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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교양 (반양장) - 지금, 여기, 보통 사람들을 위한 현실 인문학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5년 12월
평점 :
지식인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자신을 따르고 배우려는 이들에게 올바른 인식과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게 도와야 한다는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동시에 동의와 비판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열린 마음도 요구된다.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일수록 지식인의 책임은 무거워진다.
채사장은 지식인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제부터 적을 글은 채사장이 '지식인'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질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건 읽는 사람의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적혀 있는 '시민의 결정'에서의 한 마디를 먼저 적어보기로 하자.
347~8쪽
시민은 눈을 뜨고 이렇게 말했다.
"지금처럼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건 두 가지입니다. 나를 바꾸는 것과. 세상을 바꾸는 것. 우선 나를 바꿔야 합니다. 나의 일에 열정을 쏟아붓고, 사람들과 경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보면서 그렇게 건강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세상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의 경제체제를 선택하고, 이를 반영하는 하나의 정당을 지지해야 합니다. 나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정당을. 신문을 접고, 티브이를 끄고, 타인의 말에 휩쓸리지 말고, 나의 현실을 직시한 후에 정말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가 무엇인지 현명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세계를 복잡하게 이해하려다 지치지 말고. 세계를 관통하는 단순함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일의 세계를 시장의 자유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정부의 개입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시민 각자가 현명하게 나의 이익에 따라 선택을 할 때, 그 선택은 사회 전체를 살 만한 사회로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민은 세상의 주인이고, 역사의 끝이며, 그 자체로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길어졌지만 중략 없이 전부 옮겨 적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여기 적혀 있는 말이 저자가 내린 진정한 결론인가 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이 아니라면 이 짧다면 짧은 문단 안에는 책의 다른 부분에서 했던 말들을 대부분 뒤집거나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표현들이 그득하다. 동시에 '혹시나', '어쩌면' 하는 생각에 그쳤던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예를 하나만 들자면 '사람들과 경쟁하고'라는 표현이 있다. 저자는 앞에서 교육의 구조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교육의 문제 가운데 하나가 경쟁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결론을 보자. 경쟁을 하는 것이 건강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작은 것을 끄집어내어 전부인 것처럼 말한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다음 문단을 보자.
'하나의 경제체제를 선택', '하나의 정당을 지지', '신문을 접고, 티브이를 끄고, 타인의 말에 휩쓸리지 말고, 나의 현실을 직시한 후에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가 무엇인지 현명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최악의 해석을 해보자. '하나의 정당'이 지배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어떤 사회에 '하나의 정당'만이 존재하는가? 낯이 익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독재국가다. 신문, 티브이, 타인의 말을 모두 보지 않고, 듣지 않는다면 무엇인가? '불통'이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란 무엇인가? 개인 이기주의 혹은 집단 이기주의다.
말도 안 되는 해석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논리적 비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위에 적은 말은 저자의 말을 따른 것이기도 하다.
'세계를 복잡하게 이해하려다 지치지 말고. 세계를 관통하는 단순함에 집중'해서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조금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내가 적고도 이건 조금 심한 비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좀 더 찾아봤더니 저자가 한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341쪽
거대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을 떼야한다. 그리고 그 첫걸음 우선 세계를 단순하게 추상화해서 잘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으로서의 '분석'은 그 의미 자체가 자르고 나누는 것을 말한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세계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아하, 거대한 세계는 자르고 나눠서 이해하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내가 쓴 방법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저자가 한 말을 자르고 나눠서 이해하려 시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 '분석'이 잘못된 것일까?
자, 이제 진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왜 책 속의 문장을 적고 그 문장을 억지스럽게(어쩌면 자연스럽게) 해석하고, 거기에 이의를 제기했는지부터 이야기하려고 한다.
먼저 결론부터 적어보면, 위에서 적었던 해석과 그 해석에 따라 내린 결론은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옳기만 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식의 '분석'은 올바른 분석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올바른 이해에 닿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왜 그럴까?
마찬가지로 결론부터 적어보면, 세계를 이해할 때에 단순화나 추상화를 통한 단편적 이해는 그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우리 개개인이 '신'적인 지식과 정보를 지닌 동시에 그 정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신'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 한 그 결론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조금이라도 경솔한 판단이나 잘못된 결론에 닿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합적이고 신중한 이해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저자는 여러 차례 '단순화'와 '나누기'를 강조한다. 전체를 이해하기는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기에 그 대상을 여러 개로 나누고 쪼개어 하나하나씩 이해해 나가야 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인 이해는 무수한 오해를 낳는다. 저마다 자기가 이해한 것이 '옳다'고 믿어버리게 된다. 마치 네 사람의 장님이 코끼리를 만져보고는 다리를 만진 사람은 통나무 같다고 하고, 귀를 만진 사람은 부채 같다고 하고, 상아를 만진 사람은 매끄럽다고 하고, 코를 만진 사람은 야구방망이 같다고 말하는 식인 것이다. 네 사람은 모두 틀리지 않았지만 누가 맞다고도 할 수 없다.
여전히 나누고, 잘라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가?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올바른 이해에 닿는 데 조금의 도움도 줄 수 없다면 일 년에 한두 번 쓸 뿐, 그 외의 날에는 창고에 박혀 있는 병풍과 다를 것이 없다. 현실을 재확인시킬 뿐인 지식 역시 그 한계가 명확하다. 지식은 현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데 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미래에 기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 이제 현실을 알았으니 현실에 안주해보자"하고 말하는 것은 지식의 역할이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처음으로 읽어본 채사장의 저서다. '시민의 교양'이라는 제목은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이해하기 쉽게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는 소문을 들어왔기에 조금은 기대를 하기도 했다. 읽기 시작할 때는 이 책이 이렇게까지 어렵게 읽힐 줄은 상상도 못했다.
프롤로그에서였다.
005쪽
나를 바꿀 것인가, 세계를 바꿀 것인가는 근원적인 대립이다. 세계와 나, 사회와 개인이라는 구분은 근본적으로 갈등의 관계다. 사회는 개인을 유혹한다. 넓은 사회의 품에 안겨 쉬라고. 반대로 개인은 극복하고 싶다. 사회를 딛고 일어서려 한다.
결론과 프롤로그를 통해 저자가 이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저자는 '대립'과 '경쟁'을 자연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 '나'와 '세계'가 대립한다고 말하는지는 대략 추측이 된다. 시민이 곧 '자유'다라는 말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가 시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밖에 없기에 갈등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그럴 지도 모른다. 사회와 개인은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는 개인을 필요로 하고, 개인 역시 사회가 없는 세계를 상상할 수 없다. 결국 근원적인 수준에서 대립인지 조화인지를 논하기란 무척 복잡하고 까다로운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저자가 말하는 단순화의 한계가 드러난다.
이 세계에는 단순하게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올바른 이해에 닿을 수 있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의 최소한의 구성요소는 무엇인가? 단순히 생각해보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은 개인이다. 개인은 사회의 최소한의 구성요소인 동시에 필수적인 요소다. 사회를 이해하려면 개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을 이해하는 것이 간단한가? 아니다. 구성원 가운데 하나인 개인을 이해하는 것조차 간단하지도 단순하지도 않다. 하나의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정보가 필요하며, 그 정보를 다양한 방향에서 해석하는 과정이 요구된다.
개인을 이해하는 데에도 이만큼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사회를 이해하는데 그것을 나누고 쪼개어 단순하게 만들어 이해하면 된다는 말을 정말 믿어야 할까?
다시 341쪽을 보자.
세계를 자르기 위한 기준은 다양하다. 세계를 남자와 여자로 나눌 수 있고, 남한과 북한으로 나눌 수도 있으며, 선과 악, 미와 추, 나와 타자, 동양과 서양, 배운 자와 못 배운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나눌 수도 있다. 이러한 다양한 기준 중에서 완벽하게 잘못되거나 틀린 기준이란 없다.
저자는 세계를 자르기 위한 기준이 다양하다고 말하며 여러 기준을 나열한다. 그런데 이 나열이라는 것이 조금 이상하다. 남자와 여자는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하자. 남한과 북한 역시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고 하자. 하지만 선과 악은 어떤가? 둘로 확실히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는가? 미와 추는 어떤가? 둘로 나누어 떨어지는가? 나와 타자는 어떤가? 내가 없이 타자가 있을 수 없고, 타자가 없이는 나 역시 없는 것이 아닌가? 동양과 서양? 아직도 동양과 서양의 구분이 뚜렷하고 분명한가? 배운 자와 못 배운자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어느 정도 가진 것을 기준으로 하겠나?
단순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해보자. 하지만 단순화가 곧 이분법적 사고를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단순화 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사회를 해석하는 프레임은 점점 좁아진다. 넓게 보고 생각하고 판단해야 할 것조차 볼 수 없게 되고 생각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좁혀진 프레임은 선택의 자유를 억압한다. 누가 선택을 억압했는가? 좁혀진 프레임을 가진 자기 자신이다. 결국 당연하게도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남아있지 않게' 된다.
간단히 표현하면 이것이 단순화의 오류다.
더 거대한 이익, 미래를 위해서 사소한 것들은 제쳐두고 큰 축을 이해하고 거기에 집중하자는 식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유행하던 '파이 키우기'와 닮아 있다. 아직 파이를 나눌 만큼 커지지 않았으므로 조금 더 참으며 파이를 키우자고 하는 이야기 말이다.
이 책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오히려 지나치게 현실적이라고 생각될 만큼 현실적이다.
처음에는 '혹시'나 싶었던 의문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조금씩 확실해지고 뚜렷해졌다. 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고 견해를 풀어놓는다. 대부분의 경우 두 견해의 충돌 개념으로 설명이 시작되어 끝이 난다. 또한 그 충돌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필연적인 동시에 자연스러운 것처럼 이야기된다.
이런 서술 방식이나 구조는 현재 우리 사회의 프레임을 긍정 혹은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처럼 보인다.
현실이란 지극히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객관적인 현실 인식이란 개인에게는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으로 파악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저자의 현실적인 이해에 관한 '감상문'처럼 읽힌다.
지금 내가 적고 있는 것은 저자의 감상문에 대한 감상문이 되는 것이고 말이다.
저자가 이 책 속에서 인정하는 문제나 현상에 관한 정의는 대부분 '현시점에서의 정의'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의 이야기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생각과 의지를 대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저자의 현시대 읽기가 잘못되었다거나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올바른 지적, 필요한 변화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읽기 힘들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읽었던 이유도 이런 생각을 하는 저자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엉뚱한 이야기를 하나 하기로 한다.
오래전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고 난 후에 지금까지도 가끔 궁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왜 소크라테스는 도망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도덕 시간에 배운 것처럼 "악법도 법이다"라는 신념 때문인 줄 알았다. 시험에 나온다고 하기에 외우기는 했지만 솔직히 소크라테스처럼 현명하다는 사람이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 후로 소크라테스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을 몇 권인가, 몇 번인가를 더 읽고 난 후 조금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소크라테스가 법을 지키기 위해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다르게 생각해 본 거였다.
왜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가?
이렇게 생각했다. 소크라테스가 지키려고 했던 것은 '법'이 아니었다. 그 법이 지켜줄 자신이 소중하다고 믿는 것들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소중한 것이라면 무엇일까? 우선 내적인 요인으로 자신이 평생 동안 믿고, 말하고, 나눠왔던 신념이다. 어떤 것은 목숨보다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내적인 요인 외에도 외적인 요인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킨 법이 지켜줄 소중한 것들을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망명을 결심했다면 그와 그의 부인,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평생을 살아온 고향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지금은 고향의 의미가 조금 덜 중요해졌지만 당시 사회는 '그리스인'이라는 사실이 하나의 자부심처럼 여겨지던 시대였다. 이방인과 외국인을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명백한 차별이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큰 사람임이 분명하지만 큰 사람일수록 자신의 정체성의 근원을 잃었을 때의 충격이 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 하나를 이해하려고 하는 데에도 이렇게 많은 것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도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왜 죽음을 받아들였는지는 그만이 알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세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일까? 단순하게 이해하면 왜곡될 수 있고, 거대한 걸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면 말이다.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라고 함은 서로 소통하고 이해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눈을 돌리지 말자. 귀를 막지 말자. 생각을 닫지 말자. 마음도 열어두자.
권리란 무엇인가?
이것 역시 복잡하다. 하지만 내 마음대로 정의 내려보겠다.
권리란 '다수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내가 '권리'에 내린 가장 단순한 정의다.
국민의 권리 혹은 시민의 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잊어버렸는지도 모르지만, 권리는 국민이 처음부터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투표를 두고 '정당한 권리의 행사'라고 말한다. 국민은 국민의 권리를 행사하여 그 권리를 이양한다. 다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 대통령에서부터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자리에 앉아 국민의 권리를 대신 행사한다. 이것이 지금의 시스템이다.
문제는 이 시스템이 원래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다수의 국민을 소외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더 좋지 않은 것은 원래 국민의 권리였던 것을 돌려받을 수도 없다는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국민이 시스템을 수용하고 적응하는 쪽으로 뜻을 바꾼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일종의 무기력이 학습된다. 원래 그렇지 않았던 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바꾸려고 하지도 않고, 바꿀 수도 없게 되며, 바꾸지 않으려는 쪽으로 계속 옮아간다.
결과적으로 시스템은 고착되고 원래 권리를 가졌던 사람들은 그것이 자신의 권리였다는 것조차 잊은 채 살아간다. 자신의 권리를 간단히 포기할 수 있게 된 이유 역시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권리의 행사보다 시스템의 상위에 편입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것이 무한한 경쟁의 고리를 끊을 수 없게 한다. 마치 치킨 게임처럼 먼저 멈추는 사람이 지는 것, 패배하는 것, 루저가 되는 것이라 믿게 된 것이다.
현재의 프레임 안에서는 아무리 넓게 보려고 해도 더 많은 것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미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식을 습득하고, 지혜를 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이 프레임을 넘어서서 사고하기 위해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부족하다.
아니다. 이런 판단은 너무 섣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현재를 확실히 인식할 수 있는 좋은 디딤돌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이 디딤돌이 되기 위해서는 좀 더 냉철한 현실 인식이 우선 되어야 한다.
지금의 한국은 마치 야생의 세계 같다. '생존'을 위해 혈안이 되어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가득해서 잠시라도 방심하면 지금 갖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내 몫까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아 불안에 떨어야만 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헬조선'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헬조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본인이 헬조선이 그 수명을 연장할 수 있도록 기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헬조선인가?"하는 물음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헬조선이니까"하는 납득과 수용이 더 흔하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권위는 인정하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헬조선'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헬조선 담론은 권위를 갖고 그 우위를 강화해 갈 것이다.
아, 어쩌다 여기까지 온 것인지 이제 내가 쓰기 시작한 글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끝으로 이 책 <시민의 교양>에 대해 한두 마디만 보태기로 한다.
이 책은 분명 '현실 인문학'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동시에 인문적인 통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의 보통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책 속에 담기 내용을 단순히 수용하는 데 쓰기보다 현실을 인식하는 하나의 견해로 활용하기를 권한다. 저자가 말하는 지금과 독자가 생각하는 지금이 반드시 일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다름'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곰곰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아, 정말 마지막으로 궁금한 게 하나 더 있다.
도대체 '양질의 일자리'란 게 무엇인가?
혹시 이 구분의 기준에 대해 하는 것이 있는 분은 꼭 의견 남겨주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