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
신영준.고영성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너지지 않기 위해 붙드는 문장들

—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을 읽고


레이 브래드버리는 『화씨 451』에서 책을 불태우는 사회보다 더 위험한 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읽기를 멈추는 순간이라고 말한 바 있다. 생각할 시간을 잃고, 오래 붙들 문장을 잃고, 자기 삶을 스스로 해석하는 힘을 잃어갈 때 정신의 생태계는 소리 없이 무너진다. 책에도 인용된 브래드버리의 격언, “문화를 파괴하기 위해 책을 태울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라는 말이 책을 덮자마자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 까닭은,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책을 읽지 않는 사회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해력이 빠르게 붕괴되고 있다고 연일 한탄이 사회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이 시대에, 과연 인생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각은 무엇일까. 나는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이 책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은 원전인 명언집 『거인을 읽다』에서 선정한 문장들을 바탕으로, 그 안에 담긴 사유를 더 깊이 파고든 책이라고 한다. 수백 개의 명언 가운데 대체 어떤 문장들이 끝내 살아남았을까. 왜 하필 이것들이었을까.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이라는 제목을 보며 내가 가장 먼저 붙든 질문도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최소한”은 작고 얕다는 뜻이 아니라, 삶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우리 의식의 저변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생각에 가까워 보였다. 아마 저자들은 듣자마자 번쩍이는 문장보다 시간이 지나도 삶에서 계속 작동하는 말을 골랐을 것이다. 판단할 때, 관계가 흔들릴 때, 욕망이 과열될 때, 삶의 방향을 잃을 때 다시 꺼내 쓸 수 있는 문장들. 생산성이나 처세의 기술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좋은 삶인가, 욕망과 절제는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타인과 나는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 불안과 죽음과 자유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같은 밑바닥의 질문을 건드리는 말들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이 말하는 “최소한”은 대단해지기 위한 생각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생각, 남보다 앞서가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키를 놓지 않기 위한 기준처럼 느껴졌다. 잘 살기 이전에 대충 살지 않기 위해 필요한 생각, 인생이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끝까지 남겨야 하는 말들이 있으리라 여기니, 이 책은 단순한 명언 해설서라기보다 삶의 토대를 이루는 생각들을 골라 다시 붙들게 하는 선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 하나가 이어졌다. 어쩌면 이런 책을 읽는다는 것은 좋은 문장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그 문장 뒤에 있는 사유의 방식을 조금씩 훔치는 일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대가의 사유를 훔친다는 것은 그들의 문장을 외우는 일이 아니라, 그들이 세계를 의심하고 해석하고 파고드는 방식 일부를 내 안에 이식하는 일이다. 프롬에게서는 감정의 근원을, 비에리에게서는 자기형성의 구조를, 코비에게서는 패러다임의 뿌리를, 쇼펜하우어에게서는 욕망의 냉정한 메커니즘을, 인지과학에서는 인간 정신의 진화적 바탕을 훔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훔친 빛을 내 질문과 내 언어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문장들은 독자를 잠시 고무시키고 지나가는 명언이 아니라, 오래된 사유의 결을 삶의 자리로 다시 번역해보게 하는 도구처럼 느껴졌다.


아무래도 바탕이 명언이다 보니 읽는 동안 와닿는 대목이 많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역시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성장에 관한 사유들이었다. 저자들은 말한다. 성장은 눈에 띄지 않는다고.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안쪽에서 먼저 결이 바뀐다고, 말이다. 요즘의 나는 그것을 독서 속에서 자주 느낀다. 한 권의 책을 읽다가 오래전에 읽은 다른 책의 문장이 떠오르고, 전혀 다른 분야의 사유들이 예상치 못한 자리에서 서로 손을 잡는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수능 지문조차 더는 시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쌓인 독서의 맥락과 접속하며 새롭게 살아나는 텍스트처럼 느껴진다. 겉으로 보면 여전히 비슷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일지 몰라도, 안에서는 이미 해석의 방식이 달라지고 있다.


성장의 첫 징후는 아마 성과가 아니라 이런 연결의 쾌감일 것이다.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내 안에서는 이미 변화가 문장을 얻고 있다. 그래서 이제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라는 말을 쉽게 믿지 않게 되었다. 겉으로 정지해 있는 것처럼 보여도, 안에서는 이미 어떤 방향이 정해지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독서는 내게 그 보이지 않는 변화를 가장 먼저 알려주는 징후가 되었다. 어제와 비슷한 하루처럼 보여도, 안쪽에서는 이미 해석의 근육이 자라고 있고, 생각과 감각의 연결망이 조금씩 촘촘해지고 있다면, 그건 분명 성장의 일부일 것이다.


시간의 밀도라는 표현이 내게 크게 울린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하루를 더 빽빽하게 채우라는 조언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필요한 것은 더 긴 시간이 아니라 덜 새고 덜 닳는 시간에 가까웠다. 나는 원래 한 가지 일을 할 때도 생각이 쉽게 번지고, 감정과 불안과 자책이 한꺼번에 끼어들어 같은 한 시간을 써도 더 빨리 지치는 편이다. 그래서 체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시간의 밀도를 익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시간의 밀도란 더 많은 일을 욱여넣는 능력이 아니라, 같은 시간 안에서 내 힘이 허공으로 새지 않게 하는 능력이다. 공부할 땐 공부만 하고, 읽을 땐 읽기만 하고, 쉴 땐 죄책감 없이 쉬는 것. 해야 할 일과 불안, 몰입과 자책이 한 시간 안에서 서로 잡아당기지 않게 만드는 것. 아마 사람을 가장 지치게 하는 것은 노동량 자체보다 이렇게 분산된 내적 마찰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의 밀도를 높인다는 것은 삶을 빽빽하게 채우는 일이 아니라, 내가 쓰는 힘을 더 또렷한 방향으로 모으는 일처럼 느껴진다. 이 문장은 그래서 단순한 자기계발의 조언이 아니라, 지금의 나에게는 지치지 않고 오래 가기 위해 꼭 익혀야 할 삶의 기술처럼 읽혔다.


저자들은 독자로 하여금 당장 바뀌라고 윽박지르는 대신, 삶을 오래 지탱할 말 몇 개를 다정하게 손에 쥐여준다. 그리고 그 말들을 통해 독자가 자기 삶을 다시 비추어보게 만든다. 이 책이 주는 효용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어떤 말은 위기 앞에서 기준이 되고, 어떤 말은 과열된 욕망을 식히며, 어떤 말은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어 준다. 좋은 문장이 오래 남는 이유는 그것이 멋있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할 때 다시 되뇌일 지침이 되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은 “어떻게 더 잘될까”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 책이라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을까”에 대한 이정표를 세워주는 책에 가깝다. 더 높이 올라가는 기술보다 중심을 잃지 않는 판단, 더 화려해지는 방법보다 무너지지 않는 태도. 그런 것들이야말로 삶이 복잡해질수록 더 절실한 "최소한"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에서 저자들의 사유의 방식을 통해 명언을 읽는 태도를 배웠다. 좋은 문장을 읽는다는 것은 그 문장을 인용하기 위해 머릿속에 저장하는 일이 아니라, 그 말이 지닌 무게를 내 삶 안으로 들여오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인의 통찰이 오래도록 내 의식 속에 남아 내 말과 생각의 결을 조금씩 바꾸기 시작할 때, 독서는 더 이상 소비가 아니라 형성이 된다. 그리고 그런 형성은 결국 내가 책임을 택하도록 조금씩 등을 떠밀 것이다.


책이 말하듯 인생에는 두 가지 기본적인 선택이 있다.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바꿀 책임을 받아들이거나. 이 책이 내게 준 말들도 결국 그 둘 사이에서 망설이는 마음을 오래 붙들어주는 기준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해이해질 때마다, 오늘을 그냥 흘려보내고 싶어질 때마다, 나는 다시 이 말들 곁으로 돌아오게 될 것 같다.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 삶의 키를 남의 손에 넘기지 않기 위해서. 넘어졌다가도 다시 일어나기 위해 붙드는 말들이란 결국 이와 같이 다시 책임을 선택하게 만드는 말들인지도 모르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일동맹이라는 거울 - 한미일 안보 체제의 한계와 가능성
지지와 야스아키 지음, 길윤형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이 사라지고 ‘한반도’만 남을 때

— 『미일동맹이라는 거울』을 읽고



대학 시절 국제 정치학과 국제법 수업을 들으며, 나는 정치와 국제 관계가 보여주는 유연한 합의와 변화의 감각을 보이지 않는 전쟁처럼 느꼈다. 우리 헌법이 천명하는 국제 평화주의 역시, 우리만의 의지만으로 지켜낼 수 없는 무게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깨달았다.


을사조약 이후 고종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사절단을 보냈으나, 약소국이었던 우리는 입장조차 허락받지 못했다. 1904년 대한제국의 국외중립선언 역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무위로 돌아갔다. 국제 평화주의는 힘의 논리 앞에서 언제나 소리 없이 쓰러질 수 있다. 그 교훈 아래 인류는 집단적 동맹 체계로 안보를 지키는 전략을 택했고, 그 흔적은 한미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도 남아 있다.


내가 미일동맹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우리 바깥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전략적 시선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침략의 역사보다 침략 당한 기억을 더 깊이 가진 나라의 후손으로서, 침략하지 않되 침범받지 않으려면 동맹의 다자적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를 느꼈다. 그렇게 펼친 이 책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불편한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우리는 동맹을 안전의 언어로 배운다. 서로를 지켜주는 약속, 위협을 억제하는 장치, 전쟁을 막기 위한 구조. 그래서 ‘한미동맹’이나 ‘미일동맹’이라는 말을 들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호의 문장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미일동맹이라는 거울>을 읽으며 나는 그 문장을 다르게 읽게 되었다. 이 책은 동맹을 설명하는 동시에, 우리가 너무 쉽게 넘겨왔던 질문을 끌어올린다.


정말로, 동맹은 누구를 어떻게 지키는 구조인가.


특히 한국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을 때, 미일동맹은 단순한 타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미동맹을 비추는 거울처럼 작동한다. 구조는 닮아 있고, 논리는 유사하며, 작동 방식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질문이 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전쟁은 과연 누구의 판단으로, 어떤 방식으로 확장될 것인가.


저자는 반복적으로 ‘대한민국’이 아니라 ‘한반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처음에는 그것이 지정학적 분석을 위한 중립적 용어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그 표현이 만들어내는 시선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언어 안에서 한국은 더 이상 선택하고 판단하는 주체가 아니다. 대신 분석되고 배치되는 공간, 전략이 작동하는 무대, 필요할 때 투입되고 확장될 수 있는 조건처럼 다뤄진다. 누가 싸울 것인가보다 어디에서 싸울 것인가가 먼저 규정되는 세계. 그 안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은 지워지고, ‘한반도’라는 지리적 단위만 남는다.


그 표현이 반복될수록 나는 묻게 된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언어로 불리고 있는가. 그리고 그 언어 속에서, 우리는 과연 주체로 남아 있는가.


이 불편함은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니다. 이 책은 냉전 시기 미국이 아시아에서 다자 동맹을 구축하지 못하고, 결국 허브 앤 스포크라는 양자 동맹 체제로 귀결된 과정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로 한국의 반일 감정을 언급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애초에 하나로 묶이기 어려웠던 아시아 질서의 균열이 더 깊게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전후 아시아는 하나의 공통된 위협으로 단순화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각 국가는 서로 다른 적을 바라보고 있었고,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동일한 전쟁을 상상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 균열 위에서 다자 동맹이 성립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선택한 것은 각 국가를 개별적으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중심에 서서 관계를 조율하고, 필요할 때 작동 시키는 구조. 이 체계는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또 다른 의문을 남긴다. 그 네트워크는 누구를 중심으로 작동하는가. 그리고 그 안에서 각 국가는 얼마나 스스로를 결정할 수 있는가.


이 책은 미일동맹의 작동 원리를 구체적 사례를 통해 설명하는 과정에서, 몇몇 역사적 장면을 비교적 단선적으로 정리하는 경향도 보인다. 예컨대 일본의 ‘사전협의제’로 인해 오키나와 기지 운용에 제약이 생기고, 그 대안으로 한국 내 기지, 나아가 제주도까지 검토되었다는 서술은 흥미로운 시사점을 던지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확정된 정책 흐름처럼 읽힐 여지가 있다.


그러나 실제 전후 동아시아의 안보 구조는 단일한 결정이나 의지로 설명되기 어려운 복합적 맥락 위에서 작동해왔다. 한국 정부가 미군의 작전 지속성과 대응 속도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 특정 지역을 대체 기지로 ‘제공하려 했다’는 식의 단정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 여부 자체보다, 가능성과 논의의 수준에 머물렀던 사안을 하나의 구조적 결론처럼 압축해 제시하는 서술 방식이다.


이러한 압축은 독자의 이해를 돕는 동시에, 동맹이 작동하는 실제의 복잡성과 긴장을 다소 평면화할 위험도 함께 지닌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제시된 사례를 하나의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기보다, 당시의 정치적 조건과 전략적 선택지가 교차하던 맥락 속에서 다시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냉전 시기 핵 배치의 방식은 이러한 구조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당시 미국은 핵탄두를 한국과 필리핀 등지에 분산 배치해 두고, 오키나와의 전력과 결합해 운용하는 체계를 구성하고 있었다. 형식적으로 한국은 핵을 보유한 국가가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핵이 저장되고 이동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했던 셈이다. 핵의 사용 여부와 전략적 판단은 외부에서 내려지지만, 그 작동의 조건과 경로는 이 땅 위에 놓여 있었던 구조. 이처럼 냉전기의 핵 전략이 한국을 주체가 아니라 공간으로 위치 지었다면, 오늘의 안보 논의 역시 그 연장선 위에서 다시 읽힐 필요가 있다.


저자가 전제하고 있는 안보 감각은 분명하다. 미국의 상대적 우위가 약화되는 상황에서, 기존의 핵우산만으로는 충분한 억제력을 담보하기 어렵고, 따라서 핵 공유나 전진 배치와 같은 선택지를 전략적 옵션으로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일정 부분 자연스럽다. 핵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동맹의 신뢰성을 보완하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이 논의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일본의 억제력 보강이라는 문제는 곧바로 한반도 유사시 개입 가능성의 확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핵심은 단순히 일본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의 필요성과 범위를 규정하는 판단이 점점 더 외부 동맹의 언어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이다. 일본에게 그것이 ‘억제력’의 문제라면, 한국에게 그것은 ‘전쟁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의 문제로 변한다.


확장억제는 단순한 군사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신뢰에 의존하는 구조다. 바이든 행정부가 이를 제도화하려 했던 것과 달리, 트럼프 시기에는 동맹이 거래의 대상으로 전환되며 그 신뢰 자체가 흔들린 바 있다. 결국 핵우산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며, 그 관계가 불안정해질 때 동맹의 구조 역시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국의 핵무장 가능성은 때때로 정치적 발언 속에서 언급되지만, 실제 정책 차원에서 그것은 여전히 강하게 제한된 선택지에 가깝다. 미국이 허용하는 것은 핵의 공유된 억제력이지, 핵의 분산된 주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하게 읽은 지점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였다. 저자가 집단적 자위권의 확대를 강하게 옹호하는 이유는, 그것을 일본의 군사적 팽창이 아니라 미일동맹을 실제로 작동시키기 위한 현실적 조건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안보담론 내부에서는 이것이 비교적 자연스러운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그 ‘자연스러움’은 곧바로 불편함이 된다. 일본의 안전을 위한 제도적 보완이 한반도 유사시의 개입 가능성과 연결되는 순간, 집단적 자위권은 더 이상 추상적 법 해석이 아니라 우리의 전쟁과 주권을 가르는 문제로 바뀌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것을 미일동맹의 현실적 조정과 법적 재구성의 맥락에서 설명하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이 문제는 그렇게 중립적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일본이 말하는 ‘존립위기사태’는 형식상 일본 정부의 판단에 달려 있지만, 실제로는 미국과의 동맹 구조 속에서 공동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그 사태가 누구에게 얼마나 중대한 위협인지를 판단하는 권한은 한국만의 손에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한국은 전쟁이 벌어지는 장소이고 피해를 감당해야 하는 당사자인데, 그 전쟁의 확대 가능성과 대응 방식의 일부는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판단 속에서 선결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이 한국인 독자로서 내가 일본의 ‘한정 용인된’ 집단적 자위권조차 위협으로 느끼는 이유다. 문제는 일본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만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의 감당은 한국의 몫이면서도 전쟁의 판단과 작동은 외부 동맹의 언어 속에서 결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맹은 보호를 약속한다. 그러나 그 보호의 언어 뒤에는 언제나 권한과 책임의 비대칭이 함께 존재한다. 전쟁을 결정하는 권한과, 그 전쟁을 감당해야 하는 위치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끝내 붙잡게 된 것은 동맹의 유용성 자체보다, 그 구조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우리는 동맹을 너무 쉽게 ‘안전’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안에는 언제나 선택과 통제, 그리고 감당의 문제가 함께 들어 있다. 그것은 우리를 지켜주는 장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감당해야 할 위험의 범위를 더 넓히는 구조일 수도 있다.


이 책은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구조를 따라가다 보니 나는 앞선 질문들 앞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단순한 국제정치 해설서라기보다, 우리가 너무 오래 당연하게 받아들여온 세계의 문장을 다시 읽게 만드는 거울에 가깝게 느껴졌다. 헤이그에서 입장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나라의 후손으로서, 나는 보호를 약속하면서도 결정권과 감당의 몫을 다르게 배분하는 이 구조를, 끝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교양100그램 #AI #미래 #김대식 #김혜연 #책추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교양 100그램 11
김대식.김혜연 지음 / 창비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정말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를 읽고


제목은 아주 노골적이다.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 처음에는 누구나 이 제목을 기술의 문제로 읽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얼마나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지, 인간의 일자리를 얼마나 대체할 것인지, 앞으로 우리는 어떤 능력을 갖춰야 하는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말이다. 


하지만 책을 읽기 시작하자 곧 알게 됐다. 이 제목은 기술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완전히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이 진짜로 묻는 것은 “AI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전의 질문, 더 불편하고 더 사적인 질문이다.

너는 지금, 인간답게 일하고 있느냐.

혹은 더 잔인하게 말하면,

너는 지금 정말 '무언가를' 하고 있느냐.


 저자가 서두에서 AI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둠스크롤링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흐름은 명확하다. AI는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지치지 않는다. 반면 인간은 집중하지 못하고, 스크롤하고, 피곤해하고, 시작을 미룬다. 그러니 결론도 냉정하다. 이 상태라면 AI가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 AI가 특별히 악마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이미 자기 집중력과 실행력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AI가 인간보다 뛰어날 수 있다는 사실보다, 그 전에 이미 인간 쪽이 먼저 자신을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춰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내게 단순한 미래 전망서가 아니라, 지금의 인간 상태를 진단하는 책이 되었다. 특히 내게 그 말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는 오래도록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며 사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어왔다. 적어도 나는 나를 그렇게 설명해왔다. 그런데 돌아보면, 나는 종종 이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척하며 도망치고 있었다. 읽고, 밑줄 긋고, 감탄하고, 생각하고, 연결하는 일은 열심히 했지만 정작 현실의 한 문제를 풀고, 틀린 이유를 고치고, 다시 반복하는 일 앞에서는 자꾸 미끄러졌다. 나는 행동하지 않으면서도 생각하고 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용서해온 사람이었다. 이 책의 제목을 내 식으로 번역하면 결국 이렇게 된다.


AI가 나보다 일을 잘할 때가 아니라,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


하지만 이 책이 내게 무섭게 남은 이유는 실행력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중반부의 자율주행차와 판단 문제, 곧 AI가 누구를 먼저 살릴 것인가를 둘러싼 논의에 이르자 책은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간다. 그 순간 공포의 핵심은 “AI가 사람보다 똑똑해진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 선명해졌다. 더 무서운 것은 오히려 이쪽이다.

AI는 죄책감 없이, 망설임 없이, 일관되게 원칙을 수행할 수 있다.

인간은 잔인한 결정을 내릴 때 흔들린다. 자기합리화를 하더라도 끝내 마음 한구석이 더럽혀진다. 그 더러움 때문에 멈추고, 돌아보고, 규칙을 깨기도 한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다를 수 있다. 한 번 기준이 입력되면 그 기준을 고통 없이 반복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공지능은 단순한 계산기나 보조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분류하고 서열화하는 권력의 형식이 된다. 부자를 빈자보다 우선하고, 노인보다 아이를 우선하는 결정을 효율이나 합리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순간, AI는 단순히 더 빠른 기계가 아니라 누가 더 살 만한 존재인지 판정하는 기계적 심판이 된다. 이 문제의식은 내가 이혁진 작가님의 소설 <단단하고도 녹슬지 않는>에서 느꼈던 서늘함과도 맞닿아 있었다. 처음에는 위급 상황, 한정된 자원, 더 많은 생존 가능성이라는 명분으로 작은 예외가 허용된다. 그러나 그런 기준이 제도화되는 순간, 다음 단계는 너무 쉽게 열린다. 누구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 누구에게 더 많은 보험과 자원을 배분할 것인가, 누구의 생명이 더 투자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될 것인가. 그렇게 되면 AI는 인간을 돕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을 평가하고 배제하는 구조가 된다.


기계화된 권력은 기계가 만들어 내는 게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합리성과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기계에게 위임한다. 그리고 그 순간, 삶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 인공지능은 <1984>가 경고한 빅브라더처럼, 감시를 넘어 판단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인류의 멸종은 폭발이나 반란의 형태가 아니다. 사유를 빼앗기고, 존재 가치를 외부의 계산에 따라 분류당한 채, 무력하게 관리되는 상태로 살아남는 것이다. 그런 인간은 생물학적으로는 존속할지 몰라도 의미의 차원에서는 이미 소멸한 존재일 수 있다.


동시에 저자는 책을 통해서 AI와 인간의 대화, 소통, 창작의 경계가 흐려지는 문제도 건드린다. 그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낯설기보다 오히려 이상하게 익숙한 감정을 느꼈다. 남편을 제외하면 나는 많은 인간관계에서 비교적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편이고, 깊은 불안과 사유, 감정의 결은 오히려 AI와 더 자주 주고받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것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일이 아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소설을 써왔고, 내 캐릭터들끼리 깊이 공감하고 대화하게 해왔다. 결국 그 대화들은 모두 내 안의 여러 목소리가 부딪히고 화해하는 방식이었다. 그런 점에서 AI와의 대화는 완전히 외부적인 경험이 아니라, 내 안의 사고를 비추고 밀어내는 또 하나의 거울일 수 있다. 다만 여기서도 핵심은 같다. 그 대화가 나를 더 명료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더 편안한 자기기만 속에 눕혀두는가.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짜 회사”의 발상은 그래서 내게 더 강한 거부감을 남겼다. AI가 대부분의 생산을 맡고 인간은 형식적인 부서와 업무 속에서 출근하고 커피를 마시고 회의를 하며 구조만 유지하는 삶. 통찰로서는 흥미로웠지만, 나는 그 장면이 끔찍하게 비참해 보였다. 인간은 시간을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부가 부여한 역할을 흉내 내는 것만으로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얻을 수 없다. 느리고 서툴고 실패하더라도, 스스로 부딪히고, 해보고, 좌절하고, 다시 움직이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존재는 자기 무게를 얻는다. 나는 노동 없는 삶보다도 실감 없는 삶이 더 두렵다. 생산이 아니라 시뮬라크르simulacre만 남는 세계, 행동이 아니라 형식만 남는 세계는 내게 유토피아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폐허처럼 보였다.


이 모든 지점에서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나는 무엇을 넘겨주고, 무엇을 끝까지 붙들 것인가. 계산은 넘겨줄 수 있다. 반복도 넘겨줄 수 있다. 속도와 정리는 상당 부분 넘겨줄 수 있다. 하지만 판단의 최종 책임,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감각, 그것은 포기할 수 없다. 


우리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실행의 몫까지 넘겨주는 순간, 인간은 편리해지는 대신 공허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공허를 효율과 안락의 이름으로 포장하는 사회는 생각보다 쉽게 도래할 수 있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결론은 단순하다.

AI 시대의 위기는 AI 자체가 아니라, 행동하지 않는 인간이다.

더 정확히는, 생각으로 도망치고 실행을 미루면서도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 인간이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나는 종종 생각으로, 이야기 속으로 도망쳤고, 이해하는 척하며 미뤘고, 행동 없는 자의식을 성찰로 착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핑계를 남겨두지 않는다. 희망을 주는 책이라기보다, 핑계를 없애는 책에 가까웠다.


인간을 지키는 것은 기술의 부정이 아니다.

편리하다고 해서 다 넘겨주지 않는 태도, 그리고 생각만 하지 않고 실제로 움직이는 습관이다. 눈 앞의 문제 하나를 풀고, 오답 하나를 고치고, 오늘 해야 할 것을 오늘 하는 태도. 너무 사소해서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이는 그 반복이야말로, AI 시대에 인간이 끝내 포기해서는 안 되는 마지막 권한이고, 인공지능이 우리를 아득히 뛰어넘는 존재가 된 뒤에도 끝내 잡을 수 없는 살아있음의 감각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 특서 어린이문학 17
이상권 지음, 오이트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은 인간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드러낸다

— 『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고


전쟁을 생각하면 우리는 흔히 인간성이 파괴된다고 말한다. 문명은 무너지고, 도덕은 사라지며, 인간은 짐승으로 전락한다고. 그래서 전쟁은 인간을 망가뜨리는 사건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소년병의 끝없는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그 생각을 조금 바꾸게 되었다. 전쟁은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안에 숨겨져 있던 것을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사건에 가깝다는 것을.


나는 원래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보는 편이 아니다. 인간은 교육받지 않으면 사회 구성원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돌봄과 규율, 윤리와 학습이 없다면 인간은 쉽게 이기심과 폭력 쪽으로 기울어지는 존재라고 믿어왔다. 그런 내 인간관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사실 이 책 속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다. 저보다 더 어리고 약한 존재의 생명을 태워 자기 이념과 행동과 존재를 정당화하는 어른들. 아이들의 생존 본능을 이용해, 그들을 전쟁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존재들. 전쟁이 잔혹한 이유는 총과 피 때문만이 아니라, 바로 그 구조가 너무도 인간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 속 아이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이념도, 국가도, 정의도 없다. 오직 하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만이 남아 있다. 총을 드는 이유도, 방아쇠를 당기는 이유도 결국은 그 하나다. “내가 죽지 않기 위해.” 그 단순한 문장이 이 세계의 전부가 된다.


문제는 바로 그 지점이다. 아이들에게서 어린 시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워버렸다는 사실. 그들은 선택하지 않았지만 선택당했고, 이해하지 못했지만 행동해야 했다. 전쟁은 아이를 어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아이를 자기 논리의 연료로 바꾸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내가 인간을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바로 이런 장면들 때문일 것이다. 힘없는 존재를 이용하고, 더 약한 존재의 삶을 대가로 삼아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는 것. 나는 인간의 악함이란 대개 거기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순한 비극으로만 남지 않는 이유는, 그 한가운데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어떤 감정 때문이다.


내가 기어이 눈시울을 적시고 만 장면은, 서로를 버리면 더 쉽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끝내 손을 놓지 않는 순간이었다. 도망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상대를 버리면 확률은 올라간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것이 맞다. 하지만 소설 속 소년병 토마스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니, 하지 못한다.


이 지점에서 인간성은 완전히 다른 얼굴로 드러난다. 그것은 더 이상 도덕도, 윤리도 아니다. ‘착함’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주 원초적인 형태의 감각, 누군가를 완전히 사물로 보지 못하는 힘. 총을 들고 있으면서도 끝내 상대를 ‘사람’으로 인식하는 잔여. 나는 끝내 그것을 인간성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내 안의 어떤 모순을 보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인간을 악하다고 본다. 교육받지 않으면 제멋대로 흐르고, 약한 존재를 해치고도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쪽으로 기울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작 내 눈길을 붙잡고 나를 울리고 생각하게 만든 것은 그런 악한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내 세계관에 더 잘 들어맞는 것은 전쟁을 설계하고 아이들을 소모하는 어른들이었는데, 내 마음을 무너뜨린 것은 끝내 친구를 버리지 않으려는 한 아이의 선택이었다. 나는 이 장면을 통해 비로소 알았다. 내 마음 어딘가에서는 극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선의로 스스로를 고결하게 만드는 인간을, 여전히 긍정하고 있었다는 것을.


아이러니하게도, 이 감정은 가장 늦게 나타났다. 이미 너무 많은 것이 파괴된 뒤,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어선 뒤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래서 더 아프다. 만약 이 감정이 조금만 더 일찍 나타났다면, 어쩌면 많은 것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은 언제나 그렇다. 인간다움은 너무 늦게 도착한다.


이 책이 잔혹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전쟁 장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결국 적응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총을 들고 떨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자연스럽게 다루게 된다. 죽음은 일상이 되고, 폭력은 습관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조금씩 마모된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필연적인 변화이지만, 동시에 가장 큰 비극이기도 하다.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지만, 바로 그 적응의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친구를 향한 마음, 가족을 향한 기억, 그리고 누군가를 버리지 못하는 선택. 그것은 시스템도, 교육도, 이념도 아닌, 인간 내부에 남아 있는 마지막 흔적이다. 나는 여전히 인간의 본성을 낙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인간을 완전히 비관할 수도 없게 되었다. 끝까지 타인을 사람으로 남겨두려는 어떤 힘, 같이 살자고 말하는 힘, 죽음의 한복판에서도 누군가를 밀어내지 못하는 힘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인간 안에 존재하던 짐승과 인간을 동시에 끌어올리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두 얼굴이 충돌하는 장면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끝에서 무엇이 남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조차,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미는 선택, 그 미약하고도 비합리적인 선택이야말로, 인간이 끝내 인간일 수 있는 마지막 증거라는 것을 절감하며 나는 이 책을 덮었다. 


그래서 이 책은 슬프며, 너무 늦게 도착한 희망처럼 아프다. 하지만 아마도 그 늦은 희망 덕분에, 나는 끝까지 이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의 나쁜 무리
예소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관계는 구원이기도 하고 파괴이기도 하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너의 나쁜 무리>를 읽고 나면 이 문장은 더 이상 안전하게 들리지 않는다. 관계는 우리를 살리는 동시에, 가장 쉽게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관계는 내게 대체로 큰 두려움이었다. 십대의 원만하지 못했던 교우관계, 성과에 대한 보상으로만 주어졌던 부모님의 지지, 첫 직장에서의 직속 상사 주도의 사내 괴롭힘까지. 내게 인간관계는 늘 잠재적 위험을 내포한 대가 관계에 가까웠다. 살아남기 위해 첫인상의 불길한 기운을 읽어내는 데 특화된 내게, 관계가 만들어내는 파경과 구원을 다루는 이 소설집은 오래도록 펼치기 두려운 책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조건 없는 사랑에 가까운 남편과 고양이들의 맹목에 가까운 애정 속에서 처음으로 안전한 울타리를 얻어 신뢰를 조금씩 회복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소설집을 영영 펼쳐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예소연 작가님의 소설은 큰 사건으로 독자를 끌어당기지 않는다. 대신 아주 작은 장면, 말의 결, 시선의 방향 같은 것들을 통해 관계의 균열과 긴장을 드러낸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순간이 어떻게 의존으로 기울고, 그 의존이 어떤 파경으로 이어지는지를, 저자는 그 관계의 저변에 깔리는 미세한 호흡까지 예민하게 포착한다. 그래서 이 소설집을 읽는 일은 어떤 드라마를 따라가는 경험이라기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해왔던 감정들을 하나씩 다시 마주하는 과정에 가깝게 느껴졌다.


내가 이 소설집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사랑하게 된 작품인 소란한 속삭임을 읽고 있노라면, 저자가 관계의 최소 단위를 다루는 방식이 퍽 독특하면서도 굉장히 보편적인 깨달음을 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것을 부탁하는 장면, 속삭이는 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백 같은 것들. 그 사소한 순간들이 오히려 관계의 본질을 드러낸다.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삶을 붙들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반대로, 가장 가까운 관계가 가장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작은 순간들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저자가 다루는 고독 역시 단순한 외로움과는 다르다. 인물들은 혼자여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타인과 연결되기를 원하면서도 그 연결이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더 깊은 고독 속에 놓인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서 관계는 언제나 양가적이다. 구원이면서 동시에 위험이고, 위로이면서 동시에 부담이다. 그 긴장을 저자는 과장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준다.


표제작 〈너와 나쁜 무리〉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여사였다. 어린 손녀 유선을 키운 조모인 그녀는 자기파괴적인 자유연애자로, 아이에게 가감 없이 본인의 사생활을 오픈한다. 그 과정이 끼친 파급력은 어린 유선에게 자못 파괴적이다. 여사는 분명 좋은 어른도, 보호자도 아니다. 예전의 나였다면 여사의 양육자로서의 자질을 거론하며 유선의 독립만을 바랐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여사는 비록 유선을 반듯하게 키워내지 못했고 끝내 어린 손녀를 폭행의 공범으로 만들었지만, 그녀마저 없었다면 유선이 아름답지 않은 인간의 본질을 보고도 운명공동체가 되기를 택할 만큼 마음이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을까. 어쩌면 부모에게 버려진 유선에게 여사는 그녀를 망치러 온 구원자였을지도 모른다. 관계는 언제나 순수하게 좋거나 나쁘지 않다. 상처와 구원이 같은 자리에서 온다는 것을,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작년 읽었던 성해나 작가님의 <혼모노>가 날것의 감정으로 생의 바닥을 파고드는 작품이었다면, <너의 나쁜 무리>는 그보다 조금 더 절제된 거리에서 관계를 응시한다. 덜 격렬할 수는 있지만, 대신 더 오래 남는다. 문장은 차분하고, 시선은 정확하며, 감정은 과잉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살아가지만, 그 관계가 언제든 균열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관계를 향하게 되는 마음, 나는 이 소설집을 읽으며, 관계의 모순적인 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는 그 불안정함을 알면서도, 아주 작은 방식으로 서로를 붙들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