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 머니 - 생명을 구하는 약을 둘러싼 탐욕의 전쟁
네이선 바르디 지음, 신유희 옮김 / 상상스퀘어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구용 신약은 누구의 공포를 덜어주는가

— 네이선 바르디, 『블러드 머니』를 읽으며


『블러드 머니』를 읽기 시작하며 가장 먼저 붙잡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왜 신약 개발은 이토록 고가의 혁신 치료제를 향해 달려가는가. 암 치료제, 표적치료제, 경구용 신약. 이 단어들은 모두 과학의 진보처럼 들린다. 병의 원인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고, 환자에게 더 적은 고통으로 더 긴 시간을 주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이 단어들은 미국 의료 시장 안에서는 막대한 자본이 움직이는 언어이기도 하다. 생명을 구하는 약은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희망이고, 누군가에게는 수십억 달러짜리 시장이다.


이 책의 제목이 『블러드 머니』인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생명을 둘러싼 돈은 언제나 깨끗하지만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단순히 더럽다고만 말할 수도 없다. 누군가의 절박함이 누군가의 투자 기회가 되고, 누군가의 생존 시간이 누군가의 시장 가치가 되는 세계. 이 책은 바로 그 불편한 교차점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BTK 억제제 같은 표적치료제는 기존 항암치료의 한계를 넘기 위해 개발되었다. 전통적인 화학항암제는 빠르게 분열하는 세포를 폭넓게 공격한다. 그 과정에서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세포도 함께 손상될 수 있고, 환자는 탈모, 구토, 피로, 면역 저하, 통증 같은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반면 표적치료제는 암세포가 생존하고 증식하는 데 기대고 있는 특정 회로를 겨냥한다. 암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버티고 있는 핵심 신호축을 찾아내 그 흐름을 끊으려는 접근이다.


이브루티닙 같은 BTK 억제제는 B세포 수용체 신호전달에 중요한 효소를 겨냥한다. 만성림프구성백혈병이나 외투세포림프종 같은 B세포성 혈액암에서 암세포는 특정 생존 신호에 의존한다. 이 약은 그 회로를 차단함으로써 암세포가 살아남는 방식을 방해한다. 이것은 단순히 “새 약 하나”가 나온 사건이 아니다. 암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게 된 과학의 결과다. 암을 하나의 병명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 변이, 신호전달 경로, 면역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질병군으로 이해하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접근이다.


그런 점에서 표적치료제의 등장은 현대 의학의 성취다. 암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 “어떻게 죽일 것인가”에서 “무엇에 기대어 살아남는가”로 바뀐 순간이기 때문이다. 병의 핵심 회로를 찾아내고, 그 회로를 막아 환자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일. 표적치료제는 그 자체로 과학이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의학적 필요는 미국 의료 시장 안에서 곧바로 사업적 가치로 번역된다. 암 치료제는 높은 가격을 정당화하기 쉬운 영역이다. 생명과 직결되고, 대체 치료제가 부족하며, 환자와 가족에게는 “시간을 벌어주는 약”이기 때문이다. 표적치료제는 환자군이 좁아도 고가 책정이 가능하다. 특정 암종, 특정 돌연변이, 특정 치료 단계에서 효과를 보이면 “정밀 치료”라는 가치가 붙는다. 환자 수가 많지 않아도, 그 환자들에게는 대체 불가능한 약이 될 수 있다. 이 절박함은 가격의 논리로 바뀐다. 생명의 시간이 곧 시장 가치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경구용 표적치료제는 장기 복용 시장을 만든다. 병원에서 일정 주기로 주사를 맞고 끝나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 약을 먹으며 병을 억제하는 만성 관리형 치료가 될 수 있다. 환자에게는 편의성과 지속 가능성이 생기지만, 개발사 입장에서는 장기간 매출이 발생하는 구조가 된다. 한 번 성공하면 적응증 확장도 가능하다. 처음에는 특정 혈액암 치료제로 시작했더라도, 같은 B세포 신호 경로가 관련된 다른 혈액암, 더 나아가 자가면역질환까지 확장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면 하나의 약은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플랫폼형 자산이 된다. 과학의 발견은 특허, 브랜드, 장기 복용, 적응증 확장, 인수합병 가치로 이어진다.


그래서 경구용 항암제는 이중적인 얼굴을 가진다. 한쪽 얼굴은 환자 친화적이다.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고, 입원하고, 수액 항암을 견디는 대신 집에서 약을 먹으며 치료를 이어갈 수 있다. 환자 접근성이 좋아지고, 병원 이용 부담이 줄어들며, 치료가 삶의 리듬 안으로 들어온다. 특히 미국처럼 의료비가 높고 보험 구조가 복잡한 사회에서 경구용 치료제는 “의료비 부담을 낮추고 환자 편의를 높인다”는 강력한 명분을 갖는다.


주사 항암제가 의료 행위의 일부로 처리되는 반면, 경구 항암제는 약제급여 구조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환자 부담이 달라질 수 있다. 이 차이를 보완하려는 oral parity law의 흐름까지 생각하면, 경구용 치료제는 분명 환자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먹는 약이라는 형태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의료 접근성과 보험 설계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러나 다른 얼굴도 있다. 경구용 신약은 병원 밖으로 나온 치료이면서 동시에 환자의 일상 안으로 들어온 시장이다. 약은 집에서 먹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약값과 부작용 관리와 장기 복용의 부담도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다. 치료가 덜 침습적으로 바뀐 만큼, 환자와 가족은 매일 약을 챙기고, 반응을 살피고, 보험과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병원 침대에 묶이는 시간은 줄어들 수 있지만, 고가의 약을 지속해야 하는 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구용 표적치료제는 환자를 병원에서 조금 해방시키지만, 동시에 특허와 가격 체계 안에 오래 묶어둘 수도 있다. 치료의 공간이 병원에서 집으로 이동했을 뿐, 치료의 부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달땡이의 림프종 치료를 떠올렸다. 달땡이는 내게 단순한 반려동물이 아니라 가족이었다. 그 아이에게 림프종이 생겼을 때, 내 앞에는 몇 가지 선택지가 놓였다. 수술적 제거, 화학요법과 주사, 그리고 경구투약과 표적 치료 추적. 이 선택지들은 의학적 판단의 목록이기도 했지만, 보호자인 내게는 공포의 목록이기도 했다. 수술은 병변을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선택지였지만, 마취가 필요했다. 화학요법과 주사는 보다 적극적인 치료처럼 보였지만, 치료 과정에서 달땡이가 겪을 고통과 스트레스가 두려웠다. 병원 안쪽에서 내가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내 아이가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혹시라도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나를 압도했다.


나는 결국 경구투약을 선택했다. 그 선택의 중심에는 의학적 판단도 있었지만, 더 깊은 곳에는 공포가 있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 아이가 아파하고 괴로워할까 봐, 치료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생명을 낯선 공간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이 선택이 모든 경우에 정답이라는 뜻은 아니다. 질환의 종류, 병기, 환자의 상태, 수의학적 판단에 따라 최선의 치료는 달라질 수 있다. 다만 그 순간 보호자인 내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는 분명했다. 나는 치료 자체만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치료 과정에서 내가 완전히 무력해지는 감각을 두려워했다.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달땡이는 처음에 약을 거부했다. 이미 하루에 열댓 번씩 토하며 몸무게가 반토막이 난 아이였다. 나는 그런 아이에게 약 먹는 시간마저 공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약은 독했고, 병원에서도 입맛이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몸이 무너지고 있는 아이에게, 치료라는 이름으로 또 하나의 공포를 얹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달땡이의 영리함과 나와의 유대를 믿어보기로 했다. 억지로 붙들고 밀어 넣는 대신, 아이를 설득했다. 십오 분, 이십 분씩 말을 걸었다. 내 말을 정말 알아들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달땡이가 납득한 듯한 눈빛을 보이면,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벌리고 손가락으로 약을 밀어 넣었다. 그것은 단순한 투약이 아니었다. 치료의 가장 작은 단위가 보호자와 환자 사이의 협상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나는 아이의 거부를 고집으로만 보지 않으려 했다. 아픈 몸이 보내는 두려움이자, 쓰고 독한 약을 삼켜야 하는 생명의 저항으로 보려 했다. 그래서 매번 달땡이를 이기려고 하지 않았다. 달땡이와 함께 약을 먹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치료란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주 작은 신뢰 위에서 겨우 성립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인가 달땡이는 좁은 집 안 대신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를 걷고 싶어 했다. 한참 걷고 나면, 마치 운동하고 배고파진 사람처럼 밥을 먹었다. 조금씩 약에도 적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달땡이가 사라진 식욕을 스스로 불러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느꼈다. 살려고, 자기 몸을 다시 움직이게 하려고, 아이가 자기 나름의 방식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달땡이를 데리고 산책을 시작했다. 고양이 산책이 위험하고 일반적으로 권장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는 시간대를 골랐다. 주변이 시끄럽지 않은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 모두가 출근하고 등교한 뒤의 한적한 오전. 우리는 30분에서 한 시간 남짓 복도를 걸었다. 달땡이가 걷고, 냄새를 맡고, 몸을 움직이고, 다시 살아 있는 감각을 되찾는 시간을 기다렸다. 집에 돌아오면 발을 닦이고, 밥을 먹이고, 약을 주었다.


그 시간들은 내게 치료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했다. 치료는 병원에서 처방된 약물만이 아니었다. 치료는 약을 삼키기 전까지의 설득이었고, 아이가 고개를 돌리면 기다리는 일이었고, 밤의 복도를 함께 걷는 일이었고, 밥그릇 앞에서 다시 식욕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일이었다. 치료는 환자의 몸만이 아니라, 환자와 보호자가 함께 견디는 시간 전체였다.


그렇게 경구투약을 이어간 지 2년 만에, 달땡이는 림프종 완치 판정을 받았다. 거의 기적 같은 케이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경구 투약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했다. 경구 투약은 단순히 병원에 덜 가도 되는 편리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랑하는 존재가 치료의 과정에서 완전히 낯선 시스템 안으로 사라지지 않게 하는 방식이었다. 보호자가 곁에서 보고, 설득하고, 기다리고, 약을 먹이고, 다시 밥을 먹는 순간까지 함께할 수 있게 하는 치료의 형식이었다.


인간 환자와 가족에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주사 항암이나 입원 치료는 몸의 고통뿐 아니라 공포를 동반한다. 치료실에 들어가는 일, 혈관을 잡히는 일, 약물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 부작용을 예감하는 일. 그 과정은 환자와 가족에게 강한 불안을 준다. 반면 경구용 표적치료제는 치료를 병원 안쪽에서 환자의 일상으로 가져온다. 물론 그것이 고통을 없애지는 않는다. 부작용도 있고, 비용도 있고, 장기 복용의 부담도 있다. 그러나 치료가 환자의 삶을 완전히 병원에 빼앗기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경구 투약은 분명한 심리적 가치를 가진다. 약을 삼키는 행위는 단순한 복용이 아니라, “나는 아직 내 삶 안에서 치료받고 있다”는 감각을 준다.


그래서 나는 경구용 신약 개발의 논리 안에 “공포를 낮추는 기술”이라는 요소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환자 접근성, 의료비 부담 완화, 장기 복용 시장, 적응증 확장, 특허와 브랜드. 이런 산업적 이유만으로는 경구용 표적치료제의 힘을 다 설명할 수 없다. 경구 투약은 병을 치료하는 방식인 동시에, 환자와 보호자가 치료의 공포를 견디게 하는 심리적 형식이다. 병원 밖에서도 치료가 이어질 수 있다는 감각. 사랑하는 사람의 상태를 곁에서 지켜보며 치료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감각. 그 안정감은 실제 치료 선택에서 매우 큰 힘을 가진다.


문제는 그 안정감마저 시장의 언어로 번역된다는 데 있다. 환자에게는 덜 침습적인 희망이지만, 개발사에게는 장기 복용 매출을 만드는 상품이 된다. 보호자에게는 사랑하는 존재를 곁에서 돌볼 수 있다는 안도감이지만, 제약사에게는 특허와 브랜드와 고가 약가를 정당화할 수 있는 가치가 된다. 신약은 환자의 몸을 겨냥하지만, 동시에 환자와 보호자의 공포도 겨냥한다. 치료의 두려움을 낮추는 기술은 분명 선한 효과를 갖지만, 그 선한 효과가 곧 시장의 강력한 설득 논리가 된다.


『블러드 머니』가 흥미로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생명을 구하는 약은 순수한 선의만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순수한 탐욕만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병의 핵심 회로를 찾아내고, 환자에게 더 나은 시간을 주기 위해 싸운다. 투자자와 제약사는 그 가능성을 고가의 자산으로 만들고, 특허와 임상과 인수합병의 언어로 포장한다. 환자는 그 사이에서 생명을 연장하고, 고통을 줄이고, 동시에 비용과 부작용과 보험의 현실을 감당한다. 한쪽에는 실험실의 집요함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월가의 계산이 있다. 그 사이에 환자의 몸과 가족의 공포가 놓인다.


고가의 표적치료제는 단순히 탐욕의 산물도, 순수한 선의의 결과도 아니다. 기존 항암의 한계를 넘고 환자에게 시간을 벌어주려는 과학적 필요에서 출발하지만, 미국 의료 시장에서는 그 절박함이 고가의 브랜드, 특허, 장기 복용 시장, 적응증 확장, 인수합병 가치로 전환된다. 표적치료제의 시대란 암을 더 정밀하게 이해하게 된 과학의 성취이면서, 생명의 절박함이 가장 비싼 시장이 되는 자본주의의 얼굴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묻게 될 것 같다. 생명을 구하는 약이 환자의 삶을 얼마나 덜 고통스럽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그 덜어진 고통은 누구의 비용과 누구의 이익으로 재배치되었는가. 경구용 혁신 치료제는 환자와 보호자의 공포를 덜어주는 기술이다. 동시에 그 공포와 희망이 고가의 시장으로 조직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모순을 함께 보아야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블러드 머니』는 신약 개발의 빛나는 성공담만을 말하는 책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아마 생명을 구하려는 과학이 어떻게 자본과 만나는지, 환자의 절박함이 어떻게 시장 가치로 바뀌는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여전히 더 나은 약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지를 묻게 할 것이다. 달땡이의 치료 앞에서 내가 느꼈던 공포를 떠올리면, 나는 경구용 신약의 의미를 단순히 산업적 혁신으로만 볼 수 없다. 그것은 생명을 조금 덜 아프게 붙잡고 싶은 마음, 사랑하는 존재를 병원 밖 일상 안에서 지키고 싶은 마음, 치료의 공포 속에서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감각을 주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 질문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경구용 신약은 누구의 공포를 덜어주는가. 그리고 그 공포를 덜어준 대가는 누가 치르는가. 생명을 구하는 약은 기적처럼 보이지만, 그 기적은 과학과 자본과 제도와 보호자의 떨리는 손 사이에서 만들어진다. 『블러드 머니』를 읽는 일은 그 손의 온도와 시장의 냉기를 함께 바라보는 일이 될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출근길의 주문 - 일하는 여자들을 지탱하는 언어와 관계, 그리고 마음, 개정증보판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성은 말하기 전에 미움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

— 이다혜, 《출근길의 주문》을 읽고


나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고, 바른 말을 잘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상한 말을 이상하다고 말하는 아이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 부당한 말, 누군가를 함부로 낮추는 말 앞에서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러나 친인척들은 그런 나를 똑똑하다고 부르지 않았다. 솔직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싸가지 없는 년”으로 통했다.

어른들은 자주 말했다. 여자가 그렇게 따지고 들면 남편 사랑 못 받는다. 미움받는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그 말들이 내게 가르친 것은 단순한 예절이 아니었다. 여자는 말해도 되지만, 너무 정확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자는 생각해도 되지만, 그 생각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만큼 또렷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자는 틀린 말을 바로잡기 전에, 먼저 자신이 미움받지 않을지를 계산해야 한다는 것.

나는 그때 몰랐다. 내가 미움받은 것은 말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여자인 내가 너무 똑바로 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다혜의 《출근길의 주문》을 읽으며 가장 오래 멈춘 지점도 바로 이곳이었다. 이 책은 일하는 여성들의 언어와 관계, 마음과 커리어를 다룬다. 하지만 내게 이 책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질문이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여성은 어떻게 말해야 미움받지 않는가.

여성은 너무 세게 말하면 안 된다. 너무 똑똑한 척해도 안 된다. 너무 감정적이면 안 되고, 너무 차가워도 안 된다. 질문을 많이 하면 나댄다고 하고, 질문하지 않으면 소극적이라고 한다. 부드럽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다고 하고, 단호하게 말하면 무섭다고 한다. 남성이 직설적으로 말하면 시원하다, 결단력 있다, 리더답다고 할 수 있는 말이 여성이 하면 예민하다, 까칠하다, 피곤하다는 말로 돌아온다. 그러니 여성은 말하기 전에 먼저 배운다. 미움받지 않는 법을. 자기 말의 모서리를 미리 깎는 법을.

책에서 말하는 쿠션어의 문제는 그래서 단순한 화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쿠션어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잘못 이해했을 수도 있는데”,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면” 같은 말은 때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말에도 완충 장치가 필요하다. 정직하되 무례하지 않은 말, 정확하되 상대를 함부로 찌르지 않는 말은 분명 좋은 언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완충 장치가 유독 여성에게 더 많이 요구된다는 데 있다.

여성은 자기 의견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과를 배운다. 요구를 해도 부탁처럼 들리게 만들고, 반박을 해도 질문처럼 포장하고, 불쾌함을 말할 때도 상대가 무안하지 않도록 여러 겹의 완충재를 깐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 말의 내용보다 말의 태도가 더 크게 심판받는다. 무엇을 말했느냐보다 어떻게 말했느냐가, 더 나아가 네가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위치의 사람이냐가 문제가 된다.

나는 대학 글쓰기 수업에서 그 이상한 감각을 또렷하게 경험한 적이 있다. 그 수업에는 우수 글쓰기 학생에게 일부 수업을 면제하고 논문으로 A+를 주는 제도가 있었다. 나는 중간에 그 제도를 받았다. 익명으로 진행된 논설문 쓰기에서 내 글은 주장하는 바가 선명하고 논거가 튼튼한, 남성적인 글쓰기의 전형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2차 익명 수필 쓰기에서는 문체가 수려하고 정서가 아름다운 글쓰기이나 주장하는 바가 약한 게 아쉽고, 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쓰는 경향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둘 다 내가 쓴 글이었다.

나는 남자처럼 쓴 것도, 여자처럼 쓴 것도 아니었다. 논설문은 논설문답게 썼고, 수필은 수필답게 썼을 뿐이다. 장르에 맞춰 문체와 구조를 바꾼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 글들은 곧장 성별 프레임 안으로 들어갔다. 주장이 선명하면 남성적이고, 정서가 아름다우면 여성적이라는 식의 분류. 그때 나는 알았다. 글조차 성별로 읽히는구나. 말뿐 아니라 문장에도 성별이 덧씌워지는구나.

그래서 나는 일부러 논문 주제를 산업노동자의 법적 권리와 실태로 잡았다. 젊은 여자는 노동문제에 관심이 없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다. 내가 무엇을 볼 수 있고, 어떤 논리로 말할 수 있으며, 어떤 문제에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내 글이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가 아니라, 내가 세계를 어떻게 읽고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출근길의 주문》은 이런 장면들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일하는 여성이 겪는 곤란은 단순히 능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능력을 발휘하는 순간, 그 능력이 태도로 심판받기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잘 말하면 건방지고, 조심하면 약하고, 정확하면 차갑고, 부드러우면 만만하다. 여성은 말의 내용뿐 아니라 말이 놓인 자리까지 함께 평가받는다.

이 문제는 직장에만 있지 않다. 가족 안에도 있다. 시댁에서도 있다. 나는 시댁에 가면 꽤 다른 사람이 된다. 남편에게 깍듯하게 존대하고, 언성을 높이지 않으며, 부탁은 눈빛으로만 한다. 시부모님이 무어라 하시든 대개 “네”라고 답한다. 그러면 나는 참한 며느리가 된다. 어른들은 그런 나를 예뻐하신다.

조금 웃기고, 조금 씁쓸하다. 그 “네”가 내 속내의 항복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안다. 남편도 안다. 나는 동의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내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과 쿠션어, 여성성을 활용해 관계비용을 낮추는 것이다. 시부모님은 편찮으시고, 시아버님은 파킨슨과 치매가 심하시다. 남편은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부모 간병의 무게를 안고 있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매번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싸우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어떤 전투는 이겨도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말의 칼을 칼집에 넣는다. 속내는 타협하지 않지만, 표현은 조절한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사회가 그 전략을 순함으로 읽는다는 점이다. 내가 “네”라고 말하면 참하다고 한다. 내가 싸우지 않으면 착하다고 한다. 내가 반박하지 않으면 좋은 며느리라고 한다. 그러니까 여성에게 요구되는 좋은 말이란 때때로 좋은 의사소통이 아니라, 상대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침묵이다. 말하지 않는 여성이 사랑받는다. 부드럽게 웃고 고개를 끄덕이는 여성이 관계를 망치지 않는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렇다고 나는 모든 자리에서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시댁에서는 관계비용을 낮추기 위해 “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터에서는 그럴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나는 강사였고, 내게는 교육관이 있었다. 이전에 초중등 대상 대형학원에서 일할 때, 학생들의 학력 수준에 맞지 않는 천편일률적인 교육 스케줄에 반발한 적이 있다. 아이들의 수준은 달랐고, 필요한 보강도 달랐다. 나는 보강자료를 따로 만들고, 개별 맞춤 수업을 진행했다. 내 판단으로는 그것이 학생들에게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자 남자 원장이 말했다. 왜 내 수업에만 들어간 아이들은 반 배정에 따른 강사 교체를 싫어하느냐고. 여자 선생이 학원 방침을 거스르고 그렇게 나대는 거 보기 좋지 않다고 했다. 그 학원에서 나는 왕따였다. 같은 여자 선생들도 나를 미워했다. 그러나 학교별 분반 수업을 주장한 남자 대학생 강사의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그때 나는 뼈아프게 보았다. 같은 개선안도 누가 말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름을 얻는다는 것을. 남자가 말하면 건의가 되고, 여자가 말하면 반항이 된다. 남자가 교육 방식의 문제를 지적하면 현장 의견이지만, 여자가 학생에게 맞는 자료를 만들고 수업을 조정하면 나댐이 된다. 내가 한 일의 핵심은 학생의 학습권과 수업의 질이었지만, 그들에게 먼저 보인 것은 “학원 방침을 거스르는 여자 선생”이었다.

말은 내용만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누가 말했는지가 평가를 바꾼다. 이것이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아프게 다가온 진실이었다.

스몰토크에 관한 대목도 그래서 불편했지만 정확했다. 한국 사회의 스몰토크는 종종 친근함을 가장한 개인정보 요구가 된다. 나이, 결혼 여부, 자녀 여부, 사는 곳, 학교, 직장, 수입, 배우자의 직업, 자산, 인맥. 이런 질문들은 가벼운 대화처럼 시작되지만 쉽게 사람을 분류하고 평가하는 표가 된다. 특히 여성은 이런 질문 앞에서 더 자주 해명하는 위치에 선다. 결혼했는가, 아이는 있는가, 남편은 어떤 사람인가, 시댁에는 잘하는가, 일을 계속할 것인가. 말은 어느새 대화가 아니라 심문이 된다.

좋은 대화는 상대를 빨리 알아내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자신을 드러내도 안전하다고 느끼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친근함이라는 이름으로 경계를 침범한다. 더 나쁜 것은 그 질문 뒤에 자기 과시가 따라붙는 경우다. 자산, 투자, 수입, 자녀의 성취, 배우자의 직업. 이런 말들은 스몰토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위를 확인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나는 그런 대화가 싫다. 그 불편함은 예민함이 아니라 정당한 경계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에 관한 부분도 오래 남았다. 여성들만 있을 때는 질문이 활발하지만, 남성과 여성이 섞여 있을 때는 여성이 첫 질문자로 나설 확률이 낮아진다는 대목은 많은 것을 말한다. 질문은 단순히 모르는 것을 묻는 행위가 아니다. 질문은 “나도 이 논의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고 선언하는 일이다. 그런데 여성은 어릴 때부터 질문하는 몸짓조차 조심스럽게 훈련받는다. 너무 나서지 말 것. 분위기를 끊지 말 것. 똑똑한 척하지 말 것. 괜히 말대꾸하지 말 것.

나는 내 말이 잘리는 경험도 자주 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상대가 결론을 내버리는 일. 내 말을 다 듣기 전에 “그러니까 네 말은 이런 거지”라고 요약해버리는 일. 내가 말하려던 핵심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훨씬 쉽게 받아들여지는 일. 내 문장이 끝까지 갈 권리를 빼앗기는 느낌. 말이 잘린다는 것은 단순한 대화 방해가 아니다. 그것은 내 사고가 완성될 권리를 빼앗기는 일이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언어의 문제는 여성에게 더 예쁘게 말하라는 조언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이 자기 말의 주도권을 어떻게 잃지 않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언제 쿠션어를 쓸 것인가. 언제 단호하게 말할 것인가. 언제 침묵할 것인가. 언제 “잠시만요,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라고 말할 것인가. 이 구분이 필요하다.

간접화법에 관한 대목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흥미로웠다. 간접화법은 때로 우아하다. 특히 권력관계나 상류층 인사, 조직 내 정치가 작동하는 세계에서는 말의 힘이 정면충돌보다 우회로에서 더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내가 소설에서 권력관계와 상류층 인사를 자주 묘사하기 때문인지, 이 지점은 익숙했다. 내 캐릭터들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하지 않는다. 예의와 호칭과 침묵과 시선 속에 진짜 뜻을 숨긴다. 우아한 언사는 힘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힘의 형태를 바꾼다.

하지만 현실의 간접화법은 늘 우아하지만은 않다. 그것이 약자에게만 강요될 때, 간접화법은 배려가 아니라 자기축소가 된다.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게 만들고, 정확히 요구해야 할 때 부탁처럼 만들며, 분노해야 할 때 미소 짓게 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품위가 아니라 억압이다. 그러므로 좋은 말하기는 무조건 부드러운 말하기가 아니다. 필요한 순간에는 정확해야 하고, 가능한 순간에는 품위 있어야 한다. 상대를 해치지 않되, 진실을 흐리지 않아야 한다.

‘여성적 리더십’에 관한 대목도 답답했다. 왜 여성에게만 리더십 앞에 ‘여성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가. 남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면 그냥 리더십인데, 여성이 리더십을 발휘하면 여성적 리더십이 된다. 이 말은 얼핏 칭찬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리더십의 표준을 남성으로 두는 오래된 습관이 숨어 있다. 여성 리더가 단호하면 독하다고 하고, 부드러우면 약하다고 한다. 남성이 실패하면 개인의 실패지만, 여성이 실패하면 여성 리더십의 한계처럼 말해진다. 이것은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유리천장만큼이나 유리절벽도 무섭다. 여성에게 높은 자리가 주어지는 순간이 종종 조직이 위태로울 때라는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평소에는 기회를 주지 않다가, 위기 상황에서 책임을 맡긴다. 성공하면 조직의 성과가 되고, 실패하면 여성의 한계로 기록된다. 여성은 올라가도 자유롭지 않다. 오히려 다른 방식의 검열대 위에 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계속 같은 생각으로 돌아왔다. 여성적 리더십이 아니라 리더십이면 충분하다. 여성적 말하기가 아니라 말하기면 충분하다. 정확하고 품위 있는 말. 필요할 때 질문하고, 부당할 때 반박하고, 관계비용이 너무 클 때는 전략적으로 침묵하며, 그러나 속내까지는 내어주지 않는 말하기. 그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어떤 자리에서는 “네”라고 말하는 참한 며느리가 되었고, 어떤 자리에서는 “그 방식은 학생에게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는 나대는 여자 선생이 되었다. 이상한 것은 내가 달라진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듣는 사람들이 붙이는 이름이 달라졌다는 점이다. 같은 사람의 같은 판단력도 어떤 관계 안에서는 참함이 되고, 어떤 관계 안에서는 나댐이 된다. 그러니 문제는 내 말 하나에만 있지 않다. 그 말을 듣는 세계의 귀에도 있다.

《출근길의 주문》은 내게 일하는 여성의 처세서로만 읽히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의 말에 덧씌워진 오래된 명령들을 하나씩 보여주는 책이었다. 부드러워라. 튀지 마라. 너무 똑똑해 보이지 마라. 상대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마라. 그러나 동시에 유능해라. 리더가 되어라. 질문해라. 성과를 내라. 이 모순된 요구들 속에서 여성은 매일 자기 말을 조율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말의 모서리를 전부 깎아내고 싶지 않다. 그러나 무례해지고 싶지도 않다. 내가 배우고 싶은 것은 불편한 진실을 말하되, 사람을 함부로 다치게 하지 않는 언어다. 예의를 지키되 내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말이다. 침묵하더라도 그것이 굴복인지 선택인지 아는 태도다.

어쩌면 여성이 말하기 전에 미움받지 않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회의 오래된 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나는 이제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나를 지우는 말이 아니라, 나를 지우지 않으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말. 쿠션어가 필요할 때는 쓰되, 쿠션 속에 내 생각까지 묻어버리지는 않는 말. 질문할 수 있고, 거절할 수 있고, 필요하면 “제 말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언어.

이 책이 내게 남긴 주문은 결국 이것이었다.

말하라.

그러나 네 말의 주인을 잃지 말라.

배려하라.

그러나 네 자리를 내어주지는 말라.

침묵하라.

그러나 그것이 굴복인지 선택인지 알고 침묵하라.

질문하라.

네가 이 자리에 있음을 스스로에게도 증명하라.

나는 아직도 때때로 “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그 “네”의 의미를 안다. 그것은 언제나 동의가 아니다. 때로는 전쟁을 미루는 말이고, 때로는 나를 아끼는 말이고, 때로는 더 중요한 곳에 힘을 남겨두기 위한 말이다. 그리고 정말 말해야 할 순간이 오면, 나는 더 이상 내 문장을 지나치게 작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일은 내일에게 (청소년판) - 숨이 막힐 때 주문처럼 특서 청소년문학 47
김선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의 결을 읽게 되는 소설

— 김선영, 『내일은 내일에게』를 읽고


나는 저자의 북토크에 간 적이 있다. 그때는 저자의 저작을 한 권도 읽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상하게 저자라는 사람 자체가 좋았다. 말의 온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 묘한 신뢰가 생겼다. 언젠가 이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은 내일에게』를 읽으며 그때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이 소설은 간만에 만난, 정말 글다운 청소년소설이었다.


청소년소설이라고 해서 아이들의 감정을 단순하게 다루지 않는다. 상처를 예쁘게 포장하지도 않고, 어른을 악역이나 구원자로 나눠 평면적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이 소설은 다만 사람의 결을 오래 들여다본다. 연두의 일상은 작품의 흐름을 따라 극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결말까지도 그는 다시 학교에 가고, 자고 일어나고, 밥을 먹고, 다시 하루를 산다. 그러나 그 “다시”가 가볍지 않다. 삶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도 다음 날로 넘어가며 이어지는 것임을 이 소설은 조용히 보여준다.


『내일은 내일에게』속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크지 않다.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세상을 뒤집고 싶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굶지 않고, 버려질까 두려워하지 않고,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자기 나이에 맞게 철없이 살고 싶어 할 뿐이다. “나도 어리광 부리며 철없이 살고 싶다. 내 나이에 걸맞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그래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아이들이 바란 것은 거창한 행복이 아니라, 아이로 살아도 되는 하루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인상깊게 남은 감각 중 하나는 “거세된 욕구의 합리화”였다. 아이들은 원하는 것이 없어서 담담한 것이 아니다. 좋은 집, 따뜻한 말, 안전한 자리, 울어도 되는 권리. 그런 것을 원하지만 현실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나는 괜찮다”, “나는 원하지 않는다”,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게 된다. 욕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욕구를 가져도 소용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운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 속 아이들의 담담함은 성숙함이라기보다, 너무 이르게 익힌 생존법처럼 읽혔다.


그 생존법은 때로 폭발한다. 연두가 터지는 장면이 그랬다. 연두의 분노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었다. 너무 오랜 시간 억눌려 있던 아이가 처음으로 학대와 폭력의 부당함을 말로, 몸으로, 물건으로 밀어 올리는 장면이었다. 상처 입은 사람은 곱게 아픔을 호소하지 못한다. 어떤 날은 울고, 어떤 날은 던지고, 어떤 날은 가장 아픈 말을 골라 상대에게 꽂아 넣는다. 이 소설이 좋은 것은 연두를 착한 피해자로만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두는 상처받았지만, 동시에 상처를 되돌려주는 아이이기도 하다. 그 모순까지 포함해서 연두가 살아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연두도, 그 주변의 아이들도 상대적으로 방어적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것도, 친절을 베푸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냉정함이라기보다 오래된 자기보호에 가깝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을 내주었다가 다칠까 봐 먼저 얼어붙는 것이다.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말은 정말 아무 마음도 없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마음이 너무 많은데 그 마음이 들키면 다시 버려질까 봐 먼저 문을 닫는 사람의 말처럼 읽혔다. 방어는 마음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마음이 너무 많이 다쳤다는 흔적일 때가 있다.


이 작품이 깊은 이유는 아이들만 복합적으로 그리는 데 있지 않다. 어른들 역시 평면적이지 않다. 이 소설 속 어른들은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다. 무심해서 상처를 남기는 어른이 있고, 폭력적이고 거칠지만 끝내 아이를 버리지 않는 어른이 있으며, 아이의 삶을 대신 구원하지는 못해도 조심스럽게 쌀을 건네고 미래를 기다려주는 어른이 있다.


연두의 엄마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거칠고, 폭력적이며, 아이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결코 이상적인 보호자가 아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전 남편의 딸을 끝내 버리지 않은 사람이기도 하다. 좋은 엄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많이 상처를 주었지만, 나쁜 인간이라고만 부르기에는 인간적이다. 현실의 어떤 관계는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거칠고, 폭력이라고만 부르기엔 너무 오래 버텨낸 시간이 있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모호한 인간의 결을 놓치지 않는다.


반대로 쌀을 건네는 카페 이상의 주인 아저씨 같은 인물은 이 소설의 따뜻함을 만든다. 그는 구원자처럼 과장되지 않는다.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주지도 못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 다만 알아차리고, 선을 넘지 않으며, 필요한 만큼만 손을 내민다. 아이의 가난을 폭로하지 않고, 아이의 자존심을 짓밟지 않으며, 도움을 굴욕으로 만들지 않는다. 사람을 구하는 것은 때로 거창한 선의가 아니라,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는 조심스러운 친절일 수 있다는 것을 이 인물은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죽음도 여러 번 등장한다. 객사한 노숙자의 죽음, 길고양이 네로의 죽음, 가족의 죽음. 특히 네로가 차에 치이는 장면은 마음이 아팠다. 아이에게 보여서는 안 될 세계의 잔혹함이 또 한 번 아이 앞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러나 소설은 그 죽음을 완전히 방치하지 않는다. 이상 아저씨는 네로의 숨이 잦아들 때까지 몸을 쓸어준다. 세계는 잔인하지만, 그 잔인함 앞에서 끝까지 손을 거두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내일은 내일에게』의 따뜻함은 바로 그런 데 있다.


이 소설은 우리 사회가 불편한 존재를 어떻게 치워버리는지도 보여준다. 노숙인의 텐트, 길고양이, 가난한 아이, 불안정한 가족. 우리는 자주 위험을 줄이는 방법을 찾기보다 눈앞에서 불편한 존재를 제거하려 한다. 불편함을 위험이라고 부르고,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문제처럼 보이는 사람을 치운다. 그 앞에서 아이가 묻는 “아무 피해를 안 주는데도요?”라는 질문은 단순하지만 날카롭다. 정말 피해를 주었는가. 다만 우리가 보기 싫었을 뿐인가. 이 소설은 청소년의 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비정함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이 책은 냉소로 끝나지 않는다. 유겸과 연두의 편지가 그랬다. 유겸은 왕따의 기억을, 연두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품고 있다. 둘의 상처는 같지 않다. 그러나 둘은 서로의 고통을 완전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본다. 같은 상처라서 통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처인데도 “그래도 살고 싶었다”는 마음이 같아서 통하는 것이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상처가 있다. 그리고 어떤 상처들은 서로 닮지 않았어도, 생존의 언어 안에서 서로를 알아본다.


이 소설이 끝내 붙잡고 있는 것은 완전한 구원이 아니다. 연두의 삶은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가족의 상처도, 가난도, 불안도 깔끔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어른은 연두의 미래를 기다려준다. “그 아이의 미래를 기다려 주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리라 생각이 듭니다”라는 문장은 이 작품이 말하는 좋은 어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아이를 대신 구원하지 않더라도, 아이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는 것. 그 기다림이 때로는 한 사람을 내일까지 데려간다.『내일은 내일에게』라는 제목은 단순히 삶의 무게를 잊자는 말도, 내일이면 모든 고민이 해결될 거라는 말이 아니었다. 오늘 감당할 수 없는 마음을 내일의 나에게 조금 나누어 맡기자는 뜻이었다. 오늘 다 해결하지 못해도, 오늘 다 괜찮아지지 않아도, 그래도 잠들고 일어나 다시 학교에 가고 밥을 먹는 일,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견디면서. 그리고 그 견딤의 곁에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친절과 기다림이 있을 때, 사람은 아주 조금 더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다.


『내일은 내일에게』는 “괜찮아질 거야”라고 쉽게 말하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괜찮지 않은 오늘을 안고도 내일로 건너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 책은 청소년소설이지만 아이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각자가 움켜쥔 삶의 무게,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불안, 생활이 자아를 삼키는 공포, 그리고 그럼에도 내일로 넘어가려는 마음을 그린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사람의 결을 읽게 한다. 사람을 착하다, 나쁘다, 불쌍하다, 못됐다로 쉽게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이 왜 그렇게 굳어졌는지, 왜 그렇게 폭발했는지, 왜 그럼에도 떠나지 않았는지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고 그 길목에서 우리는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사람의 결을 읽는 법을 배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 하나로 수렴되지 않기 위하여

— 『나이 묻는 사회』 를 읽고


제2의 커리어를 제대로 쌓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막연한 전환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설계하고 싶었다. 공부하고, 배우고, 다른 직업의 가능성을 열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지역 커뮤니티 센터나 각종 교육 지원 제도를 찾아보면 나는 자주 ‘대상자’가 아니었다. 34세 미만 청년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묘하게 서러웠다. 내가 늙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직 할 수 있는 게 많다고 느끼는 시기였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청년이 아니라고 잘라냈고, 사회는 동시에 나를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했다. 다시 배우고 싶은 사람, 새 커리어를 만들고 싶은 사람, 아직 자기 삶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 사람으로는 좀처럼 읽어 주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였다. 나이는 사회가 사람을 분류하고, 가능성을 배분하고, 지원 자격을 끊어 내는 현실의 장치다.


『나이묻는 사회』는 바로 이 불편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책이다. 우리는 흔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 말은 듣기에는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나이가 결코 숫자에 머물지 않는다. 나이는 취업 가능성, 정책 지원, 관계의 서열, 호칭, 농담, 멸칭, 심지어 한 사람의 매력과 능력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노년 혐오만이 아니다. 한국 사회 전체가 연령을 기준으로 사람을 나누고, 평가하고, 배제하는 방식이다.


특히 내게 강하게 와닿은 것은 중년 혐오의 결이었다. 우리는 노인 혐오에 대해서는 비교적 쉽게 말한다. ‘틀딱’, ‘연금충’, ‘노인 민폐’ 같은 말의 폭력성은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그러나 중년을 향한 혐오는 더 애매한 얼굴로 온다. 그것은 농담처럼, 유행어처럼, 세대 감각의 평가처럼 등장한다. ‘아재’, ‘개저씨’, ‘아줌마’, ‘영포티’, ‘스윗 영포티’ 같은 말들은 처음에는 가벼운 호칭이나 조롱처럼 보이지만, 반복될수록 중년이라는 나이대를 특정한 이미지 안에 가둔다.


중년 남성은 쉽게 무능하고 권위적이며 시대에 뒤처진 존재로 묶인다. 중년 여성은 생활감, 억척스러움, 촌스러움, 성적 비가시성, 민폐성의 이미지로 수렴된다. “아줌마”라는 말을 들을 때 묘하게 기분이 나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이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은 좀처럼 중립적으로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한 여성을 한 사람으로 부르는 말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놓은 중년 여성의 낡은 이미지 안으로 밀어 넣는 말처럼 들린다.


나는 내 나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나이 하나로 해석되고 싶지 않다. 나는 아줌마이기 전에 독자이고, 작가이고, 강사이고, 수험생이고,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이다. 그런데 나이 멸칭은 이 모든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우고, 사람을 하나의 연령 이미지로 단순화한다. 이것이 이 책이 말하는 연령차별의 핵심이다. 나이는 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요소 중 하나일 뿐인데, 사회는 자꾸 나이를 그 사람 전체처럼 다룬다.


더 불편한 것은 긍정적인 말조차 쉽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바뀐다는 점이다. 40대가 자기 관리를 하고, 시대 변화에 적응하고, 감각을 유지하려 하면 본래는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젊은 척한다”는 조롱으로 번역된다. “영포티”라는 말이 그렇다. 젊게 살고, 건강하게 살고, 자기 삶을 놓지 않으려는 태도는 분명 긍정적인 면이 있다. 그런데 사회는 그것을 온전히 긍정하지 않는다. 40대가 아직 자기 삶의 주인공이고 싶어 하는 순간, 누군가는 그 욕망을 우스운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중년에게 허락된 자리가 너무 좁기 때문이다. 중년은 위로부터는 아직 젊다며 더 일하라고 요구 받고, 아래로부터는 이미 기성세대라며 책임을 요구 받는다. 제도적으로는 청년 지원에서 밀려나고, 사회적으로는 완성된 어른처럼 취급되며, 노동시장에서는 변화에 뒤처지지 말라고 압박받는다. 그러나 정작 다시 배우고,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커리어를 만들 수 있는 구조적 지원은 충분하지 않다.


내가 청년 지원 대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속상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특혜를 바란 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직 배울 수 있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사회에 다른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었다. 그런데 제도는 나를 “이미 청년이 아닌 사람”으로 분류했고, 그 분류는 생각보다 차갑게 느껴졌다. 청년이 아니면 무엇인가. 중년인가. 그렇다면 중년은 이미 자기 앞가림을 끝낸 사람인가. 다시 시작하고 싶은 중년의 불안과 욕망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이 묻는 사회』가 중요한 이유는 이런 질문을 개인의 예민함으로 치부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나이에 관한 멸칭과 농담이 단지 말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와 제도와 관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언어는 생각의 껍데기가 아니다. 언어는 생각의 길이다. “아줌마”, “아재”, “영포티”, “꼰대” 같은 말이 반복될수록 우리는 개별 인간을 보기 전에 연령 이미지를 먼저 본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진 이미지는 고용, 관계, 정책, 미디어 재현 속에서 다시 차별을 강화한다.


차별은 늘 게으른 사고와 손잡는다. 한 사람을 제대로 보려면 오래 보아야 한다. 그 사람의 삶, 직업, 몸, 실패, 배움, 변화 가능성을 봐야 한다. 그러나 멸칭은 빠르다. “아줌마”라고 부르면 생활감과 촌스러움이 따라오고, “영포티”라고 부르면 젊은 척하는 중년의 이미지가 따라오고, “꼰대”라고 부르면 더 이상 대화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라는 판정이 따라온다. 구조를 분석하는 일은 어렵고 느리지만, 사람을 조롱하는 일은 쉽고 빠르다. 그래서 불안한 사회일수록 언어는 짧아지고, 짧아진 언어는 다시 인간을 작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중년 혐오가 단순히 젊은 세대가 중년을 싫어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고 느꼈다. 각 세대가 자기 자리를 잃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불안이 서로를 향한 칼날이 된 결과에 가깝다. 청년은 시작할 자리가 없다고 느끼고, 중년은 다시 시작할 권리를 잃었다고 느끼며, 노년은 쓸모없는 존재로 밀려난다고 느낀다. 그런데 분노는 구조가 아니라 가까운 타 연령대에게 향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경쟁자로 오해한다.


나이는 원래 그렇게 서로를 밀어내기 위한 기준이 아니어야 한다. 나이는 삶의 한 과정이고, 각 시기마다 다른 욕망과 가능성과 취약성을 가진다. 청년에게는 출발의 지원이 필요하고, 중년에게는 전환의 지원이 필요하며, 노년에게는 존엄한 지속의 지원이 필요하다. 어느 한 세대의 몫을 다른 세대가 빼앗는 방식이 아니라, 각 생애 단계가 다른 방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나는 더 이상 청년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배움과 전환의 권리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아줌마로 불릴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의 이름과 꿈과 능력과 욕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 읽고, 쓰고, 배우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다.


『나이묻는 사회』는 나이를 지우자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우리 삶을 얼마나 깊이 규정하는지 똑바로 보자고 말하는 책이다. 나이를 숫자로만 여기자는 말은 위로가 될 수 있지만, 현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나이는 숫자 이상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이 하나로 사람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나이가 아니라, 나이를 사람보다 먼저 보는 습관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는 사회는 단순하다. 청년이 아니어도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중년이어도 배울 수 있으며, 노년이어도 존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회. 나이로 사람을 닫아 버리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라면,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이해해 보려고 애쓸 수 있을 것이다.


#도서제공 #서평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러니까 비밀이야 특서 어린이문학 18
박현숙 지음, 김진아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말하지 않는 마음을 다루는 법

— 《그러니까 비밀이야》를 읽고


《그러니까 비밀이야》는 처음엔 단순한 생활동화처럼 보였다. 비밀을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아이, 그 말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끝내 “비밀은 지켜야 한다”는 교훈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작품은 예상보다 훨씬 복잡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 이 책은 아이들에게 단순히 입조심을 가르치는 이야기가 아니다. 비밀이 관계 안에서 어떤 힘을 가지는지, 폭로가 얼마나 쉽게 권력적 행위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른의 말이 아이에게 어떤 부담으로 전가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마이클 슬레피언의 《비밀의 심리학》이 떠올랐다. 슬레피언은 비밀을 단순히 “말하지 않은 정보”가 아니라 “숨기려는 의도가 담긴 정보”로 설명한다. 이 구분은 중요하다. 우리가 말하지 않는 모든 것이 비밀은 아니다. 어떤 것은 프라이버시이고, 어떤 것은 아직 말할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이며, 어떤 것은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한 침묵이다. 하지만 그 안에 “알리지 않으려는 의도”가 생기고, 그 의도가 관계 안에서 긴장과 부담을 만들 때 비로소 비밀은 마음의 사건이 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러니까 비밀이야》 속 장수의 행동은 단순한 “입이 가벼운 아이”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장수는 작품 속에서 남의 말을 전하고 비밀을 폭로하는 버릇 때문에 자주 관계의 곤란을 겪는다. 그런데 장수의 첫 문제는 아이 개인의 결함만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도입부에서 장수는 자기 엄마가 민지네 엄마를 흉보는 말을 듣고, 그 말을 민지에게 전한다. 이후 그 말이 민지 엄마에게 알려지자 장수 엄마는 자신이 아이들 앞에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는 점은 돌아보지 않고, 말을 전한 아들 장수를 탓한다.


나는 이 대목이 가장 먼저 불편했다. 아이는 어른의 말을 그대로 흡수하고, 아직 그 말의 무게와 파장을 계산할 만큼 성숙하지 않다. 그런데 어른이 아이 앞에서 누군가를 험담해 놓고, 그 말이 밖으로 나갔을 때 아이만 꾸짖는다면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 아이가 말을 전한 것은 분명 문제일 수 있지만, 그 말을 아이 앞에 먼저 놓은 사람은 어른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장수가 입이 가볍다”는 설명에 앞서, 어른의 말이 얼마나 쉽게 아이의 관계를 흔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으로 읽힌다. 말의 책임은 아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 앞에서 말하는 어른에게도 있다.


장수는 이후에도 비밀 앞에서 흔들린다. 어느 날 장수는 민지가 “나는 동민이 네가 좋아”라는 메시지가 적힌 선물을 포장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민지는 장수에게 자신이 아끼는 수입 필통과 연필을 선물하며, 어차피 동민이에게 선물을 주지 않을 거라며 그 일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다. 장수는 물건에 마음을 빼앗겨 약속을 하지만, 그 비밀을 품은 뒤 얼굴이 누렇게 뜰 만큼 괴로워한다. 비밀은 장수에게 신뢰의 증표라기보다 감당하기 어려운 압력으로 작동한다.


결국 장수는 전학 온 홍기에게 민지의 비밀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수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밀을 말하는 행위는 관계 안에서 힘을 가진다. 누군가의 좋아하는 마음, 부끄러운 마음, 아직 세상 밖으로 꺼낼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을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약한 부분을 공공의 장에 내놓는 일이다. 장수는 홍기가 그 말을 퍼뜨리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한 번 입 밖으로 나온 비밀은 더 이상 장수의 통제 아래 있지 않다. 홍기는 그 말을 떠들어대고, 민지는 모든 것을 알게 된 동민에게 모욕적인 거부를 당한다. 결국 민지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밀려나고, 아이들의 오해를 산 채 울음을 터트린다.


이 장면에서 《비밀의 심리학》의 문제의식이 다시 떠오른다. 비밀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관계적 행위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입을 다무는 기술만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마음을 내 흥밋거리나 거래 수단으로 쓰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반대로 폭로는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니다. 사실이어도, 그것이 누군가의 약점을 드러내고 관계 안에서 그 사람을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면 폭력에 가까워진다.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는 말은 종종 가장 무책임한 변명이다. 사실은 말하는 순간, 방향과 맥락을 얻는다. 그리고 그 방향은 누군가를 지킬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장 멋진 인물은 민지다. 민지는 자기 마음을 폭로당했고, 좋아하던 동민이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었고, 친구들 사이에서 난처해졌다. 장수는 당연히 민지가 자신을 엄마에게 일러바칠 거라고 예상한다. 어쩌면 그것은 장수가 익숙하게 배워 온 관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잘못하면 고발하고, 말하고, 관계의 벌을 받게 하는 방식, 장수는 그러한 시스템 속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민지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민지는 비밀을 폭로한 장수를 용서한다. 그리고 이 용서는 단순히 착해서 가능한 행동이 아니다. 민지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그대로 되돌려주는 대신, 관계를 다시 선택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민지가 정말 멋지다고 느꼈다. 민지는 완벽하게 성숙한 아이가 아니다. 상처받고, 울고, 부끄러워하고, 화도 난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상처를 타인의 파괴로 갚지 않는다. 자신이 폭로의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똑같은 방식으로 장수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이것은 어린아이에게 매우 어려운 소프트스킬이다. 자기감정을 알아차리는 능력, 억울함을 즉각적인 공격으로 바꾸지 않는 능력, 상대의 잘못을 보면서도 그 사람 전체를 폐기하지 않는 능력, 관계를 끝내기보다 다시 조율하는 능력. 이런 능력은 어른에게도 쉽지 않다.


민지의 용서 앞에서 장수도 변한다. 장수는 민지의 멋짐과 자신의 미안함을 느끼고, 선물을 건넨다. 민지도 답례 선물을 하며 둘은 친구가 된다. 이 결말이 좋은 이유는 장수가 단순히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배워서가 아니다. 장수는 말이 관계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동시에 자신이 잘못했음에도 누군가에게 다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한다. 관계는 처벌만으로 자라지 않는다. 때로는 용서받은 사람이 비로소 자기 잘못의 무게를 배운다.


창작 노트에 담긴 작가의 자전적 고백도 이 작품을 더 깊게 만든다. 작가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도 남의 비밀을 말해 버리는 습관이 있었고, 그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받았던 경험을 털어놓는다. 이 고백은 작품의 태도를 바꾼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위에서 내려다보며 “비밀을 지켜야 해”라고 훈계하지 않는다. 자신도 한때 말의 무게를 몰랐던 아이였음을 먼저 밝힌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목소리는 “너희는 조심해”가 아니라 “나도 그랬고, 그래서 이제는 함께 배워보자”에 가깝다. 그 자기반성 덕분에 이 이야기는 생활 교훈을 넘어 관계에 대한 사려 깊은 동화가 된다.


《그러니까 비밀이야》는 비밀을 무조건 지키라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비밀이 관계 안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작동하는지 보여준다. 어떤 비밀은 누군가를 지키는 울타리가 되지만, 어떤 비밀은 아이가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된다. 어떤 폭로는 진실을 밝히는 일이지만, 어떤 폭로는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사용하는 권력 행위가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말하느냐, 말하지 않느냐가 아니다. 이 말이 누구를 지키고, 누구를 다치게 하는가.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은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약한 마음을 내 손에 쥐고 흔드는 일인가. 이 질문이 비밀을 다루는 윤리의 출발점이다.


결국 이 책이 남기는 문장은 이것이다. 비밀을 지킨다는 것은 말을 하지 않는 기술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함부로 말하지 않는 태도이다. 그리고 좋은 관계란 모든 것을 즉시 말해 버리는 관계가 아니라, 말해도 되는 것과 기다려야 하는 것을 함께 배워가는 관계다. 장수는 그 어려움을 배워가는 아이이고, 민지는 그 배움이 가능하도록 관계의 문을 닫아버리지 않는 아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는 것은 비밀 그 자체가 아니라, 비밀 이후에도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는 마음의 힘이다.


#도서협찬 #특별한서재서평단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