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잘해요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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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는 동안, 단 한 줄의 메모도 남기지 않았다. 사실 이건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의미심장하다 여기며 읽었을 뿐 아니라 작가의 시선이나 인물들의 감정의 흐름, 판단과 행동들이 무척 흥미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메모는 단 한 줄도, 한 단어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메모가 있고 없고 가 중요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어쩐지 머릿속에 떠오른 두 가지 가능성 가운데 좋지 않은 쪽으로 기울어 버릴 것 같아 미묘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하나의 가능성은 이 책이 무척 쉽고 부드럽게 읽혔기에 읽는 동안 읽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어쩐지 너무나 '병신'같은 두 친구의 생각이나 행동인 인간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둘 가운데 어느 쪽이 좋지 않은 쪽인지 알겠는가? 혹여 몹시 궁금해지고 말았다면 읽어볼 일이다.


 결과적으로 어떤 메모도 남아있지 않기에 이제부터 적을 감상은 간단명료 하면서  단순 유치할 예정이다.

사과를 해야 할까? 미안하지만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사과다. 그 이유는 이 책 속에 있다. 이제부터 적을 감상이  터무니없는데다 어처구니까지 없고 거기에 더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게 된다 해도 그것 역시 내가  사과할 수 없는 일이다. 이 모든 건 '사과'때문이다. 죄가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사과의 문제로 시작되어 사과의 문제로 끝날 모양이다. 왜 사과의 문제로 시작되느냐고? 그건 성경에 적혀 있으니 성경을 읽어보면 알 일이다.


 신선한 소설이다. 지금까지 읽은 한국 작가의 소설이 많지는 않지만 그 가운데서도 독특한 맛이 나는 그런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독특한 맛은 이야기가 끝난 후에 등장한 작가의 말로 적잖이 쉬어버렸다. 작가는 너무 많은 말을 해 버렸다. 본래 썼던 소설을 절반으로 줄였든, 누구의 도움을 받았든 그건 자기들끼리 나눴어야 할 '뒤엣말'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이 많았다'랄까. 

앞에서 좋은 작품으로 무수한 말을 한 뒤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수다스럽다고 느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이유에서 말이다. 하나는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장편 소설이라는 것이다. 둘은 작가의 시선이 마음에 든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렇게 적었다.


 222쪽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있는 어떤 것들의 이면이 궁금하다면 끝과 시작, 위와 아래를 뒤집어볼 것. 그것이 내 소설 쓰기의 기조가 되어버렸다. 이번 소설 또한 그런 기조 위에서 쓰였다. 그래서 이제 나에겐 '죄'의 반대말은 '무죄'가 아닌, '사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 가운데 마지막 문장인 '죄의 반대말은 무죄가 아닌 사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는 부분이 와 닿았다. 

그래서다. 그래서 저자의 너무 많은 말은 '무죄'로 하기로 했다. 


 작가는 '죄'와 '사과'를 가지고 이야기를 지어낸다. 그가 지어낸 이야기 속 주인공은 조금은 모자란 두 친구다. 두 친구는 이른바 '시설'에서 만나 알고 지내다, 어느 날 어쩌다가 보니 시설의 비리를 폭로하는 '내부 고발자'가 된다. 시설의 원장을 포함한 직원들은 구치소로 끌려가고 남은 원생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주인공인 나는 갈 곳이 없었다. 그러나 친구 시봉에게는 집이 있었다. 그들은 시봉의 집으로 간다. 며칠이 지났을 때 두 친구는 그들을 처남들이라 부르는 시봉의 여동생의 동거인의 부추김으로 일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닿는다.

"우리가 가장 잘하는 걸 하자."

그 둘이 가장 잘하는 것이란 '사과'다. 보통 사과는 마음을 담아 잘못한 상대, 그러니까 죄를 지은 상대에게 용서를 비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과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라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신 사과를 해주는 일을 시작한다. 

 '사과 대행업'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을 착안하고 실행하는 그들의 무모해 보이는 시도는 의외의 순간에 결실을 맺는다. 그리고 그 결실은 어떤 이들에게는 상상하지 못했던 불행과 맞닿아 있었다. 

 두 친구는 '죄'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했던 행위들이 사과해야만 하는 '죄'가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보통의 지각과 사고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가는 곳에는 반드시 '죄'가 생겨났고, '사과해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 


 죄는  길바닥의 돌부리 같은 거였다.

작은 돌인 줄 알고 발로 차 버리려고 시도한 사람의 발가락을 부수는 뿌리 깊은 돌부리 말이다. 

사소한 것이 죄가 된다. 그리고  사소할수록 큰 죄가 된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오히려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그것을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 사과할 생각도 없다. 모든 것을 무시할 수 있는 '미련함'을 그들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섬세한 사람들, 죄를 알고, 사과를 아는 사람들은 그 죄가 차고 넘쳐서 견딜 수 없게 되면 정신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광인 가운데 천재가 많은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물론, 이 말은 헛소리다. 그러나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세상이 그렇다. 다 그런 거다. 


 어쩐지 웃으며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이 이야기는 뒤로 갈수록 캄캄해진다. 마치 그런 '어둠'이 꼭 필요한 것인 것마냥 어둡게 만들어 버린다. 


 많은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과에 인색한 편이다. 아니다. 정확히는 그런 일 정도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버린다. 

 이유는 제각각이고 또 많고도 많다.

자기 말고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잘못을 무수히 저지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자기는 그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들을 괴롭게 하기 위해 일부러 사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사과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이런 특징들은 개인에게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혹은 국가에서도 두드러진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과 부재의 시대'에서 처럼 말이다.


 '사과는 잘해요'라는 말은 몹시 비꼬는 말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주인공인 두 친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앞에서도 적었듯 이 둘은 죄를 무척 잘 알았다. 어떤 사과는 할 수 있고, 어떤 사과는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두 친구는 외줄 위에서 비틀거리며 간신히 중심을 잡아가며 나아가는 곡예사를 정말 살짝 밀친 것 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그 곡예사는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떨어지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 편안하게 해 준 게 맞다. 그 아래에  안전그물만 쳐져 있었다면 말이다(보통은 안전그물 따위 없다는 게 문제다). 


 이 이야기는 죄와 사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너머로 엿보이는 것은 '책임'이라는 엉뚱한 녀석이다. 죄가 있으면 그 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책임지는 방법은 여럿이며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반드시 자기 자신이 아닐 수도 있다. 어느 순간에는 가장 원하지 않았던 순간에, 가장 바라지 않았던 형태로 책임을 져야 하는 지경에 놓일 수도 있다. 

 거의 모든 범죄자가 붙잡히는 순간에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제가 안 그랬어요." 혹은 "저는 아무 잘못도 없어요."

 우스개가 아니라 진담이다. 그들은 정말 자신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죄가 아니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무엇보다 나는 그것이 두렵다. 그들이 책임지지 않는, 죄의 무게를 누군가가 감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에너지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그 형태와 위치가 바뀔 뿐 사라지거나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혹시 이 세상의 죄와 잘못 역시 같은 원리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르더니 지워지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잘못한 것이  틀림없는' 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사과를 '잘못한 것이라고는 살아가는  것뿐인' 사람들이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흩어지지 않는다. 

 

 "사과라도 하면 밉지나 않지."

이 말은 전적으로 완전히 거짓말이다.

사과를 해도 미운 건 미운 거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이 말에도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럼 도대체 누구를 미워해야 한다는 말인가?


 단순히 형식적인 사과는 또 다른 사과할 거리를 만든다. 책임은 누가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거다. 

아아, 가볍게, 정말 가뿐하게 적으려고 했던 감상이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걸까?

느닷없는 줄 알지만 심심한 사과를 전하며 감상을  마무리해야겠다. 

뭐, 어쩌겠는가, 사과 말고는 잘 하는 것이 없는 건 나 역시 마찬가지인 것을.


아, 이 이야기의 결말은 '비극'이다. 

고의적인 스포일러에 대해 사과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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