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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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프랑스 시인 루이 아라공의 시 속의 문장이다. 동시에 밀란 쿤데라의 <불멸> 속에서 인용되는 문장이기도 하다.

'불멸'이라는 제목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문장이 어떻게 이어질 수 있었는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읽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 호기심을 갖고 이 글을 읽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문장을 적어두기로 한다. 이 마지막 문장의 의미를 깨달을 때까지 다섯 번 이상을 읽었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눈치챌 수 있었다. 작가의 장치를 말이다.


 520쪽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렸고, 성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에 바로 이런 분위기에서 아녜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했다.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 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작가는 왜 '물망초'를 자꾸만 언급하는 걸까? 그 이유는 알고 있는 사람은 이미 알겠지만 물망초의 꽃말이 "'Forget me not' 나를 잊지 마세요." 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도 아니고, 한 송이, 그것도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자취로서 간직하고 싶어 했다는 표현에서 불멸에 대한 염원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거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이런 의미의 말을 한다.

"행간을 건너뛰어 읽으면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읽어보면 알게 되겠지만 이 말에는 조금의 과장도 없다. 정말 서둘러 행간을 건너뛰며 읽었다가는 다른 사람에게 이 소설의 줄거리를 이야기해 줄 때 엉뚱한 결말을 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잘 짜인 이야기인 동시에 복잡하게 느껴지는 이야기라는 거다.


 이 복잡함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대략 그 이유들을 나열해보면 하나는 '불멸'이라는 불분명한 주제를 제목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둘은 이야기 속에 무수한 '상징'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셋은 어디부터가 실제고, 어디까지가 상상인지 모호하다는 거다. 넷은 주인공이 누군지도 알기 어렵기에 누구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인지 알기 어렵다는 거다(저자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기는 하다). 다섯은, 아마 있을 것 같지만 굳이 적고 싶지 않다. 뭐가 뭔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 말이다. 


 이 소설은 기묘하다. 읽기 어려운 문장은 거의 없다. 술술 잘 읽히기까지 한다. 그러나 한 순간 방심하면 어떻게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는지 이전 페이지를 돌아봐야만 하게 된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과 육신을 오가며 삶과 죽음을 생중계하는 것도 같다. 그래서 다 읽고 나면 이게 쉬운 소설인지, 어려운 소설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 책을 읽고 나면 밀란 쿤데라의 다른 작품을 읽을 때 상당히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거다.  <농담>이나 <웃음과 망각의 책>은 확실히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게 될 거라는 거다. 물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말이다(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하고는 비슷비슷할 것 같지만 말이다). 아아, <무의미의 축제>도 더하자.


 밀란 쿤데라는 무척 좋아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다. 본래 그의 문장이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짤막한 문장 속에 다양한 의미가 담긴 상징을 새겨 넣는 재주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애매한 처지로 몰고 가면서도 동시에 지쳐 나가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긴장을 유지하는 감각이 무뎌 보이지만 실제로는 날카로운 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진한 여운이 한참이나 지속되는 걸 느낄 수 있는 까닭이 그런 숨겨진 날카로움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소설가인 밀란 쿤데라가 한 수영장에서 지인인 아베나리우스를 기다리는 동안 한 나이 든 여성을 본다. 그 여성은 젊은 강사에게 수영을 배우는 중이었는데 물 속에서 내뱉는 숨소리가 마치 증기기관차 같아 소설가의 눈길을 끈다(이유는 다를 수 있지만 아무튼 눈길을 끈다). 그 여성은 강습이 끝나고 강사와 헤어지며 하나의 몸짓을 한다. 그 몸짓을 보는 순간 소설가는 상상 속에 한 여자를 만들어 낸다. 필멸하는 인간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불멸성을 가진 몸짓을 통해 소설가가 만들어 낸 여자의 이야기인 거다. 그 여자의 유년부터 죽음까지가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라면 줄거리가 되겠다. 그런데 소설이라면 당연한 것이지만 이 여자의 주변에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그들은 전혀 무관해 보이면서 관계가 있으며, 무의미한 인물 혹은 사건처럼 보이는 것들 역시 돌고 돌아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난다. 이야기는 '불멸'에 관한 것이다. 그렇기에 불멸성을 획득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두 사람이 괴테와 헤밍웨이다. 하지만 왜일까? 소설가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 인물들의 불멸성은 신성하거나 숭고한 것이라기보다 우스꽝스러운 것처럼 그려진다. 기억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가 아닌 '이미지화'된 기억들뿐이다. 헤밍웨이보다 한참 오래전에 죽어 불멸의 반열에 오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죽는 법'을 깨우치고자 한다. 물론 이미 죽은 사람이기에 물리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죽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소설 속에서 색다른 성격과 이력을 부여받아 살아났던 인물이기에 실제와도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오래전에 죽은 그는 그가 원하지 않았음에도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 부활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였다. 헤밍웨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지 않은 말까지도 작가의 상상에 의해 늘어놓아야 했고, 고백해야 했으며, 움직여야 했다. 그들의 불멸성이 우스운 것이 되어버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싶은 것이 절대적이지도, 자율적이지도, 그들의 의지가 개입할 수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줄거리라고, 간략하게 적겠다고 했음에도 아직 이야기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뭐, 이야기가 궁금하면 스스로 읽어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 밖에는.


 소설 속에서 괴테나 헤밍웨이가 획득한 '불멸'은 하나의 '벌'이다. 그들이 책을 썼기 때문에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책을 썼다고 해서 불멸을 얻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들은 자신이 죽기 전에 자기의 모든 작품을 지상에서 지워버리려고 시도하기도 하고, 어떤 작가들은 한 세대는커녕 몇 년도 지나지 않아 잊히고 만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어떤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걸까? 무엇은 불멸하고, 무엇은 필멸하며, 누구는 기억되고, 누구는 잊히는 걸까? 기억된다고 해도, 불멸한다고 해도 정말 기억되고 불멸하는 것은 그 본래의 존재일까 아니면 다른 기억될만한 어떤 것일까? 

 이 소설은 그런 생각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존재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은 시에서부터 음악에까지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그 복잡한 실타래 속을 오가며 이야기를 만들어낸 작가의 능력에 새삼 감탄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기묘하고도 우스웠던 것은 인간이 거의 공통적으로 불멸을 바라지만, 그 불멸이란 '죽음'이라는 필멸의 과정을 지난 후에야 완성되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살아있으면서 '불멸'을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불멸에 죽음이라는 과정이 개입하는 필연적인 이유다. 또 하나 우스웠던 것은 앞에서도 적었던 것처럼 '책을 쓴 죄로' 불멸을 선고받았다고 이야기하는 '불멸자'들 입장에서의 진술이다. 그들은 불멸을 바랐거나, 불멸에 대한 생각을 했을 것임에도 조금은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죽음 후에도 자신의 평판이나 기억되는 이미지를 염려하는 죽은 자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왠지 웃음이 나지 않는가?

  

 한때 잊히는 것이 가장 두렵다고 느꼈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무엇이든 좋으니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으로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도 하고, 서툰 솜씨로 적은 글을 나눠주기도 했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일단은 거의, 전혀 도움이 된 것 같지 않다는 결론에 닿았을 뿐이다. 

 이 작품은 불멸에 대해 두 가지로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그럼에도 불멸할 수 있는 어떤 것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다. '어떤 것'은 글이나 책일 수도 있고, 자식일 수도 있으며, 사람들 속에 남을 기억일 수도 있다. 그저 어떤 형태라도 좋으니 오래 기억되고 싶다는 '욕망'을 일깨웠던 거다. 

 또 하나는 어차피 기억되는 것, 불멸하게 되는 것이 단편적인 '이미지'와 실제의 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편집되고 왜곡된 '기억'이라면 차라리 잊히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죽음과 함께 죽은 자에게 어울리는 망각 속으로 가라앉고자 하는 욕망이 새삼 깨어나는 것을 느꼈던 거다. 

 나는 기억되고 싶은 것인가? 혹은 잊히고 싶은 것인가?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하게 되는 거다. 


 무엇보다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었음을 고백해야겠다. 불멸 이전에 이 삶 속에서의 모습이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온 마음을 차지한 채 한동안 놓아주지 않았었다는 거다. 

  

 떳떳하고 당당하게 '나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기억만 남겨달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나만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야기 속에는 '거울'과 '카메라'가 등장한다. 카메라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대표하는 이미지인 것 같다. 그리고 거울은 자아도취를 의미하는 것 같다. 불멸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러한 시선들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받아들인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섭하고, 비난하고, 옹호하고, 칭송하며, 실망하고, 사랑하고, 미워할 것이다. 이 모든 감정의 도가니 속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멸이 아닐까?

 그러나 상상 속의 인물인 '아녜스'조차 물망초 한 송이만큼이라도 기억되고자 소망한다. 실제 존재했던, 살아왔던 이들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불멸하기를,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소망을 이루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꿈꾸고 희망한다. 그것이 필멸하는 존재,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 대한 해석은 모호하다. 여성의 잉태, 여성성, 몸짓, 아름다움. 이러한 것들이 더 항구적인 가치를 지니기에 결국 남성들 역시 여성적이 되어갈 것이라는 예언인 것 같기도 하고,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의미인 것 같기도 하고, 과학이 예언하는 것처럼 먼 미래에는 오로지 여성만이 남을 것이며 남성은 사라질 것이라는 의미 인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의미인지는 모호하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남성보다는 여성 쪽이 더 '불멸'하는 가치를 더 많이 품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결론이 나는지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감이다. 여성은 약자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기에 존중받아야 하고 또 사랑받아야 하는 거다. 


 사랑조차 불멸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감정이란 불멸과는 거리가 먼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만큼 불멸에 가까이 있다고 믿어지는 것도 없다. 거짓도, 미움도, 질투와 증오조차도 사랑과 닮아 있으니, 오히려 불멸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는 넘치도록 사랑하는 이가 아니겠는가.

 일단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도 좋겠다. 물망초 한 송이를 두 눈에 품어 두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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