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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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님의 <간단후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탈출도 허락하지 않는 소설이다. 읽는 동안 독자는 끊임없이 숨이 막히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이 작품이 왜 희망을 배제한 채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여성의 몸에 새겨진 폭력 역시 종료되지 않는다. 주인공 요코는 끝내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임신한 몸으로 오늘도 군인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준비한다. 이 엔딩은 잔혹하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정확하다. 이 작품의 핵심은 전쟁 중 벌어진 비극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봉합된 역사, 그리고 그 봉합 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겪어야 했던 이중의 폭력이다. 요코는 살아남았지만 구원받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남았기 때문에 더 오래, 더 깊이 고통 속에 놓인다. 그녀의 생존은 기적이 아니라 형벌에 가깝다.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임신과 출산의 문제는 단순한 모성 서사가 아니다. 요코가 아이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아이의 기저귀를 마련할 각반을 모으는 장면은 독자를 윤리적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이 욕망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라, 이 세계에 아이를 들여보내지 않으려는 마지막 방어다. 아이를 낳는 순간, 그 아이 역시 전쟁의 연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이 아이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몸처럼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렇기에 엔딩에서 유코의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 미완의 임신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은유다. 전쟁은 총성이 멎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책임지지 않은 순간, 사죄하지 않은 순간,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전쟁은 다른 형태로 지속된다. 요코가 여전히 군인을 데리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장면은, 전쟁이 그녀의 몸을 통해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사적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조국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온전히 공론화하지 않은 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고,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덮었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국가의 외교 논리 앞에서 지워졌다. 살아 있는 증언자들은 침묵을 강요받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몇 해 전,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의 수가 한 자릿수로 줄었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우리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간단후쿠>의 엔딩은 바로 이 현실을 상징한다. 요코의 삶이 멈춰 있듯, 이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은 채 정지되어 있다. 국가로부터도, 가해국으로부터도 제대로 된 사죄를 받지 못한 이상, 이 서사는 과거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애써 위로하지 않는다.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는다. 대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인물이 끝내 구원 서사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요코는 투사가 되지도, 증언자가 되지도, 새로운 삶을 찾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저 오늘을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 하루는 어제와 다르지 않다. 이 반복은 지옥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지옥을 벗어나게 하는 대신, 독자를 그 안에 남겨 둔다. 이는 잔인함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다. 독자가 쉽게 감동하고, 슬퍼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 이 역사는 다시 한번 소비재로 쓰이고 잊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답장은 마세요.”라는 문장은, 단순한 문장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이것은 독자에게 보내는 경고다. 섣부른 위로, 쉽게 하는 이해, 감정의 정리조차 이 서사 앞에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알고 있다. 이 작품은 해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을 요구한다. 끝내 태어나지 않는 아이처럼,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질문을 독자의 마음속에 남겨 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고, 죄송하고, 분노를 일으킨다. 읽고 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바로 그 감정이 이 작품의 윤리다.

 

<간단후쿠>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지만, 책임을 돌려준다.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아직 이 문제를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요코는 오늘도 준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의무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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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님의 <간단후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탈출도 허락하지 않는 소설이다. 읽는 동안 독자는 끊임없이 숨이 막히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이 작품이 왜 희망을 배제한 채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여성의 몸에 새겨진 폭력 역시 종료되지 않는다. 주인공 요코는 끝내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임신한 몸으로 오늘도 군인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준비한다. 이 엔딩은 잔혹하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정확하다. 이 작품의 핵심은 전쟁 중 벌어진 비극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봉합된 역사, 그리고 그 봉합 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겪어야 했던 이중의 폭력이다. 요코는 살아남았지만 구원받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남았기 때문에 더 오래, 더 깊이 고통 속에 놓인다. 그녀의 생존은 기적이 아니라 형벌에 가깝다.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임신과 출산의 문제는 단순한 모성 서사가 아니다. 요코가 아이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아이의 기저귀를 마련할 각반을 모으는 장면은 독자를 윤리적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이 욕망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라, 이 세계에 아이를 들여보내지 않으려는 마지막 방어다. 아이를 낳는 순간, 그 아이 역시 전쟁의 연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이 아이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몸처럼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렇기에 엔딩에서 유코의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 미완의 임신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은유다. 전쟁은 총성이 멎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책임지지 않은 순간, 사죄하지 않은 순간,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전쟁은 다른 형태로 지속된다. 요코가 여전히 군인을 데리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장면은, 전쟁이 그녀의 몸을 통해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사적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조국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온전히 공론화하지 않은 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고,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덮었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국가의 외교 논리 앞에서 지워졌다. 살아 있는 증언자들은 침묵을 강요받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몇 해 전,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의 수가 한 자릿수로 줄었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우리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간단후쿠>의 엔딩은 바로 이 현실을 상징한다. 요코의 삶이 멈춰 있듯, 이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은 채 정지되어 있다. 국가로부터도, 가해국으로부터도 제대로 된 사죄를 받지 못한 이상, 이 서사는 과거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애써 위로하지 않는다.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는다. 대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인물이 끝내 구원 서사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요코는 투사가 되지도, 증언자가 되지도, 새로운 삶을 찾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저 오늘을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 하루는 어제와 다르지 않다. 이 반복은 지옥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지옥을 벗어나게 하는 대신, 독자를 그 안에 남겨 둔다. 이는 잔인함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다. 독자가 쉽게 감동하고, 슬퍼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 이 역사는 다시 한번 소비재로 쓰이고 잊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답장은 마세요.”라는 문장은, 단순한 문장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이것은 독자에게 보내는 경고다. 섣부른 위로, 쉽게 하는 이해, 감정의 정리조차 이 서사 앞에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알고 있다. 이 작품은 해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을 요구한다. 끝내 태어나지 않는 아이처럼,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질문을 독자의 마음속에 남겨 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고, 죄송하고, 분노를 일으킨다. 읽고 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바로 그 감정이 이 작품의 윤리다.

 

<간단후쿠>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지만, 책임을 돌려준다.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아직 이 문제를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요코는 오늘도 준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의무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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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투더퓨처, 역사의 시계를 돌리다 - 뉴스로 읽는 세계사
김상운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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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운님의 <빽투더퓨처, 역사의 시계를 돌리다>는 카드 뉴스형 시사서의 외형을 띠고 있으나, 실제로는 한국 현대사를 해석하는 인식 틀을 재배치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에 입각한 책이었다. 다만 이 책은 정책 제안이나 미래 전망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어떤 조건 속에서 판단해 왔는지를 추적함으로써, 한국 현대사가 작동해 온 구조적 좌표를 드러낸다. 이 점에서 이 책의 핵심적 성취는 처방이 아니라 시야 교정에 있다.

 

이 책이 남북 관계를 다루는 방식은 기존의 민족사적·도덕적 접근과 뚜렷이 구분된다. 저자는 남북 분단과 갈등을 민족 내부의 비극이나 선택의 결과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남북문제를 냉전, 탈냉전, 신냉전으로 이어지는 국제질서 변동의 부산물로 간주한다. 남북사는 독립적인 역사라기보다, 강대국 질서 속에서 형성된 관계사이며, 선택의 역사라기보다 선택지가 제한된 상태에서의 대응의 역사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국 현대사에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온 책임 논쟁을 다른 차원으로 이동시킨다. 무엇이 옳았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묻는 대신, 이 책은 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조건과 제약을 먼저 분석한다. 이는 행위자의 책임을 소거하기 위한 접근이 아니라, 행위가 발생한 구조적 맥락을 선행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읽는 나는 도덕적 평가 이전에 정치·외교적 환경의 작동 방식을 검토하게 되었다.

 

국제정치학적 관점에서 이 책의 중요한 특징은 미··러를 단순한 배경 변수가 아니라 능동적 행위자로 다룬다는 점이다. 한국 현대사는 강대국 간 세력 균형 변화가 가장 밀도 높게 관철된 사례 중 하나였다. 냉전은 이념 대립 이전에 권력 배치의 문제였으며, 오늘날의 미중 경쟁 또한 새로운 형태의 구조적 긴장으로 보인다. 이 책은 한국이 이러한 구조 속에서 언제나 주체이면서 동시에 제약된 행위자였음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저자는 한반도의 위치를 중심이나 주변이 아닌 경계선으로 규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반도는 국제질서의 변동이 가장 먼저 감지되고, 가장 직접적으로 충돌하는 공간이다. 이 경계성은 일시적인 역사적 불운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재생산되어 온 구조적 조건이었다는 점에서 분석의 대상이 된다.

 

이 책은 과거 서술에 머물지 않고, 과거의 조각을 모아 현재의 뉴스와 국제정세를 해석하는 인식 틀로 확장한다. 남북 관계, 북핵 문제, 미중 갈등, 러시아의 재등장은 개별 사안이 아니라 하나의 연속된 시간축 위에 놓인다. 그 결과 현재를 단절된 사건이 아니라, 누적된 구조의 결과로 인식하게 된다.

 

이 책은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결핍이 아니라 이 책의 방법론적 선택이다. 이 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는 대신,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한국 현대사를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국제질서 속 위치의 문제로 재배치함으로써, 이 책은 한국 사회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좌표를 보다 정밀하게 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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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급을 이기는 생기부 독서법
김수미 지음 / 빅피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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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급을 이기는 생기부 독서법

독서 능력이 어떻게 대학이 원하는 사유하는 인간을 만들어내는가

 

대입에서 독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리고 독서는 정말로 대학이 판단하고 싶은 능력 을 보여줄 수 있는가.

 

오랫동안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나는 늘 이 질문에 부딪혀왔다. 학교 현장에서 독서는 과목 간의 균열을 잇는 다리처럼 기능하지만, 대입이라는 좁은 문턱 앞에서는 그 의미가 종종 형식에 갇히거나 숫자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1등급을 이기는 생기부 독서법은 매우 현실적인 책이다. 이 책은 입시에서 독서를 왜 강조하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전제로, 현행 학생부 구조와 실제 SKY 합격 사례, 전공별 추천 도서 목록을 체계적으로 엮어내며 대입 독서를 전략으로 재구성한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학생부 독서가 실제 대학 평가에서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는 점이다. 입학사정관제의 도입 이후, 대학은 단순히 성적이 좋은 학생이 아니라 지적 호기심을 갖고 스스로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학생, 즉 성장하는 두뇌를 지향하는 학생을 원하는 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포착한다. SKY를 비롯한 주요 대학이 요구하는 것은 어떤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가 아니라, 책을 통해 어떻게 사고 구조가 변했고, 그 변화가 다른 교과의 이해와 문제 해결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다.

 

독서는 곧 지적 이동성이다. 이 책은 그 이동성을 학생부 독서 기록 속에서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예컨대 단순 감상문이 아닌, ‘문제의식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어떤 지적 갈증이 생겼는지’ , ‘그 갈증이 다음 독서와 학습에 어떤 연쇄를 일으켰는지를 실제 합격생의 글을 통해 제시한다. 이런 흐름을 기록하는 방식은, 대학이 입학 후 성장을 예측하는 데 큰 단서를 제공한다.

 

 

책의 또 다른 강점은 전공별 추천 도서 목록의 풍부함이다. 생명과학, 공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전공별로 탄탄한 서지들을 제시하며 학생이 무엇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명료하게 안내한다. 특히 주요 합격생들이 실제로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식으로 학생부에 녹여냈는지 보여주는 사례들은 현장의 교사와 학생들에게 매우 실질적인 참고점이 된다. 학생부 독서가 추상적인 조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서류에서 어떻게 점수를 만들어내는지를 직접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책의 한계 역시 드러난다. 이 책은 분명 생기부 독서를 성공시키는 전략서로서는 뛰어나지만, 평범한 학생이 현실적으로 완독하고 소화할 수 있는 책인가?라는 질문에는 조금 다른 답을 준다. 제시된 추천 도서들은 전반적으로 난이도가 높다. 입문 동기나 배경지식이 충분하지 않은 학생들, 혹은 기초 학습이 흔들리는 중위권 학생들에게는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 책이 강조하는 지적 이동성과 학습 간 전이 효과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독서 능력 자체가 이미 일정 수준 이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 이 책은 명확하게 상위권 또는 상위권을 지향하는 학생을 위한 책이다. 전공별 도서 목록이 실질적으로 활용되려면 높은 독해력과 사유력이 필요하고, 합격 사례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강렬하지만 동시에 일반 학생이 그대로 따라 하기엔 다소 올라야 할 계단이 많아 보인다.

현장에서 학생을 지도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평균적 학습자의 실제 독서 역량은 대학이 기대하는 수준보다 훨씬 불안정하다. 이 책이 제시하는 리스트는 이 방향으로 성장하면 좋다는 이정표라기보다는, “이 정도는 읽어야 SKY에서 먹힌다는 기준선에 가깝다. 따라서 현실적 격차를 충분히 감안하여 독서를 계단식으로 설계하고, 난이도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가치는 분명하다. 독서를 입시 전략의 일부가 아니라 대학이 바라는 인재상과 직접 연결된 핵심 역량으로 설명한다는 점이 그렇다. 최근 대학들은 융합적 사고’, ‘문제 해결능력’, ‘전공 적합성을 강조하는데, 이 세 가지는 결국 깊이 있는 독서 경험 없이는 형성될 수 없다. 학생부 독서는 텍스트를 읽었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사고 구조를 가시화하는 장치다. 대학이 보는 것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그 생각이 어떤 탐구로 이어졌는가.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을 명확히 포착한다.

 

현실의 입시는 점점 더 정량에서 정성으로, 기록에서 구조로, 결과에서 과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그 변화 속에서 독서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사고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필수 능력이다. 학생부 독서를 잘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 학생이 지적 성장을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이며,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유용한 지도와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결국 1등급을 이기는 생기부 독서법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책이다. 상위권 학생에게는 입시 지형을 정확히 읽게 해주는 나침반이고, 중하위권 학생에게는 도전적인 안내서 혹은 지나치게 높은 벽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기준선이다.

 

그러나 이 양면성은 오히려 이 책의 필요성을 반증한다. 독서의 위상이 입시에서 얼마나 중요해졌는지, 대학이 지적으로 살아 있는 학생을 얼마나 찾고 있는지, 그리고 입시가 단순 서열 게임이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을 선발하려는 방향으로 구조적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입시독서는 곧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고, 자기 사고를 외부 세계와 연결하는 작업이다. 그 의미에서 이 책은 단순한 기술서가 아니라, 독서를 통해 스스로를 구축하려는 학생들에게 깊은 프레임을 제공하는 사회학적 문서에 가깝다. 독서는 점수로 환원되지 않는 역량을 기르는 과정이며, 대학이 진짜로 보고 싶어 하는 것은 그 성장의 흔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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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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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를 읽으며 - 팽나무가 인간의 역사를 바라볼 때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은 특정 인물의 비극도, 극적인 사건도 아니었다. 600년을 살아온 팽나무가 마지막 장면에서 내뱉는 단 한 문장이었다.

 

이놈아, 어디 갔다 인제 오냐.”

 

이 말은 위로도, 고발도, 교훈도 아니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인간을 부르는 방식 그 자체처럼 느껴졌다. 이 건조하고 감정 절제된 소설이 놀라울 만큼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역사를 자연의 시간 속에 다시 배치하기 때문이다.

 

1. 왜 하필 팽나무여야 했는가

 

팽나무는 한국의 생태·문화사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점한다. 수백 년을 사는 장수목이자, 마을 어귀에 서서 사람의 출입과 역사를 묵묵히 지켜보는 존재. 서낭신으로 모셔지며 인간의 삶과 죽음, 탄생과 이주를 모두 보아온 나무다. 저자가 팽나무를 화자로 선택한 것은 단순한 토속적 상징 때문이 아니다. 팽나무는 인간보다 훨씬 긴 시간 단위로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다. 인간의 왕조 교체, 종교의 흥망, 전쟁과 학살은 팽나무에게 하나의 계절 변화처럼 지나간다. 이 소설에서 팽나무는 기억하는 신이 아니라, 지켜보는 자연이다. 그래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그것이 오히려 더 잔혹하고 정확하다.

 

2. 끊임없는 탄생과 죽음의 순환고리

 

이 소설은 개똥지빠귀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새의 죽음으로 그 뱃속의 씨앗인 팽나무가 탄생한다. 팽나무의 탄생은 버려진 아이 몽각의 생과 사로 이어진다. 몽각은 자신의 사체를 자신이 먹고 살게 해준 대자연에 보시한다. 몽각의 사체 위로 기어오르는 게는 수많은 새들의 먹이가 되고, 팽나무에 깃든 도요새 무리의 번식과 죽음은 생합의 탄생의 기반이 된다. 생합으로 대표되는 갯벌 위에서 다시 인간의 역사가 쓰여진다. 이렇게 자연과 인간의 이 교차 구조는 인간이 특별할 것 없는 존재임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작품 속에서 몽각의 죽음에 감정적 서술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몸에 바닷물이 밀려들고, 칠게들이 몰려드는 장면은 애도 없는 죽음이 아니라, 자연으로의 회귀 그 자체다. 이는 <사피엔스><, , >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자연주의적 관점과 맞닿아 있다. 인간은 자연의 정점이 아니라, 그 일부일 뿐이라는 인식 말이다. 이 소설은 그 명제를 서사로 구현한다.

 

3. 특별할 것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

 

이 소설에서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몽각은 수행자도, 영웅도 되지 못한다. 당골네, 춘삼, 경순, 경수, 동수로 이어지는 계보 역시 위대한 진보를 이루지 않는다. 그들은 떠나고, 속하고, 배신하고, 믿고, 죽는다.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거부하려는 인간의 태도다. 갯벌을 막고, 바다를 죽이고, 새떼를 몰살시키는 행위는 생존의 전략이 아니라 오만이다. 이 소설이 인간을 비판하지 않고 연민하는 이유는, 인간이 악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어리석은 존재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저자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4. 다양한 종교, 하늘과 연결되려는 인간의 몸부림

 

이 소설 속에는 참 많은 종교인이 등장한다. 불교, 무속, 천주교, 동학. 이 소설에 종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종교는 모두 하늘과 연결되려는 인간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절에서 자란 몽각, 서낭신을 모시는 당골네, 박해 속에서도 신을 선택한 유 도사공, 하늘님을 품고 죽어간 동학군 경수. 그러나 어떤 종교도 소설 속에서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대신 종교는 시대마다 소외된 인간들의 선택지로 등장한다. 이는 초월을 향한 믿음이라기보다, 구조적 폭력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다. 흥미로운 점은 마지막에 신부가 마주하는 존재가 신이 아니라 팽나무라는 사실이다. 구원은 하늘에 있지 않고,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 곁에 머물던 자연에 있었다.

 

5. 허무주의가 아닌, 관계의 윤리

 

이 소설은 어떤 면으로 봐도 희망적이지 않지만, 놀랍게도 그 결말이 허무주의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저자는 감정의 고조를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저자는 삶과 자연의 관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글 속에 그려지는 인간의 고통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다만 그것이 자연의 질서를 거스를 때 비극이 구조화될 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팽나무가 유신부를 부르는 목소리는 심판이 아니라, 오래 기다린 존재의 확인이다. “인제 오냐라는 말에는 분노보다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다.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 인간의 어리석은 욕심은 너무 많은 것들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망쳐왔으나,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그 자신의 회복력으로 기다리고, 스스로를 달래며 인간을 품어준다. 오래된 팽나무 할매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인간에게 묻는다. 우리가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는 동안, 자연은 여전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느냐고. 사피엔스가 인간의 허구를 해체하고, , , 가 환경의 힘을 드러냈다면, 할매는 그 모든 사유를 한 그루 나무의 시선으로 내려놓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설명하지 않고, 설득하지 않고, 울리지 않는다. 대신 독자를 자연의 시간 속으로 잠시 끌어당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에 내 안에 남은 것은 감동이 아니라, 먹먹한 인식의 전환이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디였는지를,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사실까지 후회 한편으로는, 팽나무 할매가 쓰러지지 않은 아직은, 조금 더 제대로 살아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다짐이 고개를 든다.

 

인간의 문제를 인간 존재에 국한하지 않은 장구한 서사 속에서 나는, 그리고 이 소설을 접하는 모든 독자들은 깨닫게 될 것이다. 지구를 살아가는 운명 공동체로서의 우리의 한계를, 그리고 공존의 지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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