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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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움베르토 에코라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 그에게는 수백, 수천, 수만 권의 책이 될만한 앎이 있었지만 그 역시 함께 사라지고 만다. 개인의 사라짐이 세계에 어떤, 얼만큼의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그의 경험, 그의 지식, 그가 얻었을 깨달음, 가르칠 수 있었을 누군가들. 

  그러나 그는 죽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하는 가정은 의미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행위는 그의 앞선 다른 책 보다 최후에 남긴 한 권의 소설을 읽는 일. 단지 그뿐이다.


 대학 때 학위를 마치지 못한 결과 변변찮은 신문의 기자와 대필작가 자리를 전전하던 마흔아홉의 콜론나는 시메이라는 남자의 제안으로 「도마니」, '내일'이라는 뜻을 지닌 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일을 시작한다. 창설자는 콤멘다토레라는 재계의 유력자로 상위 계층에 편입하고자 하는 의지와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신문사를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재밌는 건 그들이 준비할 「도마니」 신문에는 내일이 없다고 정해져 있다는 거다. '내일이 없다'는 말을 풀어 설명하면 신문은 창간을 준비하기(준비하는 '척'하기)는 하겠지만 실제로 창간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진실은 콜론나와 시메이, 이 이야기를 읽는'우리끼리니까 하는 얘기'다. 신문 창간 준비에 참여하게 된 여섯 명의 기자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 집단, 단체는 모른다. 


 콜론나는 동시에 시메이에게 이런 제안도 받는다. 자신의 책을 대신 써달라는 거다. 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척' 하면서 시메이의 책을 써줌으로써 이중으로, 단기간에 거액을 벌 수 있다는 제안.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의도와 결과가 '의심스러운 일'을 콜론나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그는 40년 전부터 이미 실패자였으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는 듯이 말이다. 이야기는 1992년 4월 6일에 시작해 두 달 후인 6월 6일에 절정에 이르러 그 얼마 후쯤 끝이 난다. 두 달 남짓, 우리가 2016년에 경험했듯 그 시간이면 세상을 뒤집거나, 세상이 뒤집히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듯 '현실은 허구를 뛰어넘는다'는 말은 진리임이 다시 증명된다.


『제0호』출간 예정 소식을 들었을 때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하나는 "드디어 출간되는구나."라고, 다른 하나는 "왜 이제야 출간되는 거지?"였다. "왜 이제야 출간되는 거지?" 하는 의문의 뒤에는 또 다른 의문이 이어졌는데, "재미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니야?"다. 

 결과를 먼저 얘기해버리자면 '재미가 없어서'는 아니라는 거다. 출판사의 사정이거나 혹은 당시 한국 사회의 혼란 혹은 이 소설 내용과도 겹쳐볼 수 있는 어떤 메시지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어떤 메시지인지는 뒤에서 언급하게 될 수도 있고, 이 소설을 읽고 당시 상황을 떠올려보면서 스스로 알아차리게 될 수도 있다. 


 그리 길지 않은(움베르토 에코의 다른 장편들과 비교하면) 소설 분량에 비하면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이 '많다'고 느꼈다. 심지어 지면을 많이 차지하지 않은 비중 없어 보이는 인물들조차 존재감이 작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건 이 소설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는 현실과 사실과 진실들. 현실과 사실과 진실을 교묘하게 보이지 않는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의 합법적이고 공개된 '암약'. 그러니까, 현실이 허구의 상상을 뛰어넘는 반전과 놀람과 충격이 될 수 있게 하는 기이한 장치.


 비범한 평범이라고 해야 할까, 평범한 비범이라고 해야 할까. 

의외라면 의외인데 이 소설을 읽으며 떠올린 소설이 두 권 있었다. 한 권은 조지 오웰『1984』고 다른 한 권은 올더스 헉슬리의『멋진 신세계』다. 조지 오웰이 만든 세계는 공포와 통제, 제약과 제한이 진실을 쥐고 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무제한의 쾌락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지워버린다. 이 소설들을 떠올린 이유는 결과적으로 두 작품 모두 누군가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사람과 세상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부자유와 부자유의 자유. 

 현대인들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있다. 원칙적으로는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한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데 제약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자유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어 보이는데 『제0호』를 읽으면서 그 이유 중 하나 혹은 여럿이 '이거다' 싶었다. 


 지금부터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 식상할 얘기를 하려고 한다. 누군가 혹은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자유로우며 제 멋대로 행동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할 수 있다'고 믿게 하고 싶어 한다. 어떤 사건이나, 일, 이슈에서 눈을 돌리게 만들기 위해, 뭉쳐야 할 사람들이 편을 나누어 다투거나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며 흩어지게 만들기 위해 약간의 '조정'을 하기도 한다. 그건 이미 잘 알고 있듯 어떤 사람 혹은 언론사가 내놓는 의견이나 기사일 수도 있고, 광고일 수도 있으며,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 속 영상일 수도 있다. 과거의 알력 다툼에 불을 붙일 수 있는 해묵은 논란이나, 지역감정, 별 것 아닌 꼬투리 잡기, 흠집 내기, 국외 어딘가에서 벌어지거나 벌어지고 있던 전쟁이거나 좋은 이미지였던 연예인의 의외의 일탈 혹은 스캔들, 수십 년째 이어지는 주택난, 주가 폭락. 이런 식의 나열은 더 길게, 얼마든지 늘일 수 있을 정도로 많다. 

 결론은 단순한데 말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많은 걸 알고 있다. 알아야 할 진실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얘기다. 또 다른 결론은 그럼에도 속고 있다는 거다. 매일, 매 순간 속고 또 속고 있다는 거다. 준비를 잘하고 있건, 얼마나 많이 알고 있건 상관없이 속고 있다는 거다. 


 "나는 속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얘기하고 싶은 건 이거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하는 건 거짓이 아니라, 너무 많은 진실 혹은 사실이다."


진실은 아무리 충분히 알고 있어도 부족하다. 모든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람, 모든 진실을 간파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없다. 극단적 회의주의자들, 모든 걸 의심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조차 속는다. 내가 속고 당신이 속는 것처럼 그렇게 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할 수 있는 건 없나.

필요한 건 현명한 무뎌짐, 무덤덤함, 냉담이다. 


 물고기 양식장에 가본 적이 있다. 하루 몇 번, 일정한 시간에 사료를 주는 모양인데 수면에 사람 그림자가 어리고, 사료가 물에 닿는 순간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수조 안에 든 물고기 전부가, 아마 힘이 센 녀석일수록 앞에서, 먼저 달려들어서 한 덩어리처럼 된다. 혹여라도 수조 바닥에 떨어지는 사료는 없다. 딱 그 시간에, 적당한 만큼의 사료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더 먹는 녀석은 더 크고, 못 먹는 녀석들은 못 큰다. 그래서 '분리'가 이루어진다. 더 큰 녀석은 더 큰 녀석들끼리, 작은 녀석은 작은 녀석들끼리. 저마다의 수조에서 비슷한 일이 매일, 매 순간 반복된다. 

 결과는?

그 물고기들은 모두 횟집의 접시나 우리 집 식탁에 오른다. 그러나 이건 '양식장의 물고기'의 사정이다. 바다의 물고기의 사정은 조금 다르다.


 바다의 물고기는 스스로 먹이를 찾는다. 먹을 때가 있는가 하면 굶기도 한다. 수온도 때마다 달라진다. 포식자, 적, 위험도 곳곳에 널려 있다. 먹이와 미끼를 구분하는 현명함을 익힌다. 물론, 거대한 그물에 잡혀 캔이 되거나 산채로 혹은 냉동되어 식탁에 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양식장의 물고기와는 엄연히 구분되는 자기의 삶을 산다.


앞서 얘기했듯『제0호』는 「도마니」 신문, 번역하면 내일신문 창간을 준비하는 두 달 남짓되는 시간을 담고 있다. 당연히 언론의 부작용을 떠올리게 하고 경계하게 하며 정보의 과소가 아닌 과다한 정보에 의한 진실의 익사를 일깨운다. '선동한다'는 말은 특정 정치 세력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소식, 기사, 정보는 그 수여자를 자극하고 선동할 수 있는 여지를 품고 있다. 일일이 휘둘리다가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자신이 쓰는 최후의 소설에 어떤 '비밀 메시지'를 담았던 걸까. 

무언가를 '경고'하고 싶었던 걸까?

일깨우려던 걸까?

겁내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우려고 했을까?

세상 어디나 다 비슷하다고 설득하려고?

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는 설명하지 않으며, 국적도 다르고, 게다가 죽었다. 

중요한 건 타인의 과거나 현재, 미래가 아닌 '나의 현실, 현재'를 발견하게 한다는 거다. 지금은 한두 가지, 다음에 다시 읽게 된다면 어쩌면 두세 가지로 늘어날 수도 있는 진실들을 '재발견'하게 했다.


 정확히 말하지만 '재발견'이다. 

너무 많은 걸 보고, 듣고, 알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매번 '정말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음을 깨닫는 재발견까지.


 이 소설은 이탈리아의 현실, 역사적 사실을 참 많이 담고 있다. 실제로 몇 개는 검색 해서 찾아봤는데 모두 '사실'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다짐은 이거다.

"거짓에 속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진실에 속는 일은 되도록 없게 하자."

이래 놓고 또 잊겠지마는, 다시 떠올리게 되겠지.

무기력해지지 않도록, 지치지 않도록, 적당히 무디고 무덤덤하고 냉담하게. 


 『제0호』는 이탈리아의 현실, 역사 속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 '있을지도 모를 인물'이 아니라 '있었을 인물'들이 등장한다. 가정된 상황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거다. 그래서 납득한다. 소설에 앞서 인용하는 한 문장을.


 그 페이지에는 이렇게 써 있다.

"연결하기만 하라!"

그러니까, 이 소설은 어떤 현실, 지면에 인쇄되었거나 누군가 말한 사실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다. 허구를 뛰어넘는 현실. 

잊어버렸다가도 어느 순간에 떠올리게 되는 "현실은 허구를 뛰어넘는다"는 생각을 증명해냈다는 듯이.


덧붙임 : 그나저나 책을 급하게 만드셨나 몇 군데에 명백한 오탈자 혹은 잘못된 표현과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들이 보인다. 1쇄 많이 찍으셨을텐데, 왜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는 건지. 독자들이 다 잊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안이하다,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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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10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든 생각인데, 원제 대로
<누메로 제로>라고 제목을 뽑았으면
어떨까 싶네.

<제0호>라고 하든 <누메로 제로>라고
하든 그 뜻은 설명을 들어야 아니깐.

대장물방울 2018-11-12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네요. 정말 무슨 말이야 하게 되는 건 같으니까욬
 
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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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한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고 한다.
내 마음도 모르는데 남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는가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꾸만 타인의 마음을 아는듯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오래 걸려 읽었다. 
일단 초반에 배경을, 인물을, 시간을, 공간을 세밀하게 설정하는데 조금은 질린 탓이 컸다. 장편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치밀하달까.

중간을 넘기면서 이야기에 속도가 붙었다.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마지막 즈음에는 새벽까지 읽어서 마쳤다.

처음 느낌으로 상당한 혹평을 했다. 다 읽고 난 후에는 생각이 조금 바뀌어서 그래도 괜찮았다 생각했다.

아쉬움은 있다. 지나치게 치밀했다는 느낌 탓일까. 오히려 추리소설의 구성에 닮아 있다는 인상이 남았다.

무수한 복선을 깔아 둔다. 
인물, 사건, 시간, 공간 등 다방면으로 촘촘히.
후반, 소설로는 종반으로 가면서 깔아둔 복선을 회수한다. 지나간 서술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왜 그렇게 적었는지 납득하게 된다. 

여기서 하나의 아쉬움이 생긴다.
소설은 제목부터 <경애의 마음>이다. 하지만 소설의 구성과 결과에서 받은 인상은 마음, 감정보다는 구조, 이성으로 짜맞춘 이야기라는 거였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때로는 의외여도 좋았을 설정들이 너무 질서정연하게, 한치의 틈도 없이 맞아 떨어져 만들어지는 결말.

중반 이후, 그러니까 주인공 상수의 페이스북 페이지가 겪는 곤란에서부터 결말까지 예상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이건 성공인걸까, 실패인걸까.

성실하고도 꼼꼼히, 그러니까 열심히 쓴 소설이구나 하는 느낌은 마음 한 구석에 짠한 여운을 남겼다. 

첫 장편 소설이었으니, 다음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지.

읽던 도중 계속 거슬리던 게 외래어 표기였다. "김금희 작가가 원래 이런 식으로 썼나?"하며 몇 부분을 넘어갔다. 그러다 문득 찾아온 깨달음.

아하! 이 소설, 창비였지?

(너무, 너어~무 창비)

그랬다. 창비였다. 창비만의 독특하지만 거슬리는 외래어 표기가 눈에 밟혔던 거다. 뭐, 출판사 방침이니 그러려니 하고 억지 이해를 했으나, 작가는 납득한 걸까 하는 생각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사람 마음이란 참 어렵다.
이 소설 화자처럼 모든 마음의 갈등, 방향, 변화를 모두 알 수 있다면 조금은 수월하겠다. 그러나 역시 그리 즐겁지는 않으리라.

여지가 없이 화자가 읽어내는 대로 움직이는 인물들의 마음, 이야기의 흐름이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내내 내키지 않았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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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10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책 두 번이나 도서관에서
빌렸다가 결국 읽지 못하고 반납했네
그래... 아무래도 인연이 아닌 듯.

대장물방울 2018-11-12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 번 시도해서 겨우 읽었어요크크 안 샀더라면 언제 읽었을지,,
 
내 무덤에 묻힌 사람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마거릿 밀러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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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제목만 보고는 호러 소설인가 했다.
꿈 얘기, 암시들이 이어지면서 초현실? 혹은 트라우마? 혹은 기억상실인가 싶기도 했다. 결론은 이 모든 게 그렇기도 하면서 그렇지 않기도 했다는 거다.

삼분의 이쯤 읽었을 때 문득, 부제가 없었다면 마지막까지 좀 더 예상 밖의 전개에 당황하고 궁금해하는 즐거움을 누렸을텐데 싶어졌다. 제목은 물론 부제도 참 중요하구나.

서른 살의 여성, 평판도 경제적 능력도 완벽한 남편을 둔 주인공은 어느 날 불길한 꿈을 꾸게 된다. 너무 현실적이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꿈, 자신이 죽어 묻힌 무덤을 찾아가는 꿈 말이다.
 개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예감은 분명 무언가가 있다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거라고 말한다.

가까이 사는 어머니도 남편도, 남편의 친구까지도 꿈은 무시하고 잊어버리라고 한다. 그런 반응들, 당연할 수도 있고 자연스러울 수도 있는 반응들이 여자에게는 무언가 있는 거라고, 반드시 알아내고 말 거라는 결심을 굳히게 한다.

묘지에 적힌 사망 일은 1955년 12월 2일.
4년 전, 그날,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수수께끼풀이가 시작된다.

어떤 소설, 작품들은 인물의 심리뿐 아니라 역사, 사회적 배경을 알고 있을 때 더 명료하게 메시지를 드러낸다. 물론 사건, 소재 자체로도 흥미로울 수 있겠다. 그러나 완전한 남의 이야기보다는 조금은 더 내 얘기에 가까울 때 몰입도, 흥미도 커지는 게 당연한 일.

껍데기 뿐인 행복은 가치가 없는가?
도박이라고 할 수 있는 파괴, 전복의 시도를 응원하고 도와야 하는가? 
절반의 확률로 절망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일이라도?

부모는 '보호'라는 명목으로 아이에게 가하는 많은 제약, 조건, 구속을 정당화 한다. 자신의 삶, 경험, 감정을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러면서 그 결정이 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까지 품는다.
한 마디 말.
"이게 다 너를 위한 거야."라는 말.

사람은 자신의 주장, 예감, 생각에 골몰할 수도 있지만 확신하기보다 간단히 의심하게 되고 설득에 넘어가기도 한다. 신뢰할만한 절대 다수의 말이라면 더욱 유혹적이다.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그 너머에 있다. 그리고 껍데기뿐인, 가짜 행복이라도 지켜내려는 사람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노력을 부정하고 비웃어도 되는 걸까.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저마다 유독 얽매이게 되고 집착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든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아니라도 때때로 마음을 뒤 흔드는 그 무엇이 말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마음이 무거울 때보다는 아무 생각이 없거나 킬링 타임을 위해 읽을 책이 필요할 때 읽어볼만한 책으로 분류하기로 한다.
별점은 다섯 개 만점에 세 개 반.


배경 1955년 12월 2일로부터 4년 정도 후, 미국

2018. 10. 29~ 201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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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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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숨기랴!
읽는 내내 불쾌함을 떨치지 못했고 읽고 나서도 고개를 젓게 만든 소설이다.

필립 로스를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마음에 맞는 작품과 아닌 작품에 격차가 너무 크지 싶다. 

소재가 결정적이다. 70세 노교수의 고백 형식인데 그 고백이라는 게 강의에서 만난 여대생을 유혹해 섹스를 즐겼던 과거다. 수십 년 간, 몇 명인지도 모를 제자와 관계를 가져온 뒤틀린 성욕으로 똘똘 뭉친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추하게 늙은 남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죽어가는 짐승>이라니. 나이 들어 쇠약해지는 남자의 비참함에 동정이라도 보내달라는 걸까.

강간은 아니었다고 변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루밍 성범죄'라는 정의조차 없었겠지. 1960년이나 70년, 많이 양보해서 80년 대라고 해도 얼마나 달랐겠는가.


스무 살을 넘긴 성년의 여성, 합의된 성관계라는 설정도 전부 사회적 비난을 의식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였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런 게 있기는 하겠다. 몰랐다, 무지했다는 항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추악한 욕망을 품고 의도적으로 접근해, 가장 성공률 높은 수단을 활용해서 사냥감을 손에 넣는 비열함. 그 악랄함은 조금도 줄일 수 없다.

노교수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한다. 권위와 연륜, 경험과 경력. 젊은 여자가 '어쩌면' 동경할 수 있는 요소들을 그는 갖췄고 능숙하게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나이차가 40에 가깝기에 상대는 방심하기 마련이고, 주인공을 통해 '노인과의 섹스는 어떨지 궁금해 하는 젊은 여자도 있다'고 말할 정도인데 어련할까.

필립 로스 자신의 경험이건, 상상이건, 환상이건, 욕망이건, 이런 이야기는 혼자 두고 읽었으면 좋았을뻔 했다.

 지금보다 뭘 몰랐던, 좀 더 혈기 왕성하고 호기심에 넘쳤던 때에 읽었다면 전혀 다른 평가를 내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한다. 숨겨두고 몰래 읽으면서 환상을 키우고, 욕망을 삭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게 됐다. 이 책을 읽은 건 지금의 나이고 쥐어짜서 만들 수 있는 한두 가지 이유를 제외하면 이 책이 굳이 한글로 번역되어 종이를 낭비하면서 인쇄될 필요가 있었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이유를 적을 수는 있겠다.
 첫째로 이토록 적나라하고도 노골적으로 성묘사, 성욕에 구애 받는 남자를 그리기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집착을 느끼지 못했던 남자가 쇠약해지면서(성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죽어가면서) 보이는 집착과 질투, 그가 뿌려대는 파멸의 씨앗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읽는 것만으로 역겨울만큼.
둘째로 그 생생함이, 역겨움이 커질수록 빛의 밝기에 따라 짙어지는 음영처럼 삶과 죽음의 교차가 자아내는 비극성이 극대화 되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필립 로스가 욕망을 쏟아 부을 생각으로 순수하게 자극만을 위해 쓴 작품이 아니었다면 혹은 그게 필요했던 거라면 예술로서, 어디까지나 인간 세계를 초월한 예술의 경지에서 존재해도 될 작품이라는 점.

2018년, 결국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필립 로스. 그와 그의 작품 전체에 편견을 갖게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다른 작품들, 널리 읽히면서 인정 받는 작품들이 있고, 나 스스로 감동을 느꼈던 경험이 있기에.

욕망은 건강함, 생기, 활력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집요해지고, 더러워질 때 몹시 추해서 역겨워지는 것임을 깨닫는다.

호기심이 동한다면 읽어봐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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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흑인과 훈장 창비세계문학 33
페르디낭 오요노 지음, 심재중 옮김 / 창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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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후 문학. 
좀 더 자세히는 아프리카, 식민지 문학에 관심이 생겨서 몇 권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있다.
 알제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어의 실종>에 이어 두 번째니 뭐 본격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새롭게 알게된 사실 하나는 카메룬 공식 언어가 프랑스 어라는 거다. 두 번째 언어는 영어. 토속어에 해당하는 270여 개의 언어가 있다는데, 젊은 층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거나 그들끼리의 소통에만 쓰고 있겠지.

언어를 잃어버린 셈이다.
본래의 문화, 얼마나 남아 있을까.

이렇게 추측하는 데에는 작품에 담긴 내용이 근거가 되었다. 제목 그대로 늙은 흑인 이야기다. 처음에 '훈장'을 완전히 잘못 이해해서 서당의 훈장인가 하고 생각하는 엉뚱한 짓을 해버렸다.
아프리카에도 훈장이 있나? 했으니.

결과적으로 이 훈장은 가슴에 다는, 공훈을 기념하는 뜻으로 수여하는 메달로 밝혀졌다.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메카라는 늙은 아프리카 인이 있다. 그의 집안은 아프리카 영주였으며, 넓은 토지도 갖고 있었다. 백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함께 들어온 종교로 개종한 이 아프리카 인은 지금은 자신의 토지를 몽땅 교회에 기증한 후다(그 과정에서 강압성이 있었는지, 속임수는 없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그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백인들의 전쟁에 나갔다가 모두 전사했다. 그러니까 이 흑인은 땅도, 자식도 모두 백인에게 빼앗기거나 내준 상태다.

부족 사이에서는 아직 어른으로서 존경받는 이 흑인에게 큰 일이 생긴다. 바로, 백인의 우두머리가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그들이 사는 마을, 둠까지 찾아 온다는 거다.

부족, 친척, 인근의 부족들은 모두 기뻐하며 축하를 보낸다. 이제 비로소 백인과 친구가 될 사람이 자신들 안에 생겨나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때까지 백인은 흑인과 마주 하거나, 같은 자리에 앉거나, 대화 하거나, 함께 밥을 먹는 일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게 했으나 이 훈장을 받기만 하면 그런 '금기'들로부터 자유로워질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늙은 흑인은 완벽한 토착 아프리카 인이다. 백인들이 입는 갖춰진 옷이 아니라 걸핏 하면 엉덩이나 성기가 보이기 십상인 옷을 입고 다닌다. 신발은 물론 신지 않고 다닌다. 그랬던 흑인이지만 훈장을 받는 자리에서는 옷을 차려 입기로 한다. 가죽 구두도 신기 위해 애쓴다. 그에게는 옷도, 구두도 고통이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커다란.

훈장 하나를 받는 것 뿐인데 뭐 하나 간단하지가 않다. 땡볕 아래서 몇 시간이고 기다리게 하는가 하면, 훈장을 받았음에도 같은 잘에서 밥을 먹게 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어떤 일들이 그와 그들에게 벌어진다.

식민지를 유지할 때 제국주의 국가들은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강경책과 유화책이 그거다. 총과 군대, 감옥은 그들을 가혹하게 다룬다. 훈장을 수여하고, 학교와 교회, 병원을 세우며, 통역, 시동, 낮은 계급의 행정직원, 파수꾼, 경찰 등으로 고용하기도 한다. 그들이 그들 스스로를 억압하고 통제하는 동시에 분열과 갈등을 만드는 좋은 수단이 되는 거다.

이 소설에서도 그런 방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식민지를 유지하는 방식들은 어쩌면 그리 닮아 있는지, 지역과 인종을 막론하고 공유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기이한 기분이 든다. 좁지도 않은 땅에 직선으로 국경선이 그어져 있으니 말이다. 

한반도의 38선도 그렇게 반듯하지는 않다. 그건 마치 땅따먹기를 할 때 점과 점을 찍고 선을 그은 것 같은 모양이니 이상할 수밖에.
 아프리카 역사를 조금 알고 나면 그 이상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간단히 납득하게 된다. 실제로 땅따먹기였으니 말이다.

기만당한 아프리카 인. 본래의 문화와 삶, 언어와 종교 모두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우리 역시 그와 다르지 않은 운명을 맞이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안도하게 된다.

치기 어린 시절, 세계는 왜 우리의 억울함, 분노를 왜 몰라주는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비극을 그들은 왜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는가를 궁금해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에는, 넓은 세상에는 그와 비슷한 오히려 가혹한 비극이 너무나 많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었다. 과거가 아닌, 현재. 어쩌면 미래였던 거다. 

한 마디로 말하면 이 소설은 잃고, 빼앗긴 자들의 설움이 담긴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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