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 전집 -시
천상병 지음 / 평민사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귀천> 중에서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한다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정감에 그득찬 계절,

슬픔과 기쁨의 주일,

알고 모르고 잊고 하는 사이에

새여 너는

낡은 목청을 뽑아라.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새> 중에서

 

<귀천>으로 유명한 고 천상병 시인은 문단에서 기인으로 통했다. 어느날 갑자기 행적이 묘연해서 지인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못 찾았단다. 문인들이 시인을 기리는 마음에 유고 시집 <<새>>가 출간되었다. 알고보니 풍찬노숙하던 중에 쓰러져서 행려병자로 몇년 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던 것. 살아 생전에 유고 시집이 나왔으니, 기인이란 명성이 헛되지 않다.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이 <<새>>인 이유는 초기시 중에 '새'란 제목이 많고, 새의 표상을 애용한 덕분이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귀천>이 수록돼 있다.

 

 

현대사는 기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박정희 정권 시절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유명한 대형 공안 사건으로 예술인과 유학생들이 대거 피해를 입었다. 고 최종길 서울대 법대 교수는 동생이 중앙정보부 엘리트였음에도 의문사를 당했다. 천상병 시인은 동베를린을 견학한 지인에게 막걸리값을 종종 받았다는 빌미로 끌려가서 평생 후유증에 시달렸다. 평소 천진한 얼굴로 문인들에게 막걸리값을 달라 했던 그였다. 얼마나 어이없는 비극인가.

 

 

<<새>> 이후의 작품은 운율이나 기교보다 일상에서 느낀 깨달음, 삶과 죽음, 근원에 대한 단상과 신앙이 진솔하게 담겨 있다. 순수한 시심에 정감이 간다. 막걸리, 맥주 찬양부터 가난, 카페 '귀천'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진 아내 목순옥 여사에 대한 고마움까지. 읽고 있으면 마음 한켠이 따스해진다. 시도 <막걸리>, <맥주>, <아내>, <장모님>, <찻집>. 일상의 소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땅을 가지고 싶지만,

돈이 있어야 한다.

돈을 많이 벌어야 겠다.

 

땅을 가지고 있으면,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다.

 

- <땅> 중에서

 

 

돈 많이 벌어서 땅을 사고 싶다. 그렇게 매입해서 하고 싶은 일이 초목을 가꾸고 꽃을 심겠단다. 속인이 보기엔 허탈하기 그지없다.

 

 

하늘에 둥둥 떠있는 구름은

지상을 살피러 온 천사님들의

휴식처가 아닐까.

 

- <구름> 중에서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뺵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행복> 중에서

 

 

아내는

카페를 경영하고 있다.

 

...

 

그렇잖아도

좋은 아내인데

돈도 버는 것이다.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 <아내> 중에서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고문 후유증에 말이 어눌하고 걸음은 어색했지만, 행려병자로 정신병원에 다니며 지인들에게 막걸리값을 얻어 썼지만, 행복할 줄 알았다. 문인들도 시인을 기인으로 여겼을 망정, 꺼리거나 홀대하지 않았다. 기행은 때묻지 않은 시심에서 나왔고, 시는 소박하나 울림이 크다.

 

 

정비석의 <<김삿갓>>과

이재운 씨의 <<토정비결>> 두 책은

한국 지식인이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 <꼭 읽어야 할 책> 중에서

 

 

시인은 꼭 읽어보라고 했는데, 여전히 <<김삿갓>>과 <<토정비결>>을 읽지 못했다. 시인을 좋아한다면서 당부는 지키지 못했다. 빚진 마음이 든다. 생전에 시인이 맥주와 막걸리값을 충당하며 행복을 주었던 인사동 찻집 <귀천>. 목순옥 여사가 타계한 뒤로 본점 문을 닫았다. 이제는 조카가 2호점을 운영 중이다. 아마 시 <진이> 주인공인 처조카 영진 씨가 아닐까 싶다.

 

 

나하고 아내한테서는 

아이가 하나 없고

스물 두 살짜리 여조카 진(眞)이가

우리 부부의 딸처럼 되어 있다.

 

본명은 영진(榮眞)인데

그냥 진(眞)으로 통한다.

 

- <진이> 중에서

 

 

시인 부부에게 딸 같았던 처조카 영진 씨는 진(眞)이로 불렸다. 참이란 뜻이 시(詩)에 담긴 마음과 우연히도 어울린다. 대학생 시절 막상 서울에 적을 두고 살았으면서, <<천상병 전집>>을 책장 중간 칸에 꽂아놓고 세상이 미울 때 훑었으면서, 막상 목순옥 여사 생전에 찻집 '귀천'에 들르지 않았다. 정비석 작가 <<김삿갓>>과 이재운 씨의 <<토정비결>>도 읽지 않았다. 천상병 시인을 좋아한다고 자부하기는 부끄럽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 생활에 시달리고 사람에 시달리면 시집을 집어든다. 산골 소풍을 다녀온 듯하다. 맑은 개울물에 마음이 정갈해지고 따스한 햇살에 문득 뭉클해진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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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08 11: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귀중한 시집을 읽으셨군요. 천상병 시집 1권을 가지고 있어요. 2권은 구하기 힘드네요. ^^

캐모마일 2017-01-08 12:03   좋아요 1 | URL
역시 귀한 책들을 많이 소장하고 계시네요...ㅎㄷㄷ

개인적으로 <천상병 전집>은 제 인생 시집 중 하나입니다.
시는 잘 모르는데,
백석, 기형도, 이성복, 서정주, 황동규, 천상병 시인은
가슴에 와 닿네요.


cyrus 2017-01-08 12:12   좋아요 1 | URL
캐모마일님이 좋아하는 시인들을 저도 좋아합니다. ^^

AgalmA 2017-01-08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순옥 여사가 운영하시던 <귀천> 모과차 정말 좋아해서 가면 늘 그것만 마셨어요. 인사동 가면 찻집 아지트 같아 좋았는데...시인도, 부인도 제게 좋은 추억을 남겨 주셨습니다.

캐모마일 2017-01-08 19:55   좋아요 1 | URL
부럽습니다....ㅜㅜ 모과차가 명물이란 말씀은 여러 번 들었는데 직접 당골분을 뵙네요.

AgalmA 2017-01-08 22:51   좋아요 1 | URL
전통차 몇 가지를 병에 담아 파시기도 했죠^^ 그땐 여유가 그리 없어서 사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