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듣기 - 귀 기울여 들음으로써 완성하는 사랑
유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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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눈으로 하는 듣기



— 유지영, 《심장 듣기》를 읽고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SNS를 열면 수많은 사람의 일상과 생각이 실시간으로 흘러들고, 우리는 ‘좋아요’를 누르고 댓글을 달며 빠르게 반응한다. 그러나 연결의 수가 늘어난 만큼 한 사람의 이야기에 깊이 머무는 시간도 늘어났을까. 화면에는 상대가 고른 문장과 사진이 남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와 대답하기 전의 머뭇거림, 애써 삼킨 말과 침묵은 쉽게 탈락한다. 상대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우리는 내가 무엇을 대답할지, 어떤 입장을 드러낼지를 준비한다. 타인의 말은 이해해야 할 하나의 세계가 아니라 내 반응을 생산하기 위한 재료가 되고, 화면은 보고 있지만 정작 사람에게는 가닿지 못한다.

그래서 유지영의 《심장 듣기》가 말하는 ‘온몸을 총동원한 듣기’는 파편화된 관계의 시대에 더욱 큰 울림을 준다. 온몸으로 듣는다는 것은 속도를 늦추고 판단과 대답을 잠시 미룬 채 한 사람의 말과 몸과 침묵 앞에 머무는 일이다. 효율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행위가 아니라 효율을 위해 잘게 쪼개진 관계를 다시 한 사람의 크기로 복원하는 행위에 가깝다. 저자가 말하는 듣기는 귀의 기능인 청음과도 구별된다. 청음이 들려오는 소리 신호를 인식하는 일이라면, 듣기는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고 자기 안에 받아들이려는 주체의 의지가 더해진 행위다. 상대의 말을 제대로 들은 나는 때로 흔들리고 일부가 찢어지며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여기서 책의 제목이 왜 ‘귀로 듣기’가 아니라 ‘심장 듣기’인지 선명해진다. 저자가 말하는 듣기는 음성을 정확히 포착하는 기술에 머물지 않는다. 상대의 눈동자가 향하는 방향과 손짓, 자세와 표정, 말과 말 사이에 놓인 침묵까지 온몸으로 감각하는 일이다. 침묵한다고 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할 것이 없어서 침묵하는지, 비밀을 지키기 위해 입을 다무는지, 마음속에서 자신의 말을 정리하느라 잠시 멈춘 것인지는 귀만으로 알 수 없다. 심장으로 듣는 사람은 입 밖으로 나온 문장뿐 아니라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마음에도 자리를 내어준다.

저자가 반려견 밤이와 비언어적 의사소통을 배워가는 대목에서 나는 함께 사는 열일곱 고양이를 떠올렸다. 내 고양이들은 아프거나 기력이 떨어지면 평소보다 더 가까이 다가와 내 몸에 붙는다. 다묘 가정에서 약해진 몸을 지키기 위해 가장 안전한 존재를 찾는 생존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그 본능이 하필 내게로 향한다는 사실에는 우리가 함께 견딘 시간도 새겨져 있다고 믿는다. 내가 아이들의 신호를 배워온 만큼 아이들 역시 내 목소리와 체온, 손길과 밤샘 곁을 안전의 언어로 기억했을 것이다. 생존본능과 사랑은 반드시 서로 반대편에 놓인 감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달땡이의 림프종과 마루와 새론이의 복막염, 라온이와 풀잎이의 허피스를 함께 통과했다. 가온이의 식도확장증과 유문부 다발성 염증을 돌보았고, 보담이의 자궁 염증 수술과 꽃길이의 발바닥 신경 접합 수술, 아름이의 피부염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의 중성화부터 임신과 출산, 양육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럽고 위태로운 순간에는 가능한 한 곁에 머물렀다. 말로 어디가 아픈지 물을 수 없었기에 나는 더 자세히 보고, 만지고, 기다려야 했다. 평소와 다른 울음 한 번, 밥그릇 앞에서의 짧은 망설임, 달라진 걸음걸이와 호흡, 몸을 웅크리는 각도는 모두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되는 말이었다. 그 작은 차이를 알아채는 일이 때로는 아이들의 생명과 이어져 있었다.

고양이는 인간의 문장으로 말하지 않지만 결코 침묵하지 않는다. 컨디션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와 울음의 길이가 달라지고, 눈빛과 꼬리의 움직임, 걸음걸이와 몸을 기대는 방식도 달라진다. 나는 귀뿐 아니라 눈과 손, 오랜 시간 축적된 기억을 동원해 그 말을 듣고 해석하는 일이 좋다. 내가 언제나 옳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의 신호를 뒤늦게 알아차리기도 하고, 걱정 때문에 작은 변화를 과도하게 해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해하려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는다.

책에는 듣기란 “매 순간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듣는 일이 한 명의 인간을 이해하는 최선의, 그리고 최소한의 행위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나는 이것이 듣기에 대한 가장 정직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에 직접 들어갈 수 없으며 같은 사건을 겪어도 서로 다른 감정과 기억을 갖는다. 아무리 오래 듣더라도 한 사람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확신에는 오만이 섞이기 쉽다. 그러므로 듣기의 성공은 상대를 남김없이 해석하는 데 있지 않다. 이해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사람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 바로 그 불완전한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 데 있다.

이 말은 비인간 존재와의 관계에서도 유효하다. 나는 고양이가 무엇을 느끼는지 완전히 알 수 없고, 아이들도 내가 흘린 눈물이나 두려움의 의미를 인간처럼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아이들이 밤새 곁을 지킨 내 마음을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듣고 기억한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그들의 언어를 다 알지 못하면서도 계속 귀 기울이는 것처럼, 아이들 역시 내 목소리와 손길에 담긴 마음을 감각했을지 모른다. 심장 듣기란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는 존재를 이해하려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이해의 불완전함은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가 만날 때 반드시 감수해야 할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장 듣기》는 듣기를 한 사람의 다정한 성품이나 사적인 관계의 기술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삼각지 역에서 장애인 이동권 시위에 참여한 저자의 경험은 듣기가 개인의 인품을 넘어 권력과 연결된 문제임을 드러낸다. “장애인도 지하철을 타게 해달라”는 외침은 분명 역사 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나 비장애인 시민과 경찰, 지하철을 운영하는 교통 체계는 그 절박한 요구를 동등한 시민의 발언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열차의 안내방송과 역장의 경고는 즉시 질서의 언어로 승인되는 반면, 장애인의 목소리는 시민의 이동을 방해하는 소음과 불편으로 처리되었다. 음성은 모두의 귀에 도달했지만 사회적으로는 말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들려오는 말을 모두 같은 무게로 듣지 않는다. 어떤 말은 정보와 명령으로 즉시 받아들이고, 어떤 말은 과장이나 투정으로 축소하며, 어떤 말은 아예 소음으로 밀어낸다. 누가 말했는지, 그가 어떤 몸을 가졌는지, 사회에서 어느 자리에 놓여 있는지에 따라 말의 신뢰도와 가치가 미리 결정되기도 한다. 듣기란 단순히 귀의 기능이 아니라 누구의 말을 ‘말’로 인정하고 누구에게 발언의 자리를 허락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력의 문제다. 듣지 않는 사회는 타인을 침묵시키기 전에 먼저 그의 말을 소음으로 명명한다. 목소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처리되는 것이다.

저자는 시위에 참여한 자신의 정의로움만을 기록하지 않는다. 지친 몸으로 현장에 도착해 경찰의 손에 밀려 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느낀 서러움,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웃던 경찰들의 표정, 자신 역시 피로와 당혹감 속에서 타인의 절박함을 얼마나 끝까지 들을 수 있었는지를 함께 돌아본다. 듣지 않는 권력은 언제나 노골적인 폭력의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못 들은 척하는 표정, 고통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웃음, 모두에게 질서를 지키라고 말하는 듯한 중립적인 안내방송 속에도 숨어 있다. 거대한 사회 구조를 비판하면서도 그 구조 안에 놓인 자기 몸의 피로와 모순까지 감추지 않는 정직함이 이 장면을 구호 이상의 글로 만든다. 타인의 말을 듣는 일은 나를 언제나 옳은 편에 세워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외면해온 것과 내 안의 모순을 함께 마주하게 한다.

“장애인도 시민”이라는 외침과 장애인의 시위를 “역사 안에서 소란을 피우는 행위”라고 규정하는 말 사이에는 깊은 간극이 있다. 첫 번째 말은 장애인을 이동권을 가진 동등한 시민으로 호명하지만, 두 번째 말은 그들을 정상적인 일상을 방해하는 존재로 밀어낸다. 같은 행동도 누가 이름 붙이느냐에 따라 정당한 권리 요구가 ‘소란’이 되고, 절박한 호소가 ‘불편’과 ‘민폐’로 바뀐다. 시민의 권리는 조용히 부탁할 때만 허락되는 호의가 아니다. 지켜지지 않는 권리를 들리게 하기 위해 소란을 피워야만 하는 사람에게 왜 조용하지 못하냐고 묻는 것은 이미 안정된 질서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의 언어일 수 있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목소리의 크기를 탓하기 전에 그 말이 왜 그렇게 커질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여기서 《심장 듣기》는 좋은 경청법을 알려주는 에세이를 넘어 듣기의 윤리와 정치학을 다루는 인문서가 된다. 개인의 태도에서 출발하되 그것을 개인의 친절이나 인품 문제로 끝내지 않고, 누가 말할 자리를 얻으며 누구의 목소리가 삭제되는지를 사회 구조까지 밀고 나간다. 제대로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귀를 열어두는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말로 인정받지 못했던 목소리가 왜 들리지 않았는지, 그 침묵을 만들어낸 질서 속에서 나는 어디에 서 있었는지를 묻는 일이다. 타인의 말을 들으려면 때로는 내가 편안하게 누려온 자리를 비워야 한다. 나로 가득 찬 상태에서는 타자의 삶이 들어올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심장 듣기》를 읽으며 나는 듣기가 내가 오랫동안 해온 책 읽기와도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책이라는 도구를 통해 유지영이라는 한 사람의 말을 듣고 있다. 저자는 내 앞에 앉아 있지 않고 그의 눈빛이나 손짓도 볼 수 없지만, 문장은 시간과 거리를 건너 그의 목소리를 내게 데려온다. 나는 한 문장에 밑줄을 긋고, 이해하지 못한 페이지로 되돌아가며, 불편한 주장 앞에서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오래 머문다. 그것은 귀 대신 눈과 손과 기억을 사용하는 느린 청취다. 독서는 어쩌면 눈으로 수행하는 듣기인지도 모른다.

물론 책을 읽는다고 언제나 저자의 말을 듣는 것은 아니다. 줄거리와 핵심만 빠르게 수집하고, 이미 가진 생각을 확인해주는 문장만 골라 읽는다면 독서 역시 청음에 머물 수 있다. 책을 몇 권 읽었는지 기록하고 결론만 소비하는 동안에는 눈으로 글자를 좇아도 그 안에 담긴 타인의 세계와 만나지 못한다. 독서가 듣기가 되기 위해서는 문장 앞에서 판단을 잠시 미루고, 나와 다른 삶이 내 안에 머무르도록 허락해야 한다. 저자의 뜻을 정답처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이 내 삶과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질문까지 받아들여야 한다. 듣기와 읽기는 모두 타인의 말을 내 안에 들임으로써 변화될 가능성을 감수하는 일이다.

책을 듣는다는 것은 저자의 말에 모두 동의하거나 비판을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다만 책이 자기 이야기를 충분히 펼치기도 전에 내가 가진 취향과 경험으로 결론을 내려버리지 않는 것이다. 나는 책을 펼칠 때 가능한 한 기존의 판단을 잠시 내려놓으려 한다. 낯선 작가의 글과 익숙하지 않은 장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소재의 책도 우선 그 세계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들어본다. 사실과 주장에는 검증과 비판이 필요하지만, 한 사람이 어떤 삶을 통과했고 그 경험에 어떤 이름을 붙였는지는 먼저 그의 언어로 들을 필요가 있다. 동의하지 않는 것과 듣지 않는 것은 다르다.

편견 없이 읽는다는 것은 비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비판보다 이해를 먼저 놓는 일이다. 익숙한 장르의 문법이나 유명 작가의 성취를 낯선 책의 기준으로 앞세우지 않고, 그 책이 무엇을 하려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다. 책이 자기 언어와 질서로 충분히 말할 시간을 허락하면 나는 취향의 경계를 넘어 낯선 세계의 재미를 발견한다. 평소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장르에서 뜻밖의 질문을 만나고,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소재를 통해 내가 알던 세계가 전부가 아니었음을 배운다. 많이 읽는 일의 가치는 이미 좋아하는 것을 되풀이하는 데만 있지 않다. 내 바깥에서 도착한 목소리를 성급히 돌려보내지 않는 데에도 독서의 기쁨이 있다.


좋은 독서는 이미 잘 들리는 목소리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내 경험과 사회적 위치 때문에 그동안 듣지 못했던 존재의 말을 읽어내고, 누군가의 삶을 소음이나 통계로 처리해온 내 인식의 한계를 발견하게 한다. 책은 전쟁과 가난, 질병과 장애, 차별과 상실을 통과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붙인 이름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들의 말을 읽으며 나는 세계가 내 경험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배웠다. 독서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게 해준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섣불리 단정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법을 조금씩 가르쳐주었다.

저자는 경청이 단순히 듣기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과거의 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도록 변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말을 제대로 들으면 내 삶이 흔들리고 일부는 찢어지며, 나는 어제와 다른 형태가 된다. 그래서 저자가 경청을 마친 뒤 던지는 질문은 “잘 들었나요?”가 아니라 “무엇이 변했나요?”이다. 이 질문은 독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책을 얼마나 정확히 요약하고 많은 문장을 기억하는가보다, 그 책을 읽은 뒤 내가 무엇을 이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책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은 채 이전의 나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목소리를 받아들인 탓에 더는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일이다.

한 문장이 오래 지켜온 확신에 균열을 내고, 낯선 삶을 내 안에 머물게 하며, 그동안 소음으로 여겼던 목소리를 비로소 말로 알아듣게 할 때 독서는 눈으로 하는 경청이 된다. 한 권을 다 읽고도 아무 생각이 흔들리지 않고 이미 믿던 것만 더 단단해졌다면, 그것은 독서라기보다 자기 확신을 확인한 일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반대로 한 문장 때문에 익숙한 판단을 의심하고, 쉽게 미워하거나 외면했던 존재에게 다시 질문하게 되었다면 그 책의 목소리는 이미 내 안에 들어온 것이다. 독서를 마친 뒤 내가 물어야 할 것은 무엇을 알게 되었는가만이 아니다. 무엇을 예전처럼 생각할 수 없게 되었는지, 누구의 말을 새롭게 듣게 되었는지, 그래서 내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변화는 제대로 읽고 들었다는 가장 깊은 흔적이다.

나 역시 《심장 듣기》를 읽기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다. 처음에는 듣기에 관한 책을 펼쳤지만, 밤이의 이야기를 통해 열일곱 고양이와 맺어온 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삼각지역의 장면에서는 듣기가 개인적인 다정함만이 아니라 시민권과 권력의 문제임을 발견했다. 저자가 경청의 본질을 변화에서 찾는 대목에서는 내가 오랫동안 해온 독서의 의미를 새로 정의하게 되었다. 이 책은 내게 새로운 독서 습관을 가르쳤다기보다, 내가 왜 낯선 작가와 장르와 소재를 편견 없이 만나려 했는지를 설명할 언어를 건넸다. 나는 이 책을 요약한 것이 아니라 이 책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목소리 때문에 내 독서를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나는 살아남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책이 내 삶의 문제에 분명한 답을 내려주기를 바랐고, 무너진 일상을 다시 세우는 방법을 얻고 싶었다. 그렇게 자기계발서에서 시작한 독서는 문학과 과학, 철학과 사회, 역사로 점차 반경을 넓혀갔다. 많은 책을 읽었다고 해서 세상의 답을 모두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저자의 말을 오래 듣는 동안 사람과 삶을 쉽게 단정할 수 없게 되었다. 독서가 내게 돌려준 것은 확신의 양보다 질문을 품고 머무를 수 있는 힘이었다.

책 속의 문장은 내가 살아보지 못한 삶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동시에 미처 설명하지 못했던 내 고통과 욕망에도 언어를 건넸다. 타인의 말을 듣는 일이 나를 지우는 과정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타인의 언어를 통과하면서 나는 내 안에 있던 목소리를 발견했다. 책이 나를 살린 것은 삶의 정답을 대신 내려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삶 쪽에서 건너오는 수많은 목소리를 계속 들을 수 있도록 붙잡아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말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가 혼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감정의 이름과 삶의 방향을 보여주었다. 나는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비로소 나 자신의 목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비인간의 몸짓을 인간의 말로 완벽하게 번역할 수 없듯, 한 권의 책을 읽는다고 저자의 내면을 남김없이 이해할 수도 없다. 사람을 마주하고 그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전부 살아볼 수 없기에 언제나 어느 정도는 오해하고 실패한다. 그러나 이해의 불가능성이 듣기의 무용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매 순간 이해에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다시 눈을 맞추고 몸을 기울이는 것이 한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최선이자 최소한의 행위다. 듣기의 윤리는 완벽한 이해가 아니라 실패 이후에도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지속적인 노력 속에 있다.

저자는 “댓글과 좋아요, 구독자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었지만 타인의 고통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는 단 한 명의 진지한 청자는 찾아보기 어렵다”고 말한다. 수많은 사람에게 노출되는 것과 한 사람에게 온전히 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단 한 사람이 있다는 믿음이 삶을 놓지 않게 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 듣기는 거창한 해답을 내놓거나 상대의 고통을 대신 해결하는 일이 아니다. 때로는 눈길을 피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곁에 머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소한의 일이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동안 우리는 그가 이 세계에 존재할 자리를 함께 지켜준다.

나는 지금 책이라는 도구로 유지영의 말을 듣고 있다. 그의 문장에 밑줄을 긋고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내가 무엇을 어떻게 들어왔고 또 어떤 목소리를 듣지 않았는지를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그동안 책에서 구했던 것은 정답이 아니라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살아보지 못한 삶의 이야기, 혼자서는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정, 사회가 소음으로 밀어냈던 존재의 외침, 절망 속에서도 삶을 놓지 말라고 건너온 수많은 목소리. 그것들을 오래 들은 끝에 나는 타인뿐 아니라 나 자신에게도 조금 더 잘 듣는 사람이 되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이 듣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제대로 듣는 순간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타인의 말이 나를 흔들고 일부를 바꾸도록 허락하는 것이 듣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심장 듣기》는 더 잘 말하고 더 많이 드러내야 살아남을 것 같은 시대에 말하는 몸에서 듣는 몸으로 옮겨갈 용기를 건넨다. 이제 내게 남은 질문은 얼마나 많은 목소리를 들을 것인가가 아니다. 나는 누구의 말을 말로 인정해왔으며, 한 존재의 목소리 앞에 얼마나 오래, 얼마나 온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가이다. 귀로 들을 수 없는 말과 사회가 소음으로 밀어낸 외침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눈과 손과 기억을 열고 심장으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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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들판 - 침묵은 어떻게 역사를 드러내는가
마거릿 주혜 리 지음, 장상미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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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진 이름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비밀의 들판》을 읽고


어떤 역사는 기록되지 않아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너무 아픈 기억이라 말할 수 없어서 사라진다.


마거릿 주혜 리의 《비밀의 들판》은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한 명의 위대한 인물을 발굴하는 역사책이 아니다. 저자가 찾아가는 것은 한 사람의 업적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라진 뒤 남겨진 가족의 시간이다.


1970년대 미국 텍사스에서 자란 저자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싶었지만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은 침묵이었다. 가족에게 할아버지는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말할 수 없는 존재였다.


누군가에게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숨겨야 하는 상처가 될 수 있다. 같은 사건도 그것을 경험한 사람의 위치에 따라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 전체를 관통한다.


저자가 오랜 추적 끝에 발견한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공주 지역에서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었고, 긴 시간이 흐른 뒤 독립유공자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비밀의 들판》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히 “왜 이제야 그 이름이 돌아왔는가”에 머물지 않는다.


왜 한 사람의 삶은 오랫동안 기록되지 못했는가.

왜 그 가족은 자신의 과거를 말하지 못했는가.

그리고 침묵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시간을 견뎌야 했는가.


역사는 언제나 기록하는 사람의 선택으로 남는다. 무엇이 기록되었는지만큼 중요한 것은 무엇이 기록되지 못했는지다.


한 독립운동가의 삶이 오랫동안 드러나지 못한 것은 단순한 행정적 누락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식민지와 전쟁, 분단과 이념 갈등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한 가족은 자신의 과거를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가장 마음이 아팠던 것은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힌 사실 자체보다, 그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이었다. 고문과 수감은 한 사람의 몸을 파괴한다. 그러나 침묵된 역사는 남겨진 가족의 삶에도 오래 흔적을 남긴다.


어린 시절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부모의 행동과 선택이 시간이 흐른 뒤에야 시대의 맥락 속에서 다시 보이는 순간이 있다.


책 속 저자의 부친 역시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의 기록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의 기억이 아니라 설명되지 않은 수치와 침묵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했는지 알지 못한 채 자란 아이에게 역사는 자부심이 아니라 혼란과 상처로 남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깊이 와닿았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 역시 가족의 역사를 떠올렸다.


나의 증조부는 구한말 고종의 근위대장이었다고 가족에게 전해 들었고, 한일병합 직후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들었다. 그분이 어떤 마음으로 마지막 선택에 이르렀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시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자신이 믿어온 세계가 흔들리는 순간을 경험한 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사의 상처는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이후 가족이 겪은 몰락 속에서 친할머니는 더 많은 배움과 가능성을 펼칠 기회를 잃었고, 현실 속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다. 숙명여고까지 다녔던 분이 생계를 위해 꿈을 접어야 했고, 영특하고 공부를 잘했던 아버지도 가난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온전히 펼치기 어려웠다.


어릴 때의 나는 그런 할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를 나와 어머니를 미워했던 사람으로 기억했고, 그 감정은 오래 남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다른 질문을 하게 되었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사람이 잃어버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은 누군가의 잘못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


상처받은 사람이 반드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시대의 피해자가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행동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함께 바라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이 책이 인상 깊었던 이유는 이철하를 완벽한 영웅으로만 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어서 시대에 맞선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라는 거대한 현실 속에서 무엇이 옳은지 고민했고, 두려움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선택했던 사람이었다.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특별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 역시 불안하고 흔들리는 한 인간이다. 다만 자신의 두려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있었기에, 어려운 선택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삶에서 더욱 오래 마음에 남은 부분은 가족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시대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가능성 역시 존중했다. 당시 여성의 교육 기회가 제한적이었던 시대에 아내의 배움과 성장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기록은 의미 있게 다가왔다.

사회적 정의를 말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신의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바깥세상의 변화를 이야기하면서도 가족 안에서는 익숙한 질서를 반복한다.


그런 점에서 이철하 지사가 가족이라는 작은 세계 안에서도 한 인간의 성장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사실은, 그가 왜 시대의 부당함에 저항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이 가진 가치관은 거대한 역사적 선택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을 어떤 존재로 바라보는지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깊게 다가왔다.


그러나 《비밀의 들판》이 끝내 보여주는 것은 한 독립운동가의 위대한 삶만이 아니다. 역사의 격랑은 영웅 한 사람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 곁에 있던 가족들, 이름 없이 기다린 사람들, 자신의 꿈보다 생존을 먼저 선택해야 했던 사람들이 함께 통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철하 지사의 삶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저자가 마주한 것은 할아버지의 용기만이 아니었다. 그 곁에서 긴 시간을 견뎌낸 할머니의 삶이었다. 남편을 잃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뒤로 미뤄야 했던 사람이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이름 뒤에만 머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가 무너뜨린 자리에서 가족을 다시 일으켜 세운 또 하나의 주체로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독립운동가의 아내라는 이름으로만 살아간 것이 아니었다. 남편이 남긴 흔적과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두 아들을 키워냈고, 손주들을 돌보았으며, 흩어질 수 있었던 가족을 붙잡았다.


저자가 “할머니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었다”고 표현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완전히 극복해서 위대한 사람이 된 것이 아니다. 상처를 품은 채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삶을 지켜낸 사람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이름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하지만 한 시대를 버티게 만든 힘은 기록에 남은 몇 명의 영웅만이 아니다. 그들의 곁에서 무너진 삶을 다시 세운 사람들이 있었다.

이름을 남기지 못했지만 누군가를 먹이고, 기다리고, 돌보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버틴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할머니를 단순히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그녀 역시 한 시대의 폭력과 상실을 통과한 사람이었다. 꿈을 잃은 사람이었고, 자신의 가능성을 접어야 했던 사람이었으며, 동시에 끝까지 가족을 지켜낸 사람이었다.


나의 할머니처럼 저자의 할머니가 남긴 것은 완벽한 사랑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이 견뎌낸 생존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그녀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버텨낸 사람이었다. 물론 고통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권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시대의 피해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해한다는 것은 용서하거나 미화하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행동만 바라보는 대신, 그 사람이 어떤 시간을 지나왔는지 함께 바라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비밀의 들판》은 기억에 대한 책이었다. 사라진 기록을 찾아내는 일, 침묵 속에 묻힌 사람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상처를 물려받고, 또 어떻게 다르게 이어갈 것인지 묻는 과정이다.


우리는 이전 세대가 남긴 선택과 결과 위에 서 있다. 그들의 용기뿐 아니라 두려움도, 희생뿐 아니라 상처도 때로는 다음 세대에게 이어진다. 그러나 과거가 우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반복하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는 일이다.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의 시간을 이해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 타인의 시간이 나의 가족과 나 자신의 시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할 때, 책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자신을 이해하는 거울이 된다.


시대의 광풍 속에서도 끝내 남는 것은 거대한 이름만이 아니다.


싸운 사람, 기다린 사람, 살아남은 사람이 함께 역사를 만든다.


우리가 기록하는 이유는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다. 누군가의 희생과 누군가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같은 상처가 다음 세대에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역사는 영웅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싸웠고, 누군가는 기다렸으며, 누군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모든 시간이 이어져 지금의 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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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
노은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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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불안의 시대, 나를 이해하는 언어를 찾는 법



1. 연결은 많아졌지만 마음을 이해받는 경험은 줄어든 시대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이 연결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세계 곳곳의 정보와 사람에게 닿을 수 있고, SNS를 통해 타인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바라본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속도로 관계가 확장되었고, 우리는 언제든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연결의 증가는 마음의 고립을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현대인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 “나는 왜 인정받고 싶을까”, “나는 왜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도망치고 싶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인간은 본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배운다. 어린 시절 부모의 표정과 반응을 통해 내가 사랑받는 존재인지 확인하고, 친구와 학교생활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타인의 반응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관계 구조는 크게 변했다.


가족과 지역 공동체는 이전보다 약화되었고, 직장은 더 이상 평생 소속감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온라인 관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 관계가 반드시 깊은 정서적 지지와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해석해 줄 관계는 부족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신의 마음을 설명해 줄 새로운 언어를 찾기 시작했다.

MBTI, 심리 테스트, 사주와 타로, 각종 성향 분석 서비스가 인기를 얻는 현상은 단순한 유행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것은 복잡하고 모호한 내면을 이해하고 싶다는 인간의 오래된 욕구가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왜 같은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받을까.

왜 원하는 관계를 선택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할까.


현대인은 자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한다.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질문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노은정 작가는 정신분석과 심리학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지만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의 패턴을 들여다본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해지는 마음.

도움을 받고 싶으면서도 의존하는 자신을 불편해하는 태도.

사랑받고 싶지만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는 관계 방식.


책은 이러한 감정을 단순히 성격의 문제나 의지 부족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과거의 경험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적응 방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빠르게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니다.

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AI 시대, 마음의 해석을 외부에 맡길 때 생기는 것

최근 많은 사람이 AI에게 자신의 감정과 고민을 묻는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일까.”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이 현상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이해해 줄 거울을 필요로 했다.


정신분석가 하인츠 코헛이 말한 자기대상(selfobject)의 개념처럼 인간은 타인의 공감과 인정 속에서 안정적인 자기감을 형성한다. 누군가가 나의 감정을 알아보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해주는 경험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중요한 힘이 된다.


AI 역시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역할의 일부를 수행할 수 있다.

판단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언어를 제공하며, 감정의 구조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AI는 하나의 안전한 대화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위험도 존재한다.

AI가 제공하는 설명을 하나의 확정된 정답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자기 이해는 오히려 자기 제한으로 변할 수 있다.


“나는 불안형 인간이다.”

“나는 회피형이라서 관계가 어렵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이런 문장은 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나를 고정된 틀 안에 가둘 수도 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목적은 나를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하고, 앞으로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불안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다.

이해해야 할 신호다.



2. 복잡한 이론보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심리학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려운 정신분석 이론을 지식으로 전달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지만 쉽게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인정이 끊임없이 필요한 사람.

혼자 해결하려 애쓰다가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

버림받을까 두려워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


책 속 사례들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경험과 겹쳐진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진단을 받는 느낌보다,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심리학 책은 때때로 전문 용어가 많아 독자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공부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는 사례 중심의 구성으로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렵고,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진입장벽이 낮은 책이다.


한 사례를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때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책은 대신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대신 내가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질문을 건넨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야말로 진짜 자기 이해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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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의 가성비 - 대한민국, 누가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
정욱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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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의 가성비》를 읽고


자주국방과 전시작전통제권, 한 국가가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


하나의 단어는 언제나 하나의 의미만 갖지 않는다. ‘자주국방’이라는 말 역시 누군가에게는 국가 주권과 독립성을 상징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동맹 약화와 안보 불안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주국방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 국가가 자신의 안전을 어떤 방식으로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자주국방의 가성비》를 읽으며 가장 오래 머문 지점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문제였다. 이전까지 나는 전작권 논쟁을 주로 “한미동맹 강화인가, 자주국방인가”라는 정치적 구도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책은 이 문제가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작권은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군사 작전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권한이다. 한국의 현재 작전권 구조는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역사에서 출발했다. 전쟁 초기 한국군은 북한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유엔군 지휘 체계 아래 들어갔고, 이후 한미동맹이 형성되면서 한미연합사 중심의 독특한 지휘 구조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국가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후 세계적인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했고,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등장한다.


강대국의 보호가 필요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안보 구조를, 성장한 한국이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


전작권 문제는 단순히 “미국이 한국군을 지휘하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다. 평시와 전시의 지휘 체계가 다르고, 한미연합사와 유엔사 등 여러 조직이 연결되어 있는 복잡한 구조 속에서 유사시 누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는 빠르고 일관된 지휘 체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 사령부와 다국적 전력이 어떻게 조율되는지는 중요한 안보 과제가 된다.


전작권 전환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주권국가라면 자국 군대의 작전 판단 권한을 스스로 가져야 하며, 동맹 역시 일방적 의존이 아니라 책임 있는 파트너십 위에서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신중론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한반도의 특수한 안보 환경을 고려할 때, 미국의 전략 자산과 한미 연합 지휘 체계가 현실적인 억제력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두 입장 모두 안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차이는 무엇을 더 큰 위험으로 보는가에 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국가의 위험을 우려하고, 또 다른 사람은 충분한 준비 없이 지휘 권한만 바꾸는 위험을 우려한다.


결국 전작권 문제는 “미국인가 한국인가”의 선택이 아니다. 동맹과 자주성, 억제력과 책임 있는 판단 능력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의 군사적 판단이 주변 국가의 운명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보며 이 질문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안보와 미래에 대해 얼마나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는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니라 국가 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자주국방’이라는 익숙한 단어 뒤에 숨겨진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주국방은 단순히 무기를 많이 확보하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력, 기술력, 산업 기반, 외교 전략, 동맹 관리 능력이 함께 갖추어져야 가능한 개념이다.


결국 국가의 힘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가에서 드러난다.


전작권 논쟁은 우리에게 묻는다.


한 국가는 언제까지 보호받는 존재로 남아야 하는가.

그리고 언제부터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좋은 사회과학 책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던 단어 속에 담긴 역사와 이해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자주국방의 가성비》는 ‘자주’와 ‘동맹’이라는 두 단어를 대립시키는 대신, 변화한 한국이 어떤 국가로 성장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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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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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일을 처음으로 노동이라 부르게 된 날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를 읽고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고양이 화장실 모래가 할인 중인지 확인하고 종류별로 세 상자를 주문했다. 키친타월과 휴지의 남은 수량을 세어 필요한 만큼 구매했고, 독서모임 책을 주문했다. 종량제 봉투를 사러 갈 시간을 계산하고, 아름이와 약속한 저녁 산책과 길고양이 밥 주기를 머릿속 일정표에 넣었다. 파일집 정리, 화장실 청소, 걸레질, 구토 치우기, 쓰레기 배출, 택배 상자 정리, 고양이 화장실 모래 전체 갈이, 오줌 묻은 이불 빨래, 설거지, 열 마리의 심장사상충 접종 일정, 서평단 마감까지 확인했다. 그 와중에 나는 모의고사 오답을 풀고 있었다.
언뜻 세어보아도 서른 개가 넘는 일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이것을 가사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 때만 집안일을 한다고 여겼다. 무엇이 부족한지 알아차리고, 언제 사야 하는지 판단하고, 여러 선택지를 비교하고, 일정을 조정하고, 다른 존재의 필요를 예측하는 일은 그저 내가 원래 잘하는 일, 혹은 내가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바로 그 믿음에 이름을 붙였다. 내가 그동안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수많은 생각과 판단이 모두 ‘인지노동’이었다.
미국 사회학자 앨리슨 데이밍거는 이성애·퀴어 커플 172명을 심층 인터뷰해 가정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추적한다. 저자가 말하는 인지노동은 단순히 할 일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예상하고, 가능한 선택지를 조사하고, 그중 하나를 결정한 뒤, 일이 제대로 끝났는지 다시 확인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아이의 병원 예약을 잡는 행위만 놓고 보아도, 이상 증상을 알아차리고 병원을 비교하고 가능한 시간을 조율하고 진료 이후의 약 복용과 다음 예약까지 관리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한 번의 행동 뒤에는 여러 갈래의 판단과 책임이 겹쳐 있다.
이 정의를 읽는 순간 내 머릿속이 해체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일정만 관리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시험 일정과 보충 계획, 과제와 성적을 챙기고, 여러 마리 고양이의 식사와 약, 병원과 접종 일정을 기억한다. 그 모든 일정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수업이 바뀌면 병원 시간이 밀리고, 한 아이의 상태가 나빠지면 공부 계획과 집안일이 함께 재조정된다. 실제 노동은 손을 움직이는 시간보다, 계속 충돌하는 변수들을 머릿속에서 맞물리게 하는 과정에 더 가까웠다. 나는 언제나 피곤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이 책은 그 피로가 의지 부족이나 체력 저하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료 지점 없는 관리 시스템을 계속 가동한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인지노동을 ‘예상하기, 선택지 확인하기, 결정하기, 결과 지켜보기’의 네 단계로 나눈다. 이 구분은 너무 정확해서 조금 잔인하다. 고양이 모래를 주문하는 일만 해도 남은 양과 교체 시기를 예상하고, 가격과 품질을 비교하며, 구매 수량과 배송일을 결정하고, 실제로 도착했는지 확인한 뒤 보관과 폐기까지 처리해야 한다. 개별 행동은 짧아 보이지만 결정의 사슬은 길다. 더구나 이 일들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휴지가 도착하면 다음에는 사료가 떨어지고, 예방접종이 끝나면 다음 병원 일정이 생긴다. 집과 돌봄은 완결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계속 갱신되는 시스템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
역할은 성격을 반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처럼 보이는 능력과 습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원래 계획적이고, 꼼꼼하며, 주변 사람의 필요를 잘 알아차린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즉흥적이고 세부적인 일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차이가 반드시 타고난 성격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한 사람이 계속 가족의 일정과 필요를 책임지면 그는 더 빨리 위험을 감지하고, 더 많은 가능성을 예측하며, 더 촘촘하게 계획하는 능력을 익히게 된다. 반대로 그러한 역할에서 비켜나 있던 사람은 그 기술을 연습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역할이 반복되면 능력이 되고, 능력은 다시 성격처럼 보인다.
이 대목은 성별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여성은 원래 더 세심하고 남성은 원래 큰일에 집중한다는 식의 설명은, 이미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배분된 경험을 타고난 본성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다. 누가 더 많이 계획하고 기억해왔는지, 누가 실패의 결과를 더 직접적으로 감당해왔는지를 보지 않은 채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면 현재의 역할 분담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으며 모든 문제를 성별 하나로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저자가 만난 커플들 가운데에는 여성이 인지노동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남성이 더 많은 인지노동을 담당하거나 두 사람이 비교적 균형 있게 나누는 사례도 있었다. 퀴어 커플 역시 자동으로 평등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명칭만이 아니라, 한 관계 안에서 누가 가족 운영의 중심축이 되고 누가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가였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인지노동을 주도권의 문제로 확장한다. 가정의 필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정보를 모으고, 일정과 기준을 세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결정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주도권은 곧 부담이기도 하다. 계획하는 사람은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더 큰 불안과 짜증을 느낀다. 그 사람이 통제적인 성격이라서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것인지, 오랫동안 관리 책임을 맡은 결과 통제적인 습관을 갖게 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통제광처럼 보이고, 통제하려 할수록 다른 사람은 더욱 수동적으로 물러서는 악순환도 가능하다.
나 역시 여러 일정과 돌봄을 총괄하면서 내가 정한 방식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믿는 순간이 많았다. 내가 전체 구조를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일부만 보고 내린 판단은 불완전해 보였다. 그러나 모든 정보를 나만 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판단할 기회도 줄어든다. 내가 과도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책임 때문에 주도권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이 책은 인지노동의 부담을 가시화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책임과 권한이 어떻게 함께 축적되는지까지 보여준다.
책의 상당 부분은 인지노동이 여성에게 더 많이 배분되는 현실을 분석한다. 그러나 나는 일부 대목에서 저자의 해석이 다소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남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말해주어야 움직인다는 사실을 곧바로 책임 회피 전략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우리 남편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정확히 움직이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것을 무능력이나 악의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 사람마다 정보를 인식하고 행동을 시작하는 방식은 다르며, 관계에는 건강, 직업, 경험, 기질, 돌봄 능력처럼 성별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변수도 존재한다.
특히 책이 개인의 성향을 문화적 각본의 결과로 강하게 해석할 때에는, 사회구성론적 분석이 개인의 고유성을 다시 지워버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별 규범이 사람의 선택과 능력을 형성한다는 통찰은 유효하다. 그러나 모든 차이를 사회구조의 산물로만 읽으면, 한 사람의 기질과 선호, 실제로 주고받은 돌봄의 역사까지 설명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구조를 발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구조라는 하나의 언어로 모든 관계를 판결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 결론부에서 저자 역시 이러한 위험을 보완한다. 인지노동 불평등을 인식했다고 해서 곧바로 분노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커플이 불평등을 인정하면서도 쉽게 역할을 바꾸지 못하는 까닭은, 그 역할이 이미 자신의 성격과 관계의 정체성처럼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계획과 돌봄을 내려놓는 일은 단순히 할 일을 덜어내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정하는 문제다. 반대로 지금껏 인지노동을 덜 맡아온 사람이 그 책임을 넘겨받는 일 역시 새로운 기술과 자신감을 익혀야 하는 변화다.
따라서 저자의 결론은 개인을 악당으로 만들기보다, 개인과 관계가 놓인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는 쪽으로 향한다. 인지노동의 문제를 당사자 커플만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되며, 학교·직장·병원·공공기관도 가족에게 떠넘기는 예측과 조정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을 줄이고, 필요한 정보를 명확히 제공하며, 돌봄 친화적인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가정 내부의 인지노동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킨다. 개인에게 더 잘 계획하고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애초에 누군가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조율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이 다루는 핵심은 단순한 가사 분담이 아니다. 무엇을 노동으로 인식할 것인지, 그 노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 그리고 책임과 정보를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의 문제다. 두 사람이 각각 절반씩 일을 맡았다는 숫자만으로는 평등을 판단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전체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이 지시받은 일부 행동만 수행한다면, 육체적 노동은 나누었어도 인지적 부담은 여전히 한쪽에 남아 있다. 반대로 정확히 50 대 50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이 현재의 역할을 함께 선택했다고 느끼고, 서로의 부담과 기여를 충분히 알고 있다면 관계의 만족도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공정함은 동일한 양의 일을 나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 상대가 알고, 상대의 일이 내 삶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이해하며, 상황이 달라질 때 역할을 다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인지노동은 생각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쉽게 과소평가되고, 과소평가되기에 한 사람의 성격이나 사랑으로 흡수된다. “당신은 원래 꼼꼼하잖아”, “당신이 더 잘하잖아”라는 칭찬은 때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영구 배정하는 문장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하는 수많은 판단을 노동으로 세지 않았다. 그저 내가 책임감이 강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누군가가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도록 필요한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사고가 나지 않게 순서를 짜고, 선택지를 비교하고, 일정을 기억하며, 결과를 확인하는 일도 분명한 노동이다. 그것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노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기꺼이 했다고 해서 피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변화는 불만을 키운 것이 아니라, 피로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준 것이다. 나는 내가 왜 늘 지쳤는지 조금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책임을 많이 맡았기 때문에 더 많은 권한을 쥐고, 그 권한을 놓지 못한 순간도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누가 더 나쁜 사람인지 판정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누구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지를 함께 꺼내놓는 일이다.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가사노동에 관한 책이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며 살아가는지에 관한 책이다. 가족을 유지하는 것은 손으로 수행하는 일만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고, 여러 사람의 필요를 조율하며, 실패를 예방하는 정신적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그 노동을 가시화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피로를 정당하게 이해하고, 타인의 기여를 제대로 바라보며, 관계를 다시 설계할 가능성을 얻는다.
구조를 보되 사람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책임을 인정하되 비난을 자동화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각자가 어떤 부담을 지고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이 날카롭고 때로는 아픈 책에서 건져 올린 가장 중요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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