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톨스토이의 마지막 3부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상원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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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에 비해 많이 읽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읽은 책이라는 게 정말 간절한 순간에는 별 도움이 안 되곤 하니까요. 특히 감정 문제로 들어가면 속수무책일 때가 많습니다. 그나마 그만큼이라도 읽었으니 이 정도에서 끝나는 건지, 읽지 않느니만 못한 건지, 아직 덜 읽어서 그런 건지 판단할 기준도 없지요. 

 결국 언제나 '더 읽어야겠구나'하는 데서 결론짓고는 합니다. 

'타협'이라고 할까요.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어머니와 아버지를 여의고, 길러주시던 고모님마저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톨스토이는 죽음에 천착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작품을 읽다 보면 특히 죽음에 골몰하던 시기의 윤곽을 짐작해볼 수도 있죠. 마흔이 넘었을 때는 죽음에 대한 염려가 극에 달했다고 합니다. 당시 러시아 남성 평균 수명이 마흔 정도였다는 점도 영향을 주었겠죠. 당시 톨스토이는 몰랐겠지만 그는 그 두 배가 넘는 시간, 80년이 넘는 시간을 살았습니다. 걱정, 염려가 얼마나 쓸모없는지 보여주는 일이겠죠.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는 톨스토이가 죽기 몇 해 전에 완성한 선집입니다. 평생을 보내며 얻은 깨달음을 자기 뒤에 세상을 살아갈 이들에게 남기고자 한 결과물이지요. 80이 넘은 톨스토이는 이제는 아무리 긍정해도 죽음이 삶보다 가깝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 자주 등장합니다. 신기한 건, 젊은 날에는 그토록 두려워하던 죽음을 이제는 두려움 없이 마주하고 있다는 겁니다. 죽음의 존재가 확실해질수록 두려움은 옅어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사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를 읽으며 제법 많은 곳에 태그를 붙여 두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문장과 기억하고 싶은 깨달음들이 적지 않았죠. 하지만 여기에는 딱 세 부분만 발췌하고 짤막하게 이야기를 마칠까 합니다. 

 책들도 그렇지만 여기에 담긴 문장들은 인생의 때가 이르지 않으면 마음에 와 닿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성격의 문장들이거든요. 가끔 다시 꺼내 읽어보며, 그때그때 마음을 돌아보는 데 쓰면 좋은 그런 책인 거죠.


 제가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발견한 세 가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첫째는 '죽음'입니다.

가장 자주 언급한 걸로 기억할 만큼 여러 번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절망이나 종말, 끝이라기보다 그 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는 촉매와 같은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는 거죠. 죽음이 있기에, 삶이 가치 있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죽음과 관련해 소개할 문장은 이거예요.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우리를 가장 자유롭게 하는 것은 죽음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톨스토이 작품 중에 죽음을 거부하며 끝없이 괴로워하는 인물을 그린 작품이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죠. 원망하고, 저주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다가 쓸쓸히 죽어간 이반 일리치,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마지막 시간들이 조금 더 행복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물론,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간단하지는 않을 거란 걸 상상할 수는 있습니다. 


 생각은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부자유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자기 생각에 얽매여 있으면, 다른 사람의 말도, 표정도,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못을 범하게 되죠. 간단히 말하면 멋대로 굴게 된다는 겁니다. 나부터 자주 그렇게 하고 있기에 그 폐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고치기도 간단하지 않아서 아주 번거롭습니다.

 죽음은 무엇에도 얽어매지 않습니다. 얽매이게 하지도 않습니다. 죽음의 다음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게 옳습니다. 설혹 천국이 있다고 해도 이승의 존재에게 죽음 이후의 천국은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야 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톨스토이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

  

 두 번째는 '삶'입니다.

죽음과 함께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그 삶 말입니다.

삶을 더 좋은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삶이 더 나아지도록 하기 위해,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요.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걸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삶을 붙들고 나아가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온 세상을 다 돌아다녔어도 못 찾은 파랑새가 집에 돌아와 보니 거기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요. 

 삶은 불완전합니다. 

위기와 위험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이라도 우리에게는 유일하며, 소중하기만 합니다. 더 나아지지 않아도 삶을 누리고 즐길 수 있습니다. 더 좋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느라 지금의 좋은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톨스토이는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솔직히 이렇게 적고는 있지만 여전히 더 나은 삶이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삶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이 좋아 보여서 모방한다고 해도 좋은 삶이 될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냇가에 비친 자기 그림자를 보고, 그 그림자 속 개가 물고 있는 고기가 탐나 짖다가 원래 물고 있던 고기마저 놓쳐버리는 아둔한 개와 같은 실수를 그만둡시다. 너무 욕심내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아도, 조바심 내고, 안달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충분히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세 번째도 첫 번째나 두 번째만큼이나 뻔하고 식상한 겁니다. 

특별한 걸 기대하셨다면 안타깝지만 다른 데서 찾아보셔야겠네요.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속 마지막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행복은 
인간을 이기주의자로 만든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이 문장은 크게 두 가지 의미로 나눠볼 수 있겠죠.

하나는 행복하기 위해 인간은 이기주의자가 되기도 한다입니다.

다른 하나는 행복이라는 건 이기적인 감정이다라는 말로도 들립니다.

두 가지가 어떻게 다른지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행복을 위해 이기주의자가 된다는 건 자기 행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기도 한다는 의미입니다. 미안하니까 하지 않는 게 아니라, 미안하지만 내 행복을 위해 네가 희생해줘야겠어라는 식으로 행동하는 걸 의미하죠. 

 아무리 자기 행복이 제일이라고 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습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해지면 정말 행복할까요.


 행복이라는 건 이기적인 감정이다라는 말을 저는 이렇게 해석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라고요. 

앞서 삶이 이미 충분히 좋은 것이라고 말했듯, 행복 역시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걸 바라지 않아도 말이죠. 하지만 혼자서는 행복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라고 적었던 거죠.

 세상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수만큼 많은 기준이 존재합니다. 행복의 잣대도 저마다 다릅니다. 그래서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행복을 훼방하는 무례하고, 파괴적인 이기주의가 아니라, 자기를 점점 더 믿게 되는 과정을 통해 자신만의 행복을 단단히 다지는 그런 건설적인 이기주의 말입니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에서  죽음과 삶과 행복을 이야기하면 다 이야기한 셈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하나를 빼먹었네요. 정말 중요한 건데, 왜 빼먹었는지.

 톨스토이가 삶과 죽음과 행복을 통해 목적으로 삼는 게 하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추구해야 할 단 하나의 가치,

이게 힌트라고 하면 알아차리셨을까요.


 대답은 사랑!입니다.

톨스토이의 말을 들어보죠.


사랑! 
그것은 신의 본질의 발현이다. 
사랑에는 시간이 없다. 
사랑은 오직 현재, 바로 지금, 
시시각각으로 나타나고 
있을 따름이다.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中


사랑은 완전한 존재인 '신의 본질'이 발현된 것이라 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삶과 죽음 사이의 모든 순간, 모든 현재에 존재합니다.

시시각각 그 모습을 바꿔가며 언제나, 항상 말이죠.

신에 대한 사랑, 가족에 대한 사랑,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사랑.

사랑은 신의 본질이자, 삶의 목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닐까요.


 톨스토이는 그 거대함에도, 낮은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작품 속에서도 민중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죠. 아마도 그 모든 노력이 톨스토이가 사랑을 실현한 방식일 겁니다. 물론 가족과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야 말할 것 없겠죠.


종종 책이 인생의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한 없이 무력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만큼 나아진 건 역시 그나마의 책이라도 읽었기 때문이구나 하게 되죠. 그래서 결국 이 이야기를 시작하며 적었듯이 '더 읽어야겠구나'하게 됩니다.


 바보는 낫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을 때까지 말이죠. 

하지만 인간은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이라고도 하고, 바보 온달의 이야기도 있으니 언젠가는 조금이라도 나아질 거라 믿어봅니다. 

 삶을 살며, 죽음을 기억하고, 행복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시길 바랍니다.


- 표지 사진은 물망초로 꽃말은 '나를 잊지 말아요'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강건너의 꽃을 따다 주려고 헤엄쳐가던 남자가 물살에 휩쓸려 죽어가며 "나를 잊지 말아줘!(Forget_me_not)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고 하는군요. 그 남자, 지금은 행복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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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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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와 무관하게 좀처럼 읽기 힘든 책이 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페이지를 넘기는 게 쉽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한 단계 더 들어가면 한 페이지에도 생각하고 정리해볼 내용이 많아 차마 지나치지 못하게 하는 책이 있습니다.

 제목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면서 게으르게 읽을 수 없게 만드는 책, 이 책은 그런 책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이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사람이었죠. 그렇게 이것저것 하신 분이라면 도무지 게으를 수 없었을 텐데 자꾸만 스스로가 게으르다고 하십니다. 이것 참.

 게으르지 않아 보이는데 게으르다고 억지를 쓰듯 보이는 착각은 '게으름'에 대한 정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은 '나태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자의 '무위'에 가깝죠.

 올바른 비유인지 모르겠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된다'정도의 의미일 거라고 하면 와 닿을까요?


 버트런드 러셀이 찬양한 게으름은 '창조'를 내포합니다. 

'여유'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겠군요.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는 동명의 에세이에서부터 국가와 경제, 사회와 역사, 청소년과 여성을 아우르는 다양한 주제를 다룬 에세이가 담겨있습니다. 내용으로 미루어 1차 대전 이후부터 2차 대전 전까지 쓴 에세이들인 듯하더군요. 쓴 날짜나, 글이 실린 지면에 대한 안내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뭐, 지금도 좋지만요.


 앞서도 말했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스스로를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창조'라고 하는 건 그냥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게 아닙니다. 고민하고, 사고하는 과정, 그러니까 '사유'하는 과정을 거쳐서 형상화되는 거죠.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는 다양한 사유가 담겨있습니다. 단지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대안과 방안까지를 제시하는 모습은 지식인의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 실현 불가능한 정책, 특정 집단을 위한 편협한 대안이 난무하는 현대 정치와 경제계에 꼭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한데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게을렀기에 지금 당장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실용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당장은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일을 고민할 수 있었던 겁니다. 한 가지 사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같은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서문에서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선 직접적인 실용성만으로 판단할 게 아니라 폭넓게 생각하는 사고 습관을 함양시키느냐, 아니냐로 판단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부면 실용성은 많은 경우 오늘날 '무용하다'라고 낙인찍힌 것들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서문 中

 목차를 살짝 공개하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시작으로,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건축, 청년들의 냉소주의, 획일성, 인간대 곤충, 교육, 이성, 공산주의, 파시즘, 사회주의, 금욕주의, 문명, 혜성, 영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방대합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버트런드 러셀의 생각이 현대에도 대단히 유용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진정한 사유'란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던 거죠.  


 게으름 덕분인지 모르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오래 살면서, 지적 욕구를 채우는 동시에 많은 글을 썼습니다. 덕분에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모두 경험했으며, 동서 냉전까지 지켜볼 수 있었죠. 이런 경험이 만년의 그를 '정치적'인 인물이 되게 했다고도 하는데, 이미 중년의 버트런드 러셀은 충분히 정치적이었습니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 쓰고 있듯 넘치도록 말입니다. 

  

 버트런드 러셀은 '사유'를 말하는 사람이기에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려 노력했을 테고, 마지막까지 어느 쪽이라고 단정하지 않으려고 했을 겁니다. 이런 정치적인 성향이라면, 지나치게 '정치적'이라고 해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는 버트런드 러셀이 지향하는 세계의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지금 당장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것만 가르치고 배우는 근시안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사상이나 체제에 얽매여 발전의 기회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거듭하는 이유도 더 나은 세계를 꿈꾸기 때문입니다. 


 소위 '유용한 지식'의 무용함은 100년도 전에 태어난 사람인 버트런드 러셀의 깨달음과 인식보다 더 발전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의 인식이 더 뒤처져 있다는 점만 봐도 증명됩니다. 

 효율성은 지속성까지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효율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외면당하는 가치 가운데에는 인간의 행복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결정적인 내용도 들어있습니다. 


 효율성에 밀려 잃어가는 가치 중 하나를 꼽으라고 하면 '선함'을 꼽을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양심'과 '직업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순간에 '이익'이 이러한 가치를 압도하는 걸 보게 됩니다. 

 쓰레기 만두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까지. 

 우리는 잃어버린 줄도 모르면서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알아차린다고 해도 현재의 가치, 지금 당장의 이익을 위해, 버려지고 외면당합니다. 이것이 부지런의 대가, 효율성의 열매라면 우리는 반드시 게을러져야 하는 게 아닐까요.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제일 많이,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입니다. 수십 억이 들어가는 복지에는 인색하면서 수백 억이 드는 대통령 부친 관련 사업에는 예산을 쏟아붓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재벌은 점점 더 부자가 되고, 노동자는 점점 더 가난해지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이런 현실이 비정상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대책을 고민하고, 사유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자신은 반대쪽 99%에 있으면서 반대쪽 1%에 들어가기 위해 효율적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일하는 나라. 

버트런드 러셀이 봤다면 가장 안타까워했을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그래서라도 우리는 이제 조금 더 게을러져야 합니다.

더 나은 오늘을 살기 위해 사유하고 고민해야 합니다. 

눈 앞의 효율을 위해 아이를 다그치며 가르치는 게 아니라, 스스로 고민하고 사유하는 힘을 길러줘야만 합니다. 자기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양심과 도덕을 외면하며 괴로워할 게 아니라, 선함의 가치를 되찾아야 합니다.


 세상은 자꾸만 부지런해지라고 말합니다. 쓸데없는 걸 그만두고, 쓸모 있는 걸 열심히 하라고 합니다. 그래야 '내일',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야 하는 건, 살아가는 건 지금, 바로 '현재'뿐입니다. 


 게으름의 다른 이름은 '사색'입니다. 

사색의 시간이 잃어버린 나, 우리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되어줄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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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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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때입니다. 

아마도 호승심에서였을 텐데, 두껍고 빽빽한 글자가 가득한 <백경>이라는 책을 덜컥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두꺼운 책이 <백경> 하나는 아니었을 텐데 굳이 골랐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만 읽기 힘들지만 재밌었다는 기억만 남아있습니다.

 <백경>은 에이해브라는 포경선의 선장이 모비 딕이라는 향유고래를 잡으려다 한쪽 다리를 잃고 복수심으로 선원을 모아 출항했다가 죽음에 이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백경>의 원제목은 <모비딕>입니다. 이제부터 감상을 적을 책과 같은 이야기죠.


 <상실의 시대>와 <노르웨이의 숲>이 같은 책이듯, <백경>과 <모비 딕>은 같은 이야기입니다. 

오랜만에 읽은 탓이었을까요, <모비 딕>을 읽는 건 망망대해 어딘가를 헤엄치고 있을 모비 딕을 쫓던 피쿼드호의 선원들이 느꼈을 막연하고도 막막한 느낌을 안겨주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모비 딕을 발견한 이후에는 그 막연하고 막막한 느낌이 사라졌으니, 역시 닮은 기분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앞서 <백경>을 이야기하며 적었듯 <모비 딕>은 복수심에 불타는 포경선 선장 에이해브가 다시 선원들을 모아 바다로 떠나, 모비 딕과 사투를 벌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고래'라는 생물은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생물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신의 사자 혹은 괴물로 여겨져 왔습니다. 허먼 멜빌은 화자인 이슈마엘을 통해 고래에 관한 역사를 한 차례 훑어보인 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고래가 어떤 존재이며, 생태는 어떠하고, 인간과 고래가 어떻게 관계를 맺어왔는지를요.

 이 이야기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을 증명하고 시작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이해브 선장의 포경선 이름은 '피쿼드 호'입니다. 이 배의 선원을 모집한다는 이야기에 이슈마엘은 특별히 '어떤 일을 하겠다'는 목적도 없이 새롭게 사귀게 된 식인종 친구 퀴케그와 함께 찾아갑니다. 그런데 선원에 지원하러 가는 그들에게 한 남자는 '저 배는 저주를 받았다'며 그만두는 게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꺼림칙하기는 해도 두 사람 중에 저주가 두려워 배에 오르는 걸 그만둘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침내 피쿼드 호는 선원 모집을 끝내고 출항을 준비합니다. 적당한 바람을 받으며, 항구를 떠난 배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배 안의 기름통을 가득 채워 돌아올 꿈에 부풉니다. 

 먼 바다에 나왔을 때 선장인 에이해브는 자신의 목적이 모비 딕에게 복수하는 것임을 선원들에게 밝힙니다. 일부 선원들은 반대하지만 결국에는 광기 어린 에이해브의 집념에 휩쓸려 모비 딕을 쫓기 시작합니다. 모비 딕만을 잡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면 선원들을 통제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에이해브 선장은 다른 고래들을 보이는 족족 잡아나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생사를 건 모비 딕과의 사투가 시작됩니다. 

 괴물, 귀신고래, 모비 딕에 붙여진 악명들은 현실이 되어 피쿼드 호와 선원들을 덮칩니다. 최후의 전투에서 결국 피쿼드 호는 에이해브 선장과 함께 바닷속으로 침몰하게 됩니다.


 감상을 쓰면서 결말까지 적나라하게 밝히는 일은 많지 않습니다. 드물게 밝히는 경우는 결말을 알고 모르고 와 무관하거나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을 때 정도입니다. 

 <모비 딕>은 둘 다에 해당되는데, 세계 문학에서도 소문난 '비극' 안에 <모비 딕>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에이해브 선장과 피쿼드 호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밖에 없습니다. 


 무모하지만 도전할만한 일과 터무니없는 도전은 엄연히 다릅니다. 냉정하게 맞서도 이길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맹목적인 흥분 상태, 광란에 가까운 정신으로 도전한다는 건 자살행위일 뿐입니다. 

 모비 딕에게 팔이나 다리를 잃은 이는 에이해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 항해에 나선 작은 아들과 그 아들을 찾아 배를 내린 큰 아들까지를 잃은 선장도 있었고, 몸 일부를 잃은 사람 역시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복수보다는 생존을 선택합니다. 모비 딕의 터무니없는 강함과 교묘함, 영악함까지를 받아들이고, 바다의 신처럼 여겨 피해 다니기도 합니다. 에이해브는 그런 그들을 비웃지만 정말 에이해브 선장이 그들을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그리 흔히 쓰는 말이 아님에도 '저주'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저는 "나는 너를 저주한다."는 말을 써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없을 거고요. 그런데도 '저주'라는 말이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기이한 일이지만, 저주가 사람을 사로잡는 게 아니라, 사람이 저주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요.


 에이해브 선장은 평화롭게 자기 삶을 살고 있던 모비 딕을 죽이려다가 다리를 잃습니다. 모비 딕은 정당방위로 스스로를 방어합니다. 그러다 다리를 잃자 에이해브는 저주를 퍼부우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겠죠. 결국 죽을 때와 자리를 찾아가듯 모비 딕과 다시 만난 바다에서 자신이 내렸던 저주는 이루어집니다. 둘 중 하나의 '죽음'으로요. 

 솔직히 아직도 에이해브 선장과 모비 딕의 대결에서 무엇을 배우고 느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광기와 복수심으로 상대와 맞서는 건 자살행위일 뿐이다라는 게 그나마 얻은 교훈일 뿐이죠.


 지금도 포경선은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닙니다. 압도적인 화력과 발달한 기술력으로 모비 딕과 에이해브 선장이 벌였던 치열한 대결은 이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고래는 발견되고, 학살당할 뿐이죠. 끔찍하게도 인간적인 일입니다. 인간의 경제 사정이야 어떻든 고래가 죽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만은 에이해브 선장의 시대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죠. 상관없는 얘기를 해버렸네요. 


 <모비 딕>이라는 작품이 단순이 에이해브 선장의 복수심만 이야기했다면 지금까지 읽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슈마엘과 식인종 퀴퀘그의 우정이나 선원들 간의 갈등, 동료 혹은 가족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 말이 통하지 않는 고래와의 소리 없는 대화. '죽음'이라는 소재를 빼놓는다면 <모비 딕>은 낭만적이고, 조금 과장해서 목가적인 풍경까지 보여줍니다. 지구 상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인 고래의 이동과 죽음은 장엄하고도 엄숙해서 경건함마저 느끼게 하죠.


 거대함.

<모비 딕>은 바다의 거대함이나 고래의 거대함 뿐 아니라 인간을 둘러싼 운명의 거대한 흐름도 함께 보여줍니다. 곳곳에 심어진 복선이 때가 되면 마치 시한폭탄이 터지듯 차례차례 존재를 드러내는 거죠. 그 완성이 침몰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선을 에이해브에서 모비 딕으로 옮기면, 모비 딕은 인간의 무수한 도전에도 꺾이지 않는 거대한 자연의 의지를 상징하는지도 모릅니다. 결코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맞서 도전자의 의지는 물론 생명까지 꺾어버리는 단호함, 모비 딕은 그 강함에 어울리는 카리스마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모비 딕에게 '저주'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주란 어딘가 치졸하고, 옹졸하며, 비겁한 데다 부자유스러우니까요. 


 모비 딕과의 대결을 읽다 보니 어느새 모비 딕을 응원하게 되더군요. 도전하는 인간을 응원해도 좋았을 텐데,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에이해브 선장이 다리를 잃지 않았다면, 운이 조금 더 좋았더라면, 피쿼드 호가 조금 더 빨랐거나 튼튼했다면 모비 딕이 패배하고 에이해브 선장이 승리했을까요. 아무리 그랬다고 해도 모비 딕의 패배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바다의 신'인걸요.


 잠깐 이야기했지만 현대의 포경 기술은 지구 상에서 가장 큰 생물인 고래를 압도합니다. 날카로운 작살은 강력한 발사기를 떠나 고래의 심장을 한 번에 꿰뚫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의 죽음이 인간의 승리를 의미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무모하지만 낭만적인 바다 위의 대결은 <모비 딕>에서 끝이 났고, 인간의 영원한 패배로 바다에 새겨져 있으니까요.


 이상한 얘기지만 에이해브 선장과 피쿼드 호 선원들의 광기 너머에는 낭만이 있습니다. 필사적으로 맞서지 않는다면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와의 대결, 십중팔구는 패배할 대결에 나서는 무모한 용기가 있습니다. 

 현대는 감수할 위험도, 필요한 용기도 잃어버린 이 시대입니다. 무모한 도전자들의 광기, 그 너머로 그리움이 보이는 듯 느껴지는 건 바다의 신기루를 오래 마주한 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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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
청민 지음 / 첫눈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민들레 홀씨는 어느 방향에서 바람이 불어오든 노여움도 슬퍼함도 없이 날아오릅니다. 

북풍이 분다고 시리다 말하지 않고, 남풍이 분다고 덥다 불평하지 않으며, 서풍이 분다고 서러워하는 일도 없습니다. 태풍 조차 민들레 홀씨를 두렵게 하지 못하죠. 

  까닭은 간단하고 명료합니다. 모든 민들레 홀씨는 날아 올라야 하고, 모든 바람은 날게 할 뿐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감상은 적지 않고 민들레 홀씨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의 작가와 책 속 이야기들이 민들레 홀씨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죠. 왜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니 이유도 적어 두기로 합니다.

 작가 청민은 민들레 홀씨를 닮았습니다. 가볍고, 여리지만 충분히 고집스러우며, 잔 바람에도 흩어지는 민들레 홀씨처럼 민감하고 섬세하죠. 하지만 마음껏 날아오를 용기를 내기도 하는데, 그건 민들레 홀씨가 날아오를 하늘만큼이나 내려앉을 수 있는 넓은 대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친 새가 날개를 쉬어갈 둥지의 존재를 아는 것처럼 말이죠.

 고작 한 권의 책을 읽었을 뿐이라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제가 읽은 작가 청민은 '혼자가 아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봅시다. 민들레 홀씨는 날아오르기 전까지 무수한 '가족'과 함께 합니다. 하지만 날아오르는 순간부터는 오롯이 혼자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이죠. 그러나 마침내 땅에 내려 싹을 틔울 때가 되면 다시 혼자가 아니게 됩니다.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는 겁니다. 

 괜스레 앞에 말이 길어지고 말았는데,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를 읽는 동안 이제는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여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아직은 모두와 함께였던 시간의 그 넉넉하고도 여유로운 마음이 그리워졌던 거죠. 

 '어린 시절'을 잘못 적은 게 아닙니다. '여린 시절'이라 적은 게 맞습니다. 

 제게도 당연히 여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묘한 일이죠. 스물몇 살, 한참이나 어린아이의 글을 읽으며 오래된 시간을 그리워하게 되는 일이 생기다니 말입니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라는 제목과 핑크빛 표지를 보고 처음에는 애틋하거나 뜨거운 사랑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열어보니 애틋하고 뜨거운 사랑 이야기이기는 한데, 그 대상에 대한 예상은 한참이나 빗나가 있더군요. 가족과 친구와 지난 추억을 향한 애틋한 마음으로 가득한 이야기들이 책의 주연이었습니다. 


 오래전 '여린 마음'을 잃어버린 후로는 무덤덤하게 넘겼던 감정의 조각들조차 청민은 닦고, 모아,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로 묶어내고 있었습니다.  

 저는 두 마음 사이를 오갔는데, 하나는 낯간지럽다고 느끼는 마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사람과 사랑을 신뢰하고 기대하는 모습에 대한 부러움이었습니다. 

 그 연약하고도 섬세한 마음이 오래오래 지켜지기를, 마지막 잎새라도 지켜보듯한 마음으로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었죠. 

 저는 이런 마음들을 '고운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여린 마음'과 비슷한 의미인데, '고운 마음'은 '여린 마음'이 단단해지고, 상처가 시간이 지나며 흉터가 된 후에도 망가지지 않고 온전한 상태를 이를 때 씁니다. 

 한참 겨울이 깊어지는 이 날에, 이 밤에, 시간이 지나도 고운 마음이 온전하기를 빌게 되는 그런 따뜻한 온기가 담긴 이야기와 만나다니 이것도 나름의 인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어온다>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온기'라고 해야겠습니다. 수식어가 허락된다면 '고운 온기'라고 하고요. 

 잃어버리고 나서야 존재를 알게 되고,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일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여린 마음'도 한 때는 치기라고, 순진함이라고 얼른 내려놓고 싶었던 부끄러움이었습니다. 그랬건만 이제는 그리워하고 있으니 웃을 수도 없습니다.


 옛날 옛날의 말, 고리타분한 말일 수도 있겠지만 한 마디만 더 적기로 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고, 많은 것에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을 충분히 느끼세요. 모든 순간이 우리의 삶이며, 모든 순간이 삶의 의미일 테니까요.


 어울리지 않게, 감상적인 걸 써버리고 말았습니다만, 이 역시 이 책이 남긴 흔적이 되겠지요. 또 이것은 이것대로 좋지 아니한가 합니다. 잠시나마 잃어버린 여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을 느낄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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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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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야기는 어린아이를 위해 씁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만 읽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어른을 위해 씁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도 읽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어린아이를 위해 씁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더 많이 읽습니다.

어떤 이야기는 어른을 위해 씁니다. 그리고 어른들만 읽습니다.

 

 세상의 이야기들을 이런 식으로 나눠보면 그 종류는 열 가지도 넘을 겁니다. 그러다가 이런 결론에 닿게 되겠죠.

 "어른만을 위한 이야기나 아이들만을 위한 이야기는 '그다지 많지 않다'."

네, 일단은 신중을 기하기 위해 '아마도'라는 말을 적을 셈이지만, 거의 확실히 그럴 겁니다. 

세상에 나와 있는 이야기들은 결국 '우리', '사람들'과 전혀 무관할 수 없을 테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이야기'를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자기의 경험과 사고의 범위 안에서 전혀 다르게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마르셀 에메의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다섯 편의 단편을 묶은 단편집입니다. 기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아주 보통의, 평범한 이야기도 담겨있어서 '이 책은 이런 책입니다'하고 똑 부러지게 말하기 어려운 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말할 수 있습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로 묶인 다섯 편의 공통점 말입니다.


 다섯 편의 이야기는 모두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사랑하는 이성을 향한 것이든, 아버지를 향한 것이든, 어머니를 향한 것이든, 불특정의 누군가를 향한 것이든 그 마음은 고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마음'에 대한 것을 좀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표제작이자 첫 번째로 실린 작품입니다. 어느 날 자신이 벽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데, '벽을 뚫는 남자'라는 뮤지컬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줄거리는 평범한 공무원인 뒤티유욀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된 후, 능력을 시험하고자 범죄를 저지르기를 거듭하던 중에 진정한 사랑에 빠진다는 식입니다. 

 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뒤티유욀의 능력은 그를 유명하게 하고,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지만 그 결말이 어떨지는 끝까지 읽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겠죠.


 뒤티유욀의 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보면서 사실 제법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정말 그처럼 가로막는 무엇이든 통과할 수 있다면 세상의 아주 많은 제한에서 자유로울 테니까요. 하지만 벽으로 드나드는 뒤티유욀의 능력을 보며 정말 바라게 된 건 벽 너머로 들어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벽이나 강처럼 물리적으로 뚫거나 건너는 게 불가능하기에 상대방이 허락하지 않는 한 영원히 닿을 수 없으니까요. 


 벽으로 드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 이야기를 읽으며 마음에 대한 생각이나 하고 있어서야 모처럼 벽으로 드나들 수 있게 된다고 해도 별 의미는 없을 겁니다. 그깟 콘크리트 벽쯤 통과할 수 있는 능력으로는 사람들을 놀라게 할 수 있을 뿐일 테니 말입니다.

 

 <생존 시간 카드>는 생산적이지 않은 것으로 분류된 사람들의 생존을 제한하는 정책이 시행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잉여인간'에게는 생존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정책이 그 시작인데, 그 실행과 과정을 따라가며 상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리고 결말, 이건 또 아주 인간적이죠.


 <속담>은 전제적인 가장인 자코탱 씨와 아들 뤼시앵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인데, 제목이 <속담>인 이유는 뤼시앵의 국어 숙제가 '잰 놈 뜬 놈만 못하다'는 속담을 주제로 한 작문이기 때문입니다. 결말이 훈훈하기는 한데 정말 이렇게 끝난 게 최선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더군요.


<칠십 리 장화>는 이 책에서 제일 감동적으로 읽은 이야기입니다. 미혼모인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들의 이야기로, '칠십 리 장화'는 한 걸음에 칠십 리를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의 장화입니다. 이런 마법의 장화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겨울에는 한 번 발명해도 좋겠더군요.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으로 실린 이야기는 <천국에 간 집달리>인데, '집달리'는 주인을 대신해 집세를 받아내거나 하는 부동산 관리인을 칭하는 말인 듯하더군요. 직업이 집달리다 보니 매정한 일도 많이 저질렀던 말리코른은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어느 날 죽습니다. 그런데 죽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하늘에서 천국과 지옥의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판사의 실수 덕분에 지옥행을 면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얻어 지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야말로 '여분의 삶'을 부여받은 거죠. 말리코른은 지금까지의 태도를 바꿔 선행과 자선을 베풀고 다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 선행과 자선은 모두 자발적이지도 마음에서 우러난 것도 아니었습니다. 천국에 가기 위한 선행 쌓기의 방편이었던 거죠. 과연 말리코른은 천국에 가게 될까요? 

 길지 않은 이야기들이니 다음 이야기는 직접 읽어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간추려 적다 보니 괜스레 긴 이야기가 되어버렸네요. 조금은 억지스럽지만 이야기를 다시 '마음'으로 돌려보겠습니다. 

 물리적인 공간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들, 벽을 뚫는다거나, 한 걸음에 칠십 리를 달린다거나 하는 건 분명 편리할 수 있습니다. 비생산적인 존재들의 생존을 제한하거나, 억지스럽기는 해도 표면적인 선행을 하는 것에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족과 자식들 앞에서 언제나 권위와 위엄을 잃지 않는 뛰어난 가장이 되는 게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저는 눈에 보이는 것들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적인 인간' 중 한 명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믿으려 애쓰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내가 정말 넘어서고 싶은 건 가로막힌 당신의 마음이며,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열리기를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할 셈이기도 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마르셀 에메가 꿈꾸었을 세상 역시 '사람의 마음' 그 따뜻한 온기가 살아있는 세상이었을 거라고 믿습니다.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소외되고 핍박받는 영혼들, 비참하고 비통한 처지의 이웃들을 찾아가는 기적.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며 퍼져가는 온기가, 깊어가는 겨울의 한기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릴 수 있기를, 이 밤 기도합니다.


 넘어서고 싶은 게 있나요? 

꼭 그곳에 닿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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