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노화 - 이시형의
이시형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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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 이시형, 『행복노화』를 읽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같은 90대의 몸을 지닌 두 사람을 생각했다.


한 사람은 저자인 이시형 박사다. 아흔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글을 쓰고,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노년을 하나의 실천적 지혜로 바꾸어 독자 앞에 내놓는다. 그의 문장은 노년의 몸에서도 정신이 얼마나 또렷하게 작동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나이 들었다는 사실이 곧 사유의 종말은 아니며, 노화가 곧 인간의 폐기처분선고는 아니라는 것을 그의 존재 자체가 증언한다.


다른 한 사람은 내 시아버님이다. 역시 90대이지만, 파킨슨병으로 근손실이 심해져 누워 계시고, 섬망 증세와 중증 치매를 겪고 계신다. 같은 세월을 살았으나 두 노년의 풍경은 너무 다르다. 한쪽에는 아직 언어와 판단과 사회적 역할이 남아 있고, 다른 한쪽에는 몸의 붕괴와 인지의 어둠이 있다. 이 대비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추었다. 노화란 정말 무엇인가. 단지 오래 산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삶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물론 이 질문을 함부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다. 파킨슨병과 치매, 섬망과 근손실은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복합적인 질환이다. 병든 노년을 “관리를 못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늙고 아픈 몸을 다시 한 번 모욕하게 된다. 인간의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유전, 질병, 환경, 경제력, 돌봄의 조건, 우연한 사고, 의료 접근성, 살아온 노동의 강도까지 모두 몸에 관여한다. 그러므로 시아버님의 노년을 실패한 노년이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한 인간이 통과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생의 말년일 뿐이다.


그럼에도 『행복노화』가 내게 깊이 와닿은 이유는, 노화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도 그 속도와 방향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노화를 병으로만 보지 않는다. 노화는 누구나 통과하는 생명 과정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똑같이 펼쳐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일찍 지치고, 어떤 사람은 오래도록 배우고 쓰고 일한다. 어떤 몸은 질병 앞에서 빠르게 무너지고, 어떤 몸은 예비력을 가지고 버틴다. 그 차이는 단지 유전자의 차이만이 아니라, 살아온 방식의 차이이기도 하다.


특히 후성유전의 관점은 내게 매우 유용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과거에는 유전자가 인간의 노화와 질병을 거의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책은 유전적 요인 못지않게 식습관, 운동, 수면, 스트레스 관리, 인간관계, 환경이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타고난 유전자를 완전히 바꿀 수는 없지만, 어떤 유전자가 켜지고 어떤 위험이 줄어드는지는 오늘의 생활과 무관하지 않다. 이 말은 노화가 숙명이라는 체념에서 우리를 조금 구해낸다. 몸은 이미 주어진 운명이지만, 생활은 그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나는 여기서 내 몸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나의 과체중은 단순히 의지가 부족해서 생긴 결과가 아니라 대사와 환경과 습관이 뒤엉킨 신호에 가깝다. 나는 오랫동안 몸을 도덕 점수표처럼 읽어왔다. 날씬한 몸은 성실하고, 살찐 몸은 게으르며, 병든 몸은 관리를 못 한 몸이라고 쉽게 판단했다. 하지만 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과거의 노년이 굶주림과 추위, 전쟁과 피난, 산업화와 과로가 새겨진 몸이라면, 오늘의 중년과 예비 노년은 과잉과 피로,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 초가공식품과 운동 부족이 새겨진 몸이다. 몸은 도덕 점수표가 아니다. 몸은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기록이다.


건강한 노화란 몸을 미워하며 벌주는 일이 아니라, 몸을 다시 읽고 조율하는 일이어야 한다. 당과 정제 탄수화물, 초가공식품을 줄이는 일은 단지 살을 빼기 위한 기술이 아니다. 그것은 내 몸의 대사를 다시 안정시키고, 노화를 촉진하는 생활의 흐름을 조금씩 되돌리는 일이다. 운동 역시 젊음을 과시하기 위한 고통이 아니라, 노년의 예비력을 만드는 일이다. 수면은 게으름이 아니라 회복의 토대이고, 스트레스 관리는 사치가 아니라 뇌와 몸을 지키는 방어선이다.


책에서 말하는 예비력의 개념도 인상 깊었다. 인간은 평소 가진 힘을 모두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 대비한 여분의 힘을 남겨둔다. 젊을 때는 그 여분이 넉넉해 무리해도 금방 회복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예비력은 줄어든다. 그래서 노화 관리는 젊어 보이려는 발버둥이 아니라, 아플 때 무너지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하는 일이다. 근육, 수면, 식사, 관계, 경제적 안정, 사명감은 모두 노년을 장식하는 요소가 아니라 생의 완충지대다.


이 책은 행복노화의 조건으로 건강, 장수, 경제적 여유, 좋은 인간관계, 사회성 혹은 사명감을 말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내 삶의 방식도 생각했다. 내게 좋은 관계란 반드시 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이는 일만은 아니다. 어쩌면 나는 좋은 인간관계만큼이나 좋은 고양이 관계를 가질 사람인지도 모른다. 고양이들을 돌보는 일은 단순한 애호가 아니다. 밥을 챙기고, 아픈 몸을 살피고, 이름을 불러주고, 작은 변화에 마음을 기울이는 일은 나를 고립시키기보다 오히려 삶 쪽으로 붙들어준다. 생명을 돌보는 일은 인간을 덜 늙게 한다. 적어도 마음이 굳어버리는 속도를 늦춘다.


나는 노화가 마음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몸은 변한다. 체력은 줄고, 회복은 느려지고, 예전처럼 무리할 수 없는 날이 온다. 그러나 내가 아직 도전할 수 있고, 나를 관리할 수 있으며, 내 삶의 방향을 다시 정할 수 있다고 믿는 한, 나는 완전히 늙은 것이 아니다. 젊음은 나이의 소유가 아니라 재시도의 능력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를 포기할 이유는 없다. 몸이 예전과 달라졌다면, 그 몸에 맞는 전략을 다시 짜면 된다. 늙음은 가능성의 종료가 아니라 전략의 변경이다.


시아버님의 노년과 이시형 박사의 노년은 내게 삶의 두 끝을 보여준다. 한쪽은 우리가 피하고 싶지만 언젠가 마주할 수 있는 취약성이고, 다른 한쪽은 노년에도 가능한 품격과 지성의 증거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워만 하는 것도, 모든 것을 의지의 문제로 몰아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늘의 생활을 조금씩 바꾸는 일이다. 당을 줄이고, 초가공식품을 멀리하고, 잠을 회복하고, 몸을 움직이고,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공부하고, 돌보는 관계를 지키는 일. 그것이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예의다.


『행복노화』는 늙지 않는 법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늙어간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되, 그 과정을 방치하지 말라고 말하는 책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선택할 수 없고, 이미 살아온 시대를 바꿀 수도 없다. 그러나 오늘의 식사, 오늘의 걸음, 오늘의 잠, 오늘의 마음가짐은 선택할 수 있다. 몸은 운명이지만, 생활은 운명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늙음을 조금 덜 두려워하게 되었다. 노화는 병이 아니다. 다만 나를 끝까지 포기하지 말라는, 생의 가장 오래된 요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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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방 (초판 한정 양장) 특서 청소년문학 48
뤼도비크 르콩트 지음, 장소미 옮김 / 특별한서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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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이 너무 무서워졌을 때


 -뤼도비크 르콩트, 『나만의 방』을 읽고



처음에는 공황장애에 가까운 이야기인 줄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아이. 현관문 앞에서 몸이 굳고, 가슴이 뛰고, 호흡이 흐트러지고, 다리가 말을 듣지 않는 아이. 병원 검사로는 뚜렷한 이상이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그는 아프다. 열도 없고, 상처도 없고, 피도 나지 않지만, 문밖으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하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병명을 이렇게 말한다. 

캐빈 증후군.


나는 그 단어를 몰랐지만, 주인공이 느끼는 감각은 알 것 같았다. 집이라는 공간이 처음에는 대피소였다가, 어느 순간 감옥이 되는 일.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는 일. 내가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그 상태를 타인에게 납득시켜야 한다는 막막함이라는 것까지도. 


소설 속 주인공은 말한다. 자신의 상태를 딱 잘라 설명하기 어렵다고. 누군가의 눈에는 그저 학교에 가기 싫어 불안을 핑계 삼는 아이처럼 보일 수 있다고. 버릇없이 자란 청소년의 변덕으로 치부될 수 있다고. 이 대목이 나는 유난히 아팠다. 보이지 않는 고통은 너무 쉽게 의심 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피가 나야 상처를 믿고, 깁스를 해야 통증을 인정한다. 그러나 마음이 몸을 붙잡는 병은 대개 증명하기 어렵다. 아픈 사람은 아픔과 싸우는 동시에, 그 아픔이 진짜라는 사실까지 설명해야 한다.


나도 비슷한 시간을 거쳐온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그때까지 내게 공부는 가장 자신 있는 일이었다. 공부는 내 자존심이었고, 내가 나를 설명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 나는 잘 배우는 사람, 오래 앉아 견디는 사람, 시험이라는 문 앞에서 결국은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실패했다. 사법고시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시험 하나에 떨어졌다는 의미로 끝나지 않았다. 내 안에서는 그 실패가 이상한 속도로 번역되었다.


나는 시험에 실패했다. 그러므로 나는 실패자다. 나는 공부도 못 해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나를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잔인한 비약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내게는 그것이 논리처럼 느껴졌다. 실패는 사건이 아니라 판결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반년 가까이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누가 나를 가둔 것도 아니고 문이 잠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나갈 수 없었다. 밖은 그대로였을 것이다. 길도, 사람도, 햇빛도. 달라진 것은 나였다. 실패 이후의 나는 문밖의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나만의 방』의 초반부를 읽을 때 나는 이 이야기를 개인의 불안과 은둔, 실패와 회복의 이야기로 먼저 읽었다. 하지만 책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화자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학교가 싫어서도, 친구 관계가 힘들어서도, 막연한 사춘기의 불안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몸을 멈춰 세운 것은 기후 변화에 대한 공포였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갑자기 더 넓어진다. 화자는 처음부터 무력했던 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무언가를 해보려 했다. 자신만의 목표 목록을 만들고, 환경 보호를 실천하고, 작은 행동을 통해 세계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고 믿으려 했다. 하지만 기후 변화에 대해 알면 알수록, 개인의 작은 실천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현실이 눈앞에 놓인다. 빙하가 녹고, 생태계가 무너지고,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이야기는 뉴스 속 정보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한 아이의 심장과 호흡과 다리로 내려온다.


기후 위기는 숫자로 발표되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몸의 증상으로 도착한다. 지구온난화는 보고서의 문장이지만, 어떤 아이에게는 현관문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공포가 된다. 이 책이 날카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나만의 방』은 한 아이의 캐빈 증후군을 개인의 나약함이나 가족 문제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이 아이를 방 안에 가둔 것은, 자신이 살아갈 세계가 이미 망가지고 있다는 감각이다. 그는 게으른 것이 아니다. 무관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아직 어린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공포를 너무 정직하게 받아버렸다.


어른들은 자주 아이들에게 말한다. 환경을 생각하라고. 미래를 준비하라고.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러나 정작 그 아이들이 정말로 미래를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그 공포를 얼마나 감당해주고 있을까. 기후 위기는 아이들에게 추상적인 사회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살아가야 할 시간 자체가 흔들리는 일이다. 어른들에게 기후 변화가 “앞으로 조심해야 할 문제”라면, 아이들에게 그것은 “내가 살아갈 세계가 정말 괜찮은가”라는 생존의 질문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의 질문은 내게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아이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가.

아니면 아이가 밖을 두려워하게 만든 세계가 문제인가.


물론 아이는 다시 움직여야 한다. 방 안에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회복을 단순한 의지의 문제로 만들지 않는다. “용기를 내라”, “밖으로 나가라”, “행동하라”는 말은 쉽다. 그러나 말은 행동보다 쉽다.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화자가 자신의 문제가 기후 변화 공포와 연결되어 있음을 인정하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병의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 낫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름을 알면, 자신을 덜 미워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랬다. 내가 겪은 것은 기후 불안이 아니라 실패 이후의 자기혐오와 사회 복귀에 대한 공포였다. 소설 속 화자와 나는 서로 다른 이유로 방 안에 들어갔다. 그러나 닮은 점이 있었다. 바깥이 너무 커졌다는 것. 그리고 그 바깥을 감당할 언어가 한동안 없었다는 것. 


나에게 바깥은 다시 평가받는 세계였다.

화자에게 바깥은 무너져가는 행성이었다.

둘 다 한 사람의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다.


그래서 이 책의 회복은 거창한 해결책으로 오지 않는다. 처음의 변화는 말하기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은 친구 마농에게 자신이 나갈 수 없었던 이유를 이야기하고 나서 홀가분해진다. 다음에는 그 스스로의 말대로 제르맹 선생님에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주 작은 통로가 열린다. 방 밖으로 나가는 첫걸음은 언제나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는 일이 아닐 수 있다. 때로는 내가 왜 무서운지 누군가에게 말하는 일이다. 내 공포가 변덕이나 게으름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부터 인정하는 일이다.


이 점에서 『나만의 방』은 기후 위기에 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 자신의 아픔을 설명하지 못해 더 깊이 침묵하는 사람, 세상의 거대한 문제를 너무 개인적인 방식으로 앓아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자주 아픈 사람에게 증명을 요구한다.

왜 못 나가느냐고 묻는다.

왜 그냥 하지 못하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문은 손잡이가 아니라 세계 전체의 무게로 닫혀 있다.

『나만의 방』은 그 닫힌 문 앞에 선 아이를 함부로 재촉하지 않는다. 대신 그 아이의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가 묻는다. 너는 언제부터 무서웠니. 무엇이 너를 여기까지 밀어 넣었니. 그리고 이제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겠니.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오래전의 나를 떠올렸다. 실패 이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던 나. 내가 나를 실패자라고 부르던 시간. 내 몸이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것 같아 더 깊이 숨어들었던 시간. 그리고 동시에, 지금 이 세계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지 않은 위기의 결과를 살아내야 한다. 어른들이 미뤄온 문제를 미래라는 이름으로 떠안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은 한 아이의 병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아이를 아프게 만든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방 안에 갇힌 아이를 보며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나오지 못하느냐고 묻기 전에,

무엇이 저 아이에게 바깥을 견딜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는지를.

그리고 어쩌면 회복은 거기서 시작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아이를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말할 수 있게 기다리고 아픔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먼저 믿어주는 것.

기후 위기라는 거대한 공포 앞에서 개인의 실천만을 요구하는 대신, 함께 책임지는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나만의 방』은 말한다.

방 안에 들어간 사람은 끝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어쩌면 누구보다 먼저 세계의 균열을 감지한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문을 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난이 아니라, 함께 들어줄 누군가의 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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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 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권혁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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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

— 권혁란, 《이름의 빈자리에》를 읽고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누군가를 세계 안으로 불러 세우는 가장 오래된 방식이고, 한 존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붙들어두는 작은 닻이다. 권혁란의 《이름의 빈자리에》는 괴물, 여성, 망자, 동물, 문학과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이름이 인간을 어떻게 만들고, 지우고, 연결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이 책은 이름을 둘러싼 인문학적 에세이이면서 동시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기록이다.


나는 《프랑켄슈타인》을 읽을 때도 괴물이 무섭다기보다 슬펐다. 그는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 이름도 받지 못했고, 창조주에게 부정당했으며, 인간들에게 반복해서 배척당했다. 프랑켄슈타인을 죽일 힘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요구한 것은 복수 이전에 관계였다. 자신과 같은 존재 하나,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동료 하나, 이 세계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유대. 괴물에게 필요했던 것은 지배나 살육이 아니라 곁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내게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어”라는 크리처의 말은 오래 남는다. 이름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호칭을 생략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상대를 책임의 바깥으로 밀어내는 일이다. “너는 내 세계에 등록되지 않았다.” “너의 고통은 나와 관계없다.” 그런 선언이 이름의 부재 안에 숨어 있다. 결국 괴물은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이름을 주지 않는 세계, 책임지지 않는 창조주, 얼굴을 보지 않고 혐오부터 던지는 인간들이 한 존재를 괴물로 만든다.


라이카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였다. 라이카는 이름을 얻었지만 자기 삶의 주인은 되지 못했다. 인간은 그 이름을 역사에 남겼지만, 그 이름은 보호의 언어가 아니라 기록의 언어였다. ‘최초의 우주 개’라는 찬란한 수식어 뒤에는 한 생명의 공포와 외로움이 있었다. 이름이 있어도 구원받지 못한 존재. 이름이 남았지만 삶은 빼앗긴 존재. 이 책이 묻는 것은 바로 그런 자리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누구에게 이름을 붙이고, 누구의 고통은 이름 뒤에 숨겨왔는가.


책을 읽으며 나는 며칠 전 사라졌던 아파트 길고양이 솔이를 떠올렸다. 솔이는 집 앞 상가 펍에서 밥을 먹고, 중성화도 마친 채 사람들 곁에서 조심조심 살아가던 아이였다. 며칠째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중, 한 할머니가 고양이 때문에 냄새나서 못 살겠다며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설마 싶었지만, 퇴근길에 펍 사장님께 물어보니 그 할머니가 솔이를 우산으로 때렸고, 아이가 다쳐 지금은 지인 집에서 임시보호 중이라고 했다.


그 할머니에게 솔이는 이름 없는 길고양이였을 것이다. 골칫거리, 냄새, 불편함, 쫓아내야 할 대상. 그러나 우리에게 솔이는 솔이다. 이름을 부르면 멀리서 인사하듯 뛰어오던 아이. 추운 날 캔을 따주면 혼자 다 먹지 않고 친구를 부르러 가던 아이. 밥 먹는 동안 곁을 지켜주면 고맙다는 듯 아파트 현관까지 재잘거리며 배웅해주던 영특한 아이. 이름이 붙는 순간, 생명은 풍경에서 관계가 된다. 관계가 되는 순간, 그 존재의 고통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데려온 아이들의 이름도 떠올렸다. 우리 라온이는 처음 왔을 때 이름조차 없었다. 해랑이는 ‘츄’처럼 발성기호에 가까운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받아온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시 지어주었다.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라는 뜻으로 보담이, 세상의 중심이 되라는 뜻으로 가온이, 해처럼 빛나는 내 작은 호랑이라는 뜻으로 해랑이, 사랑받은 티가 나라는 뜻으로 티나, 길에서의 고통스러운 삶은 잊고 꽃길만 걸으라는 뜻으로 꽃길이, 네가 별이 될 때까지 내가 키우겠다는 마음으로 키움이. 그렇게 공들여 고민한 이름을 하나씩 붙여주었다.


그때 내가 한 일은 단순히 새 호칭을 고르는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이다. “너는 이제 이전의 이름 없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너는 함부로 불리던 존재가 아니라, 내가 오래 생각하고 부를 존재다.” “너의 삶이 이 이름처럼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란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존재를 내 세계 안에 들이고, 그 삶에 책임의 실을 묶는 일이다.


김춘수의 시 「꽃」에서 말하듯,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꽃이 된다. 그러나 이름을 부른 사람에게는 책임도 생긴다. 솔이를 솔이라고 부르는 순간, 나는 그 아이의 배고픔과 두려움과 부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게 되었다. 라온이와 해랑이에게 이름을 다시 지어준 순간, 그 아이들은 더 이상 이전의 익명 속에 놓인 존재가 아니었다. 이름은 사랑의 시작이면서 책임의 시작이다.


《이름의 빈자리에》가 좋았던 이유는 이 책이 이름을 낭만적인 언어로만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은 때로 소유의 표식이 되고, 삭제의 도구가 되며, 누군가를 배제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름은 한 존재를 어둠 속에서 건져 올리는 손이 될 수도 있다. 이름 없는 존재는 쉽게 지워진다. 그러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면, 그 존재는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얼굴이 되고, 기억이 되고, 관계가 되고, 마침내 내가 지켜야 할 세계의 일부가 된다.


결국 이 책이 내게 남긴 질문은 하나였다. 우리는 누구의 이름을 부르고, 누구를 이름 없는 채로 내버려두는가. 괴물이라 불린 존재들, 실험과 기록 뒤에 남은 동물들, 길 위에서 민원으로 취급되는 생명들, 그리고 아직 자기 이름으로 살아보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빈자리에 필요한 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닐지도 모른다. 먼저 이름을 불러주는 일. 그 이름에 담긴 삶을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일.


이름은 한 존재에게 건네는 가장 짧은 축원이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은, 그 이름을 끝까지 불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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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
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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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멀고도 가까운 단어다


— 이창곤,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를 읽고




일반 국민에게 정책은 멀고도 가까운 단어다. 정책 때문에 내 삶이 바뀐다. 월급명세서의 공제 항목, 병원비 부담, 전기요금 고지서, 아이의 돌봄과 교육 조건, 주거비와 노후의 불안까지, 정책은 매일 우리의 일상으로 도착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정책은 내 삶의 조건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의 과정은 대개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로웠다.


이창곤의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는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을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한겨레》 기자로 일하며 복지,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 정책 이슈를 취재했고, 이후 시민단체와 정부 위원회 활동을 통해 정책 결정 과정의 안팎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정책 해설서가 아니다. 일반 시민에게는 멀게 느껴지는 정책 결정과 실행의 메커니즘을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권력관계와 책임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정책 입문서이자 비판적 시민 교양서에 가깝다.


이 책의 핵심 문장은 분명하다. 정치는 멀고 정책은 가까운가. 아니다. 정책은 근본적으로 정치다. 정책은 단순한 행정 절차나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한 사회의 자원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의 고통이 우선순위에 놓이는지, 누구의 삶이 보호받고 누구에게 부담이 전가되는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을 하나씩 불러낸다. 대통령과 대통령실, 국회와 정당, 경제 부처와 사법부, 싱크탱크, 노동조합, 사용자 단체, 시민단체, 이익집단, 언론, 학계, 그리고 시민까지. 정책은 이들이 서로 충돌하고 타협하며 만들어내는 정치의 산물이다.


책의 1장은 정책의 정치학을 다룬다. 왜 정책에 주목해야 하는지, 대한민국 정책 과정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무엇인지, 정책은 왜 근본적으로 정치인지 묻는다. 특히 저출산 정책과 의료보험 정책의 사례를 통해 정책의 출발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 적절한 타이밍에 대응하는 능력, 그리고 정책 의제로 올릴 것과 밀어낼 것을 결정하는 권력 작용이 정책의 성패를 가른다.


저출산을 다룬 부분은 특히 인상 깊었다. 나는 그동안 저출산을 주거, 고용, 교육비, 돌봄의 문제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는다. 정책은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저출산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재난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울리고 있던 경보를 정책이 제때 듣지 못한 결과였다. 출산율이 이미 인구 대체 수준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산아 제한 정책의 관성은 오래 지속되었고, 초저출산이 현실이 된 뒤에야 국가적 대응이 본격화되었다. 뒤늦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삶의 구조는 이미 무너진 뒤였다.


더 시원했던 지적은 저출산 정책의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저출산 대책은 “아이를 낳으면 보상하겠다”가 아니라 “아이를 낳아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가 되었어야 했다. 사람들은 단지 보상을 받기 위해 아이의 생애를 거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출산은 몇백만 원의 지원금으로 결정되는 소비 선택이 아니다. 주거, 노동시간, 고용 안정, 돌봄, 교육, 경력, 노후까지 삶 전체가 걸린 결정이다. 아이는 통계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감당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태어난다.


책의 2장은 정책 결정의 핵심 주체들을 들여다본다. 대통령은 정책 성공과 실패의 가장 큰 변수이자 최고 결정자다. 대통령 비서실은 정책 결정의 컨트롤 타워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민의를 차단하는 벽이 될 수도 있다. 경제 부처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정책 행위자이고, 정당은 시민의 고통과 요구를 정책으로 번역해야 하지만 한국 정당은 자주 정책 정당이 되지 못한다. 국회와 사법부 역시 정책 결정과 감시, 때로는 사법적 정책 결정의 주체가 된다. 이 책은 정책 실패를 단순히 한 명의 무능이나 한 부처의 실수로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권력기관과 행위자가 얽힌 정책 생태계의 오작동을 보여준다.


책의 3장은 시민사회 정책 행위자들을 다룬다. 시민단체, 노동조합, 사용자 단체, 이익집단, 대학 교수, 언론, 시민이 어떻게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거나 배제되는지 살핀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정책은 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시민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선거 때 대표자를 뽑지만,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지 알기 어렵다. 결정 과정은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정책 실패의 책임은 개인의 불운이나 시대적 한계로 흩어진다. 시민은 정책의 대상이 되지만, 자주 정책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며 며칠 전에 끝난 지방선거 공약이 떠올랐다. 어느 교육감 후보가 특정 동네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언뜻 들으면 좋은 말이었다. 학교는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언제나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질문이 생겼다. 그 동네에는 이미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여럿 있었고, 아파트도 대부분 들어선 상태라 새 학교를 지을 만한 부지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존 건물을 사들이거나 토지를 매입해야 할 텐데, 이미 땅값이 오를 만큼 오른 지역에서 그것이 교육청이나 교육부 예산으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었다.


이때 필요한 질문은 단순하다. 어디에 지을 것인가. 누구의 돈으로 지을 것인가. 교육청 단독 권한으로 가능한가. 실제 수요는 무엇인가. 과밀 문제인가, 통학 불편인가, 특정 학교 선호의 문제인가. 증축이나 학군 조정 같은 대안보다 학교 신설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선거 공약은 자주 이런 질문을 건너뛴다. “학교를 세우겠다”는 말은 쉽고 매력적이지만, 부지와 재원과 권한과 수요 분석이 빠진 순간 그것은 정책이라기보다 욕망을 자극하는 정치적 구호가 된다.


이 사례는 이 책이 말하는 정책 실패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책 실패는 집행 단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때로 실패는 공약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은 약속, 비용 부담을 설명하지 않는 구호, 특정 지역의 기대를 자극하면서도 전체 시민이 부담해야 할 재정 책임은 흐리는 정치적 언어 속에서 이미 실패의 씨앗이 놓인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공약에 대해 시민과 언론이 충분히 묻지 않는 현실이다. 우리는 정책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정작 그 정책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지 따지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다.


정책은 선한 명분만으로 좋은 정책이 되지 않는다. 좋은 정책이라면 반드시 구체적인 장소, 예산, 권한, 수요, 대안 비교를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공약은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설계도가 아니라 선거를 통과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정치수단으로 남을 위험이 크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책 실패를 욕하기는 쉽지만, 정책이 실패하기 전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의 4장은 정책 생태계의 혁신과 뉴비전을 향한다. 저자는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구조적 모순을 해부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민주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방향을 모색한다. 정책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이해관계자, 정치권력, 전문가, 시민이 복잡하게 얽혀 작동하는 유기적인 생태계다. 따라서 더 나은 정책을 위해서는 단순히 유능한 한 사람, 좋은 아이디어 하나, 더 많은 예산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더 투명해져야 하고, 시민이 배제되지 않아야 하며, 실패를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정책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회는 위험하다. 정책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정이 무엇인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부담을 지는지 알지 못하면 시민은 자기 삶을 방어할 수 없다. “왜 이 정책인가?”,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비용을 치르는가?”라는 질문은 전문가만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정책은 멀다. 복잡한 법률과 예산, 관료 조직과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책은 너무나 가깝다. 결국 내 삶의 조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멀고도 가까운 정책의 블랙박스를 열어 보자고 말한다. 더 많은 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한 질문과 더 투명한 결정 과정, 그리고 시민이 사라지지 않는 정책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책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실패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묻고, 시민의 삶을 정책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올 때 비로소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좋은 정책은 위에서 내려오는 완성품이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쌓아 올리는 인고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 시민이 있어야 한다. 정책은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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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펑 - 나를 울리고 너를 배반하며 이룩되는 케이팝 이야기
복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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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웠지만 나를 살린 노래

— 복길, 《펑펑》을 읽고


《펑펑》은 케이팝 노래와 그 노래를 둘러싼 사유의 결로 이루어진 에세이다. 저자 복길은 케이팝을 단순히 화려한 무대나 팬덤의 열광으로만 보지 않는다. 어떤 노래가 한 사람의 시간을 어떻게 붙잡는지, 좋아한다는 감정 안에 얼마나 많은 수치심과 애정, 죄책감과 해방감이 함께 들어 있는지 들여다본다. 그래서 이 책은 케이팝에 관한 책이면서 동시에, 케이팝을 통해 자기 삶을 견디고 해석해온 사람들에 관한 책처럼 보인다.


출판사에서 좋아하는 케이팝 곡과 그 사유를 함께 적어달라는 요청을 특별미션의 형식으로 제공한 것을 봤을 때,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BTS 슈가·진·정국의 〈So Far Away〉를 떠올렸다. 좋아하는 노래는 많다. 오래 들은 노래도 많고, 어느 시절의 나를 데려오는 노래도 많다. 그러나 “나를 살린 케이팝”에 가까운 곡을 고르라면 내게는 이 노래가 먼저 온다.


흥미롭게도 나는 BTS를 처음부터 ‘보는 아이돌’로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나는 BTS라는 그룹을 거의 몰랐다. 퍼포먼스로 유명한 아이돌이라는 것도, 거대한 팬덤을 가진 그룹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처음 내게 도착한 것은 화면이 아니라 소리였다. 나직하게 체념한 듯, 동시에 스스로를 타박하고 몰아세우는 것 같은 슈가의 날카로운 랩이 먼저 귀에 걸렸다. 그리고 그 위로 소년미가 남아 있는 진과 정국의 미성이 반복해서 밀려왔다. 제목처럼 멀리서, 그러나 이상하게 너무 가까운 곳에서 부르는 목소리 같았다. 그다음에야 가사가 심장에 박혔다.


그 시절의 나는 많이 고립되어 있었다. 우울이 깊었고, 내가 내 편 하나 없이 가계부채를 갚는 ATM기처럼 살고 있다는 감각에 짓눌렸다. 나는 사람이라기보다 기능처럼 느껴졌다. 돈을 벌고, 갚고, 버티고, 다시 돈을 벌고, 또 갚는 존재. 집도 싫었고, 내 삶도 싫었다.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실제로 뛰쳐나가지는 못했다.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칠 수 없는 사람은 몸 안에 감옥을 만든다. 그때 〈So Far Away〉는 나를 억지로 위로하지 않았다. 괜찮아질 거라고 쉽게 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꿈이 없고, 모두가 달리는데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먼저 알아보았다. 사람은 때로 희망보다 먼저 이해를 원한다. “네가 힘든 게 이상한 게 아니야”라는 감각을 얻고 나서야 겨우 다음 숨을 쉰다. 내게 이 노래는 그런 음악이었다.


그래서 저자가 케이팝은 ‘듣는 음악’이어야 한다고 말할 때, 나는 이 노래를 떠올렸다. 내게 〈So Far Away〉는 분명 듣는 음악이었다. 나는 무대보다 먼저 목소리를 들었고, 얼굴보다 먼저 감정을 들었고, 팬덤보다 먼저 한 사람의 절박한 독백을 들었다. 그 뒤에야 이 노래를 부른 이들이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순서가 중요했다. 내게 BTS는 먼저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어두운 방 안에서 혼자 숨 쉬던 사람에게 도착한 목소리였다.


그즈음 나는 남편과 연애를 시작했다. 집이 싫고 삶이 싫어 어디론가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실제로 내가 택한 것은 완전한 도피가 아니라 사랑 쪽으로 조금씩 몸을 돌리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받고, 나도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감각을 아주 조금씩 되찾았다. 그리고 그 회복의 한쪽에 BTS가 있었다. 노래를 듣고, 무대를 찾아보고, 웃는 얼굴들을 보고, 팬들이 나누는 말을 읽으며 나는 조금씩 다시 사람 쪽으로 돌아왔다.


물론 케이팝이 내 인생을 단번에 구원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말은 너무 쉽고, 내 고통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음악은 사람을 한 번에 구하지는 못해도 하루를 넘기게 한다. 오늘 밤을 넘기게 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눈뜨게 하고, 아주 희미하게나마 “나에게도 아직 꿈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한다. 내게 〈So Far Away〉는 나를 끌어올린 손이라기보다, 내 옆에 함께 주저앉아준 노래였다.


하지만 케이팝을 사랑한다는 일은 내게 늘 깨끗하고 편안한 감정만은 아니었다. 나는 BTS가 좋았고, 그들의 노래에 실제로 위로받았지만, 동시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돌 그룹 이름이 ‘방탄소년단’이라는 사실이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이름이 주는 낯섦과 과장됨,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 따라붙는 유치함의 시선, 나이 든 여성이 보이그룹을 좋아한다는 데 따라오는 민망함 같은 것이 있었다. 좋아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어쩐지 설명이 필요한 마음. 내게 BTS와 케이팝은 한동안 길티 플레저였다.


《펑펑》이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그 부끄러움과 사랑을 단순하게 정리하지 않는 데 있다. 저자는 케이팝을 좋아하는 마음 안에 있는 즐거움만이 아니라, 그 사랑이 때때로 우리에게 요구하는 해명과 죄책감도 함께 본다. 내가 좋아한 대상이 흔들릴 때, 그 대상을 사랑했던 나 자신까지 의심하게 되는 마음. 이 사랑은 맹목이었을까. 내가 좋아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가벼운 사람이 되는 걸까. 좋아하는 마음은 왜 자꾸 증명되어야 할까. 이 책은 그런 질문들을 피하지 않는다.


나는 케이팝을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케이팝을 둘러싼 어떤 문화 앞에서는 자주 멈칫했다. 특히 살아 있는 아이돌을 팬픽 속 동성애 서사의 인물로 소비하는 문화에는 오래도록 불편한 감각이 있었다. 물론 팬픽이반 문화가 단순히 미성숙한 놀이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복길이 짚듯, 그것은 10대 여성들이 기존의 이성애 규범을 비틀고, 남성 아이돌의 관계를 빌려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탐색한 독특한 하위문화이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금지된 상상을 통해 자기 안의 욕망을 처음 만나는 언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쉽게 편해지지 않았다.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팬픽 속 인물은 허구처럼 소비되지만, 그 이름과 얼굴과 몸은 현실의 누군가에게서 온다. 더구나 소속사와 산업은 때로 그 모호한 욕망을 모르지 않는 듯했다. 멤버 간의 친밀함, 질투처럼 보이는 장면, 의미심장한 스킨십과 떡밥들은 팬들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팬덤은 그것을 다시 콘텐츠와 소비로 되돌려주었다. 그 영리한 순환을 볼 때마다 나는 케이팝의 사랑이 얼마나 다정한 동시에 얼마나 계산적일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래서 내게 케이팝은 단순히 순수한 사랑의 대상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살린 음악이었고, 동시에 내가 부끄러워하고 변명하고 거리 두려 했던 대상이었다. 좋아하지만 불편하고, 불편하지만 끝내 떠나지 못하는 것. 《펑펑》은 바로 그 복잡한 마음을 오래 들여다보게 만든다. 케이팝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완벽한 대상을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라, 상업성과 진심, 위로와 소비, 환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 안에서도 끝내 내 마음을 움직인 무언가를 인정하는 일인지 모른다.


내가 케이팝을 좋아하게 된 것은 단순히 노래가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나는 그 안에서 내가 잃어버린 감정을 다시 배웠다. 좋아하는 법, 기다리는 법, 응원하는 법, 울어도 괜찮다고 느끼는 법, 누군가의 목소리에 기대어 하루를 건너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배웠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완전히 죽은 사람이 아니다. 사랑이 남아 있다면, 아주 작게라도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게 〈So Far Away〉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내가 바닥에 있던 시절, 아직 사라지지 않은 마음의 한쪽을 건드린 음악이었다. 나는 그 노래를 통해 BTS를 좋아하게 되었고, BTS를 좋아하며 조금씩 나를 덜 미워하게 되었다. 《펑펑》을 읽으며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도 아마 그것이었다. 우리는 왜 그렇게 어떤 노래를 사랑했는가. 왜 그 사랑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놓지 못했는가. 그리고 왜 그 사랑 때문에, 아주 가끔은, 살아갈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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