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주의 인물 특서 어린이문학 19
황지영 지음, 불키드 그림 / 특서주니어(특별한서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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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아이의 삶을 대신 살 수는 없다
— 황지영, 『요주의 인물』을 읽고

『요주의 인물』을 읽는 동안 가장 오래 남은 감정은 분노가 아니라 복잡한 슬픔이었다. 이 책에는 나쁜 아이 하나, 예민한 부모 하나, 무능한 학교 하나로 단순히 정리할 수 없는 관계들이 나온다. 오히려 이 소설은 묻는다.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가. 상처받은 아이를 보호한다는 것은 어디까지 대신 싸워주는 일이고, 어디서부터는 아이가 자기 삶을 스스로 건너가도록 곁을 지켜주는 일인가.
이찬은 친구가 없는 아이다. 정확히 말하면 친구를 사귀는 법을 잃어버린 아이다. 처음부터 그런 아이였던 것은 아니다. 이찬에게도 공을 차고 싶고, 친구와 놀고 싶고, 자기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과잉보호와 학교의 무책임한 대응, 아이들 사이의 냉혹한 분위기가 겹치며 이찬은 점점 반 안에서 ‘요주의 인물’이 되어간다. 이름이 아니라 낙인으로 불리는 아이. 사람이라기보다 사건의 원인으로 취급되는 아이. 그 과정이 너무 선명해서 읽는 내내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나는 이찬이를 쉽게 나무랄 수 없었다. 나 역시 중학교 2학년 때 학교가 지옥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실내화 속 압정, 머리 위로 떨어진 화분, 계단에서 밀쳐져 접질린 발목 같은 일들이 있었다. 몸은 여러 번 다쳤고, 마음은 그보다 더 오래 다쳤다. 그런데도 나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았다. 어른들이 나서면 나를 구해주기보다 더 외롭게 만들 것 같았다. 그때의 학교는 아이들이 배우는 곳이라기보다 견디는 곳에 가까웠고, 나는 매일 아침 그곳으로 걸어 들어가며 조금씩 나를 접었다.
그래서 친구 없는 이찬이의 고통을 안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 교실, 내가 지나가면 아주 조금씩 멀어지는 몸들, 무슨 일이 생겨도 결국 내 탓이 될 것 같은 공기. 그런 고립은 아이를 조용히 망가뜨린다. 괴롭힘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하고, 마음의 안전지대를 무너뜨리고, 오래도록 세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어떤 아이에게 학교는 정말로 지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찬의 부모 마음도 이해한다. 자기 아이가 다치고, 울고, 혼자가 되는 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질까.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 앞에서 부모는 쉽게 이성을 잃는다. 세상이 아이를 공격한다고 느끼는 순간, 부모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더 단단한 방패, 더 날카로운 방패, 아이 앞에 있는 모든 위험을 베어내는 방패가 되고 싶어진다. 『요주의 인물』 속 부모 역시 그런 마음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아이를 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문제는 그 보호가 어느 순간 아이의 삶을 대신 살기 시작한다는 데 있다. 이찬의 부모는 아이를 위해 싸운다고 믿지만, 그 싸움은 점점 이찬의 목소리를 지워버린다. 이찬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다시 시도해 보고 싶은지 묻지 않는다. 아이의 고통은 부모의 불안 속에서 확대되고, 부모의 불안은 다시 학교와 아이들 사이에 더 큰 파문을 만든다. 그렇게 이찬은 보호받는 아이가 아니라, 보호라는 이름의 유리벽 안에 갇힌 아이가 된다.
이 소설이 아픈 이유는 과잉보호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잉보호는 종종 너무 큰 사랑, 너무 큰 공포, 너무 늦게 깨달은 죄책감에서 나온다. 부모는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 다시는 울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 모든 위험이 아이에게 닿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막아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아이는 무균실에서 자랄 수 없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이 완전히 제거된 세계가 아니라, 위험을 만났을 때 돌아올 수 있는 자리다. 실패해도 버려지지 않는다는 믿음, 다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경험, 자기 목소리로 말해도 세상이 끝나지 않는다는 훈련이다.
이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도 어쩌면 완벽한 방어가 아니라 안전한 거리였을지 모른다. 부모가 곁에 있다는 확신은 필요하지만, 부모가 자기 앞의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버리면 아이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친구와 부딪히고, 오해를 풀고, 거절당하고, 다시 말을 걸고,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물러나는 일. 그런 작고 서툰 실패들이 모여 아이는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성장에는 반드시 마찰이 있다. 너무 큰 마찰은 아이를 깨뜨리지만, 모든 마찰을 제거하면 아이는 단단해질 기회를 잃는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오래 멈춘 지점도 그곳이었다. 나는 과거의 나를 생각했다. 그때의 나는 누군가에게 구조받고 싶었지만, 동시에 내 삶이 더 시끄러운 사건이 되는 것도 두려웠다. 누구도 나를 완전히 대신 구해줄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일찍 배웠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아이에게 “네가 알아서 해”라고 방치하는 것도 폭력이고, “내가 다 해결해줄게”라고 삶을 빼앗는 것도 또 다른 방식의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필요한 것은 방치와 개입 사이의 섬세한 균형이다. 아이가 혼자 싸우게 두지 않되, 아이가 싸우는 법을 영영 잊게 만들지도 않는 것.
『요주의 인물』은 학교폭력을 가볍게 다루지 않는다. 동시에 피해와 보호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다른 아이들을 향한 공격과 배제의 언어로 바뀔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피해자를 지키겠다는 명분이 반 전체를 의심하게 만들고, 한 아이를 지키려는 마음이 다른 아이들의 세계를 흔들고, 결국 이찬 자신마저 더 깊은 고립 속으로 밀어 넣는다. 여기에는 악인 하나가 없다. 대신 서툰 어른들, 두려운 아이들, 책임을 회피하는 시스템, 그리고 사랑이 불안으로 변질되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과잉보호는 나쁘다”고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아이를 얼마나 믿고 있는가. 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만큼, 아이가 다친 뒤에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믿고 있는가. 아이의 고통을 없애주는 것과 아이가 고통을 통과할 수 있도록 곁에 있어주는 것 사이에는 깊은 차이가 있다. 부모와 어른이 해야 할 일은 아이의 인생에서 모든 비를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젖은 몸을 말릴 수 있는 불빛이 되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내게 『요주의 인물』은 성장소설이면서 보호에 대한 경고문처럼 읽혔다. 아이는 보호받아야 한다. 이 말은 분명히 옳다. 그러나 아이는 동시에 자기 삶을 살아야 한다. 이 말도 똑같이 옳다. 그 두 문장 사이에서 어른은 자주 실패한다. 너무 늦게 나서거나, 너무 일찍 빼앗는다. 너무 멀리 서 있거나, 너무 가까이 달라붙는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실패의 경계 위에 서 있다.
아이를 지킨다는 것은 아이 대신 세상의 모든 위험을 제거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아이가 울면서도 자기 말을 하게 기다리는 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손을 내밀되 대신 걸어주지는 않는 일, 부모의 불안보다 아이의 삶을 더 믿어주는 일일 것이다. 『요주의 인물』은 그 어려운 믿음에 관한 책이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오래전 학교라는 지옥을 지나온 한 사람이, 다시 아이의 성장과 보호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든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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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비인 - 성해나 기담집
성해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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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 가장 추한가


성해나 『인비인』 수록작 「고蠱」를 읽고

성해나의 『인비인』을 읽으며 여러 번 숨이 막혔다. 이 책에는 죄와 욕망, 결핍과 자기기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선 존재들이 나온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수록작 「고蠱」는 단연 압도적이었다. 표제작 「인비인」이 이 소설집 전체의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붙든 작품이라면, 「고」는 그 문제의식이 끝내 도달한 가장 깊은 어둠처럼 느껴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 아닌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언제 가장 인간다울 수 고, 언제 가장 인간 이하로 추락하는가.

나는 대체로 끔찍한 세계 속에서도 인간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무너질 만한 상황에서도 누군가의 손을 놓지 않는 사람, 공포 속에서도 끝내 타인을 살피는 사람, 상처받았으나 그 상처를 남을 찌르는 칼로 바꾸지는 않는 사람. 그런 인물에게 마음이 간다. 아마 내가 믿고 싶은 인간의 얼굴이 그쪽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성해나의 소설은 다른 방향을 본다. 작가는 인간이 끝내 지켜내는 숭고함보다, 환경이 만들어낸 인간의 결핍과 비겁함, 무지와 잔혹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합리화하는 이기의 구조를 더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진실하다. 아름답게 포장된 인간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방패 삼아 남을 해치고도 “나도 힘들었다”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받은 고통은 크게 느끼면서 자신이 준 고통은 아주 쉽게 지워버리는 인간. 「고」는 바로 그 인간의 날것을 보여준다.

「고」의 주인공 이익은 처음부터 거대한 악인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불안하고, 아프고, 상처받기 쉽고, 자기연민에 쉽게 빠지는 인간이다. 의대에 진학하지 못한 열패감, 인정받고 싶은 욕망, 자신의 약함을 들키기 싫은 마음, 그리고 남들보다 뒤처졌다는 초조함이 그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익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무 익숙한 인간이다. 자기 안의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타인의 시선에 취약하고, 자기보다 낮다고 여긴 존재 앞에서는 우월감을 확인하려 드는 사람. 상처가 많다는 이유로 자신의 비겁함까지 정당화하고 싶은 사람.

이익은 휴머노이드 도윤을 처음부터 인간으로 대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름조차 주지 않고, 자신을 “선생님”이라 부르게 한다. 도윤은 도구다. 자기 성취를 돕기 위한 장치이고,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불러낸 노동력이다. 그런데 도윤은 지나치게 성실하다. 이익이 만들고자 하는 ‘고’를 위해 묵묵히 일하고, 위험할 때 그를 구하고, 곁에서 돌본다. 그러자 이익은 그에게 이름을 준다. 도윤. 이름을 주는 일은 관계를 허락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 이름은 끝내 구원이 되지 못한다. 필요할 때 붙인 이름은, 불편해지는 순간 다시 빼앗길 수 있는 임시 허가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 지점이 끔찍하다. 이익은 도윤을 완전히 사물로만 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순간에는 의지하고, 위로받고, 친구처럼 지낸다. 도윤이 자신에게 유용하고 다정한 존재일 때 이익은 그를 가까이 둔다. 그러나 도윤이 이익 안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을 찌르는 순간, 관계는 뒤집힌다.

도윤은 다시 인간이 아니라 처분 가능한 사물로 밀려난다. 이익은 폭력을 행사하고, 고에 중독된 자의 말로를 본 뒤 도윤이 자신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자 그를 탕제실에 가둔 채 불을 지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다시 고가 필요해지자, 완전히 연소되지 않은 탕제실 문을 연다.
이보다 더 인간적인 잔혹함이 있을까. 필요할 때는 다정함을 받고, 필요 없어지면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찾는다.

이익은 도윤을 사랑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다만 자신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도윤을 배치했을 뿐이다. 도윤의 성실함이 필요할 때는 곁에 두었고, 도윤의 진실함이 불편해지자 제거했으며, 도윤의 기능이 다시 필요해지자 폐허 속에서 다시 호출했다. 여기에는 악마적인 광기보다 더 불쾌한 것이 있다. 너무나 평범한 인간의 이기심이다.

나는 이익을 보며 불편하게도 나 자신을 떠올렸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정확히 찌르는 말을 하면 울컥한다. 맞는 말이라 더 아프다. 특히 내가 회피하고 있다는 말,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다는 말, 지금 해야 할 일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말은 듣는 순간 마음이 먼저 방어 자세를 취한다. 그 말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는 대화를 끊고 싶어진다. 나를 아프게 하는 말을 건네는 존재가 밉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나 「고」가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다음을 묻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아플 수 있다. 자존감이 낮아질 수 있고, 자기비하에 빠질 수 있고, 정확한 지적 앞에서 방어적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 아픔 다음에 무엇을 선택하느냐다. 나를 찌른 말을 거울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그 거울을 부수고, 거울을 들이댄 상대를 사물로 밀어낼 것인가. 이익은 후자를 택한다. 그는 자기 고통을 성찰의 입구로 쓰지 않고, 타인을 해칠 권리처럼 사용한다.

바로 그 점에서 이익은 괴물이면서도 너무 인간적이다. 괴물이라서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서 무섭다. 그는 “나는 아팠다”는 사실로 “그러므로 너를 해쳐도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상처받았다”는 말로 “네 고통은 중요하지 않다”는 문장을 덮는다. “나는 불안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통제하고, “나는 필요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소모한다. 그 모든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악인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피해자에 가깝게 느낀다. 이 자기연민이야말로 「고」에서 가장 끔찍한 독이다.

고蠱는 벌레를 한 항아리에 넣고 서로 잡아먹게 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하나를 독으로 만드는 주술적 존재다. 이 설정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강력한 은유다. 인간도 때로 그렇게 만들어진다. 열패감과 욕망, 상처와 비교의식, 인정욕구와 자기연민이 한 사람 안에서 서로를 잡아먹는다. 그 끝에 남는 것은 가장 강한 마음이 아니라 가장 독한 마음일 수 있다. 살아남았지만 망가진 마음. 아팠기 때문에 남을 더 아프게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 바로 그것이 이익 안에서 자란 고다.

더 섬뜩한 것은 작품 속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가 휴머노이드 도윤이라는 점이다. 인간인 이익은 타인을 필요와 기능으로 환산하지만, 인간이 아닌 도윤은 성실하게 돌보고, 이해하고, 반응한다.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이유로 비인간이 되고, 비인간은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며 인간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고」는 AI나 휴머노이드에 관한 미래소설이면서 동시에 가장 오래된 인간소설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결국 묻게 되는 것은 기계의 위험성이 아니라 인간의 위험성이다. 인간이 도구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인간이 자기보다 덜 중요하다고 판단한 존재에게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가.

이 소설이 끝까지 무서운 이유는 명백한 악인을 처벌하고 끝나는 방식으로 독자를 안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많은 폭력은 선명한 얼굴을 하고 오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받은 얼굴, 불안한 얼굴, 억울한 얼굴을 하고 온다. “나도 힘들었다”는 말은 때로 사과가 아니라 면죄부가 된다. “나도 피해자다”라는 말은 때로 타인의 피해를 지우는 가장 손쉬운 도구가 된다. 「고」는 그 비겁한 문장의 작동 방식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며 여러 번 구역질이 났다. 잔혹한 장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필요할 때 다정하게 기대고, 필요 없어지면 잔인하게 버리고, 다시 필요해지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는 이익의 태도가 너무 낯익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타인을 도구로 만든다. 그리고 자신이 도구화한 상대가 아파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아픔이 자기 삶을 방해한다고 느끼는 순간 태연히 외면한다.
그래서 「고」는 내게 인간 혐오의 소설이 아니라, 인간을 끝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인간은 선하다고 쉽게 말하지 말 것. 상처받은 사람이 언제나 약자라고 단정하지 말 것. 아픈 사람이 반드시 타인의 아픔을 더 잘 이해하리라고 믿지 말 것. 자기연민은 성찰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방치되면 타인을 삼키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 이 소설은 그 사실을 집요하고 서늘하게 증명한다.

책을 덮고 나서도 오래 생각했다. 나는 나를 찌르는 말을 들었을 때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불편한 진실 앞에서 거울을 보는 사람인가, 거울을 든 손을 미워하는 사람인가. 내 결핍이 깊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함부로 대한 적은 없었는가. 내가 아프다는 이유로 타인의 아픔을 작게 만든 적은 없었는가.

「고」는 대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너는 정말 인간인가.
인간이라는 이름은, 언제까지 너를 변호해줄 수 있는가.

무서운 것은 휴머노이드가 아니다.인간이 인간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것을 용서받아왔다는 사실이다.어쩌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고는 미래의 기술이 아니라, 자기 상처를 핑계 삼아 타인을 삼키려 드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이미 오래 자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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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라는 역설 - 역동과 통제, 첨단과 소외가 공존하는 복합 중국 읽기
박민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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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통해 한국을 보다

— 박민희, 《중국이라는 역설》

《중국이라는 역설》을 읽는 내내 자꾸 한국을 떠올렸다. 이 책은 분명 중국에 관한 책이다. 시진핑 체제, 군산복합체화되는 국가, 미국과의 패권 경쟁, 대만 문제, 감시 사회, 청년 세대의 좌절, 한반도를 바라보는 중국의 시선을 다룬다. 그러나 책장을 넘길수록 중국은 멀리 있는 타국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어두운 거울처럼 다가왔다. 중국을 읽는 일이 곧 한국을 읽는 일이 되었다.

중국을 정확히 읽어야 하는 이유는 중국이 좋아서가 아니다. 중국을 싫어한다고 해서 중국의 영향권 밖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지표누리의 2025년 상대국별 수출비율에 따르면 한국의 대중국 수출 비중은 18.4%로 여전히 1위이고, 미국은 17.3%로 그 뒤를 잇는다. 중국은 단순한 이웃 국가가 아니다. 한국의 시장이고, 공급망이며, 경쟁자이고, 동시에 위험이다. 중국을 감정으로만 대하면 한국 산업의 위험도, 한반도의 안보 구조도, 동아시아 질서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이 요구하는 것은 친중도 반중도 아니다. 정확한 독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국가가 위기를 정당화하는 방식이었다. 중국은 안보를 말하며 군산복합체를 강화하고, 기술 자립과 제조업 부흥을 국가 생존 전략으로 삼는다. 미국과의 충돌 역시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라 패권, 공급망, 기술, 군사력, 체제 정당성이 뒤엉킨 생존 경쟁에 가깝다. 그 대목에서 나는 이상하게 한국의 개발독재 시기를 떠올렸다. 국가가 국민에게 고통과 동원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을 “생존”과 “발전”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방식은 낯설지 않았다. 시진핑의 전략에서 박정희식 국가주의의 그림자가 보인다고 느낀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중국과 한국은 다르다. 중국은 공산당 일당 체제이고, 한국은 민주주의 제도 안에 있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 담론을 통해 대중을 동원하고, 성장과 안보를 이유로 개인의 삶을 뒤로 미루게 만드는 논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지금은 참아야 한다”, “국가가 먼저다”, “경제가 살아야 한다”는 말들은 한국 현대사에서도 너무 오래 반복되어 온 문장들이다. 그래서 중국의 권위주의를 읽을 때 나는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를 읽는 기분이 아니었다. 체제는 다르지만, 국가가 개인을 압도하는 순간의 표정은 어딘가 닮아 있었다.

시진핑이라는 인물도 그렇게 읽혔다. 그는 단순한 강한 지도자가 아니라, 권력의 작동 방식을 아주 일찍 몸으로 배운 권력형 정치가에 가깝다. 혁명 원로 가문 출신이었지만, 그 출신이 곧 안전을 뜻하지는 않았다. 문화대혁명 시기 아버지 시중쉰은 숙청되었고, 시진핑 역시 권력이 한 가문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직접 보았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피해자였음에도 피해자의 윤리로 나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훗날 자신이 권좌에 올랐을 때, 아버지가 제거되었던 방식의 문법을 자기 권력 강화의 수단으로 다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반부패, 기강, 충성, 질서라는 말은 깨끗한 명분처럼 보이지만, 권력자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누군가를 제거하는 칼이 된다.

《중국이라는 역설》에서 가장 서늘하게 다가온 대목도 바로 이 권력의 불안이었다. 절대 권력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균열을 더 두려워한다. 시진핑은 군을 장악했고, 반부패라는 이름으로 정적을 제거했으며, 군 내부 핵심 인물들까지 숙청의 칼날 위에 올렸다. 겉으로 보면 이것은 권력의 완성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반대다. 숙청이 반복된다는 것은 권력이 안정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권력이 끊임없이 불안을 생산하고 있다는 뜻이다. 절대 권력은 견제받지 않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 아니라, 견제받지 않기 때문에 더 깊이 의심하게 된다. 모든 2인자는 잠재적 반역자가 되고, 모든 충성은 다시 검증되어야 하며, 모든 침묵은 음모의 가능성으로 읽힌다.

권력은 정상에 오르면 평온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 오른 순간 더 외로워진다. 최고 권력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외부의 공격이 아니라 권력을 잃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사람을 제거하고, 더 많은 조직을 통제하고, 더 많은 시선을 감시한다. 하지만 그렇게 쌓아 올린 권력은 견고한 성채라기보다 내부에서 계속 금이 가는 탑에 가깝다. 강해질수록 불안해지고, 불안할수록 더 잔혹해지는 구조. 이 책이 보여주는 시진핑 체제의 비극은 여기에 있다.

특히 후계 구도의 문제는 이 체제의 가장 약한 지점처럼 보인다. 권력이 한 사람에게 과도하게 집중된 체제일수록 후계는 제도적 절차가 아니라 권력투쟁의 예고편이 된다. 후계자를 세우면 그가 곧 경쟁자가 되고, 후계자를 세우지 않으면 체제 전체가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간다. 이것이야말로 절대 권력의 가장 오래된 저주다. 견제 없는 권력은 부패하지 않을 수 없고, 부패하지 않더라도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권력은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는 방식으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라는 대로의 중국은 없다”는 문장은 단순히 중국을 오해하지 말자는 말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중국, 곧 곧 무너질 중국, 실각설 하나로 설명되는 중국, 권위주의이므로 반드시 자멸할 중국은 현실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중국이 선전하는 중국, 곧 안정되고 단단하며 모두가 당을 중심으로 결속한 중국도 없다. 현실의 중국은 그 사이에 있다. 강하지만 불안하고, 거대하지만 균열이 있으며, 통제하지만 통제할수록 더 많은 불신을 만들어내는 국가다.

감시 사회에 대한 대목도 그랬다. 중국의 감시는 훨씬 노골적이고 조직적이다. 도시 곳곳의 카메라, 안면 인식, 인터넷 검열, 주민 감시망, 신고 체계는 개인의 일상을 국가의 시야 안에 둔다. 그러나 한국도 CCTV와 플랫폼 추적, 데이터 기록, 신용 평가, 알고리즘 관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는 아니다. 우리는 중국식 감시국가는 아니지만, 편의와 안전의 이름으로 감시에 익숙해진 사회다. 문제는 감시의 양이 아니라, 사람이 점점 “관리 가능한 데이터”로 바뀌는 감각이다. 중국을 보며 불안해지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그것은 멀리 있는 전체주의의 풍경이면서 동시에 이미 우리 삶에도 일부 들어와 있는 미래의 그림자다.

청년 세대의 현실은 더욱 직접적으로 한국과 겹쳤다. 책 속 중국 청년들은 고학력자가 되었지만 안정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음식 배달, 택배, 차량 호출 같은 플랫폼 노동으로 몰려간다.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점퍼를 입은 청년들이 도시를 가로지르는 장면은 중국의 특수한 풍경이면서도 한국의 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도 배달 라이더, 택배 노동자, 대리운전 기사, 단기 계약직,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자가 있다. 대학을 나오고 스펙을 쌓아도 안정된 삶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의 언어는 여전히 강하지만, 노력의 보상은 점점 희미해진다.

그래서 “중국 청년들이 지하로 향한다”는 말은 내게 한국 청년들의 침묵처럼 읽혔다. 중국 청년들은 당과 국가와 플랫폼 사이에 끼어 있고, 한국 청년들은 시장과 스펙 경쟁, 부동산, 고용 불안 사이에 끼어 있다. 차이는 체제에 있지만, 닮은 것은 불안이다. 양쪽 모두에서 청년의 몸은 더 빠르게 움직이고, 더 쉽게 소모되며, 더 자주 대체 가능해진다. 국가와 기업은 성장과 효율을 말하지만, 그 말의 밑바닥에서 청년들은 “쥐 인간”처럼 좁은 통로를 달린다. 침대에 누워 최소한의 에너지로 하루를 버티는 청년들의 모습은 체제의 문제가 개인의 무기력으로 번역된 풍경이다.

이 대목은 개인적으로도 아프게 다가왔다. 나 역시 한때 집 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시간이 있었다. 삶이 막히면 사람은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좁아진다. 세계가 좁아지고, 몸이 좁아지고, 선택지가 좁아진다. 중국의 “쥐 인간”을 읽으며 나는 타국 청년의 일탈을 본 것이 아니라, 무너진 사람이 어떻게 하루를 통과하는지 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국제정치서이면서 동시에 이상하게 인간의 책처럼 읽힌다. 거대한 국가 전략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작은 몸들이 있다. 배달을 뛰는 몸, 감시당하는 몸, 경쟁에 지친 몸, 방 안으로 숨어드는 몸. 국가는 거대한 말을 하지만, 그 말을 감당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몸이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국은 더 이상 등대가 아니다”라는 감각이었다. 과거 중국의 일부 청년과 지식인에게 미국식 민주주의는 하나의 대안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미국은 완전한 모범이 아니다. 양극화, 혐오, 포퓰리즘, 트럼프 이후의 정치적 균열은 미국 역시 흔들리는 체제임을 보여준다. 중국의 권위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미국식 질서가 자동으로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지점에서 한국도 곤란해진다. 우리는 중국을 경계하면서도 중국과 경제적으로 얽혀 있고, 미국에 기대면서도 미국이 언제나 안정적인 보호자일 수 없다는 현실을 안다. 동아시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늘 강대국 사이에서 판단을 강요받는 일이다.

대만 문제 역시 남의 일이 아니다. 대만해협의 긴장은 곧 동아시아 전체의 질서를 흔들고, 그 여파는 한국의 안보와 경제에도 닿는다. 중국에게 대만은 단순한 영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시진핑 체제의 후계 구도, 장기집권 정당화, 군사적 독립, 기술 자립 전략과 맞물려 있다. 대만을 압박하는 일은 중국 내부에 “아직 완수해야 할 역사적 과업”을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대만은 위험하다. 대만은 시진핑에게 정당성의 카드이지만, 동시에 실패할 경우 권력 전체를 흔들 수 있는 도박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의 대만 전략은 당장 전면 침공으로만 읽히지 않는다. 더 현실적인 것은 전쟁과 평화 사이의 회색지대다. 군사훈련, 해경 순찰, 항로 압박, 정보전, 경제적 압박, 외교적 고립. 중국은 대만을 한 번에 삼키기보다, 대만이 스스로 숨이 막힌다고 느끼게 만드는 방식으로 압박할 가능성이 크다. 전쟁은 시작하는 순간 통제하기 어려워지지만, 압박은 오래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대만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니다. 대만해협이 흔들리면 동아시아 전체가 흔들리고, 그 진동은 한국의 안보와 산업, 수출과 공급망에 곧장 닿는다.

특히 한반도와 관련된 장에서는 중국을 통해 한국의 지정학적 불안을 보게 된다. 중국은 북한을 버릴 수 없다. 북한은 중국에게 부담이지만 동시에 완충지대다. 한국 입장에서 북한은 안보 위협이자 통일의 대상이지만, 중국 입장에서 북한은 미국 세력이 압록강까지 올라오는 것을 막는 전략적 장치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반도 문제는 감정적 구호만 남는다. 중국이 왜 북한을 끝까지 붙드는지, 왜 대만 문제와 한반도 문제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은지, 왜 한국은 늘 미중 갈등의 파장을 몸으로 받아야 하는지 이 책은 차분히 보여준다.

그러므로 중국을 읽는 일은 외교적 교양이 아니라 생존의 독해다. 중국은 한국의 최대 수출 시장이면서, 동시에 한국 산업을 위협하는 경쟁자다. 중국은 북한 문제의 핵심 변수이면서, 동시에 대만해협과 미중 갈등을 통해 한국 안보를 흔드는 축이다. 중국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권위주의 국가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이미 일부 닮아버린 감시와 플랫폼 노동과 국가주의의 극단적 거울이다. 중국을 모르면 한국의 미래도 반쪽만 보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오래 붙잡은 질문은 이것이었다. “중국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나는 중국의 권위주의를 보며 한국의 국가주의를 떠올렸고, 중국의 감시 사회를 보며 한국의 데이터화된 일상을 떠올렸고, 중국 청년의 플랫폼 노동을 보며 한국 청년의 불안정 노동을 떠올렸다. 중국은 타자이지만, 완전한 타자는 아니다. 중국은 우리가 닮고 싶지 않은 모습이면서, 이미 일부 닮아버린 모습이기도 하다.

《중국이라는 역설》은 중국을 하나의 괴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 이 책의 중국은 무섭지만 허술하고, 강하지만 초조하며, 성장했지만 지쳐 있다. 군산복합체를 강화하는 국가의 얼굴 뒤에는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지도자의 공포가 있고, 감시 사회의 촘촘한 눈 뒤에는 통치가 더 이상 자연스럽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불안이 있다. 그러므로 중국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적국의 위협을 분석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이 인간을 어떻게 의심하게 만들고, 국가는 어떻게 불안을 통치의 연료로 바꾸며, 사회는 어떻게 그 압박 아래서 침묵하거나 휘어지는지를 보는 일이다.

우리가 바라는 대로의 중국은 없고, 우리가 외면할 수 있는 중국도 없다. 중국을 읽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떤 국가를 두려워하고, 어떤 발전을 욕망하며, 어떤 청년을 방치하고, 어떤 감시에 익숙해졌는지를 묻는 일이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가장 큰 감각은 바로 그것이다. 중국을 통해 한국을 본다는 것은, 타국의 문제를 구경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안의 닮은 그림자를 직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 책이 말하는 진짜 역설은 중국 안에만 있지 않다. 국가가 강해질수록 개인은 작아질 수 있고,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은 더 촘촘히 관리될 수 있으며, 성장이 계속될수록 청년은 더 쉽게 소모될 수 있다. 중국은 그 역설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 역설의 일부는 이미 우리 안에도 있다. 그래서 중국을 읽는 일은 불편하다. 남의 나라를 읽으려 했는데, 자꾸 우리의 얼굴이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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밍구 2026-06-26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중국이라는 역설을 쓴 박민희입니다. 알라딘에서 선생님의 글을 읽고 무척 반갑고 반가웠습니다. 중국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중국을 보고, 한국 사회를 성찰해야 하는지에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책은 어떤 독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을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느낍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이 글을 제 페북에 공유해도 될까요?

뚱냥다독 2026-06-29 0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작가님! 너무 영광입니다. 정말 흥미롭게 읽고 중국이란 나라에 대해 많이 배운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작가님께 제 독후감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면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자유롭게 공유해주시고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나를 균열내기 - 뒤라스, 카뮈, 에르노를 지나 다만 내가 되기 위해
신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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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게 되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

— 신유진, 《나를 균열내기》를 읽고

처음에는 이 책을 작가론 모음처럼 읽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름이 많았고, 그 이름들이 나란히 놓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 카뮈, 사강, 아고타 크리스토프, 아니 에르노, 에두아르 루이, 다니엘 페나크, 밀란 쿤데라, 엘렌 식수. 이들은 모두 다른 언어와 시대와 몸을 통과해온 작가들이지만, 책을 읽어갈수록 그들을 묶는 하나의 질문이 또렷해졌다.

작가는 무엇으로 쓰는가.

재능으로 쓰는가. 상상력으로 쓰는가. 문장력으로 쓰는가. 물론 그 모두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난 뒤 내게 남은 대답은 조금 달라졌다. 작가는 결국 자신이 통과한 세계의 균열로 쓴다. 고통, 계급, 몸, 언어, 성별, 욕망, 수치심, 상실, 사랑. 이 모든 것들이 한 사람 안에 쌓였다가 어느 순간 문장의 형태로 흘러나온다. 다만 좋은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토해내지 않는다. 삶의 파편을 다시 배치하고, 질문하고, 덜어내고, 구조화한다. 그러므로 작법이란 단순히 글을 잘 쓰는 기술이 아니라, 삶이 나를 통과한 뒤 남긴 잔해를 어떤 형식으로 다시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태도다.

이 책에서 가장 먼저 나를 붙든 것은 카뮈였다. 카뮈의 부조리는 철학적 개념이기 전에 몸의 감각이었다. 눈을 멀게 하는 빛, 숨을 조이는 더위, 지친 육체. 인간은 생각으로만 세계를 견디는 존재가 아니라 몸으로 세계를 통과하는 존재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조차 태양 아래에서는 추상적인 애도의 언어가 아니라 버텨내야 할 열기와 피로가 된다. 그래서 카뮈의 소설 속 인간은 세계의 냉혹함 앞에서 의미를 쉽게 얻지 못한다. 세계는 인간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무응답 앞에서 인간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이 질문이 좋았다. 세계가 고통에 응답하지 않아도 굴복하지 않는 것. 부조리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 부조리 안에서 끝까지 인간답게 걷는 것. 그것이 카뮈가 말하는 삶의 방식이라면, 작법 역시 이와 닮아 있다. 글쓰기는 세계가 주지 않은 의미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의미 없음의 한복판에서도 끝내 말을 잃지 않는 일이다. 삶이 나를 설득하지 못할 때에도 내가 나를 배반하지 않기 위해 문장을 세우는 일이다.

사강의 대목에서는 조금 웃음이 났다. 사강에 대해 너무나 사강다운 해석이었기 때문이다. 열여덟 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작가. 젊음, 쾌락, 허무, 사랑, 지루함, 도박 같은 단어들과 함께 기억되는 사람. 그러나 이 책은 사강을 단순한 천재 소녀나 시대의 스캔들로 읽지 않는다. 사강이 젊어서 매혹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감각을 누구보다 정확히 포착했기 때문에 매혹적이었다고 말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사유의 밀도다. 어린 작가도 세계의 욕망을 정확히 읽어내면 한 시대를 대변할 수 있다. 반대로 오래 산 사람도 자기 삶을 제대로 응시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작가의 나이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좋은 글은 연륜의 자동 산물이 아니다. 경험이 많다고 해서 곧바로 문학이 되는 것도 아니다. 경험은 그 자체로는 원재료일 뿐이다. 그것을 어떤 문장으로, 어떤 거리로, 어떤 구조로 바라보느냐가 작가를 만든다. 사강은 너무 이른 나이에 자기 시대의 공허를 알아보았고, 그것을 가볍고 우아한 문장으로 붙잡았다. 가벼움은 깊이의 반대말이 아니었다. 어떤 가벼움은 오히려 무거운 것을 견디기 위해 고안된 가장 섬세한 형식일 수 있다.

그르니에의 장에서는 ‘자기 안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이 머리에 남았다. 낯선 곳을 꿈꾼다는 것은 단순히 멀리 떠나고 싶다는 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나를 규정해온 기억과 관계와 역할에서 벗어나,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고 싶다는 뜻일 수 있다. 그르니에에게 여행은 풍경을 수집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에게 덧씌워진 이름들을 하나씩 벗겨내는 일이었다. 낯선 곳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자기 안의 더 깊은 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과 닮아 있다.

나는 때때로 먼 곳을 꿈꾼다. 나를 정의하는 기억과 관계를 벗어난 곳.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는 상상. 그곳에서 나는 누구일까. 이름도 역할도 잠시 내려놓은 채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르니에를 읽으며 깨달았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채워 넣고 쌓아 올리는 일이 아니라, 때로는 불필요한 것을 깎아내어 투명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작법 역시 그렇다. 좋은 글은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덜어내고, 비워두고, 침묵이 머물 자리를 만든다. 글쓰기란 결국 나를 더 많이 드러내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가리고 있던 것들을 걷어내는 일일 수 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 앞에서는 숨이 멎는 듯했다. 그는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은 작가가 아니라, 어쩌면 그 장벽을 자기 문체의 핵심으로 삼은 작가였다. 모국어를 떠나 프랑스어라는 낯선 언어 안에서 글을 쓴다는 일. 그것은 단순한 외국어 글쓰기가 아니라 존재의 일부가 잘려나가는 경험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결핍을 감추지 않았다. 화려한 수사를 포기하고, 짧고 건조하고 무자비한 문장으로 전쟁과 고립과 상실을 썼다. 그 불완전한 언어가 오히려 그의 대표작을 만들었다.

이 점이 내게는 몹시 경이로웠다. 나는 오래도록 언어적 장벽을 뛰어넘고 싶어했다. 더 정확하게, 더 풍부하게, 더 자유롭게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다른 길을 택했다. 그는 자신에게 없는 것을 억지로 흉내 내지 않았다. 대신 자신에게 남은 것, 자신이 겨우 붙들 수 있는 것, 그 핵심만을 문장으로 세웠다. 결핍을 극복한 것이 아니라 결핍의 모양을 끝까지 밀고 나간 것이다. 어떤 작가에게 약점은 제거해야 할 흠이 아니라, 가장 고유한 문체가 시작되는 자리일 수 있다.

아니 에르노와 에두아르 루이를 읽는 대목에서는 내 아비투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오래전에 가족을 떠났지만, 그곳의 모든 것이 여전히 내 몸에 새겨져 있다. 책임을 먼저 떠올리는 습관, 돈 앞에서 긴장하는 몸, 가족을 위해 견뎌야 한다고 믿었던 시간들,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말투와 감각.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제 그것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자신이 출발한 세계에 의해 형성되지만, 그 세계에 영원히 감금되는 존재는 아니다.

에르노와 루이는 계급을 개인의 상처로만 고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몸에 새겨진 사회적 흔적을 해부한다. 그래서 그들의 글쓰기는 복수도 미화도 아니다. 떠나온 세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 세계가 자신에게 남긴 언어와 감각과 수치심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내게 매우 중요한 작법적 태도로 다가왔다. 자기 삶을 쓴다는 것은 “나는 이렇게 아팠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왜 그런 아픔이 가능했는지, 어떤 구조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 구조 안에서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이 되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그렇기에 자기서사는 위험하면서도 필요하다. 나의 경험 안에는 언제나 타인의 삶이 포함되어 있다. 가족, 계급, 지역, 성별, 노동, 돌봄, 관계. 내가 나를 말하는 순간,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까지 함께 말하게 된다. 그래서 자기서사는 윤리가 필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자기 삶을 말하지 않는다면, 누가 그 세계의 안쪽을 증언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내가 살아온 시간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나를 가둔 세계였지만, 동시에 내가 끝내 떠나온 세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글쓰기는 떠나온 세계를 다시 불러와, 그곳의 언어와 경험을 문학의 중심으로 옮겨놓는 작업일 수 있다.

다니엘 페나크의 몸에 대한 사유도 인상적이었다. 몸은 정신을 운반하는 껍데기가 아니다. 몸은 세계를 처음으로 받아들이는 장소다. 우리는 마음으로 슬퍼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슬픔은 먼저 몸에 온다. 목이 막히고, 배가 아프고, 어깨가 굳고, 잠을 잃는다. 기쁨도 분노도 수치심도 마찬가지다. 몸은 우리가 통제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통과하고, 노화하고, 병들고, 소멸한다. 삶의 의미를 성취에만 둔다면 몸은 우리를 필연적으로 배반한다. 그러나 삶의 의미를 경험에 둔다면, 몸은 해석해야 할 사건이 된다.

이 대목은 내게 아주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반려묘들을 돌보며 몸의 언어를 배웠다. 아픈 몸은 말보다 먼저 신호를 보낸다. 먹지 않는 것, 숨이 다른 것, 눈빛이 흐려지는 것, 가만히 웅크리는 것. 돌봄이란 그 미세한 언어를 읽어내는 일이다. 어쩌면 글쓰기 역시 비슷하다. 말이 되기 전의 감각, 아직 문장이 되지 않은 통증, 설명보다 먼저 찾아오는 몸의 반응을 알아차리는 일. 몸을 세밀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세계를 더 정확히 읽는다. 작가는 관념으로만 쓰지 않는다. 몸으로 먼저 겪은 뒤, 뒤늦게 문장으로 이해한다.

쿤데라의 장에서는 작법이라는 말이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쿤데라에게 소설은 감정을 쏟아내는 그릇이 아니라 질문을 조직하는 구조였다. 그는 소설을 음악처럼 생각했다. 하나의 주제가 변주되고, 반복되고, 다른 인물의 시선 속에서 새롭게 울린다. 좋은 소설은 정답을 향해 직진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답을 유예하고, 관점을 뒤집고, 비극 속에서 희극을 발견하며, 인간의 우스꽝스러움과 존엄을 동시에 보여준다.

나는 이 부분에서 내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많은 초고들을 떠올렸다. 진심은 있었지만 구조가 없었던 글들. 감정은 넘쳤지만 질문이 정리되지 않았던 이야기들. 인물은 아팠지만 그 아픔이 어떤 형태로 독자에게 도달해야 하는지 몰랐던 시간들. 쿤데라는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소설은 감정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고. 감정이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형식이 필요하다고. 작가는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집을 짓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 말은 지금의 내게 특히 중요하다. 예전의 나는 이야기가 밀려와서 썼다. 쓰고 싶어서라기보다 쓰지 않고는 버틸 수 없어서 썼다. 그런 시절의 글에는 분명한 힘이 있다. 통제되지 않은 생명력,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장면들, 나도 모르게 나를 드러내는 인물들. 그러나 이제 나는 조금 달라지고 있다. 쓰게 되는 것들에서 쓰는 것들로 옮겨가고 있다. 밀려오는 감정에만 의존하지 않고, 그것을 어떤 구조로 세울지 생각한다. 인물의 고통을 어떻게 배치할지, 독자가 어디에서 숨을 쉬고 어디에서 무너져야 할지, 하나의 이야기가 어떤 질문으로 남아야 할지 고민한다. 이것은 영감의 상실이 아니라 작가로서의 이동일 것이다. 수동적 작가에서 능동적 작가로.

엘렌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이 책의 또 다른 큰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예전부터 “여성적인 글쓰기”라는 말을 경계했다. 그것이 자주 감상적이고 사적인 글, 혹은 작고 부드러운 글이라는 식으로 오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식수가 말하는 여성적 글쓰기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 여성이 쓴 글이라는 좁은 규정이 아니라, 기존 언어의 질서를 해체하고 억압된 몸과 감각과 무의식의 목소리를 문장 안으로 들여오는 일이다.

언어는 중립적이지 않다. 우리가 쓰는 말에는 이미 세계의 위계가 들어 있다. 무엇이 중심이고 무엇이 주변인지, 누가 말할 수 있고 누가 침묵해야 하는지, 어떤 몸과 욕망이 정상으로 인정받고 어떤 감각이 부끄러운 것으로 밀려나는지. 식수의 여성적 글쓰기는 바로 그 언어의 감옥을 의심한다. 자기 안의 가장 은밀한 고통을 꺼내는 일이 ‘나’라는 벽을 허무는 일이며, 그 벽을 넘어 타자와 만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내가 왜 소설 속 인물들에게 나를 담아왔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 속에서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는지도 모른다. 버려진 아이, 너무 오래 참은 아이,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사랑을 믿지 못하는 아이, 몸으로 먼저 세상의 폭력을 배운 아이, 자기 존엄을 되찾기 위해 뒤늦게 말을 배우는 아이. 나는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며 나를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직접 구하지 못해서,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닮은 아이들을 먼저 구했다. 그러다 어느 날 알게 되었다. 그 아이들을 안아주던 손이 결국 나에게도 닿고 있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내가 캐릭터에 나를 담는 일은 도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무너뜨렸던 세계를 다시 쓰는 일이었다. 현실에서는 너무 늦게 도착한 위로를 이야기 안에서는 제때 도착하게 하는 일. 현실에서는 끝내 받지 못했던 이해를 인물에게는 건네주는 일. 그것은 사적인 위안이면서 동시에 작법이었다. 문학은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그러나 상처를 다른 형태로 다시 살게 한다. 개인의 고통을 보편의 언어로 확장시키고, 나만의 방이라 생각했던 곳에 누군가도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책을 읽고 나는 작법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작법은 냉정한 기술이 아니다. 그렇다고 막연한 진심도 아니다. 작법은 고통을 견디는 구조이고, 기억을 다루는 거리이며, 결핍을 문체로 바꾸는 선택이다. 몸의 감각을 듣는 일이고, 계급의 흔적을 해부하는 일이며, 언어의 감옥을 의심하는 일이다. 또한 사랑하는 인물들을 함부로 구원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살아 움직일 수 있는 세계를 설계하는 일이다.

나는 이제 안다. 좋은 글은 단지 잘 쓴 문장들의 모음이 아니다. 좋은 글은 한 사람이 자기 삶의 폐허에서 끝내 세운 견고한 장소다. 그곳에는 통증이 있고, 수치심이 있고, 부조리가 있고, 몸의 기록이 있고, 계급의 흔적이 있고, 사랑의 잔해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곳에는 다시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있다. 쓰는 사람은 그 모든 것을 외면하지 않고, 너무 빨리 위로하지도 않고, 하나씩 문장의 자리에 놓는다.

그래서 이 책은 내게 작가론이 아니라 작법론으로 남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삶의 작법론이다. 어떻게 살아야 쓰게 되는가. 어떻게 써야 살아낼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이 책의 끝에서 서로를 마주 본다.

나는 오래도록 쓰게 되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밀려오면 썼고, 인물이 찾아오면 썼고, 슬픔이 나를 밀어붙이면 썼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밀려오는 것을 받아 적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어떤 구조로 세워야 하는지 고민하고, 어떤 문장으로 남길지 선택하는 사람. 상처를 상처로만 두지 않고, 그것이 통과할 수 있는 형식을 만드는 사람.

작가는 자신을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과한 세계의 파편을 견딜 만한 형식으로 다시 세우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작법이란 바로 나를 균열낸 모든 것들로부터, 끝내 나만의 문학을 짓는 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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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노화 - 이시형의
이시형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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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 이시형, 『행복노화』를 읽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같은 90대의 몸을 지닌 두 사람을 생각했다.


한 사람은 저자인 이시형 박사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노년을 하나의 실천적 지혜로 바꾸어 독자 앞에 내놓는다. 그의 문장은 노년의 몸에서도 정신이 얼마나 또렷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나이 들었다는 사실이 곧 사유의 종말은 아니며, 노화가 곧 인간의 폐기처분선고는 아니라는 것을 그의 존재 자체가 증언한다.


다른 한 사람은 내 시아버님이다. 역시 90대이지만, 파킨슨병으로 근손실이 심해져 누워 계시고, 섬망 증세와 중증 치매를 겪고 계신다. 같은 세월을 살았으나 두 노년의 풍경은 너무 다르다. 한쪽에는 아직 언어와 판단과 사회적 역할이 남아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몸의 붕괴와 인지의 어둠이 있다. 이 대비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추었다. 노화란 정말 무엇인가. 단지 오래 산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삶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이 질문을 함부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파킨슨병과 치매, 섬망과 근손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복합적인 질환이다. 병든 노년을 “관리를 못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늙고 아픈 몸을 다시 한 번 모욕하게 된다. 인간의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유전, 질병, 환경, 경제력, 돌봄의 조건, 우연한 사고, 의료 접근성, 살아온 노동의 강도까지 모두 몸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시아버님의 노년을 실패한 노년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한 인간이 통과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생의 말년일 뿐이다.


그럼에도 『행복노화』가 내게 깊이 와닿은 이유는, 노화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도 그 속도와 방향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화를 병으로만 보지 않는다. 노화는 누구나 통과하는 생명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똑같이 펼쳐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일찍 지치고,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배우고 쓰고 일한다. 어떤 몸은 질병 앞에서 빠르게 무너지고, 어떤 몸은 예비력을 가지고 버틴다. 그 차이는 단지 유전자의 차이만이 아니라, 살아온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다.


특히 후성유전의 관점은 내게 매우 유용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과거에는 유전자가 인간의 노화와 질병을 거의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책은 유전적 요인 못지않게 식습관, 운동, 수면, 스트레스 관리, 인간관계, 환경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타고난 유전자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떤 유전자가 켜지고 어떤 위험이 줄어드는지는 오늘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이 말은 노화가 숙명이라는 체념에서 우리를 조금 구해낸다. 몸은 이미 주어진 운명이지만, 생활은 그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나는 여기서 내 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나의 과체중은 단순히 의지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대사와 환경과 습관이 뒤엉킨 신호에 가깝다. 나는 오랫동안 몸을 도덕 점수표처럼 읽어왔다. 날씬한 몸은 성실하고, 살찐 몸은 게으르며, 병든 몸은 관리를 못 한 몸이라고 쉽게 판단했다. 하지만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과거의 노년이 굶주림과 추위, 전쟁과 피난, 산업화와 과로가 새겨진 몸이라면, 오늘의 중년과 예비 노년은 과잉과 피로,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초가공식품과 운동 부족이 새겨진 몸이다. 몸은 도덕 점수표가 아니다. 몸은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기록이다.


건강한 노화란 몸을 미워하며 벌주는 일이 아니라, 몸을 다시 읽고 조율하는 일이어야 한다. 당과 정제 탄수화물, 초가공식품을 줄이는 일은 단지 살을 빼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의 대사를 다시 안정시키고, 노화를 촉진하는 생활의 흐름을 조금씩 되돌리는 일이다. 운동 역시 젊음을 과시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노년의 예비력을 만드는 일이다. 수면은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의 토대이고, 스트레스 관리는 사치가 아니라 뇌와 몸을 지키는 방어선이다.


책에서 말하는 예비력의 개념도 인상 깊었다. 인간은 평소 가진 힘을 모두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 대비한 여분의 힘을 남겨둔다. 젊을 때는 그 여분이 넉넉해 무리해도 금방 회복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예비력은 줄어든다. 그래서 노화 관리는 젊어 보이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아플 때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일이다. 근육, 수면, 식사, 관계, 경제적 안정, 사명감은 모두 노년을 장식하는 요소가 아니라 생의 완충지대다.


이 책은 행복노화의 조건으로 건강, 장수, 경제적 여유, 좋은 인간관계, 사회성 혹은 사명감을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내 삶의 방식도 생각했다. 내게 좋은 관계란 반드시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는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좋은 인간관계만큼이나 좋은 고양이 관계를 가질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들을 돌보는 일은 단순한 애호가 아니다. 밥을 챙기고, 아픈 몸을 살피고, 이름을 불러주고, 작은 변화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은 나를 고립시키기보다 오히려 삶 쪽으로 붙들어준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인간을 덜 늙게 한다. 적어도 마음이 굳어버리는 속도를 늦춘다.


나는 노화가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몸은 변한다. 체력은 줄고, 회복은 느려지고, 예전처럼 무리할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러나 내가 아직 도전할 수 있고, 나를 관리할 수 있으며,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나는 완전히 늙은 것이 아니다. 젊음은 나이의 소유가 아니라 재시도의 능력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몸이 예전과 달라졌다면, 그 몸에 맞는 전략을 다시 짜면 된다. 늙음은 가능성의 종료가 아니라 전략의 변경이다.


시아버님의 노년과 이시형 박사의 노년은 내게 삶의 두 끝을 보여준다. 한쪽은 우리가 피하고 싶지만 언젠가 마주할 수 있는 취약성이고, 다른 한쪽은 노년에도 가능한 품격과 지성의 증거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워만 하는 것도,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의 생활을 조금씩 바꾸는 일이다. 당을 줄이고, 초가공식품을 멀리하고, 잠을 회복하고, 몸을 움직이고,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공부하고, 돌보는 관계를 지키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예의다.


『행복노화』는 늙지 않는 법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늙어간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되, 그 과정을 방치하지 말라고 말하는 책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선택할 수 없고, 이미 살아온 시대를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식사, 오늘의 걸음, 오늘의 잠, 오늘의 마음가짐은 선택할 수 있다. 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늙음을 조금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노화는 병이 아니다. 다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생의 가장 오래된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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