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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 꽃들아 - 최병관 선생님이 들려주는 DMZ 이야기
최병관 글.사진 / 보림 / 2009년 5월
평점 :
DMZ : 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
단어의 의미만으로 이곳, 비무장지대를 표현할 수 있을까요?
책장을 열고 들어가 나는 작가와 함께 어느 새 그 이름을 입에 담기도 고통스러운
그 구역을 걷고 있었습다.
눈부시게 푸르른 창공 밑으로 고즈넉하게 누운 강산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허리띠를 두른 채
말없이 반세기를 버텨내는 중입니다.
서쪽 임진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의 모래밭까지 칭칭 감고 얽어 맨 철조망의 길이 249.4km,
이름은 휴전선. 그 휴전선을 두고 남북으로 각각 2km, 비무장지대 DMZ.
해마다 6월 25일이 되면 텔레비전을 통해 당시의 지옥 같은 상황이 남긴 전쟁의 흔적들을 보며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아려오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동포를 향한 총질의 자국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절망스러운 눈빛과 흐르는 눈물.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도 비무장 지대에는 그 아픔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지은이 최병관 선생님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 만에 민간인 최초로 비무장지대를
약 2년간인 450일 동안 걸어서 횡단하며, 사람의 발길이 끊긴 그곳의 모습을 10만장 이상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최병관 선생님이 카메라에 담은 것은 비단 세월의 흔적만은 아니었을
것이며, 전쟁 후 현재의 모습은 어떤가를 담은 것만도 역시 아니었을 것입니다.
책에 실린 사진을 보며 발견했습니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 우리 겨레의 움직임은커녕 숨소리와 몸을 숨길 수 있는 나무그늘조차
허락되지 않는 곳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것은 풀벌레와 꽃들이라는 것,
그 작은 생명들이 하루하루 피고 지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참혹하고 서로에 대한 경계심만이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눈을 밝히고 있는 곳이라는 것을요.
책에는 정말 많은 사진들이 실려 있는데요.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철조망 틈새에 조심스럽게 꽂아 놓은 작은 돌멩이,
빗줄기가 쏟아지는 듯이 어지러움 가운데서 이름 없이 죽어간 용사를 위해 누군가 세워놓은
십자가모양의 나무 묘비, 해가 저물고 모든 생명이 자신의 보금자리를 찾아가는 시간에도
비무장지대를 구석구석 살피는 초소의 날카로운 눈빛, 절대 다가갈 수 없는 지뢰밭에서
한껏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피어난 꽃무리, 총탄 자국이 선명한 건물과 다리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고 결국 참았던 눈물을 쏟게 만든 사진은 총알에 뚫린 철모 사이로
새치름하게 핀 꽃이 담긴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아팠을까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서로에게 던진 것이 총알과 포탄이 아닌 흐드러지는 꽃잎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반세기가 넘는 세월동안 비무장지대에는 언제나처럼 꽃이 피고 집니다.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짐으로 인해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한겨레의 한과 원망,
다시 하나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희망, 한 순간에 가족과 부모를 잃어야 했던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굳은 의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채 아물지 않은 생채기의 아픔, 혹여나 또 아픔을 겪을까 싶은
가슴 깊은 곳의 우려가 공존하고 어우러져, 꽃은 피어납니다.
그렇게 피어난 꽃은 치유라는 세월로 한 송이 한 송이 엮어진 채 따스한 이불이 되어
아무리 불러도 서러운 이름 DMZ 비무장지대를 살포시 덮습니다.
가슴까지 할퀴어 버릴 듯이 날카로운 철조망이 꽃 이불을 갈라놓아도 해마다 동강나버린
강산을 덮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피는 꽃들은 알 겁니다.
다른 이념으로 남이 되어버린 한반도의 이 두꺼운 허리띠가 사라지는 날까지
꽃들은 그 날의 울부짖음을 고스란히 담은 채 피어야 한다는 것을요.
따사로운 햇살에 아름다운 꽃잎조차 파리한 영혼을 대변하여 피어야 한다는 것을요.
아플 겁니다. 가슴 속 깊이 시림도 느끼겠지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태곳적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했지만
그것이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인가 의구심이 듭니다.
지켜야 하겠기에 지켜진 아름다움과 화합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지켜진 아름다움은
분명 다른 것이기 때문이죠.
집 앞 화단에 피어있는 꽃과 DMZ 안에 핀 꽃이 같은 종류라 할지라도 다른 꽃입니다.
아마도 비무장지대의 꽃 이름은 아픔일 거예요. 상처일 거예요.
그 옛날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하나가 되었던 그 시절을 기억하며 우리의 평화와
염원을 날개에 담아 팔랑팔랑 나비 한 마리는 꽃에게 이렇게 속삭여 주겠지요.
“울지 마, 꽃들아.”
하지만 창가를 서성이는 평화로운 바람 한 줄기를 그 곳에서도 동일하게 느낄 수 있는 그 날이
언젠가는 올 테지요. 한반도의 지도에서 249.4km의 허리띠가 사라지는 그 날,
우리는 그 곳에 핀 꽃들의 이름을 다시 지어주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꽃들의 또 다른 이름은 용서, 희망, 이해, 화합 일지도요.
서로에 대한 감시와 경계 속에 얼마나 외롭고 쓸쓸하겠니.
그 삼엄함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용서와 이해로 철조망이 끊어지는 그 날.
한 달음에 달려가 꼭 안아줄게.
아픔이라는 이름 대신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꼭 불러줄게.
그러니
울지 마, 꽃들아.
울지 마, 꽃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