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에덴
잭 런던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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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배장이 노동자 마틴이 처음 사랑한 그녀 루스에겐 한계가 있었다.
그녀의 세계 곧 이론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는 온몸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이론에서 찾아보며
일치시키고 때로는 비판적 사고를 가지며 자신의 자아로 되새겨 내는 마틴 에덴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협소한 세계에 사는 그녀의 환경은 당연히 그녀의 한계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상류층용 예절교본을 쥐고 그대로 따라하는 마틴이 다른 사람과 다른 것은
어느 순간이 오면 예절교본을 집어치우고 관찰에 의거하여 적절한 행동을 깨쳐나갔다는 것인데
실제로 모든 예절은 '눈치' 라는 관찰을 통해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책 중 이 대목은 사소하게 넘어갈 부분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마틴에 대한 올리의 이야기는 그런 마틴을 더 잘 나타내 준다.

마틴을 내버려 둬, 루스.
그는 자신에게 무엇이 최상인지 잘 알고 있어.
그가 이미 해낸 일을 봐. 가끔 그를 보면 난 창피함을 느껴.
그는 지금 세상과 삶과 인간의 위치, 그리고 다른 모든 것에 대하여 아서나 노먼이나
나보다도, 아니 그 문제에 관한 한 너보다도 더 많이 알고 있어.
우리가 받은 그 모든 라틴어와 프랑스어와 색슨어와 교양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이는 마틴이 지식과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 라고 표현되는 것을 스스로 자신도 모르게
얻게 된 것이란 뜻이 되겠지.

지금 읽는 책을 통해서 다른 새로운 책의 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하는 올바른 독서를 하는 마틴은
어느덧 자신은 글을 쓸 수밖에 없는 팔자임을 깨닫게 되는데  당연스레 편집자에 대한 올바른 견해 또한 갖게 된다, 그건 조금 슬픈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알아야 할 것들.

'구십구 페센트의 편집집자들의 주된 자격요건은 실패란 말이오.  그들은 작가로서 실패한 사람들이오. 그들이 글쓰기의 즐거움보다, 지루한 사무를 보고 잡지의 부수 확장에 신경 쓰면서
사장에게 노예처럼 매여 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진 마시오.
그들은 글쓰기에 인생을 걸었고 그들은 실패했던 것이오.
바로 그 점이 엄청난 역설이오.
왜냐하면 문학적 성공으로 가는 모든 문을 문학에서 실패한 이 사람들이
맹견처럼 지키고 있으니 말이오.
편집장, 편집차장, 편집부원 대부분과 잡지사와 출판사에 고용되어
원고를 검토하는 사람들 대부분, 거의 대부분이 글을 쓰고 싶었으나 실패한 사람들이오.
그런데도 세상에서 가장 부적격인 이 사람들이
무엇을 싣고 무엇을 싣지 않겠다고 판단하는 바로 그 사람들
-그들 자신이 이미 독창성이 없음을 입증했고 천부적인 재능이 없음을 백일하에 드러냈던 사람들- 이며, 바로 그 사람들이 독창성과 천재성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단 말이오.
그리고 그다음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실패한 사람들인 서평가들이 있소.
그들 역시 작가의 꿈을 꾸었고 시나 소설을 쓰려고 애썼던 사람들이오.
그리고 그들 역시 실패한 사람들이오.
대개의 서평이 참기 힘들 정도로 역겹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오.
당신은 서평가와 소위 비평가라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견해를 알고 있는 줄 아오.
위대한 비평가들도 있소. 그러나 그들은 가뭄에 콩나듯이 드문 법이오.
그러니까 내가 작가로서 패한다면 그것으로 편집자의 자격을 입증한 셈이오.
어쨌거나 편집자에게는 먹고 사는 것이 보장되어 있소.'

이런 그에게 알맞은 여자는 루스같은 꽉 막힌 상류층 멍청이가 아니라
삶을 비웃고 죽음에 조소를 보내고 거리낌 없이 사랑을 하는 그런 대단한 여자이자
걷잡을 수 없이 불 같은 여자라고 책속에서 누군가는 말한다.
옳다.

이 책에선 온갖 작품이 난무하는데 다음과 같은 글에 대한 설명은 작품이 아닌 설명으로만 등장한다.
 

그 글은 완벽한 예술이었다.
생각하기조차 힘든 실체의 원자 하나하나가 너무나 완벽한 구조 속에 표현되었기 때문에
마틴의 머리가 기쁨으로 아찔해지고 감격의 눈물이 핑 돌면서 전율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러한 감정을 승리감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 글은 형식이 실체에 대해 승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처럼 [마틴 에덴]에는 글의 내용이 아니라
그 글에 대한 감상이 이렇듯 훌륭함을 들쳐업고 종종 나타난다.
하지만 직접 독자가 판단할 수 없는
순전히 작가 속에만 있는 상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조금 억울하다.
이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그 소리에 대한 극찬과 멋진 표현을
글로만 또는 말로만 듣는 것과 비슷하게 답답하다.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적인 향유로 가득한 이 작품은
중요한 사실 하나를 책의 중간에 살짝 끼워 넣어 두었다.
사실과 언어와 이론의 관계.
그 셋을 잘 파악하고 잘 엮고 상호관계를 잘 버무려 놓으면 좋은 글이 또는
글이 아니어도 훌륭한 창작품이 나온다는 사실인데, 난 사실과 언어와 이론을 각각 파악은 했으나 아니 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셋을 조화시키는 작업에 실패했다고 스스로 평가하고
다시는 나의 글을 작품이라고 불러야 하는 그런 창작물을 토해내지 않기로 했다.
이건 중요한 사실이다. 

마틴은 불특정 다수를 통해서 사랑 곧 루스를 얻으려 했다.
물론 그의 계급상 그런 방법 말고는 대책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의 순진무구함은 일찌감치 그 방법이 실패할 것임을 독자에게 까발리고 말았다.
대중을, 출판업계를, 여자를 잘 몰랐기에 매우 중요했던 한 시기의 실패가
대중과 출판업계와 여자를 안 후에도  여전히 그에게 작용해야 했던 것은
어쩌면 그의 고독, 애초부터 가지고 태어난 천성, 천재성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으로써 루스는 그저 그의 굳어진 첫사랑에 처박힌 채
더 이상의 생을 영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순전히 그의 입장에서. 

워낙 오래된 책이라 맞춤법을 굳이 챙겨볼 필요가 없어 마음 편하게 읽은 작품이다.
그래서 더 좋았던 것일까 이 작품이 순수하게 좋았던 것일까. 

잭 런던, 그는 멋있다.
하지만 그의 이름과 함께 늘 따라다니는 [강철군화]는 보지 않겠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작가이지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그냥 배수아와 장정일 그것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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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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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과 같은 [소망 없는 불행]과 [아이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
베케트 이후 가장 전위적인 작가, 뭐 이런 얘긴 필요 없고,
만드는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것들을 게워내듯
꾸역꾸역 써나가는 이런 작가에 대한 논란이 있다지만,
뭐 어떤가, 읽으면서 그에게 공감하는 나라는 독자만 있으면 되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써야만 이게 문학이다 라고 떠드는 족속들은
그저 주둥이로만 문학을 하는 자들이란 생각.
틀 같은 것은 이제 그만 만들어도 될 만큼 너무 많은 것들이 둥둥 떠다닌다.
받아들일 일이다. 

[소망 없는 불행] 

누구나 다 자신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피터 한트케의 어머니가 독서하고 토론하는 데 열중했다가 돌연 자의식을 갖게 되고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하니 아들이 그녀에 대해 점차 알게 되는 것처럼,
계기~!  매체로써의 계기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모두가 다 이러한 계기를 얻는 것은 아닌 것이다.
무언가를 통해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러한 계기를 가졌기에 행복할 것만 같았던 그의 어머니는
많은 약들을 삼킨 채 죽음을 선택하고 그에 성공했다.
'드디어 평화롭게 잠들게 되어 아주 편안하고 행복하다'
라고 마지막 말을 남긴 그녀는 정말 행복했을까?

매일매일 소심하게도 죽음을 희망만 하는 나날들을 보내며
생각과 행동이 도대체 대화를 하는지 안 하는지 
무척이나 열심히 살아가는 나란 존재는 그렇다면 소망 없는 불행을 사는가
불행한 소망을 소심하게 소원하며 열심히 사는 불행을 선택한 것인가.
삶에 정답 따위는 없는 것이다.
그저 삶이 있을 뿐. 

[아이 이야기] 

이혼한 덕에 덥석 맡아 함께 생활하게 된 아이의 아빠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 영혼들은 자신의 시간을 빼앗기는 것을 지독히도 싫어하는데
아이란 특히나 어린 아이란 그런 사람에게는 조금도 맞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 자유로운 영혼들은 대개 마음이 여려서 그런 아이를 내팽개치지도 못한다는 것.
잘 대해보려고 노력하느라 진땀을 빼고  자신의 시간을 갖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아이는 저혼자 클 수밖에.
그는 그것을 몰랐다.
인간 될 때까지, 밤일 해서 낳은 두 인간이 책임을 져서 돌봐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사회 속에 살면서 자신의 뜻대로만 되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도.

저자와 같은 경우 아이를 통해 진지한 생을 얻게 되는 경우는 조금 드문데,
그는 결국 자신의 아이를 돌보기 전에 막연히 알던 아이와 아이와 함께 생활한 후의 아이의 존재가
다름을 깨달았고 그것을 통해 이러한 문학작품까지 얻었다, 아니 생산했다. 

그러고 보니 두 작품을 함께 실은 것이 참 묘하다.
한 편은 죽음, 다른 한 편은 탄생.

오탈자는 시간이 늦어서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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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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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장소 이를테면 지하철 같은 곳에서 읽으면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흘긋흘긋 쳐다볼 게 뻔한 단어가 있어 시선에 성질을 부릴까 겁나서 나중에 읽은 이 책.
다행이다, 어떤 이유에서건 '잠자는 미녀' 를 먼저 봤다는 것은,
비슷하다 입에 오를 수도 있을 두 작품 중
개인적으로 더욱 감명 받을 작품을 나중에 보게 됐다는 것이고,
나중에 읽었다면 심각한 욕설과 함께 처음으로 집어 던져짐을 당했을지도 모를 작품을 쓰신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님에게도 죄송할 일이니까.

책을 펼치자마자
"고약한 짓은 하나도 할 수 없습니다." 여관 여주인이 노인 에구치에게 경고했다.
"잠자는 여자의 입에 손가락을 넣어서도 안 되고, 그와 비슷한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됩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잠자는 미녀의 집]
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책을 읽고 영감을 얻어서 쓴 책이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이라고 하지만
두 작품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잠자는,,,은 잠자는 여자와 잠만 자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다른 것은 크게 할 수 없는
남성을 상실한 노인들이 가야 할 곳에 남성을 상실하지 않은 에구치가 갔던 것이고,
내 슬픈,,,은 아흔이 됐지만 아직 남성을 상실하지 않은 현직 기자이자 칼럼니스트
노인의 뜻 깊은 생일을 위한 생처녀가 필요해서 이십 년 만에 로사 카바르카스를 찾게 되는 것.
이건 억지일지도 모르지만 에구치는 개인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없는 경험을 우연히 하는 것이고,
아흔 살의 '서글픈 언덕' 은 그저 서글픈 언덕의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지만 단지 그 개인만의  이야기로 보기에는 노년을, 비록 아내도 자식도 없지만, 평생을 돈을 주고 창녀에게 안정적이지 않은 사랑을 주고 받은 것뿐이지만 대부분의 노인 남성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표현력과 그림을 선사해 주었다고 나는 감히 생각했다. 마무리 짓자면 에구치는 누구나 비슷비슷하게 지내는, 아이가 장성해 결혼을 하고 이제는 아내와 젊은 시절처럼의 즐거움을 나누지 않게 되는 나이의 노인의 성에 대한 소재 정도라면,
서글픈 언덕은 아내도 자식도 갖지 못한 아흔의 노인이 자신이 아닌 여인 때문에
처음으로 느끼는 사랑에 대한 소재를 넘어서 주제까지도 침범할 수 있는 글이 된다는 것. 
아, 뭔가 더 명확하게 설명하고 싶지만 더 이상 생각이 명확해진다는 것은 어쩌면 이 생각이
흩어지는 것에 다름아닌 것이란 생각이 들어 여기까지. 

로사 카바르카스는 줄곧 서글픈 언덕에게 현자양반이라고 칭하지만,
결국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로사 카바르카스거나 나중에 서글픈 언덕의 사랑 얘기를 듣고
누구보다 열띤 응원을 펼쳐주는 창녀일지도 모르겠다.

그래 서글픈 억덕의 말대로
"섹스란 사랑을 얻지 못할 때 가지는 위안에 불과한 것" 에 불과하다. 

지적하기 싫었지만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100쪽 6줄: 깨우치고 -> 깨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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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미녀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정향재 옮김 / 현대문학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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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끝이 없지.
여자와는 다른 내세울 게 있는 그들의 상상은.
어디든 찌르면 되니까 상상도 끝간 데 없을 수 있는가.

좋은 말로 해보자.
남자를 상실한 노인들이 가는 곳.
뭘 먹였는지 어떤 화학약품을 주사했는지 모르는 ,
젊다 못해 어린 것들의 잠든 몸을 곁에 두고 자러 가는 노인들. 

물론 남성을 상실하지 않은 노인이 우연히 소개 받고 가서
겪은 이야기를 통해 인생의 저물녘에 대해 뭔가를 잘 써냈다고 칭찬인데,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 읽고 나서 남는 것은 그저 그녀들의 몸태가 어떻게 생겼는가 정도.
그리고 저 불알 달린 것들은 생명을 만들 수 없으면 사고를 만들어 낸다 정도. 

개인적으로 '설국' 을 읽지 않은 이 작가에게 할 말은,
다음과 같은 초반에 쓴 메모. 

급하게 읽고 싶지 않은 책이 있다.
이제 겨우 삼십 페이지를 읽었을 뿐인 이 책 역시 마찬가지인데,
좋은 작품을 너무 빨리 읽어 치우는 것은 좋은 차를 음미할 줄 모르고 단숨에 들이키는
무지하고 무감한 행동에 다름아닌 것이다.
천천히 읽으며 한자한자 아로새길 작품이다. 

다행입니다. 초반에는 좋았다는 것입니다, 작가님. 

다른 두 단편도 있었지만 와 닿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의 팔을 잘라서 데리고 오면서 대화하는 남자와,
어떻게 해 보고 싶었던 제자 두 명의 죽음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자신을 찾다 말다
하는 어느 소설가 선생의 이야기.

맞춤법이 의심되는 단어가 몇 있지만 다음에.
 

250쪽 밑에서2줄: 삐졌는지도 -> 삐쳤는지도
286쪽 밑에서10줄: 더 없는 행복 -> 더없는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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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홀로틀 로드킬
헬레네 헤게만 지음, 배수아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15세에 46세의 여자와 성관계를 했다고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여기고,
심지어 염증까지 느끼는 미프티, 16세.
그 나이엔 보통 조금이라도 남다른 경험,
이를테면 어른이 돼서도 흔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그런 경험을 하면 생을 잘 안다고 여기는
치기 어린 감정 같은 게 있는데 미프티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의 십대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미프티가 다른 것은,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해 가장 우위에서 바라보고 있고
어쩌면 지금의 악마적 행태를 언제든 집어치울 수 있는 절제의 기술 또한
갖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책을 보는 내내 든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십대는 아홀로틀 로드킬이다. 

아홀로틀 : 양서류 단계에만 머무는 종. 자라지 않는 생물.
로드킬 : 자동차에 깔려 납작하게 짜부라진 짐승의 시체. 

이 책 202쪽의 끝부터 책의 제목인 아홀로틀이 등장한다.
어쩌면 200쪽까지 무서운 이 책을 무사히 넘기고 있는 어른들에게
구조요청을 하고 싶어 앞이 아닌 뒤춤에 아홀로틀을 숨기고 드디어 어렵게 어렵게
그것을 꺼내 든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든다.
모든 안쓰러운 십 대와 아직도 그 십 대를 살고 있는 나와 같은 삼십 대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정신적 구제. 올챙이로 머물러야 하는 운명을 지닌 그들을 개구리란 존재로 만들 수 있는 그런    구제. 

미프티가 말한 가족, 와 닿아서 옮긴다, 요즘 나 역시 가족에 대한 생각이 그와 같으니까,
아니, 언제나 그랬으니까. 

가족으로서의 최소한의 결속관계는 이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아빠, 엄마, 아이, 이런 야만적인 가족 모델이 아직까지도 멸종하지 않고 있는 걸까?
오직 살인과 광폭한 행위를 통해서만 인간은 그 관계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혹은 내 경우처럼, 비극적인 추방을 통한 의절이라든지.
비록 서로가 핏줄로 얽힌 혈연관계이기는 하지만, 그 혈연을 끊는 일이 순식간에 가능해졌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언니도 오빠도, 아빠도 없다.
공동의 삶이 기능을 발휘하려면, 구성원 사이에 단순한 호의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가족 모델에 대한 호의가 그 모델의 성공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나는 아무 버스나 집어타고 온종일 시내를 돌아다닌다.
어디로 향해야겠다는 마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새로운 장이 시작되어야 한다.
나는 존재를 찾아 길을 떠나는 나를 지켜본다.

그래서 이제 그녀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것에 성공했을까? 

미프티가 알리스를 묘사하는 부분,
난 알리스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내가 깨달은 점은, 그녀는 나뿐 아니라 원래 그 누구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혼자서 독백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에게는 상대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공간적으로 훨씬 더 광범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오리지널한 모종의 변신 가능한 핵심이 그녀에게 있다.
지금껏 내가 존재해 왔던 형태가 그녀 앞에서 <우리>라는 모습으로 다시 깨어나듯,
거의 보편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현존, 분리된 정신의 통합된 힘이 그녀에게는 있다.

다음은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편집 매뉴얼을 꾸준히 내는 열린책들에서 이런 심각한 오탈자를 내다니 실망이다.   


39쪽 15줄: 한 구석 -> 한구석
48쪽 밑에서6줄과 290쪽 3줄: 가디건 -> 카디건
78쪽 7줄: 바보를 -> 바보로
96쪽 밑에서4줄: 도취되서 -> 도취돼서
99쪽 밑에서9줄: 난장이 -> 난쟁이
105쪽 4줄: 되야 -> 돼야
123쪽 끝줄: 애기 -> 아기
139쪽 4줄: 줄밖 -> 줄 밖
153쪽 12줄: 잘 되지 -> 잘되지 (두 번 있음)
160쪽 6줄과 177쪽 9줄, 190쪽 밑에서8줄: 되서 -> 돼서
194쪽 7줄과 223쪽 10줄: 검정색 -> 검은색 또는 검정
202쪽 7줄: 잘 되어 -> 잘되어
227쪽 밑에서5줄: 됨직한 -> 됨 직한
240쪽 밑에서10줄: 얻다는 -> 얻는다는
255쪽 밑에서3줄: 보여 줄게 -> 보여 줄 게
265쪽 밑에서2줄: 그그저께 -> '그그저께' 란 단어는 없음
270쪽 끝줄: 거시기로 밖에 -> 거시기로밖에
277쪽 밑에서7줄: 섹시랑는 -> 섹시랑은
290쪽 끝줄: 나이게 -> 나이에
291쪽 밑에서 7줄: 잃고 -> 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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