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복과 반전의 순간 Vol.1 -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 전복과 반전의 순간 1
강헌 지음 / 돌베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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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살 아이부터 여든 노인까지 누구나 살면서 여러 번 마주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들에 이름을 붙이면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 될 거다. 그 순간은 어떤 때는 스스로도 확실히 인식할 것이고 많은 순간에는 모르고 지나갈 것이지만 한 사람의 삶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올 거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라고 해서 그 순간을 기점으로 모든 것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은 아닐 거다. 오히려 하나의 계기,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변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리라. 

 사람의 삶에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얽혀 있는 모든 것들에도 전복과 반전의 순간이 있는 게 자연스럽다. 이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강헌이 주목한 음악사의 역사적 장면들'이라는 부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음악사에서의 전복과 반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음악에 거의 무지한 나에게도 이 책은 커다란 전복과 반전을 경험하게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저자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하는 또 하나의 여지를 발견했다는 의미다. 흑인과 백인, 주류와 비주류, 천재와 노력가, 의혹과 사실을 오가는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동안 저절로 생각하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본문이나 주석에 적힌 노래나 영상을 발견한 것은 둘째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음악이 나와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했다는 점이다. 이 책 속에 담긴 내용을 모두 잊어버리더라도 이 책은 여전히 의미를 잃어버리지 않을 거다. 어떤 의미로, 음악이 비로소 내게 왔기 때문이다. 


 책 속에서 다루고 있는 음악 이야기는 음악의 역사와 무수한 예술가들을 생각해보면 아주아주 작고 또 적다. 하지만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 주안점을 둔다. 거기다 '강헌이 주목한'이니 저자가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만 추려서 적어도 그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저자의 입담도 입담이지만, 그 뒤의 숨겨진(아마도 나와 같이 음악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미스터리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의) 이야기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본문은 재즈에서 시작해서 로큰롤까지 살펴 본 후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트로트와 엔카에 얽힌 낡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짚어두고 넘어가야할 지점을 찍는다. 그리고 다시 모차르트와 베토벤으로 넘어갔다가 다시금 지금의 우리 음악의 뿌리를 형성했다고 할 수 있는 근대와 현대 음악 이야기를 들려준다. 

 

 재즈의 탄생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의 삶의 고단함과 고난, 슬픔을 상징하는 '필드홀러'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 음악에서(솔직히 우리 음악이 있기는 있는건지 더 알 수 없게 됐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시대가 지니는 의미를 살피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결론적으로 우리 음악의 뿌리는 거의 와해되고 해체되어 망실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왜색과 외색이 너무 짙어 다시 '우리의 소리'가 재생될 수 있을지조차 의심스러워졌다. 나부터도 잘 알지 못하고 있고 거의 관심도 없는 상태니 더 보탤 말은 없지만 자본과 시장에 휩쓸리기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동적인 모습이 좋게 생각되지 않는 게 사실이다. 


 이 책은 직접 읽어보면서 저자가 말하는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와 맥락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그 가치를 제대로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구구절절 내용을 적는 것도 소모적이기는 마찬가지인데다 책을 읽은 이마다 받아들임과 해석이 달라질 건데 어찌 저자의 의도를 바로 알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음악을 알아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언제나 직접 들어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이 책 역시 음악을 듣듯 직접 읽어나가면 좋을 책이다. 전복과 반전은 그 순간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순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어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순간이 또 다른 순간으로 이어지며 삶을 더 풍부하고 풍요롭게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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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제목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다. 나쁜 책도 있다. 도무지 어떻게 읽어야할 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 지를 판단할 수 없게 하는 책들은 일단 나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쁜 책이 읽지 말아야 할 책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나쁜 책보다는 나쁜 독서가 많다는 게 제목의 취지다.


지난 7월, 미국의 작가 하퍼 리가 55년만에 신작, 사실은 <앵무새 죽이기>에 앞서서 썼던 작품 <파수꾼>이 출간됐다. 

줄거리는 앵무새 죽이기 이후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밝혀지는 애티커스 핀치의 정체와 그 정체를 알아버린 진 루이즈의 내외면의 갈등을 담고 있다. 

 '파수꾼'의 의미가 자기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라고 느꼈다. 타인, 외부의 시선이나 판단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념을 갖고 살아가라고 말이다. 


 기묘한 풍경을 보고 있다. 여기저기서 애티커스 핀치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이야기가 들리는 거다. 마치 진 루이즈가 아버지가 마을 주민회의에 참석해서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자의 연설을 아무 말없이 듣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충격을 받고, 아버지를 경멸하기 시작한 진 루이즈처럼 말이다. 

 애티커스 핀치는 인종차별 주의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인종차별 주의자가 아닌 것도 아니다. 애티커스 핀치에게 '주의'가 있다면 그건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주의'가 있을 뿐이다. 그는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해를 자처하지도 않았다. '파수꾼을 세워라'는 메시지도 사실 자기 삶을 지탱하는 신념을 가지라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애티커스 핀치는 예전부터 현재까지 자신의 신념이 이끄는 삶을 살아왔다. 그는 기만자도 아니고 위선자도 아니다. 

만약 누군가 타인을 기만하기 위해 혹은 위선적인 선행을 위해 어떤 행위, 삶의 모습을 보여왔다면 그정도까지 일관성을 갖추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연기는 아무리 능숙하더라도 어딘가에서 헛점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법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것이 연기이기 때문이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씨> 수준의 이중인격이 아니고서는 그토록 오래 위선을 지속하는 것도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있다.

변호사를 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요즘 익숙한 풍경은 '좋은 변호사'가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는 장면들이다. 그래서 변호사들도 빈익빈 부익부가 심하다던가.

하지만 변호사의 역할이 유리한 판결을 얻어내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잘못을 한 사람은 잘못의 대가를 치러야하는데 그것이 지나치거나 모자라지 않도록 적정한 법적인 판단이 내려질 수 있도록 하는 보조자라고 생각한다는 거다. 

 애티커스 핀치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모범적인 변호사다. 사람들이 사건을 바로 볼 수 있도록 진실을 밝히려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론 진실이 반드시 '사실'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파수꾼>을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판단을 내리기를 바란다.

누구누구가 그랬다거나, 누구에게 묻는다거나 하지 말고 스스로 애티커스 핀치에 대해 생각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나는 애티커스 핀치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철저한 신념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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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
하퍼 리 지음, 공진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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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쪽 6번째 줄
그들은 서로 너무 닮아 월러비, 큰 월러비, 작은 월러비로 분류할 수 있었다. 
-> 앞 뒤로 언급되는 인물의 이름은 '윌러비'인데 이게 오탈자인지 잘 모르겠으니, 혹 아시는 분은 제보를.

 

 


181쪽 아래서 3번째 줄
그들이 모인 곳에 느지막히 도하니
-> 도착하니

246쪽 아래서 7번째 줄
NACCP는 니그로라는 인종을
-> 앞뒤로 언급되는 약자는 NAA(더블에이)CP.

 


국내 기사 검색에도 종종 NACCP가 보이는데 NAACP의 잘못인듯 하네요.



  NAACP앰블럼

(출처:http://www.dcejc.org/2015/02/06/partnering-with-the-prince-georges-county-naa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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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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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하나의 기승전결을 가진 이야기가 아니다.
비유하자면 시인이 자신이 표상하고자 하는 것을 그려내기 위해 단어들을 짜맞추어 시를 적듯이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동안 저자가 쓰고, 읽고,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잇고 붙여 담아낸 것이다.

당연히 각각의 글에서 통일된 완결성이나 필연성, 흔히 개연성이라고 하는 '이 글이 여기에 담겨야 했는가?'하는 부분에 의문이 있을 수도 있겠고, 거리 상으로도 시간 상으로도 멀고 흐릿한 나치에게 학살당한 유대인이나 재일 조선인 혹은 해방 후의 혼란 속에서 벌어진 학대나 강제에도 무감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공통성이다. 
 이 사건들과 그 일을 경험한 이들의 다양한 대처 방식을 살펴보는 것으로 의미와 교훈을 현재로 가져와서 미래로 이어주는 거다.

 기승전결도 통일성도 없는 것 같은 이 책을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각각의 이야기에서 받거나 얻은 인상 혹은 느낌을 마치 시인이 단어를 짜맞추듯 맞춰보는 것일 것 같다.
 앞서의 감상에서 나는 이 책을 하나의 단어 '시의 힘'에 맞추어 적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대실패다.

 그렇기에 새삼 다시 권한다.
각각의 글로 읽고, 그 느낌이 뻗어나가는대로 두었다가 마지막에 한 번만 더 돌아보기를.

 시를 읽는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그것을 느끼는 마음도 분분하다.
해석하는 방향도 제각각일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 마음, 방향에는 정답이 없다.

그저 내 마음에 이 시가, 이 글이 어떻게 울리고 퍼지는지 조용히 살피면 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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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밥 2015-07-27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공통성

대장물방울 2015-07-27 19:58   좋아요 0 | URL
^^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느꼈어요.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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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시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물어보곤 했다. 하지만 그 답은 언제나 중심에 닿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이다 흐려지고 옅어져 흐지부지 뭉그러지기를 계속했을 뿐 분명한 답이 되어 나오는 일이 없었다. 시에 대해 혹은 문학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일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이 책이 특별한 의미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책은 한 사람이 스스로에게 던졌던 '시의 힘'이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기에 참고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시의 힘은 무엇인가?"하는 물음에 궁극적이고 근본적인 답을 기대하며 읽지는 말기를 먼저 부탁하고 싶다. 시니 문학이니 하는 것의 보편적인 정의는 언제까지고 '나의 정의'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것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도 보편적일 수 없다. 평범한, 흔히 '보통'이라는 수식어 뒤에 이어지는 개인조차 보편적이기보다 특수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마음에 남는 것이 '특수'하기를 기대하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책이다.


 처음으로 시를 읽은 것이 언제인지 그 기억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학교에서 배운 시가 처음으로 읽어 본 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십 중 팔구는 그 생각이 맞을 거다. 학교에서 배우는 것으로 시와의 만남을 시작한 결과는 대단히 안타깝다. 애초에 정답이 없이 마음 가는대로 읽어도 좋았을 시에서 '정답'을 찾아가며 읽고는 했던 거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것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면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혹 그렇게 느끼지 않았더라도 속으로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하고 말게 된 거다. 결론적으로 시는 '난해한 것' 혹은 '어려운 것'이 되어버린 데에 우리나라의 국어 교육이 끼친 부작용이 적지 않다. 

 <시의 힘>을 읽으며 가장 절절하게 느낀 것은 아마도 저자의 의도와는 다를 것 같은 '교육'에 대해서였다. 그리고 그 다음이 '마음'이다. 먼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재일 교포 2세인 저자가 저자의 부모님이 전쟁 당시 일본에 본의 아니게 저항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교육받지 않았기에' '국가를 대상화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한 것이 깊은 인상을 주었다. '배워야 한다'말은 '배우는 것이 좋다'는 전제에 뿌리를 둔 주장이다. 하지만 배우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배우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배우는 것 역시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를 동시에,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배우고 그 가운데서 선택해서 받아들이게 된다. 문제는 정규 교육에서는 이 선택이 자유롭게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거다. 한국만의 독특한 경향일 지 모르지만 '암기'와 '주입식' 교육의 폐해는 오래 전부터 지적되어 왔고, 이제는 영영 고쳐질 것 같지 않다. 결국 시 역시 '외워야 할 것' 혹은  '정답을 찾기 어려운 것'이 되어 독자와의 거리는 자꾸만 멀어지기를 계속하는 거다. 시를 배움으로써 배우지 않은 것보다 못하게 되는 일이 되어버린 것을 생각해보면 "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의 문제뿐 아니라 그 외에 우리가 여러 경로를 통해 배우고 있는 많은 것들을 어떻게 보고, 판단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 과정의 필요성이 더 분명해지는 거다. 


 이 책의 제목은 <시의 힘>이지만 '시'는 문학, 혹은 지식, 정보와 같은 커다란 가지 가운데 하나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가 어떤 식으로 어떻게 작용하고, 어떤 의미를 품고 무엇을 남기는지를 살펴가면서 자신의 경험들(재일 조선인으로서의 고단함, 가치의 혼란, 디아스포라 의식,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이후 일본의 대응 등)을 접목시켜, 시인의 표상과 표현을 독자가 해석하는 것처럼 사회의 현상과 흐름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다.


 디아스포라, 즉 스스로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힘에 의해 흩어져야했던 이들이 겪는 가치의 혼란은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알기 힘들다. 어쩌면 우리들 역시 같은 처지에 놓여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조차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너무 멀고 막연한 이야기라서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다. 반대로 아직까지 식민지와 전쟁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직접적이고 생생했기에 직시하기 어려운 막연한 것이 되어버린다. 시의 힘은 멀리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이끌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리를 두게 해서 대상을 객관화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런 움직임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건 혹은 상태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진다는 거다. 

 "이미 지나간 일을 굳이 이해할 필요가 있는가?"하고 묻는 이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저자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감추거나 잊어버리거나 피하지 않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의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픽션화해왔던 젊은이가 시의 힘으로 처음 생명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도 한다. 그것은 시를 읽는 독자가 과거 혹은 다른 세계에서 일어난 일일지라도 그것이 스크린 속 영화나 책 속의 이야기와 같은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기도 하다는 실감을 하기를 바라는 거다.


 난해하다는 시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이 책을 간단하고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아직까지는 나 스스로의 이해부터 너무나 부족하다. 하지만 두 가지만은 기억하고 싶다.

 하나는 시는 멀고 가까운 일들 혹은 사람들을 마치 나 자신이 체험하는 것처럼 실감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또 하나는 경계를 짓는 일은 무척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기에 무엇에서든 '하나'의 결론만을 얻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거다. 


 그것은 '남의 일', '과거의 사건'이기에 지금의 나와 무관하다는 것은 사실 진실이 아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그 일이 완전히 이해되어 그 이해가 공유되고 공감하게 되지 않는 한 거듭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거듭 일어날 때는 처음 일어날 때보다 더 크고 나쁜 형태로 들이닥치기 쉽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시인은 그 역사의 증인이자 표현자로써 단순하지만 명료한 메시지를 남긴다. 그 메시지는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작용하는 생명력을 지닌 것이다. 그렇기에 시의 진정한 힘은 생명에 있는 것 아닐까? 저마다의 마음에서 저마다의 모습으로 드러나 해석되고 기억될 때 그 시가 품고 있던 생명이 후대로 전해지고 퍼져가는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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