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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의 역사
구본창 지음 / 채륜 / 2008년 3월
평점 :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다~ ㅋㅋ
우리는 신라가 3국을 통일했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그럴까요 ?
그 반론을 여기 제기 합니다.
다음은 책,'패자의 역사' , 구본창 저. 를 읽고 쓴 것입니다.
신라의 3국 통일은 왜곡이고 과장된 것이다.
근거,
1. 신라는 660년 백제 멸망 시, 단지 계백의 5천 결사대와의 전투만 있었을 뿐이다. 그 이외의 주력 전투는 당나라 군대가 단독으로 했다.
2. 668년 고구려 멸망 시, 신라는 고구려와 전쟁을 한차례도 하지 않고, 단지 당나라의 후방 병참 기지,보급 부대 역할만 했다.
3. 백제 멸망과 고구려 멸망후,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각각 도독부를 설치하나, 신라는 이에 대해 이의제기를 못하고, 인정했다.
4. 676년 당나라가 이제는 신라까지 직접 통치하기 위해, 신라땅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할려고 한다. 이에 대항하여 신라가 전쟁을 일으켜서 결국에는 승리해서 대동강 이남과 원산만까지 땅을 차지한다.
5. 698년에 발해가 고구려의 옛땅을 다시 다 회복하여, 우리의 역사는 발해와 신라의 2국체제가 된다.
6. 19세기 후반,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신라 3국통일론을 회의적으로 보았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서 신라 삼국통일론을 전면 부정하였고, 신채호 역시 신라 3국통일론을 체계적으로 비판했다.
7. 신라의 의한 3국통일이 최초로 나온 책은 1145년 고려시대 김부식의 '삼국사기'인데, 김부식은 경주김씨 출신의 신라귀족 후예였다. 즉 김부식의 주장을 객관적을 볼 수는 없다.
8. 일제 시대, 일본총독부는 조선의 고대사 문헌 약 20만권을 불태워 없앴는데, 이때 '삼국사기'는 살려두었다. 그 의도는 만주를 지배했던 '발해'를 조선의 역사에서 떼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9. 일제시대 친일 역사학자들이(이병도,국사편찬위원회-교육부 등을 장악함) 해방후에도 그대로 받아 드려서, 현재까지 오고 있다.
10. 박정희 시대에는, 신라가가 경상도의 조상이라는 식으로, 지역감정을 일으켜서, 의도적으로 신라의 3국통일을 강조한 것도 있다.
결론,
신라는 고구려 멸망 시에, 한번도 고구려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고, 백제 멸망 시에도, 단지 계백의 5천 결사대만을 상대하였다. 즉, 나-당연합은 신라가 주도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가 고구려를 치기 위하여, 신라를 후방 병참고로 이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신라와 연합 한 것이었고, 당나라 주연에 신라는 조연이었다.
p.s.
의자왕의 3천 궁녀 역시, 터무니 없는 왜곡/거짓의 역사라고 이 책은 주장합니다.
의자왕은 40세 이후에 즉위하여 60세경에 백제 멸망까지, 20여년동안 신라를 10여차례 침공합니다. 이렇게 정복에 힘쓰던 의자왕이 계집질하기 위해 3천명이나 궁녀가 있었다는 것은 상직적으로 말이 안되는 것이죠.
백제가 멸망한 이유는, 당나라의 제휴(고구려 침공 시에 병참 기지를 해달라는 연합)를 거부한 것인데, 의자왕이 이를 거부한 이유는,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 유력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 계속 전쟁을 해야 하였고(당나라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백제-신라가 연합하기를 원함)
또한 고구려가 백제와 연합하면 충분히 당-신라를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으나, 고구려가 이미 내분과 장기간의 전쟁으로 힘이 많이 약해졌는데, 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백제 멸망의 가장 큰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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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변절과 꽁무니 빼기~ ㅋㅋ
1919년 3.1 운동의 발기인으로 알려져있는 민족대표 33인들~ 이들에 대한 숨겨진 이야기를 아십니까 ? ㅋㅋ
다음은, 책-'패자의 역사' / 구본창 저에 나온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1. 3.1운동은 당시 종로경찰서 조선인 고등계 형사였던 '신철'님이 모의를 눈감아 주지 않았다면, 3월1일 당일에 운동으로 시작도 할 수 없었다.
2. 신철님은,2월말에 3.1운동의 모의를 알았으나, 모른체 해주었고 일본에 이를 알리지 않았고, 또한 3개월간 만주로 출장을 갔다가 돌아왔으나, 보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일본에 의해 발각이 나서, 문책을 받다가 자살을 하고 만다.
3. 유림(유교)은 당시 가장 큰 조직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도부가 모두 평민이라는 이유로 불참했다.
4. 33인의 대표들은, 3월1일 당일에 파고다 공원에 나타나지 않았고, 나타나지 않는 다는 사실을 학생/시민들에게 알려주지도 않았다.
5. 33인의 대표들은, 이완용의 별장이었다가 요정(지금의 룸싸롱)으로 바뀐 태화관에서 있다가, 파고다 공원의 5천여 학생/시민들이 독립선언을 한 직후에 곧바로 일본경찰서에 전화를 걸어서 자신들을 체포해가라고 알려주고 일본경찰에 연행이 되었다.
6. 이렇게 어마어마한 일을 벌여 놓은 채 33인 그들은 차후에 전개된 상황에 대한 아무런 대비나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채 종로 경찰서에 스스로 체포되는 비상식적인 행보를 한 것이다.
7. 3월1이 파고다 공원에는 학생/시민 5천명이 모였고, 일본은 행진을 하는 조선인을 바로 총을 쏘는 무장 진압을 한다.
8. 3개월간의 걸쳐 무려 200만명(당신 남북 합 인구 1500~2천만)이 참가한 3.1운동에서, 일본은 시위 초기부터 무자비한 진압으로 일관해 7,500명이 사망하고, 15,000명이 부상당했으며, 약 50,000명이 투옥되었다.
9. 33인 중에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사람은 불교를 대표한 한용운만이 그랬고, 33인 대다수가 일본 경찰의 요구대로 일종의 반성문 성격의 해명서를 쓰고 풀려났고, 선언문을 작성한 최남선을 비롯하여 최린, 정춘수,박희도 등은 친일파로 변절했다.
10. 원래 독립선언문은, 한용운님이 썼으나, 너무 과격하다고 하여 최남선(친일파로 변절)이 다소 부드럽게 고쳐썼다.
제 생각에는 세상 물정 잘 모르고, 목숨 걸고 시위를 하다가 죽은 유관순님 처럼, 윗대가리들은 이리 빠지고 저리 빠리고 지 살길 마련해서, 후일에는 대부분 친일파로 잘 먹고 살고, 순수하거나 의협심 강한-그래서 세상 때가 덜 묻은 사람들은 그냥 죽어가고~ ㅋㅋ
이런 세상은, 현재도 진행 중인데,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놈/년들(2mb, 정운찬, 안상수 등)의 80%이상이 군대 면제이고, 순진한 군인들은 수십명이 개죽음 당하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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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친일파의 보호자-지원자 ~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친일파를 지지세력으로 대통령이 된 자입니다. 그는 친일파를 보호하고 적극 채용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이어가게 해주었고, 또한 독재정권을 유지했습니다.
게다가 민족주의자 정적들을 빨갱이라는 명목으로 숙청과 사형을 시킵니다. ㅋㅋ
다음은 책, '패자의 역사' / 구본창 저 있는 부분을 정리한 것입니다.
이승만은 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반민특위 해산은 대통령인 내가 직접 경찰에 지시한 것" 이라고 밝히며 막가파식 배짱으로 맞섰다. / 참고, 반민특위 = 친일파 색출을 위한 국회지정단체
1949년 6월6일 새벽에는 무장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반민특위 직원과 특별경찰을 모두 체포했다.
그런데, 1948년 10월에 악랄한 친일 경찰 출신으로 수도청 경찰 간부였던 최란수,홍택희,노덕술이 테러리스트 백태민을 사주해 반민특위 관련자 15명을 암살하려는 음로를 꾀했다가 백태민의 자수로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구속되었다. 물론 이들은 얼마 안 있어 석방되었다.
1949년 6월 26일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휘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런 공포 분위기 속에 이승만이 또 다시 낸 반민특위개정안(실제로는 반민특위를 없애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이로 인해 친일 청산의 길이 거의 영영 막히게 되어 버렸다.
P.S.
2MB와 한나라당이 이승만을 그렇게 정통으로 보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ㅋㅋ 그들이 바로 친일파들의 후손 & 그로인해 기득권을 획득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ㅋㅋ
그리고 이런 역사가 , 역사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것은, 이들 친일파들이 정치/교육계등을 다 장악했었기 때문이었다~ ㅋㅋ
또한, 이런 기득권을 이어간 친일파들은, 자식교육에 돈을 쏟아부어 다시 사회 기득권세력(판사,검사)이 되나, 독립운동가 자녀들은 교육을 받지 못해서 하층민으로 전락하게 된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