 손실이 이득보다 더 크다는 결과가 나오기는 본질상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이 결론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협정 체결로 인해 어려움이 예상되는 부문, 특히 농업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마련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한미 FTA를 반대해야 할 분명한 이유는 찾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 278쪽
삼겹살에도 비만세를 부과해야 할까?
국민이 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 해서 정부가 간섭하기 시작한다면 과연 어디까지 가야 할까? 비만을 일으키는 음식이 햄버거, 핫도그, 콜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갈비도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삼겹살과 소주도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심지어는 밥과 빵도 너무 많이 먹으면 비만을 일으킬 수 있다. 정부가 삼겹살에 세금을 매기고 국민이 먹는 밥의 양까지 지켜보고 있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 308쪽
우리나라가 ‘부자를 괴롭히는 나라’라고?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부자들이 살기 좋은 편에 속한다. 우리 사회에는 부자에 대한 증오범죄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강절도 범죄의 피해자는 부유층보다 빈곤층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세금만 하더라도 우리는 부유층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편이다. 또한 집과 땅만 사놓으면 돈을 버니 부자가 재산 불리기에도 너무나 좋은 나라다. - 316쪽
8년으로 충분하다!
양극화 문제는 날로 심각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자 편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어 주어야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는 것은 구시대의 낡은 패러다임입니다. 이 패러다임에 기초를 둔 레이거노믹스는 초라한 성적표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레이거노믹스의 잔광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쓴 부시 행정부는 미국 국민을 불행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8년으로 충분하다”(Eight is enough.)라는 구호가 왜 한 순간에 미국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 3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