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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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 절망하는가?

완벽하다 믿었던, 완전하다 여겼던 완성의 순간을 눈앞에 뒀을 때. 

단 한 줄, 한 단어.

너무나 하찮은 실수.

 순간에 인간은 완전한 절망 속으로 침몰한다.


종종 인간은 유혹받고 이끌린다.

터무니 없는 기대.

완전 범죄의 가능성에.


 완전 범죄에 성공한 경우는 알지 못하지만 '거의 성공한 경우'는 제법  알고 있다.

나보코프의 <절망>이 그러하고,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그러하다.

비록  '성공'이 망상이나 환상  이야기라 해도, 그들은 '완전 범죄'를 '거의' 손에 넣었다.

그들은 실패한다.

너무나 사소한,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로.


 게르만은 독일 출신의 초콜릿 사업가다. 사업이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사실은 파산 직전이다. 어느날 게르만은 공원에서 잠들어 있는 부랑자를 보고 깜짝 놀란다. 부랑자가 마치 자기와 '쌍둥이'이기라도 하듯 '닮았기 때문'이다. 운명처럼 그의 뇌리에 사특한 계획이 수립된다. 실행할지 말지는 운명이 정할 일이다. 운명이 이끈다면 계획은 실행될 테고, 실행된다면 성공은 확실하다. 완벽한 계획, 완전한 범죄다.  <br /> <절망>은 파산 직전에 놓인 게르만이 부랑자 펠릭스를 만나며 시작된다. 계획을 실행할지, 계획은 이루어질지, 두 사람은 정말 '완벽하게 닮은' 것인지. 정신을 똑바로 붙들고 읽어야 한다.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br /> 아차, 앞에서 스포일러를 해버렸군.


 조금 엉뚱한 생각이지만 5장쯤을 읽기 시작했을  문득 <맥베스>가 떠올랐다.

욕망과 유혹에 굴복해 주군을 살해하고, 결국 파멸해  비극의 주인공 맥베스.

국적도 시대도 신분도 다르지만, 게르만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맥베스의 환영은 짙어졌다.


 게르만은 곤경에 처해있다. 

사업은 곤란을 넘어 파산 직전이고, 사랑하는 아내는 자기보다 가난한 예술가 나부랭이에게 끌리는  보인다. 우연히 마주친 부랑자는 자기를 너무나 닮아, 완전히 동일 인물이라고 해도 의심할 수가 없다. 

유혹의 시작이다. 

 맥베스는 충성스러운 기사다.

전쟁에서 승리했고, 왕이 죽고나면, 어쩌면 왕위에 오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적이 나타난다. 지금 해치우지 않으면 왕위의 영광은 영원히 멀어지리라. 

유혹의 시작이다.


 게르만은 고민한다.

 것인가,  것인가.

부랑자를 속여보려고 했지만 간단히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 계획은 실패다. 최악의 인간이다. 게르만은 도망친다. 그러나 운명은 놓아주지 않는다. 기어코 운명은 펠릭스를 게르만의 앞으로 다시 이끈다.

 맥베스는 고뇌한다.

 것인가,  것인가.

미련한 욕망을 떨치고 내려놓으려고도 생각해보지만 마녀들은 유혹한다. 운명은 너의 것이라고. 쐐기를 박은  아내다. '지금이에요, 해치워 버려요!' 맥베스는 물러설 자리가 없다.


게르만은 후회한다.

완벽했다고, 그보다 나은 선택은 없다고 위로한다. 

그러나 실패다, 이보다  처참한 실패는 있을  없다.

  줄,   단어가 게르만을 파멸시킨다.

아니다.

실제로 게르만은 파멸한지 오래다. 부랑자 펠릭스와 마주친 순간, 이미 파멸해 있었다.


 맥베스는 후회한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것인가, 스스로를 저주한다. 

그러나 전쟁이다. 여자가 낳은 사내는 맥베스를 해치지 못한다. 

무적의 맥베스.

 사람,   명의 사내를 몰랐다. 

그는 여자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 

이미 운명은 준비되어 있었다. 

처음부터.


이런 이유로 나는 <절망>을 읽으며 <맥베스>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실제로 등장하는  <죄와 벌>  라스꼴리니코프요, 푸쉬킨의 시인걸.

터무니 없는 오독이다. 

오독의 즐거움의 중독이다.


 열여덟, 러시아 혁명의 참화 속에 러시아를 떠나는 나보코프를 떠올린다. 

스물셋, 극우 테러리스트의 총에 아버지를 잃는 나보코프를 상상한다.

뒤틀리고 비꼬인 천재, 불신과 망상, 어쩌면 복수를 꿈꾸는 청년을 그려본다.

자신만만한 동시에 나약하며, 당당함과 비굴함을 천형처럼 품은 언어 유희의 마법사를 읽어나간다.


 무엇이 남는가?

절망이다. 

읽어도 읽어도 내가 무엇을 읽는지조차 확신하기 어렵다. 

아니다. 솔직히는 터무니 없이  읽었다는  안다. 

   읽어 넘기고는,  분,   분을 생각해보고는 오만하게 질문을 던지다니.

"나는 무엇을 아는가?"라고.


 터무니 없다. 

그러나 읽기는 즐거웠다. 

혼란스럽기까지  언어 유희와 의식의 흐름이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자신과 자신의 힘과 운과 운명의 인도를 믿고, 너무나 거침 없이 파멸로 나아가는 게르만.

 터무니 없는 자신감이, 확신이 우스운만큼 나를 괴롭게 한다.


 단  줄도,   단어의 실수도 있어서는  된다. 

 줄이,  단어가 모든  망쳐놓으리라.

그러나 나는 나에게 관대해져야만 한다. 

나는 천재가 아니다.


천재는,

오직 천재만이,

  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을 특권을 지닌다.


'절망'은 나의 몫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터무니 없는 감상을 거리낌 없이 마칠 수 있다.

끝.


-아아, 나는 얼마나 오만한가. 

-그런들 어떠한가.

-쓴다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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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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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하나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부활을 믿으십니까?"


종교적인 의미에서 던진 질문은 아닙니다. 

육신의 부활이나 천국을 이야기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다른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 조금씩 때 묻어가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질문을 던진 이유는 이제부터 선함의 회복, '부활' 이야기를 시작할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은 레프 톨스토이, 거장의 작품다운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몇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마한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것도 자라지 못하게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트는 풀을 모두 뽑아 없앴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쓰러뜨리고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부활>_첫 문장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공작 가문 상속자로 부족함 없이 자라온 네흘류도프는 배심원으로 입회한 재판에서 어린 시절 함께 자랐고, 한때 사랑했던 마슬로바와 재회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이 재회에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과오로 마슬로바가 이 상황에 놓였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마슬로바와 네흘류도프는 신분이 달랐죠. 순수했던 사랑의 감정은 한순간의 욕정으로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습니다. 거기에 더해 네흘류도프가 집을 떠나 있던 동안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들킨 마슬로바는 쫓겨나고 맙니다. 마슬로바는 아이를 낳지만 오래지 않아 아이는 죽고 맙니다. 이후 가정부와 매춘부 일로 삶을 이어가던 마슬로바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었고, 진범들의 공모로 기소되기에 이르렀던 겁니다. 
 네흘류도프는 이러한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씻기 위해 마슬로바와 결혼하여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시베리아 형무소든 어디든 이제부터는 함께 하며 평생 속죄하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 겁니다. 네흘류도프가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습니다. 매력적인 여성을 굴복시키는 게 자랑처럼 여겨졌고, 젊은 혈기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면서 순수함을 잃었던 겁니다. 네흘류도프는 마치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으려는 듯 무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속죄를 시작합니다. <부활>은 심경의 변화와 내면의 갈등, 외부 세계와의 마찰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입니다.

 봄이 되면 세상의 만물이 깨어납니다. 얼어붙은 땅이 녹고, 말랐던 가지에 꽃이 피고, 잎이 나죠. 

길었던 겨울을 생각하면 기적처럼 느껴지는 부활의 시절, 회복의 시기에 매년 놀라게 됩니다. 자연의 섭리가 인간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요? 겨울처럼 차고 메마른 마음도 부활과 회복의 시간은 찾아오는 걸까요? 


 네흘류도프는 처음에는 세상이 제시하는 가치와 태도를 거부하고 순수함을 지키기 위해 투쟁합니다. 세상은 선이라고 말하지만 자신에게는 악처럼 느껴지는 가치들을 받아들이지 않죠. 하지만 결국 네흘류도프는  투쟁에서  패배합니다. 패배한 이후에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도, 스스로를 믿는 일도 없이 세상이 원하는 것, 세상이 믿는 것을 행하며 껍데기처럼 살아가죠.  

 마슬로바와 재회하게 되면서 껍데기로 덮여있던 네흘류도프는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지금껏 외면했던 농민과 민중의 고단한 삶에 눈을 돌리게  거죠. 잃어버린 선함과 순수함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이 시작된 겁니다. 

  

 네흘류도프의 노력은 이중의 장애물에 부딪힙니다. 하나는 귀족 사회의 조롱과 비난이었고,  하나는 농민과 민중의 의심과 욕심이었습니다. 귀족 사회의 지인들은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라며,  혼자만의 노력으로 달라지는  아무것도 없다고 충고합니다. 

 농민과 민중은 네흘류도프의 저의를 의심하면서도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게 되기를, 빼앗기지 않기를 바라는 추한 욕심을 드러냅니다. 팍팍한 삶이 그들로 하여금 그악스럽게 만들었던 거죠. 


 네흘류도프는 마슬로바의 거절과 의심과도 마주칩니다. 자신을 버린 남자,  년이나 천하고 더러운 삶을 감내하게  남자를 다시 믿기 어려웠습니다. 거기에 더해 마슬로바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흘류도프를 사랑했기에 곤란한 처지로 끌어들이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었죠.  선한 사람들입니다.


 네흘류도프 안의 선함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순수함도 그날 함께 죽었죠. 어떻게 생각하면 네흘류도프의 변화는 회복이 아니라 변덕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수백 년이나 이어져 내려온 권위와 특권을 내려놓고, 속죄하는 모습은 감동마저 느끼게 합니다.


 <부활>은 개인의 회복, 속죄라는 의미에 머무르는 작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와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대한 담론을 담고 있죠. 개인의 일탈이라고 치부하는 많은 사건들이 실제로는 사회 전체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관행과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차별과 부당한 대우, 그릇된 인식에 더는 면죄부를 줘서는  됩니다. 

'다 그렇게 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다'는 억지 논리가 망치는  현재만이 아닙니다. 미래까지도 어둡게 하죠.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너무 많은 가치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시작하기 주저하거나 어렵게 여기는    자체가 어려워서  수도 있지만,  일을 세상이 어떻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할까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네흘류도프는 수없이 되묻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인가?", "올바른 선택인가?"하고요. 

그러다 하나의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는 이러한 어러 가지 문제들을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고 모든 것이 너무나 단순한 데 놀랐다. 그 이유는 앞으로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해선 아무리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으나 남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부활> 중

 이 깨달음은 부처나 예수 같은 성인의 깨달음과 닮아있습니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하찮게 여기고, 세상과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보통의 사람에게 이런 경지를 요구하는 건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에 앞선 생각, '자기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건 어느 정도 가능하고 또 삶에 도움이 되리라 봅니다. 


 저부터도 늘 두려움을 품고 살아갑니다. 

"내가 어떻게 될까?"

"이것을 한다면, 혹은 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나를 어떻게 볼까?"

솔직히 이겨내거나 떨쳐버리기 어려운 질문임을 고백합니다. 

얽매이지 않는 게 얽매이는 일보다 어렵다는 건 참 이상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애쓰는 중입니다. 그래서 작은 변화라도 실감하는 날에는  기쁨을 얻고는 합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왜 태어나는 걸까요? 

죽어가기 위해서?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살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태어나는 거겠죠. 

나만을 위한 삶과 욕망에 충실하는 것도 살아가는 방법의 하나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만을 위한 삶이, 나의 욕망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는 삶이 결코 행복한 삶이   없다는 걸요.


 봄이 깊어갑니다. 

산과 들, 숲과 내가 깨어납니다.

우리의 마음도 오래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죽은 듯했고, 너무 늦어버린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변화와 회복의 시기를 앞에 두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계, 타인이 만들어 둔 가치와 체계를 무조건 적으로 따라가며, 나의 생각, 나의 바람을 버리고 살던 삶과는 그만 이별해야겠습니다. 

 지금은 봄, 계절에 부끄럽지 않게 깨어나고 자랄  있도록 조금  애써보겠습니다.

바야흐로 부활, 오늘은 부활의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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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어느 왕국에 두 명의 공주가 있었습니다. 언니 이름은 엘사, 동생 이름은 안나입니다. 엘사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는데, 얼음 마법을 쓰는 거였죠. 종종 엘사는 마법을 써서 안나와 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히도 안나가 엘사의 마법에 맞아서 병이 들죠. 엘사는 자책하며 안나와 거리를 둡니다. 마법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마법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얼어붙은 듯한 시간이 흐릅니다. 오랜 시간이. 그리고 운명의 날, 안나는 처음 만난 이국의 왕자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엘사는 깜짝 놀라죠. 하지만 안나는 사랑 한다며 결혼하겠다고, 운명이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엘사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엘사는 얼어붙은 마음으로 도망칩니다. 길고 긴 겨울, 겨울 왕국의 시작이죠.


 앞서 적은 건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이야기입니다. 소설 <운명과 분노> 이야기를 할 것처럼 굴어놓고는 엉뚱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으니 조금은 당황하셨을까요. 

 전혀 달라 보이지만 두 이야기는 닮아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품고 있는 두려움과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요.


 <운명과 분노>는 두 남녀의 이야기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과 축복 속에서 자란 남자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환상의 세계가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자신을 잊기 위해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죠. 

남동생의 탄생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한 여자는 남동생의 죽음과 함께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세상에 기댈 곳도, 의지할 데도 없이 내팽개쳐지죠. 

 여자는 자기 힘으로 공부를 하고, 등록금을 만들어 대학에 갑니다. 

남자는 대학에 갑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녔고, 졸업을 앞두고 처음 만난 날 결혼을 약속합니다. 

 여자의 이름은 마틸드, 남자의 이름은 로토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새긴 상처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서로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죠. 감추려고 한 건 아니지만 굳이 밝히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삶의 동반자가 됩니다. 

 트라우마를 품고 사랑을 시작한 거죠. 


<겨울 왕국>에서 엘사는 마법 능력을 숨깁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엘사에게는 사랑하는 여동생을 상처 입힌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이야기할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슬픔을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모두 통제되지 않는 마법 때문이었죠. 엘사는 통제되지 않는 마법을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마법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사람으로, 착한 아이로 남아야 하니까요.


 <운명과 분노> 속 마틸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한계까지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죠.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누구에게 다가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타인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혹독할 만큼 엄격하게 행동하죠. 그런 마틸드에게 유일하게 예외가 된 사람이 로토입니다. 빛이 나는 남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남자죠. 엘사가 마법을 감춘 것처럼 마틸드는 과거와 속마음을 감춥니다. 로토가 떠날까 봐 두려웠거든요. 

 이제 마틸드에게는 로토뿐입니다. 로타가 마틸드의 전부죠. 마틸드는 로토의 엄마조차 자신에게서 로토를 빼앗아갈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운명이 훼방하지만 않는다면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상적인 존재, 천생연분으로서 말이죠.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운명은 언제나 겁내고 두려워하는 이들의 발목 붙잡기를 즐기니까요.


'트라우마'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신에 남아 영구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일컫는 말입니다. 극적인,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치유되지 않는 상처죠. 

 <겨울 왕국> 엘사가 마법으로 안나를 상처 입힌 기억이 트라우마입니다. 오래오래 마음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고 끊임없이 상처를 키우게 만들죠. 

 <운명과 분노>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로토에게 트라우마가 됩니다. 마틸드에게는 어린 시절 전부가 트라우마죠. 


 로토의 분노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거듭되는 불행과 불운 앞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로토의 곁에 있는 마틸드는 분노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항상 분노하죠. 로토 몫의 분노까지 자기 것으로 삼은 것처럼요. 언제나 불안에 떨며,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자기 내면으로 숨어드는 마틸드는 언제까지나 다섯 살 어린아이로 남습니다.


 <겨울 왕국>에서 엘사의 두려움, 분노를 치유하는 건 사랑입니다. 언제나 지키고 싶었던 존재의 헌신, 희생이 기적을 일으키죠. 그리고는 동화처럼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운명과 분노>는 동화가 아니죠. 소설이기에 현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지만 더 엄격하고 혹독한 이야기입니다. 운명은 마틸드를 절망의 바닥에 떨어뜨릴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거죠.


 저는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죠. 치유되거나 치유되지 않은 채, 해소되거나 해소되지 않은 채, 행복을 되찾거나 여전히 불행한 채 그렇게들 살아가는 거죠. 이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고, 언제나 행복한 웃음을 웃지 않는다고 병들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기에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죠. 

 사람은 누구나 더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괴테가 말했듯이요. 

트라우마라고 말해버리면 그 앞에서 손 쓸 수 없이 무력해질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성장, 방황, 애쓰는 과정이라고 고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어 지기도 하죠.


 트라우마는 사람을 솔직할 수 없게 만듭니다. 겁내게 만들고 두려워하게 하죠.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순간에도 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에는 원망과 분노만이 앙금으로 남죠.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트라우마의 폐해입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 영원한 고통이라는 저주. 더더욱 트라우마를 인정할 수가 없죠. 


내면의 아이를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는 극복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전적으로 '나'를 신뢰하는 지지자가 필요합니다. <겨울 왕국> 속 엘사의 사랑스러운 동생 안나와 같은 존재 가요. 하지만 그런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운명과 분노>에서 마틸드가 조금 더 용기를 냈다면 로토는 그런 마틸드를 더 아끼고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뭐라든 두 사람은 '운명의 연인'이었으니까요.


분노한다는 건 출구가 불확실하거나 없는 동굴로 자기를 이끌고 가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하며, 입을 막게 만들죠. 철저하게 고립되려고 하면서, 세계로부터 오는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모순이 분노에는 담겨 있습니다.


 기이한 건 <운명과 분노>가 해피엔딩인지, 새드 앤딩인지, 열린 결말인지 모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명백하건만 모호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왜인지.


  운명에 분노하든지, 운명 앞에 무력하기만 한 스스로에 분노하든지, 그런 운명으로 몰아간 세상과 사람들에 분노하든지, 그 분노는 언젠가 나를 집어삼키게 됩니다. 그러니 분노를 경계하시길. 불태우기 위해서는 불살라질 각오가 있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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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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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단순한 불평이나 개인적인 불만의 시대가 저물어 갑니다. 

근거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한  하니 '징조'라고 부를만한  하나 예로 들어야겠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정치가나 일부 시민이 아니라 다수의 시민이, 거의 누구나가 던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오래된 질문은 아니지만 과거에도 '국가란 무엇인가'와 유사한 의문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의문의 뿌리 혹은 기대하는 결과는 지금과 달랐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질문은 한탄, 원망, 좌절, 무력함에서 시작되어 어떤 변화도 만들지 못하고 흩어졌습니다. 

지금의 질문은 시민의 힘이 국가를 변화시킬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정당한 '분노'를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힘이 있습니다. 단순한 한탄에서 그치지 않고 변화를 완성할  있는 힘이요.


 유시민 작가의 <국가란 무엇인가>는 스스로에게 던져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나는 어떤 국가를 원하는가?'

유시민 작가는 스스로를 '진보주의자'라고 정의합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는 진보주의자 유시민이 생각하는 국가를 담고 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하는  '국가란 이것이다'가 아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유시민 작가는 자기의 생각을 정답이라고,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개인 유시민을 위한 나라가 아닌 시민 모두를 위한 나라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 <국가란 무엇인가>는 결론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은  지난해 12월이라,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적으려다 보니 부실해질  분명한지라 짧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책을 읽고 남겨둔 메모를 보니  줄이 적혀 있었습니다.


"단순한 불평이나 개인적인 불만의 시대가 저물다."


어떤 의미로 적었을까 곰곰 생각해봤습니다. 

'불평'이나 '불만'이라 함은 무력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아무것도   없을  그나마   있는  불평하는 일입니다. 불만을 표하는  조금  적극적이기는 하지만 상대방이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마찬가지죠. 

 시민이 국가에 어떤 요구를 했을 때, 지금까지는 국가가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어쩔  없다며 포기해왔습니다. 어차피  되는  신경 써서 무엇하냐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죠. 하지만 시민들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를 겪으며 무관심해졌을  국가가 얼마큼 부패할  있으며, 무능해질  있는지 깨달았습니다. 동시에 국가의 권력이 시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국가가 국민의 위에 있지 않다는 사실, 시민이야 말로 국가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기에 과거와 결별하는 시기를 맞게  겁니다.


 책 속으로 들어가서  군데 들여다보기로 합니다.

풍요로운 사람들은 오늘의 상황에 불만을 느낄 기회가 없어서 보수적인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내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서 보수적인 것이다.
<국가란 무엇인가> 중

 '보수적'이라는 말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지금 상태에 불만이 없고, 충분히 만족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자연스러운  당연합니다.  해봐야 본전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이해하기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오래전부터 '왜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나 있는 질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것, 가진 것까지 잃어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죠. 그래서 변화를 일으켜 가난에서 구제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도 쉽게 믿지 않습니다. 보수 집회에서 태극기를 흔드는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보수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고도 말합니다. 마찬가지 이유인데,  나은 삶을 기대하기보다 지금보다 나빠지지 않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라는 거죠.


 흔히 하는 말로 집단에는 양심이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 중

  줄에 불과한  문장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없는  현재 대한민국이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벌어졌지만 책임이 있는 사람은 없는 일, 국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라는 믿음을 져버린 일, 위안부 합의와 싸드 배치로 대표되는 굴욕적이고 기만적인 일. 

 하이에나에게 양 떼를 맡기는  낫지 국가를 믿고 우리 삶을 내놓을 수는 없습니다.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유시민 작가가 말하는 건 국가의 미래가 아닙니다. 국가를 규정하는 정체성, 국가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죠. 식민지와 한국 전쟁을 거쳐 분단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대한민국에는 이데올로기 대결 구조가 고질병처럼 뿌리를 내렸습니다. 나날이 커지는 빈부 격차도 불안을 키우고 있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바람직한 국가상을 그리는 동시에 시민들의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망각과 용서, 진보와 보수, 국가와 정치.

어디에서든 국민, 시민들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책임에서 자유로울  없습니다. 

'모든 국가는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게 된다'는 말을  어느 때보다 무겁게 여겨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나라를 탓하고 정치인을 탓할  있는 시기는 단순한 불만이나 개인적인 불평의 시대와 함께 끝을 맞이했습니다. 

주권자로서 시민은 감시하고, 요구하며 관심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갈등을 조장하고 지속하기보다 이해하고 화합할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합니다. 시민이 국가를 두려워할  아니라, 국가가 시민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화해와 용서를 이유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자'라고 말하는  갈등의 골만 깊어지게 할 뿐입니다. 청산되지 않는 과거는 언젠가 곪아   상처가 됩니다. 깨끗이 도려내고 씻어내는 일,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피해갈  없는 과정입니다.


 30년 넘는 시간을 살아오면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던지고 답해본 기억이 없습니다. 지금도 국가가 무엇인지, 어떠해야 하는지 확실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어떠해서는  되는지는 알아가고 있습니다. 적어도 국가는 국민 위에, 시민 위에 군림해서는  된다는 것만은 분명히 알게 됐죠. 

 앞으로도 이 물음을 잊어버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가 곧 국가이며, 우리가 곧 주인이기에 살고 싶은 나라를 고민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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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틈에 2017-04-20 0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몸이 안좋아서 일을 쉬게 되었는데 미뤄두었던 유시민 대표저서 읽기를 해볼까 합니다. 할까 말까 어제까지 고민했는데 이 글이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장물방울 2017-04-20 07:56   좋아요 0 | URL
건강이 정말 중요한데 몸조리 잘하셔서 좋은 책 많이 읽을 수 있게 되길!
계기가 되었다니 미흡하나마 영광이네요.
 
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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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를 대신하여.
한 남자가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의 사랑을 독차지할 운명을 타고난 남자죠. 그리고 한 여자가 있습니다. 여자의 내면은 임계점까지 분노로 가득합니다. 신화 속 비극의 여주인공들. 키르케, 메데이아, 안티고네를 잇는 저주받은 운명이 만들어낸 분노를 형벌처럼 품고 살아가죠. 여자에겐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불타버리거나 불태우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죠. 여자는, 태우는 쪽을 선택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요. 그런 여자가 사랑에 빠집니다. 오직 그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지금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여자는 모든 것을 걸죠. 사랑이 여자를 구원할지 아니면 완전히 파괴시킬지. 신이 부여한 운명에 맞서는 한 인간의 분노가 600페이지에 이르는 지면을 뜨겁게, 순식간에 불살라 버립니다.

<운명과 분노>는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였던, 누구보다 서로에게  충실했던 두 남녀의 운명과 분노 그리고 헌신적인 사랑 이야기입니다. 


미리 경고하자면, 완벽한 사랑, 순수한 사랑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결코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오히려 사랑은 한 사람의 전부 혹은 그 이상을 내놓기를 요구할 때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목숨까지도 요구하죠. 그래서 겁쟁이들은 사랑에 빠지지 못합니다. 지나치게 머리가 좋은 사람도 그러하죠.

 

 두 사람은 예외입니다. 너무나 똑똑한 두 사람이 사랑 앞에서는 눈이 멀어 버리죠. 주인공 남자와 여자, 로토와 마틸드는 그야말로 '미친 사랑'을 합니다. 어리석다고 말하는 세상도, 타협을 권하는 사람도 외면한 채 오로지 두 사람의 사랑만을 위해 살아가죠. 

 하지만 이 사랑의 이면에는 여자, 마틸드에게 내려진 저주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세상의 모두가 마틸드에게 등을 돌리게 만든 저주 가요. 마틸드는 사랑으로 빛나는 존재인 로토를 이용해 저주를 풀고자 합니다. 그렇게 될 테고, 그럴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고 살아가는 거죠.


역사와 신화 속 무수한 이야기가 증거 하듯, 인간은 운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처음부터 이루지 못할 꿈이었던 거죠. 모든 인간은 병들고, 나이 들어 죽음에 이릅니다.  언제든, 덜컥, 불쑥 들이닥쳐 깜짝 놀라게 하죠.


 사랑받은 적 없는 마틸드와 사랑으로 가득했던 로토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몹시 '고독하다'는 거죠.

고독.


 어떤 이들은 나이 들면 고독에도 익숙해진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고독은 결코 나이 들지 않습니다. 나이를 먹는 건 사람뿐이죠. 때문에 사람은 고독에 익숙해지는 게 아니라, 고독 앞에 무력해져 갈 뿐인 거죠. 

 더 좋지 않은 건 고독이 나이 들지 않듯 분노 역시 사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존재가 분노를 감당할 수 없게 되어도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은 물론 주변의 존재들도 분노에 휩쓸리게 되는 거죠. 통제되지 않는 분노는 재앙 혹은 저주가 되어 모두를 파멸시킬 때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나이들 지도 사멸하지도 않는 고독과 분노만큼이나 어려운 상대가 있습니다. 

그 상대의 이름은 '기억'입니다. 

기억은 망각에 덮여 흐려지거나 지워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결국 저절로 흐려지거나 병 혹은 사고로 지워지기 전까지는 고되고 치열한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숨을 곳조차 없는 내면에서 매일 기억과 마주치는 일은 작고 왜소한 자아를 피폐하게 하죠. 이 피폐함, 고통을 끝내는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용서하는 거죠.

  말은 쉽지만 용서하기란 간단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타인을 용서하는 일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는 일은 더 힘이 듭니다. 타인이 모르는 것까지 '나'는 알고 있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되는 겁니다.


 왠지 어렵고 복잡하게 적고 말았는데 사실 이야기는 단순합니다. 

왜냐하면 결국 이 모든 건 사랑의 문제이기 때문이죠.


 사랑은 주기만 할 수도, 받기만 할 수도 없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다는 말도, 먼저 사랑을 주지 않으면 사랑을 받을 수 없다는 말도 모두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을 '운명'의 장난이라고도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큐피드의 화살 이야기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갑자기 이 무슨 낭만주의인가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낭만적인 상상도 없이 운명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운명과 분노>를 먼저 읽어본 지인은 제게 "이 얘기는 딱 네 얘기다."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솔직히 처음 읽기 시작할 때는 온통 물음표 투성이었죠. 

'이 소설의 어디가 내 얘기란 말인가?' 

 초반을 넘기고 중반을 지나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깨닫는 바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제 모습이 있더군요. 남자 주인공이나 여자 주인공 한쪽이 아니라 둘을 합쳐둔 모습. 분명 제 이야기였습니다. 


 억지스럽게 들릴 수 있지만 저주나 운명을 이겨내는 방법은 완전히 무시하거나, 철저하게 믿거나 하는 두 가지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이, 운명이, 나 자신조차 무시하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거죠.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죠.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걸 무시한다면 삶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남은 건 '믿는 것'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고, 친구를 믿고, 가족을 믿는 거죠. 이 방법도 그리 간단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믿는다고 해도 어디까지, 어떻게, 누구를 믿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으니까요. 

 그래서, 용서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큐피드의 화살이 주는 내 눈에 콩깍지도 필요하죠. 


고독은 '나' 홀로 존재할 때 생겨납니다. 

'나'를 그 혹은 그녀에게 준다면, '나'가 없기에 고독도 생겨날 수 없죠. 

사랑이라면 그런 낭만, 환상, 불가능을 꿈꿔도 좋을 겁니다. 

삶 동안 한 번쯤이라면요.


이번에는 기필코 정리해서 적겠노라 마음을 먹었건만, 사랑 이야기라면 젬병이라 역시 정리되지 않은 혼란과 어수선함만 잔뜩 늘어놓고 말았네요. 


 한 번쯤은 "너는 내 운명"이라 믿는 사람을 만났거나,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나 운명의 사람인 그에게도 "참을 수 없이 분노하게 되는 날"이 찾아올 거예요. 

그럼에도 "너는 내 전부"라는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게 바로 사랑 아닐까요.   


역시, 사랑해야 합니다.


+ 더하여.

<운명과 분노> 곳곳에 삽입된 셰익스피어 희곡과 신화를 읽다 보면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해질 겁니다. 이번 기회에 만나보는 것도 좋지 않은가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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