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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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개정판을 샀다. 전판에 비해 판형이 커지고 종이 질이 개선됐다. 문봉선 교수가 그린 먹그림 삽화가 비장하면서 고풍스럽다. 책 표지는 호란을 겪던 시절 인조가 청병을 피해서 파천하는 모습을  담았다. 남한산성 네 글자 세로 제목 아래 그려진 조선 임금의 파천길이 뭉클하고 애잔하다.

 

 

개정판은 옛 판에 없던 김훈 작가의 '못다 한 말'을 수록했다. 예전에 읽었던 작품이라 먼저 '못다 한 말'에 끌렸다. 2011년 <흑산> 출판 기념 사인회가 기억나서다. 사인회 강연 중에 작가는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못한다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며 꽤 시간을 할애했다. 질의 응답 시간에 어떤 독자가 그에 대해 꽤 격앙되게 질문하기까지 했다.  당시 나에겐 기자 정신에서 발현된 엄정함으로 다가왔었는데, 개정판에서 별도로 '못다 한 말'을 실었다고 하니 궁금했다. 작가가 작품에서 말하지 못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옛 <남한 산성>을 소장하고 있지만 개정판을 샀다.

 

 

'못다 한 말'엔 호란에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작품에 대한 소회가 들어 있었다.  작중 등장인물인 척화파 김상헌과 주화파 최명길, 서날쇠와 최명수, 병자호란 후 청에 끌려간 척화파 세 신하(삼학사)의 후일담, 그에 대한 인물 평가와 작가로서의 감상을 적었다. 나에겐 언어의 한계와 상상의 위험성에 관한 내용이 인상 깊었다. 그 한계와 위험성이 가진 경계를 지키다 보니 못다 한 말이 생긴다는 것이다. 예컨대, <칼의 노래>에서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의 침묵의 내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흑산>에서 "정약용의 침묵의 내면에 관해서는 한 줄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남한산성>도 마찬가지다. 독자는 때로 그 여백이 궁금하겠지만, 말하지 않음으로써 높아지는 설득력과 완성도가 있는 것 같다.

 

 

"정약용의 침묵의 내면에 관해서는.....그 안쪽의 풍경을 드러내기에는 나의 언어는 허약했다. 말하여지지 않는 것에 비하면 말하여지는 것은 얼마나 작은가. 나에게는 늘 쓸 수 있는 것보다 쓸 수 없는 것들이 더 많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p.401)

 

 

반면에, 작품에서 주화파와 척화파가 벌이는 논쟁들, 신하의 상소와 임금의 교서는 판이하다. 필치는 현학적이고 고급스러우나, 그 분분한 말들은 현실을 담지 못할 뿐더러 지나침을 모르고 달려간다. 작가가 말한 언어의 한계와 상상의 위험성을 드러낸다.

 

 

"문장으로 발신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맥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말들의 산맥 너머는 겨울이었는데, 임금의 시야는 그 겨울 들판에 닿을 수 없었다." (p.15)

 

 

분분한 말의 향연을 담는 묘사는 작가답지 않게 격앙돼 있다. <논어>에서 공자는 제자 사마우가 "인(仁)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말을 더듬는 것이다'라고 답한다. 말에 따르는 실천의 어려움을 지적한 가르침이다. 현실과 괴리된 말은 어짊의 덕목이 아니고, 공자는 정명(正名)을 내세워 이를 얼마나 경계했던가. 현실을 앞서는 말은 유교를 숭상한 조선 조정이 갖춰야 할 자세는 아니었다. 작품에서 임금은 묘당의 논쟁에 가려서 호란의 국면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

 

 

임금도 마찬가지다. 남한 산성 성벽을 지키는 병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다. 손이 얼어 제대로 창을 잡지 못한다. 임금은 교서를 내려 병졸을 위무하고 치하하지만, 말은 추위를 물리지 못하고 병사의 고충을 해결하지 않는다. 임금의 교서는 추위에 덮을 가마니 조각보다 못하다. 마치 <흑산>에서 정순왕후의 교서가 떠오른다. 교서는 현학적이고 현란하다. 대비는 나라 걱정과 고달픈 백성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애달프지만, 그 절절함은 어디까지나 문장 안의 세상에서다. 교서는 조선 말기 백성이 겪는 곤궁함과 애환을 달래주지 못했고. 허황되었다.

 

 

말로써 함부로 위로할 수 없는 삶의 치욕은 <남한산성>의 한 축이다. 작품에선 실제 역사에 삼전도의 굴욕으로 알려진 사건이 등장한다. 인조는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신하의 예를 바치러 남한산성을 나온다. 신하로서 나서는 길이라 남면하는 왕의 권위는 내세울 수 없었고, 남문 대신에 서문으로 홍타이지에게 예를 바치러 갔다. 이 사건에 대해 작가는 다른 에세이에서 말했다.

 

 

"남한산성 서문의 치욕과 고통을 성찰하는 일은,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는 세상에서 그러나 죽을 수 없는 삶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아마도 받아들일 수 없는 고통과 치욕이란 없는 모양이다. 모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은 결국은 받아들여진다."

 

 

"나는 투항으로써 나라를 지켜낸 인조의 치욕을 긍정한다. 나는 투항하는 임금의 뒤를 따라 눈 쌓인 산길을 걸어 내려가던 시녀들의 통곡을 긍정한다. 삶이 불가능할 때, 영광보다 치욕을 내포하는 삶이 더 소중하다고 남한산성은 가르쳐준다. 치욕은 삶의 일부라고 남한산성은 가르쳐준다. 삶이든, 역사든, 오로지 온전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남한산성은 가르쳐준다."

 

- "살길과 죽을 길은 포개져 있다", <자전거여행2> 중에서

 

 

삶은 치욕을 감내해야 하는 행위다.  작가는 그것을 일관되게 쓴다. 독자는 작가의 작품에서 현실의 치욕을 되새긴다. 힘들고 우울할 때도 밥을 꾸역꾸역 삼켜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삶인 것처럼, 작품을 통해 치욕은 숙명임을 되새긴다. 독자는 역설적으로 작가의 시선에 공감과 위안을 얻는다. 작위적이고 과장되지 않아 더욱 감명 깊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저쪽 물가에 낚싯대를 들고 앉아서 나를 건져올리는 자는 대체 누구인가. 그 자가 바로 나다. 이러니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다시 밥을 벌 수가 있다."

 

- "밥1", p.71~72, <라면을 끓이며> 

 

 

김훈 작가의 글을 읽으면 이성복 시인이 떠오른다. <남해 금산>에 수록된 "치욕의 끝"과 "고통 다음에 오는 것들"이다. 시인은 김훈 작가처럼 치욕과 고통을 관찰하고 시로 승화시킨다. 독자가 김훈 작가의 작품에서 느끼는 감상과 이성복 시인의 시는 닮은 데가 있다.

 

 

치욕의 끝

 

치욕이여,

모락모락 김 나는

한 그릇 쌀밥이여,

꿈꾸는 일이 목 조르는 일 같아

우리 떠난 후에 더욱 빛날 철길이여!

 

-  p.23 , <남해금산>

 

 

고통 다음에 오는 것들

 

고통 다음에 오는 것들,

저 하늘엔 밀고 밀리는 배들,

정다운 사람들은 명절날처럼 盛裝(성장)하고

떡과 과일을 나누고

나뉘는 슬픔의 몫도 아름답다.

 

고통 다음에 돌아와

저무는 들판을 양팔로 껴안고

저미는 벌레 소리에 머리 수그리면

 

마침내 괴로움이 켜드는 불,

저 하늘엔 밀고 밀리는 배들,

착한 어버이들이 모여 앉아

맑은 술을 나누고 있다.

 

- p.70, <남해금산>

 

 

작가는 어쩔 수 없는 치욕을 긍정하는 일뿐 아니라, 그 안에서 소신과 철학을 지키는 인물, 무엇보다 언어의 세계를 넘어 생명력을 발산하는 인물을 내세운다.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은 비록 묘당에서 싸웠지만 결국 청나라 감옥에서 서로를 인정한다. 척화나 주화의 관점을 떠나서 나라를 위한 맑은 충정과 소신을 인정한다. 의리와 절개는 그들이 무기로 붙들고 싸웠던 언어 이상의 정신이었고, 서로를 인정하게 된다.

 

 

서날쇠와 <흑산>의 마노리에겐 작가의 애정이 돋보인다. 서날쇠는 남한산성에 거주하는 대장장이자 무당이다. 김상헌의 부탁을 받고 전국 근왕병에게 격문을 전달한다. <흑산>의 마노리는 발이 빨라 천주교인 사이의 전달책을 맡아 동분서주한다. 이들은 천한 신분이나 밑바닥에서 배운 삶의 지혜와 강건함을 갖춘 인물이다. 날 것의 생명력을 발산한다.

 

 

<논어>에서 공자는 곤궁한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박학다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책상물림이 아닌 생생한 생존 현장에서 삶의 지혜와 배움을 얻었기에 윗일에서 아랫일까지 꿰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서날쇠와 마노리가 학문적 업적을 남기진 못했으나, 생존 현장에서 지혜는 누구보다 뛰어난 인물들이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전란이 끝난다. 조선은 청이 가져간 노획물과 수십 만에 이르는 인질 때문에 나라가 휘청거렸으나, 남한산성엔 다시 봄이 오고 농사를 짓기에 너무 늦지 않았다고 한다. 서날쇠는 다시 일가를 이끌고 삶의 터전인 남한산성 대장간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서날쇠는 뒷마당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 뿌렸다. 똥물은 잘 익어서 말갛게 떠 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장군을 날랐고, 아내와 나루가 들밥을 내왔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온 날 나루는 초경을 흘렸다.

나루가 자라면 쌍둥이 아들 둘 중에서 어느 녀석과 혼인을 시켜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며 서날쇠는 혼자 웃었다." (p.393)

 

 

남한산성엔 조선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치욕이 새겨졌다. 그러나 남한산성에서 새싹이 돋고 서날쇠를 비롯한 민초는 다시금 생업을 이어간다. 삶은 치욕과 고통을 내포하지만, 그것 또한 생을 향한 몸부림이 아닌가 싶다. 서날쇠는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는 순환의 이치를 안다. 쌍둥이 아들은 자라 삶의 터전을 이어갈 것을 안다. 뱃사공의 식솔로 홀로 청병의 봉쇄를 뚫고 남한산성에 들어온 나루를 며느리로 점지하고 흐뭇한 웃음을 지을 줄 안다. 그것이 삶인 줄 안다.

 

 

군인 시절에 읽은 소설이라 그런지 <남한산성>은 감회가 남다르다.  김상헌과 최명길이 갔던 길이 마음 속에서 다투는 것 같았고, 서날쇠가 가진 단단함과 생존의 지혜가 부러웠다. 힘든 시절에 읽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윤태호 작가의 만화 제목처럼 "미생(未生)"으로 산다. 이상과 현실에 고민하고, 삶의 길을 찾아 치욕과 고통을 겪어나간다. 이런 주제의식을 김훈 작가처럼 끈질기게 붙들고 천착하는 작가가 또 있을까. 한번쯤 그의 작품 <남한산성>을 읽어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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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16 09: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삶을 지탱할 밥벌이는 치욕을 감내 해야한다‘는 구절이 오늘도 지겨운 밥벌이를 해야하는 이 들에게 위안을 주는 군요..

캐모마일 2017-11-16 14:0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저도 그 부분이 인상적이라 김훈 작가의 작품을 계속 읽게 되네요.

cyrus 2017-11-16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훈의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쓴 에세이부터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

캐모마일 2017-11-16 14:11   좋아요 0 | URL
네. 에세이와 소설이 통하는 데가 많은 것 같네요. 에세이에서 소설의 모티브가 보이기도 하고..조언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