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노래들 - 80~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마스터피스
최성철 지음 / 뮤진트리 / 2015년 12월
평점 :
품절




주의사항 : 이 책을 읽으려는 자, 책 속의 음악을 '꼭' 들어볼 것을 권함.(안 그럼 나처럼 됨)


이상한 달이다. 

바라지 않았음에도 여러 책들이 나를 일깨워주고 있다. 

어떤 식의 일깨움이냐?

한 마디로 이런 식이다.

"야, 너! 요즘 편독하는 경향이 생겼더라?"

 몰랐었다. 

나름대로 책을 가리지 않는 편으로, 두껍고, 얇고, 가볍고, 무겁고, 쉽고, 어렵고를 떠나 두루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다는 걸.

 착각이었다. 어떤 책은 너무 읽기가 힘들었고, 어떤 책은 읽으면서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결국 일종의 슬럼프 상태가 되어서 다른 책들마저 읽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청춘의 노래들>은 한참 그 격류의 여파에 시달리고 있을 때 읽기 시작한 책이다. 

운이 나빴다고 해야 할까? 

이 책 역시 읽는 게 수월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먼저 알려주고 싶은 게 있다.

이 책은 표지에 적힌 것처럼 80~90년대를 관통하는 대중음악의 흐름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이 뭐 별 것 있겠느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의 아이돌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시대 역시 어느 시기를 대표하는 많은 뮤지션들이 있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풀어 적으면 지금 이 책 한 권만큼씩은 될 것이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80~9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요약정리집' 정도가 될 것이다. 


 그 시기에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은 거의 '전혀' 모를 것이고, 어린아이였던 사람들은 후반부에 등장하는 몇몇 뮤지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거나 리메이크된 노래로 접해본 적이 있는 정도일 것이다. 

 결국 이 책은 80~90년대의 중심이 됐던 사람들에게 가장 큰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책이 될 수밖에 없다. 

 태생적 한계라고 할까?


 문학에서도 느끼는 점이지만 지금 이 시대는 깊이보다는 면적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결국 깊이 있는 음악에 대한 욕구도 그만큼 덜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흔해질수록 가치를 찾고, 진정으로 누릴 줄 아는 이들이 줄어드는 것은. 

몹시도 이상한 일이다.


 읽으면서 생각한 거지만 이 책은 후루룩하고 읽어 넘겨서는 그 가치를 알기 어려운 책인 것 같다. 소개하는 노래를 조금이라도 직접 들어보고 그 소개말의 의미를 찾아보는 과정을 거쳤다면 이 책에 대한 인상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책은 읽는 것이지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직된 마음가짐이 즐거운 책 읽기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러니 이 책을 읽게 된 이들이나, 읽으려는 이들이여, 이 책은 읽지 말고 들어보기를 권한다.



 짧게 어떤 사람이 읽으면 좋을지, 어떻게 읽으면 더 재밌을지만 적고 다시 짧은 감상을 적으려고 했건만 어쩌다 보니 구구절절 여러 말을 늘어놓고 말았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슬럼프였다. 이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저자는 뭔가 열심히, 심취하여 곡의 가치를 설명하고, 뮤지션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여러 수식어들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는데 와 닿지를 않는구나.' 하고 말이다.

 잔칫집의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름조차 모르는 뮤지션이 대부분이고, 특별히 좋아하거나 알고 있는 뮤지션도 거의 없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지만 공감하기 어려운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읽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몇 번이나 읽기를 그쳤다가 다시 집어 들고는 했다. 그렇게 며칠이 걸려서 겨우 읽을 수 있었다.


 역시 결론은 이 책은 읽는 데 써서는 안 된다는 거다.

이 책은 음악을 '듣는 데' 써야 한다. 

 소개하는 가수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 노래가 어떤지 들어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대중음악의 마스터피스라면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혹평한 책이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의 쓰임을 오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과 함께 경솔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후회라고 적고 싶지는 않다. 그것이 내가 느낀 인상이었고, 어쩐지 그렇게 적어둔 견해에 동의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음악을 책으로 한 책이다.

역사도 책이 되고, 정치도 책이 되고, 경제도 책이 되며, 사랑조차 책이 된다. 

이 각각의 책들은 그 쓰임 역시 제각각일 것이다. 그래야 할 것이다.


 2016년 1월 몇 권인가의 책을 읽으며 협소해진 시야와 좁아진 마음 길을 깨닫는다. 

균형을 잡아야겠다. 다시 마음도 다잡아야겠다.


 정리하자면 이 책은 80~90년대 대중음악에 관심이 있고, 조금이라도 이해가 뒤따르는 사람들이 읽었을 때 가장 쉽게 공감할 수 있을 만 한 책이다. 

 다음으로 최근 방송과 가요 프로그램을 통해 재해석되고 다시 불리고 있는 예전 노래가 마음에 든 사람들이 그 노래들과 함께 읽으면 더 많은 노래를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책이다.

 그 시기를 살지도 않았고, 대중가요에도 관심이 없다면 애석하지만 이 책을 읽어도 별다른 즐거움을 느끼기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책 속의 행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가 소개하는 뮤지션과 곡을 알아야 하고, 최소한의 이해가 전제되어야만 한다. 

관심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은 관심 있는 사람들만 읽어도 되는 것 아닐까?

 나처럼 무리인 줄도 모르고 덥석 읽었다가 쑥스러운 처지에 놓이고 마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이것 참, 쑥스럽구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6-01-26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독이라 생각하지 말고 선택과 집중이라 여기시면 되지 않을까요.
어차피 세상에 나온 책 나올책 다 못보거든요.그러니 책도 자기 스타일에 맞게 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죠.

대장물방울 2016-02-02 19:02   좋아요 0 | URL
^^ 좋은 조언 고맙습니다.
그렇게 생각할게요. 하하하
 
시민의 교양 (반양장) - 지금, 여기, 보통 사람들을 위한 현실 인문학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식인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자신을 따르고 배우려는 이들에게 올바른 인식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동시에 동의와 비판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열린 마음도 요구된다.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지식인의 책임은 무거워진다. 

 채사장은 지식인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제부터 적을 글은 채사장이 '지식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질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읽는 사람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는 '시민의 결정'에서의 한 마디를 먼저 적어보기로 하자.


347~8쪽

시민은 눈을 뜨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처럼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나를 바꾸는 것과. 세상을 바꾸는 것. 우선 나를 바꿔야 합니다. 나의 일에 열정을 쏟아붓고, 사람들과 경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그렇게 건강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의 경제체제를 선택하고, 이를 반영하는 하나의 정당을 지지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정당을. 신문을 접고, 티브이를 끄고, 타인의 말에 휩쓸리지 말고, 나의 현실을 직시한 후에 정말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가 무엇인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세계를 복잡하게 이해하려다 지치지 말고. 세계를 관통하는 단순함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일의 세계를 시장의 자유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정부의 개입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시민 각자가 현명하게 나의 이익에 따라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은 사회 전체를 살 만한 사회로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민은 세상의 주인이고, 역사의 끝이며, 그 자체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길어졌지만 중략 없이 전부 옮겨 적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여기 적혀 있는 말이 저자가 내린 진정한 결론인가 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이 짧다면 짧은 문단 안에는 책의 다른 부분에서 했던 말들을 대부분 뒤집거나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표현들이 그득하다. 동시에 '혹시나', '어쩌면' 하는 생각에 그쳤던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예를 하나만 들자면 '사람들과 경쟁하고'라는 표현이 있다. 저자는 앞에서 교육의 구조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교육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경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결론을 보자. 경쟁을 하는 것이 건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작은 것을 끄집어내어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다음 문단을 보자. 

 '하나의 경제체제를 선택', '하나의 정당을 지지', '신문을 접고, 티브이를 끄고, 타인의 말에 휩쓸리지 말고, 나의 현실을 직시한 후에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가 무엇인지 현명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최악의 해석을 해보자. '하나의 정당'이 지배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어떤 사회에 '하나의 정당'만이 존재하는가? 낯이 익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재국가다. 신문, 티브이, 타인의 말을 모두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불통'이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란 무엇인가? 개인 이기주의 혹은 집단 이기주의다.


 말도 안 되는 해석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논리적 비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 적은 말은 저자의 말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복잡하게 이해하려다 지치지 말고. 세계를 관통하는 단순함에 집중'해서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내가 적고도 이건 조금 심한 비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좀 더 찾아봤더니 저자가 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341쪽

거대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을 떼야한다. 그리고 그 첫걸음 우선 세계를 단순하게 추상화해서 잘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분석'은 그 의미 자체가 자르고 나누는 것을 말한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세계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아하, 거대한 세계는 자르고 나눠서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쓴 방법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저자가 한 말을 자르고 나눠서 이해하려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분석'이 잘못된 것일까?


자, 이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왜 책 속의 문장을 적고 그 문장을 억지스럽게(어쩌면 자연스럽게) 해석하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했는지부터 이야기하려고 한다. 

 먼저 결론부터 적어보면, 위에서 적었던 해석과 그 해석에 따라 내린 결론은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옳기만 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분석'은 올바른 분석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올바른 이해에 닿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그럴까? 

 마찬가지로 결론부터 적어보면, 세계를 이해할 때에 단순화나 추상화를 통한 단편적 이해는 그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리 개개인이 '신'적인 지식과 정보를 지닌 동시에 그 정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한 그 결론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조금이라도 경솔한 판단이나 잘못된 결론에 닿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합적이고 신중한 이해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여러 차례 '단순화'와 '나누기'를 강조한다. 전체를 이해하기는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기에 그 대상을 여러 개로 나누고 쪼개어 하나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인 이해는 무수한 오해를 낳는다. 저마다 자기가 이해한 것이 '옳다'고 믿어버리게 된다. 마치 네 사람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는 다리를 만진 사람은 통나무 같다고 하고,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같다고 하고, 상아를 만진 사람은 매끄럽다고 하고, 코를 만진 사람은 야구방망이 같다고 말하는 식인 것이다. 네 사람은 모두 틀리지 않았지만 누가 맞다고도 할 수 없다. 

 여전히 나누고, 잘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올바른 이해에 닿는 데 조금의 도움도 줄 수 없다면 일 년에 한두 번 쓸 뿐, 그 외의 날에는 창고에 박혀 있는 병풍과 다를 것이 없다. 현실을 재확인시킬 뿐인 지식 역시 그 한계가 명확하다. 지식은 현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미래에 기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 이제 현실을 알았으니 현실에 안주해보자"하고 말하는 것은 지식의 역할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처음으로 읽어본 채사장의 저서다. '시민의 교양'이라는 제목은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이해하기 쉽게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어왔기에 조금은 기대를 하기도 했다. 읽기 시작할 때는 이 책이 이렇게까지 어렵게 읽힐 줄은 상상도 못했다. 


 프롤로그에서였다.

005쪽

 나를 바꿀 것인가, 세계를 바꿀 것인가는 근원적인 대립이다. 세계와 나, 사회와 개인이라는 구분은 근본적으로 갈등의 관계다. 사회는 개인을 유혹한다. 넓은 사회의 품에 안겨 쉬라고. 반대로 개인은 극복하고 싶다. 사회를 딛고 일어서려 한다.


 결론과 프롤로그를 통해 저자가 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저자는 '대립'과 '경쟁'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나'와 '세계'가 대립한다고 말하는지는 대략 추측이 된다. 시민이 곧 '자유'다라는 말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기에 갈등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럴 지도 모른다. 사회와 개인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는 개인을 필요로 하고, 개인 역시 사회가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결국 근원적인 수준에서 대립인지 조화인지를 논하기란 무척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저자가 말하는 단순화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 세계에는 단순하게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올바른 이해에 닿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의 최소한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단순히 생각해보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인은 사회의 최소한의 구성요소인 동시에 필수적인 요소다. 사회를 이해하려면 개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을 이해하는 것이 간단한가? 아니다. 구성원 가운데 하나인 개인을 이해하는 것조차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하나의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정보가 필요하며, 그 정보를 다양한 방향에서 해석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개인을 이해하는 데에도 이만큼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회를 이해하는데 그것을 나누고 쪼개어 단순하게 만들어 이해하면 된다는 말을 정말 믿어야 할까?


 다시 341쪽을 보자.

세계를 자르기 위한 기준은 다양하다. 세계를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 있고, 남한과 북한으로 나눌 수도 있으며, 선과 악, 미와 추, 나와 타자, 동양과 서양, 배운 자와 못 배운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눌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기준 중에서 완벽하게 잘못되거나 틀린 기준이란 없다.


 저자는 세계를 자르기 위한 기준이 다양하다고 말하며 여러 기준을 나열한다. 그런데 이 나열이라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남자와 여자는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자. 남한과 북한 역시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고 하자. 하지만 선과 악은 어떤가? 둘로 확실히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는가? 미와 추는 어떤가? 둘로 나누어 떨어지는가? 나와 타자는 어떤가? 내가 없이 타자가 있을 수 없고, 타자가 없이는 나 역시 없는 것이 아닌가? 동양과 서양? 아직도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뚜렷하고 분명한가?  배운 자와 못 배운자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어느 정도 가진 것을 기준으로 하겠나?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보자. 하지만 단순화가 곧 이분법적 사고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화 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사회를 해석하는 프레임은 점점 좁아진다. 넓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조차 볼 수 없게 되고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좁혀진 프레임은 선택의 자유를 억압한다. 누가 선택을 억압했는가? 좁혀진 프레임을 가진 자기 자신이다. 결국 당연하게도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간단히 표현하면 이것이 단순화의 오류다. 


 더 거대한 이익, 미래를 위해서 사소한 것들은 제쳐두고 큰 축을 이해하고 거기에 집중하자는 식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유행하던 '파이 키우기'와 닮아 있다. 아직 파이를 나눌 만큼 커지지 않았으므로 조금 더 참으며 파이를 키우자고 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 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현실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현실적이다. 

처음에는 '혹시'나 싶었던 의문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확실해지고 뚜렷해졌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견해를 풀어놓는다. 대부분의 경우 두 견해의 충돌 개념으로 설명이 시작되어 끝이 난다. 또한 그 충돌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필연적인 동시에 자연스러운 것처럼 이야기된다. 

 이런 서술 방식이나 구조는 현재 우리 사회의 프레임을 긍정 혹은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란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객관적인 현실 인식이란 개인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파악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자의 현실적인 이해에 관한 '감상문'처럼 읽힌다. 

 지금 내가 적고 있는 것은 저자의 감상문에 대한 감상문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저자가 이 책 속에서 인정하는 문제나 현상에 관한 정의는 대부분 '현시점에서의 정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이야기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저자의 현시대 읽기가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올바른 지적, 필요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읽기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읽었던 이유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저자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나 하기로 한다.

 오래전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난 후에 지금까지도 가끔 궁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왜 소크라테스는 도망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도덕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악법도 법이다"라는 신념 때문인 줄 알았다. 시험에 나온다고 하기에 외우기는 했지만 솔직히 소크라테스처럼 현명하다는 사람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로 소크라테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을 몇 권인가, 몇 번인가를 더 읽고 난 후 조금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가 법을 지키기 위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해 본 거였다.

 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법'이 아니었다. 그 법이 지켜줄 자신이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소중한 것이라면 무엇일까? 우선 내적인 요인으로 자신이 평생 동안 믿고, 말하고, 나눠왔던 신념이다. 어떤 것은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내적인 요인 외에도 외적인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킨 법이 지켜줄 소중한 것들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망명을 결심했다면 그와 그의 부인,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고향의 의미가 조금 덜 중요해졌지만 당시 사회는 '그리스인'이라는 사실이 하나의 자부심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이방인과 외국인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명백한 차별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큰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큰 사람일수록 자신의 정체성의 근원을 잃었을 때의 충격이 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하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데에도 이렇게 많은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도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왜 죽음을 받아들였는지는 그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세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일까? 단순하게 이해하면 왜곡될 수 있고, 거대한 걸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면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함은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돌리지 말자. 귀를 막지 말자. 생각을 닫지 말자. 마음도 열어두자. 


 권리란 무엇인가? 

이것 역시 복잡하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정의 내려보겠다.


권리란 '다수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권리'에 내린 가장 단순한 정의다. 

국민의 권리 혹은 시민의 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권리는 국민이 처음부터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투표를 두고 '정당한 권리의 행사'라고 말한다. 국민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여 그 권리를 이양한다. 다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대통령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자리에 앉아 국민의 권리를 대신 행사한다. 이것이 지금의 시스템이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원래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다수의 국민을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원래 국민의 권리였던 것을 돌려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국민이 시스템을 수용하고 적응하는 쪽으로 뜻을 바꾼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일종의 무기력이 학습된다. 원래 그렇지 않았던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바꾸려고 하지도 않고, 바꿀 수도 없게 되며, 바꾸지 않으려는 쪽으로 계속 옮아간다.  


 결과적으로 시스템은 고착되고 원래 권리를 가졌던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권리였다는 것조차 잊은 채 살아간다. 자신의 권리를 간단히 포기할 수 있게 된 이유 역시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권리의 행사보다 시스템의 상위에 편입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것이 무한한 경쟁의 고리를 끊을 수 없게 한다. 마치 치킨 게임처럼 먼저 멈추는 사람이 지는 것, 패배하는 것, 루저가 되는 것이라 믿게 된 것이다.

 현재의 프레임 안에서는 아무리 넓게 보려고 해도 더 많은 것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미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고, 지혜를 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프레임을 넘어서서 사고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부족하다. 

 아니다. 이런 판단은 너무 섣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현재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는 좋은 디딤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디딤돌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냉철한 현실 인식이 우선 되어야 한다. 

 

 지금의 한국은 마치 야생의 세계 같다. '생존'을 위해 혈안이 되어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잠시라도 방심하면 지금 갖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내 몫까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불안에 떨어야만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헬조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헬조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본인이 헬조선이 그 수명을 연장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헬조선인가?"하는 물음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헬조선이니까"하는 납득과 수용이 더 흔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권위는 인정하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헬조선'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헬조선 담론은 권위를 갖고 그 우위를 강화해 갈 것이다. 


 아,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인지 이제 내가 쓰기 시작한 글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끝으로 이 책 <시민의 교양>에 대해 한두 마디만 보태기로 한다.

이 책은 분명 '현실 인문학'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인문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의 보통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책 속에 담기 내용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 쓰기보다 현실을 인식하는 하나의 견해로 활용하기를 권한다. 저자가 말하는 지금과 독자가 생각하는 지금이 반드시 일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다름'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곰곰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아, 정말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다.

도대체 '양질의 일자리'란 게 무엇인가?

혹시 이 구분의 기준에 대해 하는 것이 있는 분은 꼭 의견 남겨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읽는 동안, 단 한 줄의 메모도 남기지 않았다. 사실 이건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의미심장하다 여기며 읽었을 뿐 아니라 작가의 시선이나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 판단과 행동들이 무척 흥미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메모는 단 한 줄도, 한 단어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메모가 있고 없고 가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머릿속에 떠오른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좋지 않은 쪽으로 기울어 버릴 것 같아 미묘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하나의 가능성은 이 책이 무척 쉽고 부드럽게 읽혔기에 읽는 동안 읽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어쩐지 너무나 '병신'같은 두 친구의 생각이나 행동인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좋지 않은 쪽인지 알겠는가? 혹여 몹시 궁금해지고 말았다면 읽어볼 일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메모도 남아있지 않기에 이제부터 적을 감상은 간단명료 하면서  단순 유치할 예정이다.

사과를 해야 할까?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사과다. 그 이유는 이 책 속에 있다. 이제부터 적을 감상이  터무니없는데다 어처구니까지 없고 거기에 더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된다 해도 그것 역시 내가  사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건 '사과'때문이다. 죄가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사과의 문제로 시작되어 사과의 문제로 끝날 모양이다. 왜 사과의 문제로 시작되느냐고? 그건 성경에 적혀 있으니 성경을 읽어보면 알 일이다.


 신선한 소설이다. 지금까지 읽은 한국 작가의 소설이 많지는 않지만 그 가운데서도 독특한 맛이 나는 그런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독특한 맛은 이야기가 끝난 후에 등장한 작가의 말로 적잖이 쉬어버렸다. 작가는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렸다. 본래 썼던 소설을 절반으로 줄였든, 누구의 도움을 받았든 그건 자기들끼리 나눴어야 할 '뒤엣말'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이 많았다'랄까. 

앞에서 좋은 작품으로 무수한 말을 한 뒤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수다스럽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말이다. 하나는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이라는 것이다. 둘은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222쪽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어떤 것들의 이면이 궁금하다면 끝과 시작, 위와 아래를 뒤집어볼 것. 그것이 내 소설 쓰기의 기조가 되어버렸다. 이번 소설 또한 그런 기조 위에서 쓰였다. 그래서 이제 나에겐 '죄'의 반대말은 '무죄'가 아닌, '사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가운데 마지막 문장인 '죄의 반대말은 무죄가 아닌 사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부분이 와 닿았다. 

그래서다. 그래서 저자의 너무 많은 말은 '무죄'로 하기로 했다. 


 작가는 '죄'와 '사과'를 가지고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가 지어낸 이야기 속 주인공은 조금은 모자란 두 친구다. 두 친구는 이른바 '시설'에서 만나 알고 지내다, 어느 날 어쩌다가 보니 시설의 비리를 폭로하는 '내부 고발자'가 된다. 시설의 원장을 포함한 직원들은 구치소로 끌려가고 남은 원생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주인공인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친구 시봉에게는 집이 있었다. 그들은 시봉의 집으로 간다. 며칠이 지났을 때 두 친구는 그들을 처남들이라 부르는 시봉의 여동생의 동거인의 부추김으로 일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닿는다.

"우리가 가장 잘하는 걸 하자."

그 둘이 가장 잘하는 것이란 '사과'다. 보통 사과는 마음을 담아 잘못한 상대, 그러니까 죄를 지은 상대에게 용서를 비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신 사과를 해주는 일을 시작한다. 

 '사과 대행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착안하고 실행하는 그들의 무모해 보이는 시도는 의외의 순간에 결실을 맺는다. 그리고 그 결실은 어떤 이들에게는 상상하지 못했던 불행과 맞닿아 있었다. 

 두 친구는 '죄'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위들이 사과해야만 하는 '죄'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보통의 지각과 사고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죄'가 생겨났고, '사과해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 


 죄는  길바닥의 돌부리 같은 거였다.

작은 돌인 줄 알고 발로 차 버리려고 시도한 사람의 발가락을 부수는 뿌리 깊은 돌부리 말이다. 

사소한 것이 죄가 된다. 그리고  사소할수록 큰 죄가 된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 사과할 생각도 없다.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는 '미련함'을 그들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섬세한 사람들, 죄를 알고, 사과를 아는 사람들은 그 죄가 차고 넘쳐서 견딜 수 없게 되면 정신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광인 가운데 천재가 많은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 말은 헛소리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세상이 그렇다. 다 그런 거다. 


 어쩐지 웃으며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이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캄캄해진다. 마치 그런 '어둠'이 꼭 필요한 것인 것마냥 어둡게 만들어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과에 인색한 편이다. 아니다. 정확히는 그런 일 정도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이유는 제각각이고 또 많고도 많다.

자기 말고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잘못을 무수히 저지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자기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 일부러 사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사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런 특징들은 개인에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혹은 국가에서도 두드러진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과 부재의 시대'에서 처럼 말이다.


 '사과는 잘해요'라는 말은 몹시 비꼬는 말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주인공인 두 친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적었듯 이 둘은 죄를 무척 잘 알았다. 어떤 사과는 할 수 있고, 어떤 사과는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두 친구는 외줄 위에서 비틀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잡아가며 나아가는 곡예사를 정말 살짝 밀친 것 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그 곡예사는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떨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 편안하게 해 준 게 맞다. 그 아래에  안전그물만 쳐져 있었다면 말이다(보통은 안전그물 따위 없다는 게 문제다). 


 이 이야기는 죄와 사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너머로 엿보이는 것은 '책임'이라는 엉뚱한 녀석이다. 죄가 있으면 그 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책임지는 방법은 여럿이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반드시 자기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순간에는 가장 원하지 않았던 순간에, 가장 바라지 않았던 형태로 책임을 져야 하는 지경에 놓일 수도 있다. 

 거의 모든 범죄자가 붙잡히는 순간에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제가 안 그랬어요." 혹은 "저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우스개가 아니라 진담이다. 그들은 정말 자신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죄가 아니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보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들이 책임지지 않는, 죄의 무게를 누군가가 감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그 형태와 위치가 바뀔 뿐 사라지거나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혹시 이 세상의 죄와 잘못 역시 같은 원리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더니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잘못한 것이  틀림없는' 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사과를 '잘못한 것이라고는 살아가는  것뿐인' 사람들이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흩어지지 않는다. 

 

 "사과라도 하면 밉지나 않지."

이 말은 전적으로 완전히 거짓말이다.

사과를 해도 미운 건 미운 거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 말에도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럼 도대체 누구를 미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단순히 형식적인 사과는 또 다른 사과할 거리를 만든다. 책임은 누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거다. 

아아, 가볍게, 정말 가뿐하게 적으려고 했던 감상이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걸까?

느닷없는 줄 알지만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감상을  마무리해야겠다. 

뭐, 어쩌겠는가, 사과 말고는 잘 하는 것이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 것을.


아, 이 이야기의 결말은 '비극'이다. 

고의적인 스포일러에 대해 사과하는 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의 시 속의 문장이다. 동시에 밀란 쿤데라의 <불멸> 속에서 인용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불멸'이라는 제목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문장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는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읽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 호기심을 갖고 이 글을 읽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문장을 적어두기로 한다. 이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다섯 번 이상을 읽었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눈치챌 수 있었다. 작가의 장치를 말이다.


 520쪽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고,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아녜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했다.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 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작가는 왜 '물망초'를 자꾸만 언급하는 걸까? 그 이유는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알겠지만 물망초의 꽃말이 "'Forget me not' 나를 잊지 마세요." 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도 아니고, 한 송이, 그것도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자취로서 간직하고 싶어 했다는 표현에서 불멸에 대한 염원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거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런 의미의 말을 한다.

"행간을 건너뛰어 읽으면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정말 서둘러 행간을 건너뛰며 읽었다가는 다른 사람에게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줄 때 엉뚱한 결말을 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잘 짜인 이야기인 동시에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라는 거다.


 이 복잡함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대략 그 이유들을 나열해보면 하나는 '불멸'이라는 불분명한 주제를 제목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이야기 속에 무수한 '상징'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셋은 어디부터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모호하다는 거다. 넷은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기 어렵기에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인지 알기 어렵다는 거다(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다섯은, 아마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적고 싶지 않다. 뭐가 뭔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이 소설은 기묘하다. 읽기 어려운 문장은 거의 없다. 술술 잘 읽히기까지 한다. 그러나 한 순간 방심하면 어떻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는지 이전 페이지를 돌아봐야만 하게 된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과 육신을 오가며 삶과 죽음을 생중계하는 것도 같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이게 쉬운 소설인지, 어려운 소설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책을 읽고 나면 밀란 쿤데라의 다른 작품을 읽을 때 상당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거다.  <농담>이나 <웃음과 망각의 책>은 확실히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게 될 거라는 거다. 물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말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하고는 비슷비슷할 것 같지만 말이다). 아아, <무의미의 축제>도 더하자.


 밀란 쿤데라는 무척 좋아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본래 그의 문장이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짤막한 문장 속에 다양한 의미가 담긴 상징을 새겨 넣는 재주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애매한 처지로 몰고 가면서도 동시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긴장을 유지하는 감각이 무뎌 보이지만 실제로는 날카로운 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진한 여운이 한참이나 지속되는 걸 느낄 수 있는 까닭이 그런 숨겨진 날카로움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가 한 수영장에서 지인인 아베나리우스를 기다리는 동안 한 나이 든 여성을 본다. 그 여성은 젊은 강사에게 수영을 배우는 중이었는데 물 속에서 내뱉는 숨소리가 마치 증기기관차 같아 소설가의 눈길을 끈다(이유는 다를 수 있지만 아무튼 눈길을 끈다). 그 여성은 강습이 끝나고 강사와 헤어지며 하나의 몸짓을 한다. 그 몸짓을 보는 순간 소설가는 상상 속에 한 여자를 만들어 낸다. 필멸하는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멸성을 가진 몸짓을 통해 소설가가 만들어 낸 여자의 이야기인 거다. 그 여자의 유년부터 죽음까지가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라면 줄거리가 되겠다. 그런데 소설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이 여자의 주변에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들은 전혀 무관해 보이면서 관계가 있으며, 무의미한 인물 혹은 사건처럼 보이는 것들 역시 돌고 돌아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이야기는 '불멸'에 관한 것이다. 그렇기에 불멸성을 획득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사람이 괴테와 헤밍웨이다. 하지만 왜일까? 소설가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 인물들의 불멸성은 신성하거나 숭고한 것이라기보다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그려진다. 기억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가 아닌 '이미지화'된 기억들뿐이다. 헤밍웨이보다 한참 오래전에 죽어 불멸의 반열에 오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죽는 법'을 깨우치고자 한다. 물론 이미 죽은 사람이기에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소설 속에서 색다른 성격과 이력을 부여받아 살아났던 인물이기에 실제와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오래전에 죽은 그는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 부활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헤밍웨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지 않은 말까지도 작가의 상상에 의해 늘어놓아야 했고, 고백해야 했으며, 움직여야 했다. 그들의 불멸성이 우스운 것이 되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은 것이 절대적이지도, 자율적이지도, 그들의 의지가 개입할 수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줄거리라고, 간략하게 적겠다고 했음에도 아직 이야기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뭐, 이야기가 궁금하면 스스로 읽어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밖에는.


 소설 속에서 괴테나 헤밍웨이가 획득한 '불멸'은 하나의 '벌'이다. 그들이 책을 썼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책을 썼다고 해서 불멸을 얻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자기의 모든 작품을 지상에서 지워버리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어떤 작가들은 한 세대는커녕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잊히고 만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무엇은 불멸하고, 무엇은 필멸하며, 누구는 기억되고, 누구는 잊히는 걸까? 기억된다고 해도, 불멸한다고 해도 정말 기억되고 불멸하는 것은 그 본래의 존재일까 아니면 다른 기억될만한 어떤 것일까? 

 이 소설은 그런 생각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시에서부터 음악에까지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 복잡한 실타래 속을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기묘하고도 우스웠던 것은 인간이 거의 공통적으로 불멸을 바라지만, 그 불멸이란 '죽음'이라는 필멸의 과정을 지난 후에야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살아있으면서 '불멸'을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불멸에 죽음이라는 과정이 개입하는 필연적인 이유다. 또 하나 우스웠던 것은 앞에서도 적었던 것처럼 '책을 쓴 죄로' 불멸을 선고받았다고 이야기하는 '불멸자'들 입장에서의 진술이다. 그들은 불멸을 바랐거나, 불멸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것임에도 조금은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 후에도 자신의 평판이나 기억되는 이미지를 염려하는 죽은 자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왠지 웃음이 나지 않는가?

  

 한때 잊히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무엇이든 좋으니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도 하고, 서툰 솜씨로 적은 글을 나눠주기도 했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은 거의, 전혀 도움이 된 것 같지 않다는 결론에 닿았을 뿐이다. 

 이 작품은 불멸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그럼에도 불멸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다. '어떤 것'은 글이나 책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으며, 사람들 속에 남을 기억일 수도 있다. 그저 어떤 형태라도 좋으니 오래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웠던 거다. 

 또 하나는 어차피 기억되는 것, 불멸하게 되는 것이 단편적인 '이미지'와 실제의 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편집되고 왜곡된 '기억'이라면 차라리 잊히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죽음과 함께 죽은 자에게 어울리는 망각 속으로 가라앉고자 하는 욕망이 새삼 깨어나는 것을 느꼈던 거다. 

 나는 기억되고 싶은 것인가? 혹은 잊히고 싶은 것인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게 되는 거다. 


 무엇보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불멸 이전에 이 삶 속에서의 모습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온 마음을 차지한 채 한동안 놓아주지 않았었다는 거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나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기억만 남겨달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나만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는 '거울'과 '카메라'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것 같다. 그리고 거울은 자아도취를 의미하는 것 같다. 불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시선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받아들인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섭하고, 비난하고, 옹호하고, 칭송하며, 실망하고, 사랑하고, 미워할 것이다. 이 모든 감정의 도가니 속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멸이 아닐까?

 그러나 상상 속의 인물인 '아녜스'조차 물망초 한 송이만큼이라도 기억되고자 소망한다. 실제 존재했던, 살아왔던 이들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불멸하기를,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소망을 이루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꾸고 희망한다. 그것이 필멸하는 존재,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대한 해석은 모호하다. 여성의 잉태, 여성성, 몸짓, 아름다움. 이러한 것들이 더 항구적인 가치를 지니기에 결국 남성들 역시 여성적이 되어갈 것이라는 예언인 것 같기도 하고,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하고, 과학이 예언하는 것처럼 먼 미래에는 오로지 여성만이 남을 것이며 남성은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 인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호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남성보다는 여성 쪽이 더 '불멸'하는 가치를 더 많이 품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결론이 나는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감이다. 여성은 약자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에 존중받아야 하고 또 사랑받아야 하는 거다. 


 사랑조차 불멸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감정이란 불멸과는 거리가 먼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만큼 불멸에 가까이 있다고 믿어지는 것도 없다. 거짓도, 미움도, 질투와 증오조차도 사랑과 닮아 있으니, 오히려 불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는 넘치도록 사랑하는 이가 아니겠는가.

 일단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물망초 한 송이를 두 눈에 품어 두기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화재감시원 코니 윌리스 걸작선 1
코니 윌리스 지음, 김세경 외 옮김 / 아작 / 201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코니 윌리스 첫 책인줄 알았건만 <개는 말할 것도 없고>가 코니 윌리스라 깜짝 놀랐다.
역시 기대할만한 책이었다는 예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