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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은 왜 실패하는가 -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
이창곤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평점 :
정책은 멀고도 가까운 단어다
— 이창곤,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를 읽고
일반 국민에게 정책은 멀고도 가까운 단어다. 정책 때문에 내 삶이 바뀐다. 월급명세서의 공제 항목, 병원비 부담, 전기요금 고지서, 아이의 돌봄과 교육 조건, 주거비와 노후의 불안까지, 정책은 매일 우리의 일상으로 도착한다. 그런데 정작 나는 그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다. 정책은 내 삶의 조건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의 과정은 대개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로웠다.
이창곤의 《정책은 왜 실패하는가》는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민낯과 가능성을 다루는 책이다. 저자는 오랫동안 《한겨레》 기자로 일하며 복지,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 정책 이슈를 취재했고, 이후 시민단체와 정부 위원회 활동을 통해 정책 결정 과정의 안팎을 지켜보았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정책 해설서가 아니다. 일반 시민에게는 멀게 느껴지는 정책 결정과 실행의 메커니즘을 친절하게 설명하면서도, 그 안에 숨은 권력관계와 책임의 문제를 날카롭게 드러내는 정책 입문서이자 비판적 시민 교양서에 가깝다.
이 책의 핵심 문장은 분명하다. 정치는 멀고 정책은 가까운가. 아니다. 정책은 근본적으로 정치다. 정책은 단순한 행정 절차나 기술적 선택이 아니라, 한 사회의 자원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누구의 고통이 우선순위에 놓이는지, 누구의 삶이 보호받고 누구에게 부담이 전가되는지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저자는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행위자들을 하나씩 불러낸다. 대통령과 대통령실, 국회와 정당, 경제 부처와 사법부, 싱크탱크, 노동조합, 사용자 단체, 시민단체, 이익집단, 언론, 학계, 그리고 시민까지. 정책은 이들이 서로 충돌하고 타협하며 만들어내는 정치의 산물이다.
책의 1장은 정책의 정치학을 다룬다. 왜 정책에 주목해야 하는지, 대한민국 정책 과정에 대한 근본적 질문은 무엇인지, 정책은 왜 근본적으로 정치인지 묻는다. 특히 저출산 정책과 의료보험 정책의 사례를 통해 정책의 출발점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 적절한 타이밍에 대응하는 능력, 그리고 정책 의제로 올릴 것과 밀어낼 것을 결정하는 권력 작용이 정책의 성패를 가른다.
저출산을 다룬 부분은 특히 인상 깊었다. 나는 그동안 저출산을 주거, 고용, 교육비, 돌봄의 문제로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은 거기에 한 가지를 더 얹는다. 정책은 타이밍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저출산은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재난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울리고 있던 경보를 정책이 제때 듣지 못한 결과였다. 출산율이 이미 인구 대체 수준 아래로 떨어졌음에도 산아 제한 정책의 관성은 오래 지속되었고, 초저출산이 현실이 된 뒤에야 국가적 대응이 본격화되었다. 뒤늦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었지만, 삶의 구조는 이미 무너진 뒤였다.
더 시원했던 지적은 저출산 정책의 방향에 관한 것이었다. 저출산 대책은 “아이를 낳으면 보상하겠다”가 아니라 “아이를 낳아도 삶이 무너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겠다”가 되었어야 했다. 사람들은 단지 보상을 받기 위해 아이의 생애를 거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 출산은 몇백만 원의 지원금으로 결정되는 소비 선택이 아니다. 주거, 노동시간, 고용 안정, 돌봄, 교육, 경력, 노후까지 삶 전체가 걸린 결정이다. 아이는 통계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감당할 수 있다고 느끼는 사회에서 태어난다.
책의 2장은 정책 결정의 핵심 주체들을 들여다본다. 대통령은 정책 성공과 실패의 가장 큰 변수이자 최고 결정자다. 대통령 비서실은 정책 결정의 컨트롤 타워가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민의를 차단하는 벽이 될 수도 있다. 경제 부처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정책 행위자이고, 정당은 시민의 고통과 요구를 정책으로 번역해야 하지만 한국 정당은 자주 정책 정당이 되지 못한다. 국회와 사법부 역시 정책 결정과 감시, 때로는 사법적 정책 결정의 주체가 된다. 이 책은 정책 실패를 단순히 한 명의 무능이나 한 부처의 실수로 축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권력기관과 행위자가 얽힌 정책 생태계의 오작동을 보여준다.
책의 3장은 시민사회 정책 행위자들을 다룬다. 시민단체, 노동조합, 사용자 단체, 이익집단, 대학 교수, 언론, 시민이 어떻게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거나 배제되는지 살핀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질문이 떠오른다. 정책은 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시민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선거 때 대표자를 뽑지만,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정책을 결정하는지 알기 어렵다. 결정 과정은 밀실에서 이루어지고, 정책 실패의 책임은 개인의 불운이나 시대적 한계로 흩어진다. 시민은 정책의 대상이 되지만, 자주 정책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이 책을 읽으며 며칠 전에 끝난 지방선거 공약이 떠올랐다. 어느 교육감 후보가 특정 동네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언뜻 들으면 좋은 말이었다. 학교는 아이들과 학부모에게 언제나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질문이 생겼다. 그 동네에는 이미 초등학교와 중학교, 고등학교가 여럿 있었고, 아파트도 대부분 들어선 상태라 새 학교를 지을 만한 부지가 쉽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존 건물을 사들이거나 토지를 매입해야 할 텐데, 이미 땅값이 오를 만큼 오른 지역에서 그것이 교육청이나 교육부 예산으로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었다.
이때 필요한 질문은 단순하다. 어디에 지을 것인가. 누구의 돈으로 지을 것인가. 교육청 단독 권한으로 가능한가. 실제 수요는 무엇인가. 과밀 문제인가, 통학 불편인가, 특정 학교 선호의 문제인가. 증축이나 학군 조정 같은 대안보다 학교 신설이 더 나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선거 공약은 자주 이런 질문을 건너뛴다. “학교를 세우겠다”는 말은 쉽고 매력적이지만, 부지와 재원과 권한과 수요 분석이 빠진 순간 그것은 정책이라기보다 욕망을 자극하는 정치적 구호가 된다.
이 사례는 이 책이 말하는 정책 실패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정책 실패는 집행 단계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때로 실패는 공약이 만들어지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지 않은 약속, 비용 부담을 설명하지 않는 구호, 특정 지역의 기대를 자극하면서도 전체 시민이 부담해야 할 재정 책임은 흐리는 정치적 언어 속에서 이미 실패의 씨앗이 놓인다. 더 큰 문제는 그런 공약에 대해 시민과 언론이 충분히 묻지 않는 현실이다. 우리는 정책의 수혜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정작 그 정책이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비용을 부담하는지 따지는 데에는 익숙하지 않다.
정책은 선한 명분만으로 좋은 정책이 되지 않는다. 좋은 정책이라면 반드시 구체적인 장소, 예산, 권한, 수요, 대안 비교를 통과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공약은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설계도가 아니라 선거를 통과하기 위한 포퓰리즘적 정치수단으로 남을 위험이 크다. 이 책이 내게 흥미로웠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책 실패를 욕하기는 쉽지만, 정책이 실패하기 전 우리가 어떤 질문을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의 4장은 정책 생태계의 혁신과 뉴비전을 향한다. 저자는 대한민국 정책 생태계의 구조적 모순을 해부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민주성과 투명성을 높이는 방향을 모색한다. 정책은 고립된 섬이 아니다. 이해관계자, 정치권력, 전문가, 시민이 복잡하게 얽혀 작동하는 유기적인 생태계다. 따라서 더 나은 정책을 위해서는 단순히 유능한 한 사람, 좋은 아이디어 하나, 더 많은 예산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가 더 투명해져야 하고, 시민이 배제되지 않아야 하며, 실패를 인정하고 수정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정책을 모른 채 살아가는 사회는 위험하다. 정책이 지향하는 목표와 가정이 무엇인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부담을 지는지 알지 못하면 시민은 자기 삶을 방어할 수 없다. “왜 이 정책인가?”, “다른 대안은 없었는가?”,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비용을 치르는가?”라는 질문은 전문가만의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시민의 당연한 권리이며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정책은 멀다. 복잡한 법률과 예산, 관료 조직과 정치적 이해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책은 너무나 가깝다. 결국 내 삶의 조건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멀고도 가까운 정책의 블랙박스를 열어 보자고 말한다. 더 많은 정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한 질문과 더 투명한 결정 과정, 그리고 시민이 사라지지 않는 정책 생태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정책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실패를 운명처럼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실패를 제대로 들여다보고, 무엇이 문제였는지 묻고, 시민의 삶을 정책의 중심으로 다시 불러올 때 비로소 다른 가능성이 열린다. 좋은 정책은 위에서 내려오는 완성품이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쌓아 올리는 인고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 시민이 있어야 한다. 정책은 결국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권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