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최순우의 한국미 산책, 학고재신서 1
최순우 지음 / 학고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최순우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열다
걸음의 보폭을 조절하지 않아도 되는 계절이다.
서두르며 빠르지도 않게 주춤거리며 너무 느리지도 않게,그저 마음이 시키는 대로 거리를 걷다보면 여름 내내 체념하듯 스러져있던 모든 것들이 푸드득 날아오르는 새처럼 말을 걸어오는 계절.
더 이상 긴 머리칼을 질끈 동여매지 않아도 축축한 땀방울 대신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 한 자락이 머리칼 틈새를 헤치고 들어와 목덜미를 간질인다.
그러고 보면 이맘때의 바람은 간질이는 것들이 참 많다.
빛을 간질이고 나뭇잎을 간질이고 그걸로도 모자라 빛과 나뭇잎이 만들어낸 그림자까지 간질이며 곧 깊어갈 또 하나의 자연 앞에서 차분한 마음이 되어 두 손을 모으게 해주는 것 같다.
한들한들..코스모스의 흔들림을 표현할 때 이보다 더 적절한 수식어가 또 있을까.
어느 오후.. 바람의 간질임을 이기지 못해 그렇게 한들한들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그만 한 송이를 탐하고 말았다.
마침 바람이 기억저편에 묻어두었던 추억까지 간질이고 말았으니,학창시절 책을 펼치다가 불현듯 책 밑으로 투욱하니 떨어져버리곤 하던 잘 말린 꽃잎하나가 문득 그리워졌던 것이다.
나는 길가에서 남몰래 범한(?) 그 코스모스를 소중히 모셔오듯 가져와선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최순우선생의 책<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중 신윤복 그림 ‘월하정인’이 실려있는 부분에 잘 펴놓고 책을 덮었다.
마치 한들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는 순간부터 이 책과 함께 ‘월하정인’을 떠올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나로 하여금 이렇게 가을볕 고운 오후에 잘 말려진 코스모스 한송이를 함께 간직하고 싶게 만든 책<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이 책은 1984년 작고하실 때까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내셨던 혜곡 최순우 선생이 우리나라의 소소한 공예품에서부터 국보급 문화재까지 ‘한국의 미’를 주제로 우리의 것에 담겨있는 아름다움, 또 그 아름다움이 갖는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써내려간 책이다.
평생을 박물관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문화재를 아끼고 사랑하셨던,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심미안을 가지고 계셨던 최순우 선생이 우리나라의 건축,회화,공예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소개한,말하자면 문화유산관련 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가리켜 단순히 문화유산 관련서적,이라고 일축해버리고 만다면 이미 고인이 된 최순우 선생에게 엄청난 결례를 범하게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의 짜임새나 구성이 그저 학문적 지식만을 전달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문화관련 서적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만약 선생이 생전에 박물관장을 하지 않았더라면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을 만큼 중간 중간 돋보이는 아름다운 선생의 글.
때로는 그 표현이 너무나 절절하고 애틋해서 선생이 정말 유물들과 연애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는데 이처럼 우리유물에 대한 선생의 남다른 애정은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금방 느낄 수가 있지 않을까 싶다.
생전에 한사람이라도 더 박물관으로 발길을 끌기위해 애쓰며 우리미술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던 최순우 선생.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오랜 시간을 거쳐 이 책을 통해 선생의 바램이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http://cfs9.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DJHYzJAZnM5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TUuanBnLnRodW1i&filename=15.jpg)
MBC '느낌표'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에서 네 번째 선정도서로 선정되면서 보급판으로 새롭게 출간되고 본문과 표지도 일반 용지로 바뀌면서 많은 이들에게 읽혀진 책-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책 보급판에 부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 유홍준 교수는 미술에 대한 안목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미술품을 좋은 선생과 함께 감상하며 그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여는 길’ 이라고 했다.
또 ‘그 선생’이 책이 되는 경우도 있는데 유홍준 교수는 일찍이 그 최고의 스승으로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꼽았다.
불편하지 않은 활자 덕에 가볍게 첫 장을 열고 책 속의 미문 속으로 빠져들다 보면 그동안 어렵게만 생각했던 고미술이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친근함이 관심을 갖게 하고 어느새 관심이 애정으로 변해가는것을 느끼게 되는데 그 애정이야 말로 독자로 하여금 우리의 유물들과 서투르지만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사랑을 다듬고 아끼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안목이라는 게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마저 하게 되는 것이다.
비교적 책을 빨리 읽는 편인데 이 책만큼은 책속에 흠뻑 젖어들기를 바라며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읽었다.
또 두툼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외출을 할 때 잊고 나서는 일은 없었고 어디에 있던지 늘 곁에 두었다.
매장 일이 한가하면 한가한대로 이 책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서 좋았고 바쁘면 바쁜대로 빠르게 손과 발을 놀리면서도 곁에 이 책이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던 시간들.
그런데 이렇듯 이 책을 곁에 두고 있자니 책속에 살아있는 문화유산들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져 마음이 바빠져 옴을 감지하게 된다.
선생이 ‘세상에는 진정 잊을 수 없는 연인이 두 번 다시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마 세상에는 정말 못 잊을 집도 다시 있기는 힘들지도 모른다'고 표현했던 창덕궁의 연경당이며 당장이라도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아가서 지금까지 박물관을 찾아도 그저 관람수준에 그치고 말았던 유물들을 ‘선생의 눈을 빌려 내 눈을 열고 ’다시 한번 만나고 싶어져 좀이 쑤실 지경이다.
또 5월과10월 일 년에 두 번 일반인에게 개방하는 간송미술관 특별전도 벌써부터 내게 설레임을 안겨주고 있다.지난 5월의 관람 때와는 또 다른 감동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기대와 함께.
‘좋은 그림이란 전체를 보아도 허전한 곳이 없고,어느 부분만 떼어놓고 보아도 하나의 그림이 될 때가 많다’는 말씀과 함께 혜원 신윤복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가까이는 창경궁의 연경당과 국립중앙박물관,간송미술관을 비롯해서 멀게는 불국사까지, ‘가고싶다’로 그치지 않고 ‘가야겠다’라는 마음을 먹게 해주는 책.
‘조용한 시간을 틈타서 이 뜰을 거닐 때면 언제나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손에 안 잡히는 나의 그리운 사람은 차라리 보살부처이기나 했으면 좋겠거니 생각하노라면 나는 금세 눈시울이 더워오곤 했다....,<중략>..소원이 있는 사람이면 마음이 외로울 때 이 뜰이 조용한 틈을 타서 석단 앞에서 석단의 크고 작은 돌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범영루 너머로 석가탑을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불국사를 다시 찾게 된다면 나는 분명 선생의 말씀을 기억하고 불국사의 앞뜰에 서 있을 것이다.
최순우 선생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책을 덮으며 마지막으로 범영루 너머로 석가탑을 바라보며 내가 빌 소원 하나를 생각해본다.
한국의 미술은 언제나 담담하다.
그리고 욕심이 없어서 좋다.
없으면 없는 대로의 재료,있으면 있는 대로의 솜씨가 별로 꾸밈없이 드러난 것,
다채롭지도 수다스럽지도 않은
그다지 슬플 것도 즐거울 것도 없는 덤덤한 매무새가
한국 미술의 마음씨이다.-본문中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은 함께 실려 있는 사진들이 흑백이기 때문에 그 생생함을 느낄 수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문득 몇 달 전에 사둔 ‘문화유산일기’라는 도감이 생각났다.
아주 생생한 칼라판 사진이 1300여컷이나 담겨져 있는 도감인데 사실 그때는 너무나 사진위주의 이 도감을 보면서 짧은 설명하나 제대로 없는 것을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와<문화유산일기>을 함께 보면서 책 두 권이 지니는 아쉬움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책읽기의 즐거움도 배가 되었던 것 같다.
![](http://cfs6.blog.daum.net/upload_control/download.blog?fhandle=MDJHYzJAZnM2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MTcuanBnLnRodW1i&filename=17.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