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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대
미야모토 테루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3년 5월
평점 :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비웃으리라. 짐작건대 그런 사람들은, 놀랄 만큼의 행복은 평생 만나지 못한다.
말라죽은 줄 알았던 작은 화분의 꽃씨가 연둣빛 새싹을 틔웠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삐딱하게만 굴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어느 날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죄송해요"라며 울먹인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뭘까.
그렇게 생각하면 누구의 인생에나 넉넉한 행복이 마련되어 있다."(p.224)
<등대>는 미야모토 테루 작가의 신작이다. 이른바 '강 3부작'으로 다자이 오사무상, 아쿠타가와상을, 그외에 일본 문학에 관심있는 독자라면 알 만한 상들을 수상했다. <환상의 빛>은 <어느 가족>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화하였다. 이제나마 <등대>로 미야모토 테루 작가를 알게 된 것이 다행이지 싶다. <기사단장 죽이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옮긴 홍은주 번역가의 손을 거쳤다.
마키노 고헤는 상점가에서 중화소바(라멘) 가게 '마키노'를 3대 째 운영했다. 2년 전 30년 간 같이 가게를 꾸려나갔던 아내 란코가 죽었다. 상실감과 함께 가게 일에 버거움을 느끼고 문을 닫았다. 같은 상점가 친구들을 만나거나, 필요한 일 이외에는 집에서 칩거하기 시작했다. 독서가 낙이었다.
어느날 고헤는 카렌 암스트롱 저 <신의 역사>를 읽는다. 언젠가 읽으리라 묵혀뒀었다. 책에서 오래된 엽서를 발견한다. 고사카 마사오라는 낯선 발신인이 아내 란코에게 보낸 엽서. 한 점을 표시한 지도 일러스트와 더불어 대학 마지막 여름방학에 보고 싶었던 등대를 봐서 만족했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란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런데 그 엽서가 <신의 역사>에 꽂혀 있었을까.
어느날 친구가 심근경색으로 생을 마감한다. 고헤에게 독서가 왜 필요한지 가르쳐 줬고, 애독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헤는 친구의 죽음과 그 엽서를 떠올리며, 등대 순례를 결심한다. 등대 그 자체보다 칩거 생활에서 벗어나 다시금 일어서고 싶었다. "아무튼 억지로라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등대를 보러 간다. 그걸로 되지 않나."(p.53)
<등대>는 상처한 예순둘 마키노 고헤가 등대 여행을 하며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을 되짚어보는 여정을 담았다. 일본 각지 등대를 관람하는 중, 자녀들과 만나 여행을 떠나고,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족이라 오히려 몰랐던 속을 터놓는다. 떄로는 죽은 친구의 아들과 동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아내가 <신의 역사>에 숨겨놓았던 비밀을 알아나간다.
<등대>는 중년 남성이 상실감에서 벗어나 재생과 회복을 해 나가는 드라마를 서정적인 정서로 그려낸다. 등대를 순례하며 여러 감상을 느낀다. 주변인과의 유대감을 깨닫고 삶을 되짚어본다. 누군가에겐 그저 배를 안내하는 등대고, 누군가에겐 명소고, 누군가에겐 어두운 바다를 비추는 빛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에겐 이 모든 것이 삶으로 다가온다.
"한자리에서 침묵한 채, 바다를 나아가는 사람들의 생사를 지켜봐온 등대가 고헤에게는 어떤 일에도 동요하지 않는 한 인간으로 보였다.
하늘색과 바다색과 안개 속에서 등대는 스스로의 빛깔을 지우고 숨 죽인듯 보이지만, 해가 지면 어김없이 불을 밝혀 항로를 비춘다. 숱한 고생을 견디며 살아가는 이름 없는 인간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저것은 조부다. 저것은 조모다. 저것은 아버지다. 저것은 어머니다. 저것은 란코다. 저것은 나다.
저것은, 앞으로 살아갈 내 아이들이며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다.
저마다 다채로운 장점이 있고, 용기가 있고, 묵묵히 견디는 나날이 있고, 쌓여가는 소소한 행복이 있고, 자애가 있고, 투혼이 있다. 등대는, 모든 인간의 상징이다.
보라. 이것이 인간이고 인생이라고 등대는 들려주건만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다."(p.301)
마지막으로 아내 란코가 <신의 역사>에 꽂아넣은 엽서를 바탕으로 란코의 비밀을 찾아나선다. 수수께끼 엽서를 보낸 발신인을 만나 란코와 등대에 관련된 일화를 듣는다. 그리고 비밀을 안 후, 고헤는 읖조린다. "란코, 당신은 훌륭한 여자야. 확실히 그 엽서는 <신의 역사>야." (p.321)
란코는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자신이 언젠가 <신의 역사>를 펼쳐 볼 줄을, 혹은 그때 란코가 곁에 없을 때일 수 있었으리란 것을. "고헤는 대답을 고민했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에는 왜 이리 많을까."(p337)
"<소공자>를 처음 읽었던 스물일곱 살 때, 고헤는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지만, 마흔을 넘길 즈음에는 과연 세상에는 놀랄 만큼의 행복이 널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를테면?하고 물으면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의 숱한 행복이."(p.223)
예전에 한창 인기있던 일본 서정 영화를 보는 듯했다. 예순둘 중년의 남성이 등대 순례를 떠나 다시금 자신을 찾아가며 아내가 숨겼던 따스한 수수께끼를 풀어간다. 가끔 "유령"처럼 떠오르는 아내의 잔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30년을 함께 가게를 꾸려갔던 아내와 소소한 대화, 너무 가까운 나머지 듣지 못했던 이야기에 마음이 뭉클하다.누군가에게 나는 등대고, 누군가는 나에게 등대다.
그리고 행복이 있다. 고헤와 비슷한 나잇대를 맞이한 어머니께 <등대>를 추천했다. 한 시간 남짓 소설을 주제로 통화했다. 서정적으로 일상을 그리지만, 그 속에 정갈하고 깊은 육수의 맛이 있다고 하셨다. 그 대화들을 회상하며 글을 쓰는 새벽 이 순간. 행복이 아닐까. 스티븐 호킹 박사는 강연회에서 말했다. 우주에서 순간은 지구의 백 년이라고. 작가는 답한다. 순간 속에도 영원은 있는 법이라고. 어쩌면 지나칠 법한 일상의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다. 기쁨을 흠뻑 누릴 때, 그 순간에서 나는 조금이나마 영원을 맞이할 것이다.
방바닥에 드러누워 두께가 족히 4센티미터는 되는 <신의 역사>를 읽던 마키노 고헤는 긴 서문을 몇 줄 못 읽고 깜빡 졸았던 듯했다.
마흔을 넘길 즈음에는 과연 세상에는 놀랄 만큼의 행복이 널려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이를테면?하고 물으면 설명하기 곤란할 정도의 숱한 행복이. - P223
란코, 당신은 훌륭한 여자야. 확실히 그 엽서는 <신의 역사>야.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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