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당이 되기로 했다 - 결핍과 승부욕이 완성하는 악당의 철학
김헌식 지음 / 한권의책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화나 드라마, 소설들을 보면 그 안에는 항상 선과 악 사이의 힘겨루기가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속에서 악은 거의 선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자, 선을 각성시키기 위한 포석으로 사용되고, 곧 버려진다. 버려진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선에 의해 제압되고 제거 된다는 이야기다.


 악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이야기가 바로 무엇이 선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해준다는 점이다. 악이 없으면 선도 없다는  식의 이야기에 많은 사람들은 쉽게 동의를 표한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 선거를 늘 치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엇이 선인지는 그동안 드러난 악들을 통해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은 지니고 있다. 다만 선은 없고 덜 나쁜 것만 있기에 언제나 눈물을 머금고 차악에 기댈 뿐이다.


 이 책의 제목은 나를 강하게 매료시켰다. 분명한 것은 읽어봐야 알게 될 테지만, 악당이 되기로 했다는 도발적 문구에서 악행을 일삼는 악인이 되겠다는 뜻이 아님을 직감했고, 뭔가 '다름'을 추구하겠다는 인상이 비쳐졌던 것이다.


 "뉘신지는 모르오나, 그 말씀 흥미를 동하게 하니 거기서 작은 빛이나마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마음으로 첫 장을 폈던 기억이 난다. 


 과연, 책 속에 담긴 이야기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고, 얼마만큼은 실행에 옮기고 있던 행동들이 저자의 말 속에 들어있었다. 그리고 더 큰 일을 꾸며보라는 부추김을 귓가에 불어넣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볼 수 밖에 없게 됐다. 이미 알아버렸으니 말이다.


 책 속에는 참으로 많은 드라마, 영화, 사람들, 소설 속 등장 인물들의 말이 인용되고 있다.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다른 점은 그 말을 들려주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한 때, 혹은 그 이야기 속에서 '악당'역을 맡았던 사람들 이라는 사실이다.

 

 단순히 폭력과 혼란을 조장하는 악인을 뜻하는 말이 아닌, 더 깊은 의미에서 파괴를 통한 창조를 꾀한 시대의 흐름을 바꿀만한 이론을 낳은 학자, 구태의연한 지성과 세태를 향해 가장 먼저 반기를 들고 일어선 혁명가들을 '악당'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악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닌 시대와 세태에 따라 그 기준이 달라지는 상대적 개념이기에 과거의 악당이 현재의 영웅으로 그려질 수 있다는 이야기야 말로 이 책의 핵심인 것이다.


 시대는 영웅을 원하지만 그 영웅은 평범한 상황에서는 태어날 수 없다. 영웅을 낳는 존재는 언제나 '악당'인 것이고, 그렇기에 악당은 단순히 비난과 비판의 대상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는 것인 거다. '악당'으로 몰아 넣었다가 때를 봐서 '영웅'으로 둔갑시키는 일은 역사 속에서 무수히 반복된 아이러니다. 하지만 언제나 악당은 등장한다. 악당은 쉽게 포기하지 않으며, 간단히 사라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악당의 진면목에 대해 새로 생각해 봐야만 한다.


 주의 할 것은 이 책이 '악인'과 '악행'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혼란을 위한 혼란을 일으킨 사람을 두고 혁명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살육을 위한 살육을 행하는 사람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다. 악행을 위한 악행을 벌이는 사람들을 결코 '악당'이라 불러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저 '악'을 행하는 악인일 뿐이다.


 착한 사마리아 인 이후로 사람들은 '선함'을 동경했고, 실천했으며, 선함을 행하지 않는 이들을 미워하고 배척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악인들은 언제나 득세했고, 이익 집단에 속해 있었으며, 자신들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들에게 '악'이라는 딱지를 붙여 말살하는 것으로써 자신들의 풍요로움을 지속시켰다. 

 결국 세상은 너무나 선해졌기에, 선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선한 사람들은 저항하지 않았고, 거절할 줄 몰랐고, 벗어날 수도 없었다. 고난이 선한 이에게 내리는 웃지 못할 비극의 연속 상영의 막이 오른 것이다.


 그러다 그 시대를 뒤집는 일이 벌어진다. 지배자가 보기에 자신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이들은 '악'이었고 그들은 '악당'이었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가 신의 위엄에 도전한 것은 희대의 악행이었고, 그들은 악당이 되어 배척되었고, 경원시 되었으며, 권력에 의해 희생되었다.  하지만 현대에 그들은 진실에 가장 먼저 도달한 '영웅'이 되었다. 


 이러한 일들 속에서 나오는 결론은 '악당'이 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것이다. 타인과 다른 주류가 아닌 이론을 내놓는 일을 겁내지 말라는 것이다. 배척 당할지라도 신념을 관철하라는 것이다.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얽매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미래를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다.


 책 속에서 저자는 악당은 내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 악당을 지나치게 억누르고 살아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악당은 가장 확실한 것을 추구하며, 타인이나 신적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면서 현재에 충실하면서 미래를 바라보고 살라고 한다.


 사실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절대적인 판단 기준을 갖고 있지 않다. 때로는 악이 선이 될 수 있고, 선이 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악당들은 자신들의 의지, 생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지나치게 선한 사회를 경계하라고 한다. 

 사람들은 완벽한 무균 상태, 살균 상태를 유지하면 질병이 사라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렇게 행한 결과 새로운 질병을 얻게되었다. 면역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이 없는 상태는 역으로 예측 불가능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소크라테스는 청년을 현혹한다는 죄목으로 죽임을 당했고,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는 지구 중심설을 부정함으로써 배척당했으며,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은 이론을 인정받기 전까지 무수한 핍박과 맞서야 했다. 

 다른 쪽에서 볼 때 그들은 '악당'이었지만 그들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고, 현재는 '영웅'들로 그 자리를 옮겨 앉을 수 있게 됐다.


 저자는 이러한 무수한 예를 통해 '악당'을 예찬한다.

하지만 이 '악당예찬'에 있어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앞서도 적었듯 단순히 악행을 저지르는 '악인'과 '악당'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284쪽 

 우리는 악당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제멋대로 욕망을 충족하는 악당이 아니라 철학이 있는 악당이 되자는 것이다. 


 이 시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은 무척 선한 세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해 자신이 겪는 고난, 불편, 부당을 인내한다. 그러한 배려를 이용하는 '악인'들은 선인들을 착취하는 것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린다. 

 비극은 언제나 선한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현대가 불러 일으킨 재앙 중 하나는 '자아의 상실' 혹은 '혼란 된 자아'가 아닌가 싶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발로 삶을 살아 나가기 보다, 타인의 의지에 휩쓸려 다니는 삶을 지속하기에 급급해 있음으로 허무와 공허가 넘치게 되고 그렇게 불어난 상실감이 삶에의 의지마저 감퇴시키고 마는 비극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하고 묻고 있는 거다.


 악당이 되어도 좋다. 철학이 있는, 주의 주관이 뚜렷하며, 타인에게 악의적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자신의 삶을 확장시키는 일에 관해서는 주저하지 않는 그러너 존재가 되는 것은 어떨까?


 절제되지 않는 악행과 철학이 있는 악당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는 의지가 분명한 사람들, 자유를 꿈꾸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벌써 이 책이 출간된 게 언젠데 이제와서 스포에 대처하니 마니 하는 뜬금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느냐고 해도 별달리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저 일반적인 읽기 자세를 이야기하는데 특정한 시기나 주제에 대한 제한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결론부터 말하면 난 그다지 스포일러에 구애받지 않기로 하고 있다. 다만 조금의 스포일러조차 용납하고 싶지 않을 때는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읽으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정도 성의와 노력은 보여야 비로소 스포일러에 대해 할 말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다.

 뭐 다른 방법도 있는데, 스포일러가 될 모든 글에서 눈을 돌리고, 소리에 귀를 막는 방법이다. 단순한만큼 효과는 확실하리라.

 

 별달리 할 말도 떠오르지 않고, 이런 소설류의 줄거리를 주절거리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기에 시덥잖은 줄 알면서도 주절거려 봤다. 그 덕에 최소한 나 자신이 느끼는 어색함은 대부분 희석되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최초의 타협이 이루어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이런 물음 역시 부질없기는 마찬가지이리라. 그 시기는 사람에따라 제각각일 것이고, 그 순간을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친 사람도 무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그 정도는 다르지만 저마다 실존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그 갈등은 우연을 통해 극적인 화해에 이르기도 하지만, 결국은 크고 작은 비극으로 치닫게 된다. 

 

 그 과정이 유난히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모든 것을 잃고 난 다음에도 삶은 여전히 계속되고, 그 삶을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 역시 조금도 옅어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러한 과정을 겪는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존속하고자 하는 의지는 더 강렬해진다. 

 또하나의 아이러니는 그러한 비극 속에서만 빛을 발하는 재능, 혹은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극한의 상황에 처한 인간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극단적 절망은 오래 꿈꿔왔던 일을 이루어 낼 수 있을 만큼의 잠재능력을 일깨운다. 

 하지만 결국 이 모든 성공과 성취는 더 길고 깊은 고뇌와 좌절을 불러일으키는 최악의 장애물로 그의 앞을 막아선다. 신은 여전히 존재하며 그 신은 그의 죄악이 어떤 응보도 없이 용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잔혹한 존재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살아간다. 그것은 그가 혼자가 아니며 그를 사랑하고, 그가 사랑하는 존재가 함께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성경에 욥기라는 욥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이다. 이 욥이라는 인물은 선한 자로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인생 전반에 걸쳐 많은 축복을 누린다. 그러던 어느날 그를 놓고 사탄과 하나님은 내기를 하게 된다.그 내기의 결과, 욥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는다. 가족, 재산 그가 누리고 쌓아왔던 모든 것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탈되는 것이다. 처음엔 그도 원망과 실의에 빠져 하루하루를 보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믿음으로 그 시련을 이겨내고 새로운 복을 누린다.

 

 어찌보면 해피엔딩 같지만 이것만한 비극이 없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것으로 보상받는다 해도 그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새로 자식을 얻을 때마다 잃어버린 자식 생각이 났을 것이며, 부와 풍요가 늘어갈수록 함께 누렸던 옛 기억들이 선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번 잃어버린 실존은 되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자신의 존재 자체를 잃어버리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간다면, 그 모습이 과거와 아무리 비슷해진다해도, 설사 과거보다 더 풍요로워진다해도 늘 공허하지 않을까.

 

 이 소설은 내게 현재 지닌 것들을 소중히 여기라는 메시지로 다가왔다. 

지금 꿈을 가지고 있다면 힘들어도 그 꿈을 지켜라. 이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자꾸 타협을 반복하다보면 점점 지쳐갈 것이고, 그 피로감은 너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옮겨 갈 것이며, 결국 네가 지키기 위해 너 자신을 희생시켰던 것을 희생시켜가며 네 삶을 지속해 나가게 될 것이다. 타협이 안겨주는 풍요가 축복처럼 느껴지겠지만 그것은 네가 메피스토텔레스와 맺은 계약을 실행해야 할 날이 오기 전 까지 지속될 행복이다. 그날은 느닷없이, 득달같이 찾아 올 것이며 피할 수도 덜 수도 없는 대가를 요구해 올 것이다. 

 기억하라. 이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언젠가 반드시 치러야하는 빚을 내는 것이다. 그 빚을 갚아야 하는 날은 충동과 함께 올 것이며, 느닷없이 일어나는 분노가 그 날을 여는 열쇠가 되리라. 

 

 극단적으로 적었지만 그만큼 꿈을 소중히 여겨야겠다는 나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아직은 좀 더 꿈을 꾸고 그 꿈을 좇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생의 마지막 날까지 그 일을 계속하고 싶다. 

 

 나를 지키며 나로 살아가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은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무엇이, 누가 희생될 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언제나 내게 두려움을 안겨준다. 그것이 세상을 겁내게 하고 사람을 겁내게 만든다. 그럼에도 꿈을 계속 좇을 수 밖에 없다. 

 

 책은 언제나 내 편이다. 허락되는 한도 내에서 그 내용을 내게 맞게 내게 편하게 받아들여도 책은 나를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있다. 나로 살아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로 살아갈 것이다.

내 삶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타인이 퍼뜨리는 스포일러를 따라 살아갈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크리스 임피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몇 번인가 실패를 거듭했던 나로호의 발사에 드디어 성공했다. 많은 사람들이 환호했고, 기뻐했고, 기대에 부풀었으리라.


 1992년 8월 우리나라는 <우리별 1호>의 발사에 성공함으로써 최초의 인공 위성을 보유하게 되었고, 지금은 다양한 목적으로 쏘아올린 여러 개의 인공위성을 거느린 나라가 되었다.

 듣자하니 나로호의 활동 기간은 1년, 활동 내용은 우주 방사선량과 이온층 등 우주 환경 관측 임무와 함께 탑재하고 간 기술 부품들의 우주에서의 원활한 작동 여부의 테스트라고 한다.

 이번 나로호 발사 성공에 더하여 정부가 내놓은 포부는 2020년 달탐사다.


 사실 인간이 어떤 이유로 우주로의 진출을 갈망하는지 난 이해할 수 없다. 알면 알수록 불확실함이 늘어나는 괴상한 진리가 우주 속에는 들어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때가 많기 때문인데, 정말 우주의 진실이 밝혀질 날이 오기는 할까? 

 내게 우주는 진실이나 진리를 감추고 있는 거대한 장막이라기 보다, 감상적인 로맨스의 대상일 뿐이라 탐구하는 것으로는 그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존재같이 느껴지는 거다.


 우주를 소재로 한 책은 참으로 많다. 칼 세이건 같은 몇몇의 유명인 덕일 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우주와 천문학은 어느 정도 대중화에 성공한 과학의 한 분야인 것 같이 느껴진다.

 시간이나 역사를 다루는 책에서 우주의 기원과 신비는 빼놓을 수 없는 소재로 등장한다.


 내가 읽었던 책 중 <거의 모든 것의 역사>나 <지식의 역사>에서도 우주는 중요한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출간 일이나 자료 등의 면에서 앞에 얘기한 두 권의 책은 최신의 정보에 뒤떨어지는 것 같았다. 뭐, 내가 늦게 읽은 탓이지만 특별히 개정을 통해 최신 이론들을 더할 의지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으리라. 

 그런 점에서 이 책 <세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는 강점을 지닌다. 최신의 관측 기록과 밝혀지고 증명 된 이론들, 사장 된 이론들을 자세히 적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왜 '명왕성'은 태양계에서 퇴출 되었는가?

보이저 2호 위성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블랙홀은 무한히 성장하는 재앙의 상징일까?

우주는 진공 상태로 텅 비어있다고 하는데 그말은 진실일까?


 이 책은 여러가지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단히 전문적인 입장(천문학자)에서는 초보적이고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적당히 관련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나 우주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용한 사실들을 일러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천문학자가 쓰고, 천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번역했기에 용어의 불분명한 사용이 없어 혼동될 염려도 적다.


한 마디로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책이란 말이다.


 우리나라의 우주에 대한 관심 이야기를 하다 만 것 같은데, 첨성대의 경우를 보면 옛날에는 뭔가 봉화? 비슷한 용도로 배웠다가 언젠가 하늘을 관측하기 위한 건축물로 수정된 것 같은 기억이 남아있다. 

 좁은 범위의 하늘을 관측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더 짙고 깊은 어둠을 원했던 모양이다. 무척 과학적인 근거로 뒷받침 되는 건축물인 셈이다. 


 좁은 범위의 하늘 이야기가 나왔으니 덧붙이는 말이지만, 우주에 대한 관측 기술이 발전하면서 점점 더 미시적인 관점에서 우주를 관측하고 분석하려는 욕망이 커졌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아주 좁은 범위라고 밖에 생각 할 수 없는 공간 속에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은하'가 존재하고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그 은하가 작은 것은 우리 은하의 수십 분의 일의 크기에 불과하지만, 큰 것은 수 백 수 천 배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면?


프랙탈 이론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바탕으로 아주 작은 공간의 구조가 전 우주적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전제들 속에서 미시적 세계(작다고 할 수 없지만)의 탐구에 열을 올려가는 거다.


 위에 적어놓은 몇 가지 물음 중에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우주는 텅 비어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텅 비어있기는 커녕 수 없이 많은 은하를 창조하는데 들어간 우주의 성분은 3할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나머지 7할은 여전히 에너지의 형태로 우주에 퍼져 있는 것이다. 그 대표적 이름이 '암흑 물질'과 '암흑 에너지'라고 하는데 솔직히 확실한 실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우주는 무척 뜨겁다. (이것도 놀라운 사실이다)

붉고 밝아야만 뜨거운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내 상식을 간단히 부수어 버렸다. 검고 어둡더라도 그 공간은 상상 할 수 없을만큼 높은 온도를 가질 수 있다. 


 이렇게 책 속에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가득했다. 공부라든지 지식의 확장을 위해 읽은 책이었다면 내 머리가 먼저 빅뱅을 일으키면서 시원의 우주와 같은 안개 가득한 혼란에 빠졌을 것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그러니 질문은 책을 통해 스스로 해결하세요) 


 처음의 나로호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책을 읽고 난 후 나로호 발사의 성공을 보면서(나로호의 활동 기간과 목적을 보면서), 많은 의문을 떠올렸다. 

흐음, 과연 10년이 넘는 연구 기간과 5000억 이상의 연구 비용이 적절한 곳에 사용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첫 번째였고, 우리 기술로 발사에 성공했다고 하는데, 러시아에서 우리나라에게 발사체 기술의 진수를 전부 이전해 주었을까? 하는 의심이 두 번째였으며, 수 십년을 연구해야 비로소 하나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현재의 천문학 분야에서(쉽게 확인 할 수 있는 건 거의 외국에서 다 하고 있거나, 했기 때문에) 1년의 인공 위성 활동을 통해 확신을 얻을 수 있을만한 어떤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적인 물음이 세 번째였다.


 성공에 기뻐했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뒤이어 나온 '달탐사' 계획은 뜬금없다 싶었던 거다.

왜 우주 선진국들이 굳이 달의 탐사를 다시 하지 않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달에서 발견할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빛의 속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마무리 해야겠다.

 빛의 속도는 1초당 30만 킬로미터를 이동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빠르기다. 그 속도는 '광속'이라고 하는데 광속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타키온'이라는 개념이 이미 10년도 더 전에 나왔지만 현재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유명한 E = MC제곱 이라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빛의 속도를 능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물체가 빛의 속도에 가까워질 수록 그 물체의 무게는 무한대에 가까워지게 되기에 결과적으로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빛의 속도로 이동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보니 이것은 더 당황스러운 결과를 떠올리게 했다. 

영화 '스타트랙'을 보면 '워프'를 하는 것이 나오는데, 이 워프는 공간을 뛰어넘는 활동으로 빛의 속도보다 빨리 이동한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이건 '광속 운행'보다 '타임머신'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속도는 시간의 흐름을 좌우한다 빛의 속도로 이동한다면 우리는 나이를 먹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빛의 속도보다 빨리 움직이게 된다면 우리는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가게 될 것이다. 이른바 '시간 여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워프'를 생각해보면 빛의 속도 이상의 속도로 공간을 가르고 이동했다면 그들이 도착한 곳은 과거의 시간일 것이고, 그들이 다시 '워프'를 통해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그곳의 시간은 더더욱 과거일 것이다. 

 결국 한 번 워프를 해버리면 영원히 같은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 물론 이건 내 얕은 지식을 통해 상상해 본 것으로 실제로는 다른 상황이 펼쳐질 수 있다.


'아기공룡 둘리'는 1억년 전 쥐라기에서 현대로 옮겨진다. 둘리가 외계인에게 납치되고 난 후 둘리는 전혀 성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빙하기의 지구로 돌려보내진다. 한마디로 둘리를 납치한 외계인들은 빛의 속도로 이동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둘리는 다른 공룡들이 겪었던 멸종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어긋난 시간을 살아가야하는 서글픈 운명에 처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주에는 또 다른 지구가 있을까? 또 다른 생명이 있을까? 설사 있다해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만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수 십 억, 수 백 억년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발견한다고 해도, 그 발견은 현재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그쪽에서 우리를 발견했다고 해도 이 거의 무한한 거리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올 수 있기는 할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타임머신의 개발에 모든 것을 건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크리스마스 캐럴: 유령이야기 - 한글판 + 영문판 (오리지널 스크립트 수록) 한정 판매 세계문학의 숲 28
찰스 디킨스 지음, 정은미 옮김 / 시공사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제 읽어도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는 책이 있다.

연말 연초에 읽으면, 그 따뜻함이 새삼스럽게 여겨질만큼 흔하지만 소중한 깨달음을 안기기도 한다. 늘 보아오던 노커가 오래 전 세상을 떠난 동업자 '말리'의 모습과 겹쳐보이는 것으로 시작하는 크리스마스 정령과 스크루지의 만남 이야기처럼 낯익지만, 생각해보면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는 그런 깨달음들 말이다.

 

괜스레 바쁜 마음으로 연말을 보내고, 새해가 시작되고 한 주가 더 지나서야 읽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슬쩍 들춰보고, "아~ 크리스마스캐럴이 스크루지 이야기였구나!"하는 오랜 기억을 더듬는 일 정도를 했을 뿐이다.

 

스크루지가 먼저 세상을 떠난 동업자의 영혼과 만나고, 어떤 정령들과의 만남을 통해 개심한다는 사실은 기억해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정령들이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고, 스크루지에게 어떤 일을 경험하게 하는지는 잊고 있었다.

익숙하기에 오히려 쉽게 잊혀지는 일상의 동반자의 존재처럼, 익숙하고 낯익은 이야기이기에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했다.

 

내가 '기억'하고 '망각'한 것처럼, 스크루지는 많은 것을 잊고 있었다. 잊혀진 것 중에는 스크루지가 한 때 정말 소중히 여겼던 것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잊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는 소중한 것은 없나?', '지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현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색하지만 철저하게 제어할 수 있는 수단의 사용을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되며, 마음을 놓고 있다가는 언제 내 코가 베일지, 귀가 떼일지 모를 일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걸 늘 되새겨야 하지 않던가?'

뭔가 개운치 않았을 스크루지의 마음처럼, 짓눈개비 날리듯 온통 흐릿해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런 물음들을 떠나, 한 걸음 물러난 자리에서 스크루지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았을 때', 스크루지는 단지 동정 받아야 하는 가엾은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우리가 동정받아야 할 불쌍한 존재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한 것이었다.

'사람'

어쩜, 스크루지는 그를 소중히 여기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해주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그가 돌아봤을 때 언제든 팔 벌려 환영하고 끌어안아 줄 존재들이 곁에 있었던 거다. 그런 스크루지에게 몹시 질투가 났다.

 

언제나 사람이 답이고, 사람이 구원이다. 반대로 사람을 절망시키고 좌절 시킬 수 있는 존재도 오로지 사람 뿐이라지 않던가.

가족은 가까운 사람, 또 언제나 함께 해주는 사람, 그래서 오히려 더 냉담하고 차갑게 대할 때가 많고, 사랑이 담긴 말, 애정어린 말보다 화풀이 상대로 삼는 일이 더 많은 사람들.

오랜 친구, 나를 알아주는 친구와 좋은 일, 기쁜 일,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일보다 오늘 일하다 받은 스트레스를 풀며, 다른 사람의 흉을 보고, 무료함의 해소를 위한 만남을 계속하면서 가끔 거절 당할 때면 원망하고는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생각해보면 스크루지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을 것이 하나도 없어지는 것 같다. 스크루지는 나를 작게 만들었다. 나를 작게 만들어서 이야기를 작은 부분부터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내가 잊고 있는 것, 잃어버린 것을 떠올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 스크루지에게, 그의 동업자와 정령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거기다 스크루지는 너무나 순수하다. 동업자의 이야기, 세 정령과의 동행을 통해 하룻밤 만에 개심을 이루고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실천력도 가지고 있다. 나는 얼마나 순수한가? 깨달음을 얼마나 행동으로 옮기고 있나? 나를 바꿀 용기, 달라진 나를 타인 앞에 내놓을 용기를 가지고 있나? 인색하기로 소문난 구두쇠 스크루지만큼도 못되는 사람으로 살지는 않았던가.

 

잊었던 이야기를 되새기고, 솔직함과 순수함을 배우고, 용기를 닮기를 새해의 목표로 삼아야 하지는 않을까?

다음에 이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과 그 때에는 또 다른 꿈, 잊고 있던 순수함, 그리고 어쩌면 다시 잃어버렸을지 모를 용기를 되살릴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나길 바란다는 말로 난잡한 감상을 마무리 짓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상을 사는데 이유가 필요할까? 하는 질문은 어딘가 어리석음이 풍기는 미련한 냄새가 난다.

 

 그럼에도 몇 번씩 되묻게 되는 이유는,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이유를 사명처럼, 운명처럼 지니고 살아갔던 억척스런 인생이 세상에 내놓은 결과물들을 보며 좀 더 나은 삶으로 기억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 그런 물음을 떠올리게 되는 순간을 돌아보면 어떤 건설적인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 절박한 위기감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생존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는 확신만 늘고 만다.

 

 많은 사람이 삶 속에서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그저 휩쓸려 다니는 삶을 살아간다. 그 결말의 하나로 이른바 최악의 선택이자 최후의 선택이라 일컬어지는 '자살'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인 강상중씨는 이 책을 쓴 이유를 이야기하는 책 서두에서 자신이 겪은 비극과 그 비극 속에서 깨닫게 된 것들을 전하려 한다는 말을 한다. 그의 결론이 해답이라거나, 정답이라는 말을 할 수는 없겠지만, 슬픔과 절망에 대처하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눈은 사물을 보지만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다.

 

 우리가 삶의 태도와 목적을 정하는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내 생각을 해보면, 그건 '살아오며 경험한 것',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그 근거가 되는 것 같다.

 

 "눈은 사물을 보지만 자기 자신은 볼 수 없다"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말에 보태 "비극에 휩쓸려 불행한 상태에 있는 사람일수록 우주에 존재하는 깊은 진리를 더 쉽게 엿볼 수 있다"고도 한다.

  이런 시선들은 자칫 자기만의 좁은 시야, 작은 세계 속에 생각을 가둘 수 있게 될 위험도 있지만, 어차피 우리 인간의 관계에는 한계가 존재하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수용되지 않을테니 보는 것이 생각하는 것이 된다는 말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지난 책에서 '고민'의 힘을 이야기 했다면, 이 책에서는 '고뇌'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고뇌를 통해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기를 원한다.

 

 살아가기 위한 이유와 관해 이야기하는 여러가지 중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거듭나기와 원자화된 세상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개인적인 공명, 진지한 공명에 대한 것이다.

 거듭나기는 헤르만 헤세가 말했던 부화를 위해 알이라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는 과정을 닮았다. 깨지게 된 이유가 안으로부터 터져나온 자발적인 것이든, 외부에서 가해진 외부적인 것이든 결국 극복해야 하는 주체는 '나'다. 그리고 그 극복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외부와 공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공명은 깊이가 있어 진지하다. 가볍고 넓은 관계를 만들어가기에 급급한 현대에서 오히려 그 비중을 늘려가는 진지한 관계의 필요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친구에 관한 이야기 일 수도 있고, 가족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원자화란 개개의 개별적인 존재로서만 존재하게 된 단락적인 현대를 상징화한 말이다. 하지만 그 원자 속에는 그 원자를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구성원들이 있으니, 좀 더 들여다보면 "나 말고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라는 절망적 외침에서 벗어날 수 있게되지 않을까?

 

 저자는 과거가 미래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미래는 단순한 가능성이고, 과거가 현재의 나를 만들기에 그 미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과거라는 말이다.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대도, 분명 과거가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잣대가 되고 기반이 된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또 살아가야 하며, 살아갈 것이다.

좋은 것을, 내게 좋은 것을 보기 위해 눈을 돌리자. 눈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마음에 좋은 것을 바라보도록 하자.

 공명은 혼자서는 일으킬 수 없다. 사람과 함께하자. 그것이 좋은 이유가 되어주지 않을까?

 

 살아가는 이유가 필요하다지만, 그 이유 속에 '혼자'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함께' 살아갈 궁리를 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