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 대본화 작업 때문에 썼던 내용을 조금만 수정해서 그대로 올린다.
평소 쓰는 독후감과 다른 맛이 날 듯해서.
다른 모습을 보이는 건 스스로만 즐기는 것이라 해도 즐거운 일. 

그놈의 오지랖이 좋다 보니 돈도 안 되고 알아주지도 않는 일거리가 생기는데,
그놈의 인간들은 싫은 소리 없이 뚝딱뚝딱 해다 바치면 언젠가부터는 고마운 줄 모르고 변하게 마련.
그렇지 않은 인간들하고만 일하려고 난 다시 연을 조용히 정리했다. 아주 힘들게.
누구는 그러더라. 그렇지 않은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내가 약아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아니, 난 그런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 해도 끝까지 찾아서 같이 일할 거다. 

이 책을 간단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인디언.
지혜.
정복자.
핍박.
그것은 그저 '역사'.
윤아씨가 말하던 '사랑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 마음의 사치'와 다르지 않은. 

 

1. 내 이름은 작은 나무

아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이를 누가 맡을지에 관해 논의된 끝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결국 아이를 맡아 기르기로 함,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인디언임.

여기엔 숲 속 오두막에 도착하는 내용까지.




2. 자연의 이치

할아버지와 작은나무의 대화를 통해 할아버지가 생각하는 자연에 대한 의견을 알 수 있음.




3. 할아버지와 조지 워싱턴

산사람인 할아버지가 주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위스키를 만들어 파는 일인데 조지 워싱턴이 개인이 술을 만들어 팔려면 허가를 받아 세금을 내야 한다는 법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다는 내용.




4. 빨간 여우 슬리크

개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산속 여우 슬리크를 이용하시는 할아버지.

37쪽, 할아버지가 알고 있는 붉은 여우 등의 동물에 대한 습성.

38쪽, 백인 산사람에게까지 존경 받는 할아버지에 대해.

42쪽~ 슬리크 잡는 과정, 결코 슬리크를 잡아 죽이는 것이 아니다.




5. 당신을 사랑해 보니비

58쪽부터 나오는 너구리 잭 사건.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궁금하다면 이것을 보면 좋음.

인디언 강제 이주 사건도 나옴.




6. 과거를 알아둬라

체로키족들의 ‘눈물의 여로’가 나옴.

64쪽부터는 증조할아버지가 체로키의 여인 붉은 날개와 함께 산 이야기가 나옴.

위에 나오는 너구리 잭 사건과 잘 연결이 되면서 하나의 역사처럼 연결이 되기도 함.




7. 파인 빌리

72~74쪽에 한쪽 눈이 먼 노새 샘 영감이 나오는데 벌통 앞에 서 있는 노새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 애쓰던 할아버지의 해프닝.

75쪽부터 나오는 ‘파인 빌리’는 끝에 할아버지와 할버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 끝을 지켜주는 중요한 인물이고 여기서 처음 등장.




8. 나만의 비밀장소

84쪽 중간부터 87쪽 중간보다 조금 밑까지 작은 나무가 자신의 비밀장소가 있다는 말에 할머니의 말이 시작됨. 굉장히 심도 있고 소중한 이야기들인데 특히 85쪽부터 나오는 ‘두 개의 마음’에 대한 것은 아주 소중한 글.




9. 할아버지의 직업

98쪽부터 불법인 위스키 만들기를 몰래 했던 할아버지와 작은 나무의 위기.

증류기를 숨기려고 노력하는 작은나무와 할아버지.




10. 기독교인과 거래하다

107쪽까지는 링거의 죽음이 나오고 그 뒤로는 젠킨슨 씨 가게에서 기독교도들과 거래하는 내용이 나옴. 기독교도들의 사기짓이 나오는데 중요한 것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어떤 사람의 태도나 말 같은 것에 대해 판단한다는 사실, 물론 정치가에 대한 편견은 그들에게 빠질 수 없는 것이지만.




11. 사거리 가게에서

127쪽부터 나오는 사건. 매우 가난해서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는 기독교 여자아이에게 모카신을 선물했다가 그것을 받은 여자아이는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하고 결국 모카신까지 돌려받을 수밖에 없던 사건. ‘동정은 필요 없다, 특히 이교도 야만인 따위에게는 더욱’ 이라고 말하는 여자아이의 아버지. 이것은 종교를 떠나서 사람들이 인디언을 대하는 태도가 어땠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 될 수도 있는 부분. 마지막에 작은나무가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는 과정까지 놓칠 수 없는 좋은 글.




12. 위험한 고비

136, 137쪽에는 산사람들의 생활이 나오는데 주로 산에 나오는 풀에 대한 설명이 대부분.

143쪽~ 할아버지가 방울뱀에게 물린 사건.




13. 어느 빈터에 걸었던 꿈들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있었던 사건.

결국 모두 죽고 사과나무는 베어지던 사건.




14. 산꼭대기에서의 하룻밤

165쪽부터 젠킨슨씨를 통해 위스키 판매업자라며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사람들 이야기, 결국 멋지게 할아버지가 그들을 쫓아낸다는 이야기가 181쪽까지 나오고 176쪽에는 작은 나무가 산 속 동물들과 어울리는 모습이 묘사된다.




15. 윌로 존

193~198에 나오는 윌로존과 작은나무의 선물(개구리) 이야기, 윌로존은 실제로 끝까지 작은나무와 그 가족들을 돕는 아주 중요한 인물.




16. 교회 다니기

거의 교회의 파에 대한 이야기.




17. 와인씨

중요한 인물, 그의 증손자에게 주려고 만든 노란 코트를 작은나무에게 주고 매우 기뻐한다.

217쪽까지는 와인씨에 대한 성격이 나옴.




18. 산을 내려가다

작은나무를 고아원에 데려가겠다는 정치가가 오는 동시에 와인씨의 죽음을 알게 되는 부분.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작별인사를 함.




19. 늑대별

241~243쪽에 나오는 작은나무를 대하는 목사의 태도, 248쪽 중간보다 조금 밑부터 나오는 여선생의 사건을 사용해서 결국 다시 250쪽에서부터 다시 목사를 만나 말도 안 되는 짓을 당하는 사건.

244~246쪽까지 나오는 윌번은 다리를 절어서 고아원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어 그 어떤 노력을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게 뻔한 작은나무와 고아원 내에서는 같은 위치에 있고 그 때문에 둘은 친구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 아이는 구성상 작은나무의 분신과 마찬가지.

247과 248쪽에는 고아원에 있는 작은나무에게 끝없는 사랑을 담아 소식을 전하는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20. 집으로 돌아오다

19번 끝부터 고아원에 온 할아버지를 우연히 발견해 산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탄 부분.

산길이 잘 느껴지지 않아서 신발을 벗는 장면부터 조금 줄여서 돌아와 모든 산과 할머니 윌로존 등의 모든 인디언 관련 사물, 생물 들이 작은나무를 반기는 것은 눈 앞에 둥둥 떠다니는 상상이 즐거운 부분. 특히 267쪽에 나오는 윌로존의 도움으로 작은나무가 다시는 고아원에 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는 것은 매우 감동적임.




21. 죽음의 노래

271~275쪽 윌로존의 죽음, 276~279쪽 할아버지의 죽음, 파인빌 리가 와서 할아버지의 죽음을 같이 지켜줌, 그다음부터 할머니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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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9 23: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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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버그 가는 길
베벌리 나이두 지음, 배수아 옮김 / 내인생의책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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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의 신작이 나오면 메일로 메시지가 온다.
음, [북쪽 거실] 후에 다른 책을 드디어 낸 건가?
예상과 달리 어른용 책이 아니었다.
평소 그녀가 번역한 것까지 모두 사는 집착 독자지만
아이들용 책은 늘 그냥 넘어갔었다.
이번엔 웬일일까.
그 무거운 주제 때문이었을까, 냉큼 주문을 했다. 

86년에 상을 받은 작품이고 91년에 금서에서 풀려났다고 하니까
내가 국민학생일 때부터 중학생일 때까지 그쪽에서는 말이 많았던 작품이란 말씀.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어쩐지 억울하고 기가 막힌 일. 

입장을 바꿔서 똑같이 해줘야 한다, 단 한 번이라도.
허연 사람들에게 패스를 주고 거주할 지역과 직업을 제한하고,
흑인용 버스에는 절대 타지 못하게 하고,
정류장도 따로 쓰고, 허연이들용 병원에서 자신이 부리는 허연 이의 아이가 죽어나가든 말든
신경 안 쓰고 허연 이들을 집에 두고 부려먹으면서 살아야 한다.
어떻게 된 인간들이 지들만 우월하다고 여겨서 그딴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으, 기가 막히고 기분까지 더러워진다.
누구 때문에 그들이 발전도 못하고 그렇게 살게 되었는지
허연 그들은 알기는 알까.

어른보다는 아이들이 보는 게 먼저다 싶어서
조카의 집에 살짝 두고 왔다. 

처음 날레디와 티로를 도와준 트럭 운전사 아저씨,
아이들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며 의심해서 미안해요.
저란 독자가 너무 음해와 공갈협박, 반전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답니다.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39쪽 밑에서2줄 : 그리곤 -> 그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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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밭 엽기전
백민석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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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통이나 자판기와 같은 아빠!
흥미와 애정을 가질 수 없는 존재.
과거 구석방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그녀의 조증과 울증의 정체도 밝혀지는가 했지만,
전혀 밝혀주지 않는 불친절한 작가님, 하지만 그런 작가님이 고마운 이상한 독자인 나.
그런 아버지에게 자란 딸은 결국 살인을 자신의 냄새(본성) 때문에 하고
그 결과물을 거름이라 부르는 남편과 함께 살게 되는 아내가 되었다.
그게 누구의 죄라고 감히 밝힐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한창림의 과거에 대해선 나오지 않는다.
그냥 갇혀 있는 동물들의 자유를 위해 쇠창살에 걸려 있는 문의 버튼을 제꼈을 뿐이었던 그는
어찌저찌 삼촌(피가 섞이지 않은)에게 소속돼 살인을 일삼고 죽어갈 거름 들을 묶은 채
성행위를 하는 동영상을 찍을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된다.
그게 누구의 죄라고 감히 밝힐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그녀는 뷰티풀 피플 언니의 고통에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도움의 손길을 전하는 대신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범죄에 대해선 무력하다.
그런 그녀의 남편은 뷰티풀 피플의 언니의 고통보다 자신의 수컷 기질에 떠밀려 그녀를
괴롭히는 남편의 귀를 생짜로 잡아 뜯어 버리고 피를 뚝뚝 흘리며 달아나는 그는 훗날
그를 잡는 계기를 경찰인 오장근에게 그전 사건보다 더욱 크게 만들어 준다. 

정말 잘 쓴 글인데 편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십 년도 더 전에 백민석의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을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장정일 아저씨의 '백민석 형처럼 글 쓰려면 나는 아직 멀었다' 와 그 어디쯤의 말을
들었을 때 백민석이란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던 것과 비슷한 이유였을게다.
난 불편한 영화는 즐기는 편이지만, 불편한 책은 즐기기 어렵다.
직접 보여주지 않는 글들을 상상하는 것이 내게는 고통이기에. 

만드릴 원숭이의 냄새가 한창림이 풍기는 수컷 냄새와 같다는 식의 표현을 했는데,
그냥 대충 알 것도 같았다.
동물원을 좋아하고 미각도 발달된 나는 동물원의 그런 냄새 또한 또렷이 기억하기 때문에. 

오탈자가 많이 보였는데 11년도 더 된 것이라 그냥 넘어간다.
오래 지난 책에 대해선 오탈자를 올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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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인문학 - 인문주의와 민주적 비판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김정하 옮김 / 마티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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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저자가 뭘 해 먹고 사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이분은 이 책을 내는 이유가 인문주의의 역사를 다루기 위해서도 아니고,
인문주의의 가능한 의미들을 모두 탐구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하이데거의 [인문주의 서간]에서처럼 인문주의가 전존재와 맺는 형이상학적 관계를 철저히 살펴보기 위해서도 아니라고 밝힌다.
즉, 그가 바라는 것은 쓸모 있는 실천으로서의 인문주의이며, 이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학자로서 무엇에 기여할 수 있는지 알고자 하며 이러한 원칙들을 자신들이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세계와 연결하고자 하는 지식인과 학계를 위한 인문주의라 한다. 

그는 테러리즘에 대한 두 가지 오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25쪽.
9월 11일 이후, 테러와 테러리즘은 대중의 의식 속을 굉장히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미국은 우리의 선과 그들의 악이라는 뚜렷한 구분을 강조했지요.
조지 부시에 따르면 당신은 우리 편이거나 아니면 우리 적입니다.
우리는 인도적인 문화를 대변한다. 그들은 폭력과 증오를 대변한다. 우리는 문명화되었다.
그들은 야만인들이다.
이 모두에는 오류에 빠진 두 가지의 가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첫째, 그들의 문명(이슬람)이 우리의 문명(서구)과 완전히 대립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새무얼 헌팅턴의 비통할 정도로 통속적이고 환원적인 문명의 충돌 논제에
애매하게 기초해 있습니다.

둘째, 테러를 규정하려는 노력 속에서 테러의 정치사와 본성을 분석하는 일이 곧
테러를 정당화하는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견해가 있습니다.
사소하고 피상적으로 보이는 이러한 견해들을 살펴보거나 반박하는 데에 시간을 쓰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이런 생각들이 끈질기게 이어져오고 있다는 사실만은 지적하고 싶습니다.

위와 같은 대상의 분석이 대상을 정당화 한다는 이상한 견해와 마찬가지로
어떤 것이 잘못 사용되고 있음을 공격하는 것이 그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거나 해체해버리는 것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32쪽. (너무 길거나 쓸데없는 말을 줄여서 옮긴다)
마찬가지로 저는 몇몇 인문주의 실천가들의 평판을 떨어뜨린 것은 인문주의의 악용이지
인문주의 자체가 신용을 잃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 4~5년간, 엄청나게 쏟아져 나온 책과 글은 반인문주의적인 시도-대부분의 경우
비유럽인, 이민자들과 관계된 정치나 공공정책에서 오용된 인문주의를 향한,
종종 이상적인 비판이었습니다-에 대해 과잉반응을 보이면서 문학의 죽음 또는
인문주의의 실패와 같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우울한 사건을 소란스러울 정도로 분석함으로써
새로운 변화에 답했습니다. 소란스러운 분석을 시도했던 이들이 노여워하는 전통주의자들이나
미숙한 논객에 불과하다는 사실에도 불과하고 인문학 전반이 대학에서 그 명성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입니다. 마사오 미요시가 이곳저곳에서 친밀하게 논의한 대로,
20세기 후반 미국의 대학은 대기업화되었고 변호, 의학적, 생명 기술적, 기업적 관심사들,
즉 인문학보다는 재정에 도움이 되는 자연과학 프로젝트에 더 몰두하고 있습니다.
미요시는 이어 인문학이-그가 옳게 가정하듯이, 회사 관리의 영역이 아니라 인문학자의 영역이지요-비현재성과 반중세적인 야단법석으로 전락했다고 덧붙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현재적인 영역으로 새롭게 부상한 탈식민주의, 민족학, 문화 연구 같은 최신유행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인문학자 스스로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대신할 자는 그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내가 속해 있던 어떤 문학 모임에서도, 문학이 죽어가고 있다고 야단법석하던
가라타니 고진의 작품을 두어 권 다루며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었다.
우리는 아니 나는, 죽었다고 떠드는 것 자체가 살리자고 안간힘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
이는 인문학이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냐는 그 어떤 근거도 댈 수 없는 안일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눴었다.
실제로 그 책은 근대 일본 문학의 역사로 시작되고 있었고 그것은 당연히
근대 일본 문학의 미래를 만들기 위해 살펴보는 당연한 단계라고 여겼었다.
더 재미 있는 것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하는 인문주의에 대한 편견인데
이는 모임을 만들려고 써 놓은 글에 있던 조금은 우스운 제안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 모임에 들어오고 싶은 자는 고진, 라캉 어쩌고 저쩌고,,,정도는 아는 사람이어야 하며...'
말도 안 되는 제안이었음이 모임이 시작됨과 동시에 밝혀졌다.
다음의 내용을 모임 대장이 읽어 본 적 있었더라면 벌어지지 않을 일이었을까? 

태도 또는 실천으로서 인문주의는 언제나 선택적 엘리트-그들이 종교적 엘리트든
귀족적 또는 교육적 엘리트이든-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관계의 한 항이고요.
인문주의가 비판적이고 진보적으로 자유로운 정신을 낳는 민주적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또는 그 과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엄격히 반대하는 태도가 다른 항입니다.
다시 말해 인문주의는 매우 제한적이고 까다로운 어떤 것으로 간주됩니다.
마치 엄격한 모임과 같죠. 대부분의 사람들을 배제하면서, 누군가를 모임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때에도 회원 자격을 확대하거나 제한적인 문턱을 낮추거나 참여하는 것을 편하게 하는
어떠한 것도 허용치 않고 규제하는 모임 말입니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현재 인문학의 첫 번째 문제점이다. 

35쪽.
지난 몇 세기 동안 "인문주의"라는 단어의 쓰임새를 돌아보자면,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과 서서히 대립되는 가운데 꾸준히 확장된 주제와 문제들이
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지금의 논의를 위해 간단히 가져다 쓰는 정의는
인문학이 세속적 역사와 인간노동의 생산물, 인간의 명확한 표현 능력에 관심을 둔다는 것입니다.
R.S크레인의 말을 빌려 인문학은 "자연적 과정이나 물리학적, 생물학적 일반 법칙의 관점이나
집합적 사회 조건이나 힘의 관점에 입각한 설명만으로는 충분치 않은...그 모든 것들 안에 있다.
말하자면,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보통 인간의 성취라 부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오늘날의 인문주의에 대해 또 앞으로 무엇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중요한 단면들을 들여다 봐야 한다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 문제라고 따로 나오는 것을 본 일은 없지만 내 생각 대로,
두 번째 문제일 것만 같은 신인문주의자들에 대하여. 

처음 출간된 1987년 당시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미국 정신의 종결]의 저자
앨런 블룸으로 대표되는 편협한 종류의 교육적 보수주의자 또는 그러한 작업.
이는 60년 전 신인문주의자들이라 불렸던 한 학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학파의 멤버는 어빙 배빗, 폴 엘머 모어였는데 이는 고전으로 전형화되는 고전적 세계관,
산스크리트, 몇몇의 기념비적 문학 작품과 언어들을 폐기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교육과 문화,
학계를 이미 호되게 꾸짖은 바 있었고, 이는 실질적으로 달갑지 않은 비유럽인들이 갑자기
너무나 많이 "우리의" 문 앞에 나타난다는 말을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한 것이라고 한다.
뭐 길게 말할 것 없이 문화와 문명을 흥미롭게 하는 것은 그들의 본질이나 순수성이 아니라,
조합과 다양성, 역행, 다른 문명들과  흡입력 있는 대화를 수행하는 방식에서 나온다고 믿는 저자
와, 공개강연에서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고 다른 주장에 개입하기를 거부하는 블룸
(이분은 앨런 블룸이 아닌 해럴드)이 비교되고 후자는 비판당해야 마땅하다는 것은 불보듯 뻔하다.
신기하게도 이 해럴드 블룸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문제로 넘어가보겠습니다.'
뒤인 50쪽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이 책에서 몇 번째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란 뜻.

51쪽에서 저자는
'우리의 지적 문화적 세계는 이제 간단하고도 자명한 전문적 담론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이 세계는 해결되지 않은 기록들이 끊임없이 변동하며 빚어내는 불협화음
-끊임없이 분기하며 정교해지는 문화의 명료화를 두고 레이몬드 윌리엄스가 사용한
명쾌한 단어를 사용하자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며
은근히 이제 언어에 대해 그리고 당연히 대상을 표현해야만 하는 인문주의에 대해 말할 것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69쪽에서 말한 것을 옮기면 그것으로 흡족한데,
저는 상상력이나 "창작' 모두 여전히 유용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문주의적 노력과
성취의 주요한 부분은 언제나 개인적 노력과 독창성에 기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나 음악가, 화가들이 백지상태에서 작업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세계는 이미 과거의 작가와 예술가의 작품뿐 아니라 사적인 의식 주변으로
물밀듯이 밀려오는 거대한 정보와 담론에, 사방에서 감각을 치고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자료뭉치들과 사이버공간 속에 강하게 기입되어 있습니다. 이 영향력은 개인적 발화의 본성을 틀 짓거나
변화시킵니다. 도서관과 문서보관소의 지식 보관, 개념의 형성을 총괄하는 규칙,
표현적 언어의 어휘 목록, 보급의 다양한 체계 등에 관여하는 메커니즘은 개개인의 정신으로 진입해, 개인성이 어디서 끝이 나고 공적 영역이 어디서 시작되는가에 대해 절대적인 확신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미적 작품은 물론이고 철학자, 지식인, 공적 인물들이 행한 진술들을 다루면서, 평범하지 않은 것에서 평범한 것을, 비범한 것에서 범상한 것을 분리해내는 것이 인문주의적 연구,독해,해석의 특징이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라고 예상과 같은 말을 한다.

인문주의자를 비판하고 인문주의의 특징을 밝혔으니
이제는 인문학에 대한 올바른 독해에 대해 말할 차례가 되겠다. 


저자는 94쪽에서
'다시 한번 에머슨과 포이리어에 기대어 동시대 인문학자들에게 주장하고 싶은 것은,
제가 수용과 저항이라고 부른 두 가지의 매우 결정적인 움직임 안에서 독해를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수용은 지식적으로 텍스트에 접근해 우선 텍스트를 잠정적으로 분리된 대상으로 다루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처음 만나 응대하는 방법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텍스트가 자리잡고 있는
애매하며 보이지 않는 틀을 확장하고 명료하게 함으로써, 텍스트의 역사적 상황들로 나아갑니다.
또한 태도, 감정, 수사와 같은 구조들이 당시의 흐름, 텍스트적 맥락의 역사적, 사회적 형성과 서로
뒤엉키는 방식으로 나아갑니다.' 

 위에서 저자는 길고 길게 설명하지만
 '결국 인문학자에게 독해의 행위는 우선 자신을 저자의 입장으로 위치시키는 행위'
이 짧은 문장 하나면 충분하다. 

99쪽에 보면 정밀한 독해에 관한 스피처의 표현이 나오는데 이곳에 옮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내 안에 축적된 방법의 이론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자주 멍해지는지.
마치 아직 그 마법을 풀지 못한 책장을 앞에 둔 신입생들처럼 말이다.
이렇게 비생산적인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작품의 분위기 속으로, 말하자면
점점 스며들려는 노력 속에서 끈질기고 대담하게 읽고, 또 읽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갑자기 어느 단어가, 어느 행이, [또는 단어들과 행의 어떤 조합이] 두드러지고,
우리는 이내 시와 우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윽고 나는 처음의 관찰에 덧붙여지는 다른 관찰들, 끼어들어오는 이전 경험들,
이전에 받은 교육들이 내 앞에 쌓아올린 연상들 [여기에 덧붙이자면, 실제로 우리를 사회의 시민으로, 내부인과 외부인으로 만드는 이전의 실천이나 습관] 로 인해, 특징적인 "번뜩임"이 일어나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번뜩임"은 세부사항과 전체가 공통분모를 찾았다는 암시이다.
이것은 글쓰기의 어원을 제시한다.
이 과정을 돌이켜 생각할 때 읽었다는 것은 읽었다는 것이며,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했다는 것과 같음을 알 수 있다.

110쪽.
누군가는 우리를 인도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 이러한 것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이라크 자체, 이라크의 역사, 이라크의 제도는 물론 우리가 여기에
지난 몇 십 년 동안 광범위하게 행한 짓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의기양양하게 전쟁에서
"재건"으로 나아간다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저항은 "악의 축"과 같은 짧은 정보의 파편들의 형태나 "이라크가 대량 살상무기를 보유했으며 이것은 미국과 우리의 삶의 방식에 직접적인 위협이다"
같은 문구로 다루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 모두를 수고롭게 파헤치고 끄집어내고, 증거자료를 수집하고 반박하고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미국의 인문학자들
-세계 유일의 열강국가에 사는 그들의 묵인(또는 침묵)은 학식 있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하지요-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인문주의적 숙고는 핵심만을 뽑아 전달하는 짧은 헤드라인식 형태를 거두어들이고, 대신 적절하게 사인들을 짚어내는 , 조금 더 길고도
신중한 숙고, 연구, 탐구적 논의로 향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미국들의 말대로 하자면 '악의 축'을 뽑아 버렸다며 모든 시민이 카메라 앞에서 박수를 치고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정의를 실현했다며 떠들석했던 최근,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책을 읽던 그 시기에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이다.
파렴치 범죄자에게도 인권이 있다고 떠들어 댈 때와 너무도 다른, 파리 목숨보다 못해 보이던 
한 집단의 우두머리의 생명을 제거하고 정의를 실현했다는 야단법석과 '아이고 무고한 목숨'
수없이 죽인 잡놈 잘 죽였네 하시던 우리 어머니 같은 사람이 '저 방법이 최선이었나'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우리 같은 일반인도 인문학자의 수준까지 가야만 가능한 것일까? 

117쪽부터 122쪽까지의 내용은 열심히 읽어서 녹음해야겠다. 

마지막으로 158쪽에 나온 우리가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을 남기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 이는 에리히 아우어바흐의 미메시스 중 부분인데 4장을 할애해 그가 소개한 것. 

기본적으로 우리가 인간의 삶과 사회를 바라보는 방식은 우리가 과거의 것에 관심을 둘 때나
현재의 것에 관심을 둘 때나 똑같다. 역사를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면 필연적으로 현재의 상황들을
바라보는 관점도 따라 바뀐다. 시대와 사회는 무엇이 절대적으로 바람직한가라는 정해진 개념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각각의 경우마다 각가의 전제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할 때, 그 전제 중에서 기후나 토양 같은 자연적 요소뿐 아니라 지적이고 역사적인 요소들을
사람들이 고려할 때, 다시 말해 역사적 역동과 역사적 현상의 비교 불가능성, 그리고 그 지속적인
내적 움직임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키게 될 때, 개개의 시대의 생명력 있는 통일성을 이해해
그 시대가 자신의 특징을 표명하는 것 속에 반영되는 전체로서 드러나게 될 때,
마지막으로 사건의 의미가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인식의 형태 속에서 포착될 수 없다는 것과
이해해야 할 자료들이 사회의 계급이나 주요 정치적 사전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며,
독특하고 내적인 힘에 의해 활기를 띠며 보편적으로 유효한 것을 포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점에서 예술, 경제, 물질적이고 지적인 문화, 평범한 세계의 깊이와 세계 속의 남성과 여성도
포함해야 한다는 확신을 받아들일 때,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러한 직관들이 또한
현재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현재 역시 비교불가능하며 독특한 것으로, 내적인 힘에 의해 활기를 띠며
지속적인 발전의 상태 속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는 역사의 한 조각으로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역사의 한 조각은 역사의 일상적 깊이와 전체적인 내적 구조의 기원과 발전하는 방향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죄없는 커다란 바퀴벌레 한 마리를 위해 사실 필요 없을지도 모를 살충제 다량을 꽥꽥 소리지르며
소비하고 이렇게나 긴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항의 인문학]을 끝낸다. 


아, 녹음하겠다고 결심한 내용은 몇 번이고 내 소리를 통해 읽어질 것이고 소리파일로 남을 것이다.

 

몇 달 전에 읽어치운 책의 독후감을 이제야 올린다.

후련하다.  

 

아래는 오탈자로 의심되는 부분 

40쪽 밑에서3줄: 바로 잡을 -> 바로잡을
49쪽 3줄: 아무 것도 -> 아무것도
60쪽 각주2줄: 깊숙히 -> 깊숙이
65쪽 11줄: 엘리엇가 -> 엘리엇과
76쪽 5줄: 고려할 때그렇게 -> 고려할 때 그렇게
80쪽 밑에서8줄: 단테를 -> 단테는
84쪽 밑에서6줄: 어제쯤 -> 언제쯤
110쪽 3줄: 몇 십 년 -> 몇십 년
160쪽 6줄: 있었을런지도 -> 있었을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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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자전거 여행 창비아동문고 250
김남중 지음, 허태준 그림 / 창비 / 200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작가님은 동화 문체 그대로 어른의 책을 써도 멋질 것 같다. 

장바구니에 넣었다, 우리 집에 있는 어떤 사람들에게 강제읽기를 시키려고. 

작품이란 자고로 이래야 한다. 

어떻게 흘러갈지도 모르고 그렇게 흘러간 걸 보면서도 머리를 갸웃거리며 아니, 어쩌면 이럴수가 를 느껴야 한다. 이 작가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 '도가니'를 읽고 나서라서 더 후련하고 그렇다. 

작가님 차라리 작가님이 사회문제에 더욱 크게 관심을 가져서 인터뷰도 하시고 그들에 대한 글도 써주세요, 그 인터뷰를 당하게 됐어도 좋을 저는 그렇게 도가니 때문에 화가 났었답니다. 

대학 일학년 여름방학에 했던 그 도보여행이 그대로 되살아 났던 작품이었다. 

걷는 우리를 향해 보내주는 박수, 희망의 외침, 와 좋을 때다 하며 웃어버리는 부러움의 소리까지. 

비도 무섭게 뜨겁던 햇빛도 걸어야 했기에 충분히 먹을 수 없던 그 역경까지도 다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런 것 때문에 이 책에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가족에게까지 있는 그런 가족 문제에 대해 이렇게 후련하고 홀가분하게 조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 어른은 아주아주 처음 봤기 때문에 더욱 환호가 필요했다. 

작가 성격상 자전거 여행이 나온 것은 충분히 당연하다. 만약 자전거 여행을 죽을 때까지 울궈 먹어도 욕먹지 말아야 할 좋은 글을 보게 해 줘서 고맙고 또 고맙다. 

자신도 모르게 가출 아닌 가출을 했던 호진이는 결국 가정 문제의 정면에 다가갔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희망을 안겨줄지도 모른다.  

아이를 아프게 한 어른들은 이 책을 읽고 자신의 아이에게 무릎 꿇고 머리를 짓찧으며 사과해야 한다. 니가 우리 가족의 일원임을 나는 잊고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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