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 어느 왕국에 두 명의 공주가 있었습니다. 언니 이름은 엘사, 동생 이름은 안나입니다. 엘사에게는 신비한 능력이 있었는데, 얼음 마법을 쓰는 거였죠. 종종 엘사는 마법을 써서 안나와 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행히도 안나가 엘사의 마법에 맞아서 병이 들죠. 엘사는 자책하며 안나와 거리를 둡니다. 마법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마법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얼어붙은 듯한 시간이 흐릅니다. 오랜 시간이. 그리고 운명의 날, 안나는 처음 만난 이국의 왕자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엘사는 깜짝 놀라죠. 하지만 안나는 사랑 한다며 결혼하겠다고, 운명이라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엘사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엘사는 얼어붙은 마음으로 도망칩니다. 길고 긴 겨울, 겨울 왕국의 시작이죠.
앞서 적은 건 애니메이션 <겨울 왕국>의 이야기입니다. 소설 <운명과 분노> 이야기를 할 것처럼 굴어놓고는 엉뚱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으니 조금은 당황하셨을까요.
전혀 달라 보이지만 두 이야기는 닮아 있습니다.
트라우마가 품고 있는 두려움과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의 이야기라는 점에서요.
<운명과 분노>는 두 남녀의 이야기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랑과 축복 속에서 자란 남자는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환상의 세계가 부서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자신을 잊기 위해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죠.
남동생의 탄생으로 불안해지기 시작한 여자는 남동생의 죽음과 함께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세상에 기댈 곳도, 의지할 데도 없이 내팽개쳐지죠.
여자는 자기 힘으로 공부를 하고, 등록금을 만들어 대학에 갑니다.
남자는 대학에 갑니다. 우연인지 운명인지 두 사람은 같은 대학에 다녔고, 졸업을 앞두고 처음 만난 날 결혼을 약속합니다.
여자의 이름은 마틸드, 남자의 이름은 로토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이 새긴 상처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는 않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서로 드러내려고 하지도 않죠. 감추려고 한 건 아니지만 굳이 밝히지 않은 채 두 사람은 삶의 동반자가 됩니다.
트라우마를 품고 사랑을 시작한 거죠.
<겨울 왕국>에서 엘사는 마법 능력을 숨깁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다른 존재'를 두려워하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엘사에게는 사랑하는 여동생을 상처 입힌 기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생에게 이야기할 수도, 가까이 다가갈 수도,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도, 슬픔을 함께할 수도 없습니다. 모두 통제되지 않는 마법 때문이었죠. 엘사는 통제되지 않는 마법을 미워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마법을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좋은 사람으로, 착한 아이로 남아야 하니까요.
<운명과 분노> 속 마틸드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한계까지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죠.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도 누구에게 다가가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타인에게는 물론 자신에게도 혹독할 만큼 엄격하게 행동하죠. 그런 마틸드에게 유일하게 예외가 된 사람이 로토입니다. 빛이 나는 남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 모두에게 사랑받는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남자죠. 엘사가 마법을 감춘 것처럼 마틸드는 과거와 속마음을 감춥니다. 로토가 떠날까 봐 두려웠거든요.
이제 마틸드에게는 로토뿐입니다. 로타가 마틸드의 전부죠. 마틸드는 로토의 엄마조차 자신에게서 로토를 빼앗아갈 수 없다고 믿습니다. 운명이 훼방하지만 않는다면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할 수 있었을 겁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상적인 존재, 천생연분으로서 말이죠. 그러나 운명은 두 사람을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운명은 언제나 겁내고 두려워하는 이들의 발목 붙잡기를 즐기니까요.
'트라우마'는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정신에 남아 영구적으로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일컫는 말입니다. 극적인,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치유되지 않는 상처죠.
<겨울 왕국> 엘사가 마법으로 안나를 상처 입힌 기억이 트라우마입니다. 오래오래 마음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고 끊임없이 상처를 키우게 만들죠.
<운명과 분노>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로토에게 트라우마가 됩니다. 마틸드에게는 어린 시절 전부가 트라우마죠.
로토의 분노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지만 거듭되는 불행과 불운 앞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로토의 곁에 있는 마틸드는 분노의 화신이라도 된 것처럼 항상 분노하죠. 로토 몫의 분노까지 자기 것으로 삼은 것처럼요. 언제나 불안에 떨며, 상처 입은 들짐승처럼 자기 내면으로 숨어드는 마틸드는 언제까지나 다섯 살 어린아이로 남습니다.
<겨울 왕국>에서 엘사의 두려움, 분노를 치유하는 건 사랑입니다. 언제나 지키고 싶었던 존재의 헌신, 희생이 기적을 일으키죠. 그리고는 동화처럼 그 후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운명과 분노>는 동화가 아니죠. 소설이기에 현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지만 더 엄격하고 혹독한 이야기입니다. 운명은 마틸드를 절망의 바닥에 떨어뜨릴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거죠.
저는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마음에 담고 살아가죠. 치유되거나 치유되지 않은 채, 해소되거나 해소되지 않은 채, 행복을 되찾거나 여전히 불행한 채 그렇게들 살아가는 거죠. 이들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고, 언제나 행복한 웃음을 웃지 않는다고 병들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기에 트라우마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죠.
사람은 누구나 더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입니다. 괴테가 말했듯이요.
트라우마라고 말해버리면 그 앞에서 손 쓸 수 없이 무력해질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성장, 방황, 애쓰는 과정이라고 고집스럽게 이야기하고 싶어 지기도 하죠.
트라우마는 사람을 솔직할 수 없게 만듭니다. 겁내게 만들고 두려워하게 하죠.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순간에도 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린 후에는 원망과 분노만이 앙금으로 남죠.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트라우마의 폐해입니다. 치유되지 않는 상처, 영원한 고통이라는 저주. 더더욱 트라우마를 인정할 수가 없죠.
내면의 아이를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는 극복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전적으로 '나'를 신뢰하는 지지자가 필요합니다. <겨울 왕국> 속 엘사의 사랑스러운 동생 안나와 같은 존재 가요. 하지만 그런 존재를 만나기 위해서는 용기를 내야 합니다.
<운명과 분노>에서 마틸드가 조금 더 용기를 냈다면 로토는 그런 마틸드를 더 아끼고 사랑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뭐라든 두 사람은 '운명의 연인'이었으니까요.
분노한다는 건 출구가 불확실하거나 없는 동굴로 자기를 이끌고 가는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게 하며, 입을 막게 만들죠. 철저하게 고립되려고 하면서, 세계로부터 오는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모순이 분노에는 담겨 있습니다.
기이한 건 <운명과 분노>가 해피엔딩인지, 새드 앤딩인지, 열린 결말인지 모호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명백하건만 모호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왜인지.
운명에 분노하든지, 운명 앞에 무력하기만 한 스스로에 분노하든지, 그런 운명으로 몰아간 세상과 사람들에 분노하든지, 그 분노는 언젠가 나를 집어삼키게 됩니다. 그러니 분노를 경계하시길. 불태우기 위해서는 불살라질 각오가 있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