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 현대인을 위한 정신분석사전
노은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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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


불안의 시대, 나를 이해하는 언어를 찾는 법



1. 연결은 많아졌지만 마음을 이해받는 경험은 줄어든 시대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이 연결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세계 곳곳의 정보와 사람에게 닿을 수 있고, SNS를 통해 타인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바라본다. 과거라면 상상하기 어려웠던 속도로 관계가 확장되었고, 우리는 언제든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는 환경 속에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연결의 증가는 마음의 고립을 해결하지 못했다.


오히려 많은 현대인은 수많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 “나는 왜 이렇게 불안할까”, “나는 왜 인정받고 싶을까”, “나는 왜 가까워지고 싶으면서도 도망치고 싶을까”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인간은 본래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배운다. 어린 시절 부모의 표정과 반응을 통해 내가 사랑받는 존재인지 확인하고, 친구와 학교생활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간다. 타인의 반응은 단순한 평가가 아니라 나라는 존재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관계 구조는 크게 변했다.


가족과 지역 공동체는 이전보다 약화되었고, 직장은 더 이상 평생 소속감을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다. 온라인 관계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그 관계가 반드시 깊은 정서적 지지와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해석해 줄 관계는 부족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신의 마음을 설명해 줄 새로운 언어를 찾기 시작했다.

MBTI, 심리 테스트, 사주와 타로, 각종 성향 분석 서비스가 인기를 얻는 현상은 단순한 유행으로만 보기 어렵다. 그것은 복잡하고 모호한 내면을 이해하고 싶다는 인간의 오래된 욕구가 새로운 방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나는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왜 같은 상황에서 반복적으로 상처받을까.

왜 원하는 관계를 선택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할까.


현대인은 자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한다.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질문에서 출발하는 책이다.

노은정 작가는 정신분석과 심리학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지만 정확히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의 패턴을 들여다본다.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해지는 마음.

도움을 받고 싶으면서도 의존하는 자신을 불편해하는 태도.

사랑받고 싶지만 가까워질수록 불안해지는 관계 방식.


책은 이러한 감정을 단순히 성격의 문제나 의지 부족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이 과거의 경험과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적응 방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빠르게 결론 내리는 것이 아니다.

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AI 시대, 마음의 해석을 외부에 맡길 때 생기는 것

최근 많은 사람이 AI에게 자신의 감정과 고민을 묻는다.


“내가 왜 이런 기분일까.”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이 현상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을 이해해 줄 거울을 필요로 했다.


정신분석가 하인츠 코헛이 말한 자기대상(selfobject)의 개념처럼 인간은 타인의 공감과 인정 속에서 안정적인 자기감을 형성한다. 누군가가 나의 감정을 알아보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말해주는 경험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는 중요한 힘이 된다.


AI 역시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역할의 일부를 수행할 수 있다.

판단하지 않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복잡한 생각을 정리할 언어를 제공하며, 감정의 구조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AI는 하나의 안전한 대화 공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새로운 위험도 존재한다.

AI가 제공하는 설명을 하나의 확정된 정답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자기 이해는 오히려 자기 제한으로 변할 수 있다.


“나는 불안형 인간이다.”

“나는 회피형이라서 관계가 어렵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다.”


이런 문장은 나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나를 고정된 틀 안에 가둘 수도 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목적은 나를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이해하고, 앞으로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서다.

불안은 제거해야 할 오류가 아니다.

이해해야 할 신호다.



2. 복잡한 이론보다 나를 돌아보게 하는 심리학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어려운 정신분석 이론을 지식으로 전달하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다양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지만 쉽게 설명하지 못했던 마음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인정이 끊임없이 필요한 사람.

혼자 해결하려 애쓰다가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는 사람.

버림받을까 두려워 관계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사람.


책 속 사례들은 특별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경험과 겹쳐진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진단을 받는 느낌보다,

“나에게도 이런 순간이 있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힘이다.


심리학 책은 때때로 전문 용어가 많아 독자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기 전에 먼저 공부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모호한 마음에 이름 붙이기》는 사례 중심의 구성으로 독자가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만든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 어렵고,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진입장벽이 낮은 책이다.


한 사례를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비슷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그때 내가 두려워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금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책은 대신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대신 내가 내 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질문을 건넨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야말로 진짜 자기 이해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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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의 가성비 - 대한민국, 누가 어디까지 지킬 것인가
정욱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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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국방의 가성비》를 읽고


자주국방과 전시작전통제권, 한 국가가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의 의미


하나의 단어는 언제나 하나의 의미만 갖지 않는다. ‘자주국방’이라는 말 역시 누군가에게는 국가 주권과 독립성을 상징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동맹 약화와 안보 불안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주국방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찬성과 반대의 문제가 아니라, 한 국가가 자신의 안전을 어떤 방식으로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자주국방의 가성비》를 읽으며 가장 오래 머문 지점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문제였다. 이전까지 나는 전작권 논쟁을 주로 “한미동맹 강화인가, 자주국방인가”라는 정치적 구도로만 이해했다. 하지만 책은 이 문제가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작권은 전쟁이 발생했을 때 군사 작전을 지휘하고 통제하는 권한이다. 한국의 현재 작전권 구조는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역사에서 출발했다. 전쟁 초기 한국군은 북한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유엔군 지휘 체계 아래 들어갔고, 이후 한미동맹이 형성되면서 한미연합사 중심의 독특한 지휘 구조가 만들어졌다.


당시에는 국가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후 세계적인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성장했고, 상당한 수준의 군사력과 기술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여기서 새로운 질문이 등장한다.


강대국의 보호가 필요했던 시대에 만들어진 안보 구조를, 성장한 한국이 어떻게 다시 설계할 것인가.


전작권 문제는 단순히 “미국이 한국군을 지휘하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다. 평시와 전시의 지휘 체계가 다르고, 한미연합사와 유엔사 등 여러 조직이 연결되어 있는 복잡한 구조 속에서 유사시 누가 어떤 판단을 내리고 책임질 것인가의 문제다. 특히 전쟁 상황에서는 빠르고 일관된 지휘 체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여러 사령부와 다국적 전력이 어떻게 조율되는지는 중요한 안보 과제가 된다.


전작권 전환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주권국가라면 자국 군대의 작전 판단 권한을 스스로 가져야 하며, 동맹 역시 일방적 의존이 아니라 책임 있는 파트너십 위에서 더욱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신중론에서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과 한반도의 특수한 안보 환경을 고려할 때, 미국의 전략 자산과 한미 연합 지휘 체계가 현실적인 억제력이라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두 입장 모두 안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차이는 무엇을 더 큰 위험으로 보는가에 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국가의 위험을 우려하고, 또 다른 사람은 충분한 준비 없이 지휘 권한만 바꾸는 위험을 우려한다.


결국 전작권 문제는 “미국인가 한국인가”의 선택이 아니다. 동맹과 자주성, 억제력과 책임 있는 판단 능력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다.


최근 국제사회에서 강대국의 군사적 판단이 주변 국가의 운명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모습을 보며 이 질문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안보와 미래에 대해 얼마나 주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는 단순한 군사 문제가 아니라 국가 역량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자주국방’이라는 익숙한 단어 뒤에 숨겨진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자주국방은 단순히 무기를 많이 확보하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력, 기술력, 산업 기반, 외교 전략, 동맹 관리 능력이 함께 갖추어져야 가능한 개념이다.


결국 국가의 힘은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가에서 드러난다.


전작권 논쟁은 우리에게 묻는다.


한 국가는 언제까지 보호받는 존재로 남아야 하는가.

그리고 언제부터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가 되어야 하는가.


좋은 사회과학 책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던 단어 속에 담긴 역사와 이해관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자주국방의 가성비》는 ‘자주’와 ‘동맹’이라는 두 단어를 대립시키는 대신, 변화한 한국이 어떤 국가로 성장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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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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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일을 처음으로 노동이라 부르게 된 날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를 읽고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했는지 떠올려보았다. 고양이 화장실 모래가 할인 중인지 확인하고 종류별로 세 상자를 주문했다. 키친타월과 휴지의 남은 수량을 세어 필요한 만큼 구매했고, 독서모임 책을 주문했다. 종량제 봉투를 사러 갈 시간을 계산하고, 아름이와 약속한 저녁 산책과 길고양이 밥 주기를 머릿속 일정표에 넣었다. 파일집 정리, 화장실 청소, 걸레질, 구토 치우기, 쓰레기 배출, 택배 상자 정리, 고양이 화장실 모래 전체 갈이, 오줌 묻은 이불 빨래, 설거지, 열 마리의 심장사상충 접종 일정, 서평단 마감까지 확인했다. 그 와중에 나는 모의고사 오답을 풀고 있었다.
언뜻 세어보아도 서른 개가 넘는 일이 머릿속에서 동시에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이것을 가사노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청소를 하거나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널 때만 집안일을 한다고 여겼다. 무엇이 부족한지 알아차리고, 언제 사야 하는지 판단하고, 여러 선택지를 비교하고, 일정을 조정하고, 다른 존재의 필요를 예측하는 일은 그저 내가 원래 잘하는 일, 혹은 내가 사소한 것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바로 그 믿음에 이름을 붙였다. 내가 그동안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수많은 생각과 판단이 모두 ‘인지노동’이었다.
미국 사회학자 앨리슨 데이밍거는 이성애·퀴어 커플 172명을 심층 인터뷰해 가정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는지를 추적한다. 저자가 말하는 인지노동은 단순히 할 일을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예상하고, 가능한 선택지를 조사하고, 그중 하나를 결정한 뒤, 일이 제대로 끝났는지 다시 확인하는 전 과정을 포함한다. 아이의 병원 예약을 잡는 행위만 놓고 보아도, 이상 증상을 알아차리고 병원을 비교하고 가능한 시간을 조율하고 진료 이후의 약 복용과 다음 예약까지 관리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한 번의 행동 뒤에는 여러 갈래의 판단과 책임이 겹쳐 있다.
이 정의를 읽는 순간 내 머릿속이 해체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내 일정만 관리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시험 일정과 보충 계획, 과제와 성적을 챙기고, 여러 마리 고양이의 식사와 약, 병원과 접종 일정을 기억한다. 그 모든 일정은 독립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수업이 바뀌면 병원 시간이 밀리고, 한 아이의 상태가 나빠지면 공부 계획과 집안일이 함께 재조정된다. 실제 노동은 손을 움직이는 시간보다, 계속 충돌하는 변수들을 머릿속에서 맞물리게 하는 과정에 더 가까웠다. 나는 언제나 피곤했지만 그 이유를 설명할 언어가 없었다. 이 책은 그 피로가 의지 부족이나 체력 저하만의 문제가 아니라, 종료 지점 없는 관리 시스템을 계속 가동한 결과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인지노동을 ‘예상하기, 선택지 확인하기, 결정하기, 결과 지켜보기’의 네 단계로 나눈다. 이 구분은 너무 정확해서 조금 잔인하다. 고양이 모래를 주문하는 일만 해도 남은 양과 교체 시기를 예상하고, 가격과 품질을 비교하며, 구매 수량과 배송일을 결정하고, 실제로 도착했는지 확인한 뒤 보관과 폐기까지 처리해야 한다. 개별 행동은 짧아 보이지만 결정의 사슬은 길다. 더구나 이 일들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휴지가 도착하면 다음에는 사료가 떨어지고, 예방접종이 끝나면 다음 병원 일정이 생긴다. 집과 돌봄은 완결되는 프로젝트가 아니라 계속 갱신되는 시스템이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다음과 같은 의미로 정리할 수 있다.
역할은 성격을 반영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처럼 보이는 능력과 습관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원래 계획적이고, 꼼꼼하며, 주변 사람의 필요를 잘 알아차린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누군가는 즉흥적이고 세부적인 일에 관심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차이가 반드시 타고난 성격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한 사람이 계속 가족의 일정과 필요를 책임지면 그는 더 빨리 위험을 감지하고, 더 많은 가능성을 예측하며, 더 촘촘하게 계획하는 능력을 익히게 된다. 반대로 그러한 역할에서 비켜나 있던 사람은 그 기술을 연습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역할이 반복되면 능력이 되고, 능력은 다시 성격처럼 보인다.
이 대목은 성별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여성은 원래 더 세심하고 남성은 원래 큰일에 집중한다는 식의 설명은, 이미 성별에 따라 다르게 배분된 경험을 타고난 본성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다. 누가 더 많이 계획하고 기억해왔는지, 누가 실패의 결과를 더 직접적으로 감당해왔는지를 보지 않은 채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결론 내리면 현재의 역할 분담은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것으로 굳어진다.
그러나 나는 책을 읽으며 모든 문제를 성별 하나로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실제로 저자가 만난 커플들 가운데에는 여성이 인지노동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남성이 더 많은 인지노동을 담당하거나 두 사람이 비교적 균형 있게 나누는 사례도 있었다. 퀴어 커플 역시 자동으로 평등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명칭만이 아니라, 한 관계 안에서 누가 가족 운영의 중심축이 되고 누가 다른 사람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가였다.
이 점에서 이 책은 인지노동을 주도권의 문제로 확장한다. 가정의 필요를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정보를 모으고, 일정과 기준을 세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결정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주도권은 곧 부담이기도 하다. 계획하는 사람은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자신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더 큰 불안과 짜증을 느낀다. 그 사람이 통제적인 성격이라서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것인지, 오랫동안 관리 책임을 맡은 결과 통제적인 습관을 갖게 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통제광처럼 보이고, 통제하려 할수록 다른 사람은 더욱 수동적으로 물러서는 악순환도 가능하다.
나 역시 여러 일정과 돌봄을 총괄하면서 내가 정한 방식이 가장 안전하고 효율적이라고 믿는 순간이 많았다. 내가 전체 구조를 알고 있으니 다른 사람이 일부만 보고 내린 판단은 불완전해 보였다. 그러나 모든 정보를 나만 쥐고 있는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판단할 기회도 줄어든다. 내가 과도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과, 그 책임 때문에 주도권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동시에 참일 수 있다. 이 책은 인지노동의 부담을 가시화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책임과 권한이 어떻게 함께 축적되는지까지 보여준다.
책의 상당 부분은 인지노동이 여성에게 더 많이 배분되는 현실을 분석한다. 그러나 나는 일부 대목에서 저자의 해석이 다소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남편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말해주어야 움직인다는 사실을 곧바로 책임 회피 전략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우리 남편 역시 내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말해야 정확히 움직이는 사람이지만, 나는 그것을 무능력이나 악의로 규정하고 싶지 않다. 사람마다 정보를 인식하고 행동을 시작하는 방식은 다르며, 관계에는 건강, 직업, 경험, 기질, 돌봄 능력처럼 성별만으로 환원할 수 없는 변수도 존재한다.
특히 책이 개인의 성향을 문화적 각본의 결과로 강하게 해석할 때에는, 사회구성론적 분석이 개인의 고유성을 다시 지워버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별 규범이 사람의 선택과 능력을 형성한다는 통찰은 유효하다. 그러나 모든 차이를 사회구조의 산물로만 읽으면, 한 사람의 기질과 선호, 실제로 주고받은 돌봄의 역사까지 설명 밖으로 밀려날 수 있다. 구조를 발견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구조라는 하나의 언어로 모든 관계를 판결해서는 안 된다.
다행히 결론부에서 저자 역시 이러한 위험을 보완한다. 인지노동 불평등을 인식했다고 해서 곧바로 분노하거나 누군가를 비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많은 커플이 불평등을 인정하면서도 쉽게 역할을 바꾸지 못하는 까닭은, 그 역할이 이미 자신의 성격과 관계의 정체성처럼 굳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에게 계획과 돌봄을 내려놓는 일은 단순히 할 일을 덜어내는 문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가’를 다시 정하는 문제다. 반대로 지금껏 인지노동을 덜 맡아온 사람이 그 책임을 넘겨받는 일 역시 새로운 기술과 자신감을 익혀야 하는 변화다.
따라서 저자의 결론은 개인을 악당으로 만들기보다, 개인과 관계가 놓인 조건을 바꾸어야 한다는 쪽으로 향한다. 인지노동의 문제를 당사자 커플만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되며, 학교·직장·병원·공공기관도 가족에게 떠넘기는 예측과 조정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을 줄이고, 필요한 정보를 명확히 제공하며, 돌봄 친화적인 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가정 내부의 인지노동을 실질적으로 감소시킨다. 개인에게 더 잘 계획하고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라고 요구하는 대신, 애초에 누군가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조율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설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이 다루는 핵심은 단순한 가사 분담이 아니다. 무엇을 노동으로 인식할 것인지, 그 노동에 어떤 가치를 부여할 것인지, 그리고 책임과 정보를 어떻게 공유할 것인지의 문제다. 두 사람이 각각 절반씩 일을 맡았다는 숫자만으로는 평등을 판단할 수 없다. 한 사람이 전체 계획을 세우고 다른 사람이 지시받은 일부 행동만 수행한다면, 육체적 노동은 나누었어도 인지적 부담은 여전히 한쪽에 남아 있다. 반대로 정확히 50 대 50이 아니더라도 두 사람이 현재의 역할을 함께 선택했다고 느끼고, 서로의 부담과 기여를 충분히 알고 있다면 관계의 만족도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공정함은 동일한 양의 일을 나누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맡은 일이 무엇인지 상대가 알고, 상대의 일이 내 삶을 어떻게 가능하게 하는지 이해하며, 상황이 달라질 때 역할을 다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인지노동은 생각의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기에 쉽게 과소평가되고, 과소평가되기에 한 사람의 성격이나 사랑으로 흡수된다. “당신은 원래 꼼꼼하잖아”, “당신이 더 잘하잖아”라는 칭찬은 때로 한 사람에게 책임을 영구 배정하는 문장이 될 수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가 하는 수많은 판단을 노동으로 세지 않았다. 그저 내가 책임감이 강하고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누군가가 편안하게 하루를 보내도록 필요한 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사고가 나지 않게 순서를 짜고, 선택지를 비교하고, 일정을 기억하며, 결과를 확인하는 일도 분명한 노동이다. 그것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서 노동이 아닌 것은 아니다. 기꺼이 했다고 해서 피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 책이 내게 준 가장 큰 변화는 불만을 키운 것이 아니라, 피로를 해석할 수 있는 언어를 준 것이다. 나는 내가 왜 늘 지쳤는지 조금 더 정확히 알게 되었다. 동시에 내가 책임을 많이 맡았기 때문에 더 많은 권한을 쥐고, 그 권한을 놓지 못한 순간도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누가 더 나쁜 사람인지 판정하는 일이 아니라, 무엇이 누구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지를 함께 꺼내놓는 일이다.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가사노동에 관한 책이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삶을 얼마나 많이 생각하며 살아가는지에 관한 책이다. 가족을 유지하는 것은 손으로 수행하는 일만이 아니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고, 여러 사람의 필요를 조율하며, 실패를 예방하는 정신적 작업으로 이루어진다. 그 노동을 가시화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피로를 정당하게 이해하고, 타인의 기여를 제대로 바라보며, 관계를 다시 설계할 가능성을 얻는다.
구조를 보되 사람을 함부로 단정하지 않고, 책임을 인정하되 비난을 자동화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각자가 어떤 부담을 지고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드는 것. 이것이 내가 이 날카롭고 때로는 아픈 책에서 건져 올린 가장 중요한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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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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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운명으로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

-《비주얼 의과학사》를 읽고



나는 의학의 역사를 지나치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몸을 이해하는 일은 당연히 현대 과학에 가까운 것이고, 고대의 의술은 주술과 미신에 가까웠을 것이라고 막연히 여겼다. 히포크라테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전의 이집트 의학이 얼마나 구체적으로 몸을 관찰하고 기록했는지, 그리스 의학이 이집트의 지식 위에서 발전했는지, 갈레노스와 베살리우스와 하비와 데카르트가 어떻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몸을 다시 보게 만들었는지는 거의 알지 못했다.


《비주얼 의과학사》는 그런 나의 무지를 조용히 깨뜨린 책이다. 이 책은 의학사를 단순히 의사와 발견의 연표로 나열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기 몸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 몸을 둘러싼 신비와 금기가 어떻게 지식과 관찰로 바뀌었는지, 그 지식이 다시 해부학, 생리학, 철학, 미생물학, 유전학, 영상의학의 언어로 확장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책장을 넘길수록 나는 의학이 단지 병을 고치는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가장 오래된 지적 모험이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가장 먼저 놀라웠던 것은 고대 이집트 의학이었다. 나는 의학사의 출발점으로 히포크라테스를 먼저 떠올렸다. “의학의 아버지”라는 이름이 워낙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책은 그보다 앞선 자리, 고대 이집트의 의술을 보여준다. 인류 최초의 의사로 기록된 임호텝, 그리고 에드윈 스미스 파피루스에 담긴 외상 치료 기록은 내가 막연히 상상하던 고대 의술과 전혀 달랐다. 그 문서에는 머리, 얼굴, 목, 팔, 가슴, 어깨, 척추 등 신체 부위별 외상 사례가 기록되어 있었다. 특히 두개골과 뇌를 구분하고, 머리 손상과 뇌 손상을 관찰한 기록은 놀라웠다. 고대의 의술을 막연히 주술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낮춰 보았던 나에게, 이 장면은 거의 충격에 가까웠다.


고대 이집트의 의술은 이미 아픈 몸을 그냥 운명이나 신의 뜻으로만 넘기지 않았다. 누군가 다쳤고, 누군가는 그 상처를 보았다. 어디가 손상되었는지,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지, 어떻게 처치할 수 있는지 기록했다. 물론 그들의 지식은 오늘의 기준으로 보면 불완전했고, 틀린 설명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이 완전한 정답을 가졌는가가 아니다. 그들은 아픈 몸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고통을 이름 붙이고, 손상된 부위를 구분하고, 다음 환자를 위해 경험을 남기려 했다. 의학은 완성된 과학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몸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런 태도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이집트의 의술이 그리스로 전파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히포크라테스를 의학사의 거의 출발점처럼 생각했지만, 책을 읽다 보니 히포크라테스 역시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천재가 아니었다. 그는 고대 이집트 의술이라는 거대한 전통 위에 서 있었다. 이집트에서 축적된 의학 지식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그리스로 전달되었고, 그리스 철학과 자연관 속에서 다시 정리되고 발전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위대한 이유는 모든 것을 처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질병을 초자연적 힘이나 신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지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환자를 관찰하고, 경험을 중시하고, 진찰과 진단, 치료를 체계화했다. 의학을 기도와 주술의 영역에서 관찰과 판단의 영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지식의 흐름이 얼마나 겸손한 것인지 생각했다. 우리는 자주 어떤 위대한 이름 하나로 역사를 기억한다.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 아비센나, 베살리우스, 하비 같은 이름들은 의학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름들 뒤에는 수많은 무명의 관찰자와 기록자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의 의사들, 알렉산드리아의 해부학자들, 로마의 의사들, 이슬람 세계의 번역자와 의학자들, 중세의 수도원과 대학에서 의학 문헌을 읽고 베낀 사람들까지. 의학은 한 문명의 단독 발명이 아니라, 문명 사이를 이동한 지식의 연쇄였다.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그리스에서 로마로, 로마와 그리스의 의학이 이슬람 세계에서 보존되고 발전한 뒤 다시 서방으로 환류했다. “서양 의학”이라는 말 안에는 사실 이집트,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아랍, 중세 유럽의 지식이 겹겹이 들어 있었다.


갈레노스의 사례도 흥미롭다. 그는 수많은 해부와 실험, 관찰을 통해 인체를 체계화하려 했고, 그의 의학은 오랫동안 서양 의학의 권위가 되었다. 현대 의학의 눈으로 보면 틀린 설명도 많이 남겼다. 동물 해부를 바탕으로 인간의 몸을 추론했기 때문에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자기 시대의 한계 안에서 몸을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려 했다. 그는 동물을 해부하고, 혈관과 신경과 장기의 기능을 추론했으며, 동맥 안에 공기가 아니라 피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장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동맥에 공기가 흐른다고 믿었다. 그러나 갈레노스는 살아 있는 동물의 동맥을 묶고 절개하여 그 안에 피가 있음을 보았다. 아주 단순해 보이는 실험이지만, 그 순간 인간은 몸에 대한 오래된 오해 하나를 벗겨냈다. 의학의 진보는 언제나 거창한 선언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정말 그런가?”라는 질문 하나, 묶고 절개하고 확인하는 작은 실험 하나가 세계를 바꾼다.


물론 갈레노스 역시 틀렸다. 그는 인체의 혈액이 되돌아오지 않는 열린 흐름이라고 보았고, 심장의 구조와 기능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류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역사는 천재 한 명이 완벽한 진리를 발견하며 단번에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 관찰하고, 다른 사람이 그 관찰을 이어받고, 누군가는 틀리고, 누군가는 그 틀림을 고치며 지식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역사는 기형적인 천재의 폭발이 아니라, 거인의 어깨 위에 또 다른 거인이 올라서는 과정이었다.


그 흐름 속에서 이슬람 세계의 역할도 새롭게 보였다. 흔히 근대 의학을 유럽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의학 지식은 이슬람 세계를 거치며 보존되고 발전했다. 라제스는 홍역과 두창을 구분했고, 아비센나의 《의학정전》은 오랫동안 의학 교과서로 쓰였다. 이들은 단순한 보관자가 아니었다. 기존 지식을 종합하고, 비판하고, 체계화하며 자신들의 임상 경험과 결합했다. 지식은 한곳에 머무를 때보다 이동할 때 더 오래 살아남는다. 의학의 역사는 바로 그 사실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관찰은 다른 문명의 언어로 번역되고, 번역된 지식은 다시 교육과 진료의 체계가 되며, 그 체계는 또 다른 시대의 의학을 준비한다.


그러나 지식은 때로 권위가 되면서 다음 지식을 가로막기도 한다. 갈레노스의 의학은 한때 새로운 관찰이었지만, 이후에는 너무 큰 나무가 되어 작은 새싹들이 자라기 어려운 그늘이 되었다. 중세의 금기 속에서 해부는 오랫동안 제한되었고, 의학 교육은 고대 권위의 문장을 읽는 데 머물렀다. 교수는 책을 낭독하고, 이발사 겸 외과의가 시체를 절개하며, 학생들은 그것을 지켜보는 방식이었다. 몸은 눈앞에 있었지만, 진리는 여전히 책 속에 있다고 여겨졌다.


그 질서를 뒤집은 인물이 베살리우스였다. 그는 직접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해부하고, 직접 확인하고, 눈앞의 몸이 책과 다르면 책이 아니라 몸을 믿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장면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전환 중 하나였다. 인간의 몸이 다시 학문의 대상으로 돌아오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대하여》는 단순한 해부학 책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몸을 권위가 아니라 관찰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나는 지식이란 결국 “직접 보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가 금기와 권위 앞에서 멈추지 않고, 정말 그런가 묻고,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려 했을 때 세계는 조금씩 달라진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권위와 교회의 시선 아래에서도 몸을 다시 보았다. 그는 틀린 것을 틀렸다고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보았다. 그 태도가 근대 해부학의 문을 열었다.


하비의 혈액순환 발견도 마찬가지였다. 동맥에는 공기가 아니라 피가 흐른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혈액이 몸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대한 질문은 오래 이어졌다. 하비는 심장이 한 번 수축할 때 내보내는 혈액량을 계산했고, 그 양이 간에서 계속 새로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계산은 완전하지 않았지만, 질문은 정확했다. 혈액은 새로 만들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순환한다. 몸은 열린 흐름이 아니라 닫힌 순환계로 작동한다.


나는 이 대목이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몸 안에서 피가 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에게는 상식이다. 그러나 그 상식 역시 누군가의 의심과 계산, 관찰과 실험을 통해 얻어진 것이다. 심장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펌프로, 혈관은 길로, 피는 생명을 실어 나르는 흐름으로 다시 이해되었다. 이때 의학은 몸을 구조로 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스템으로 보기 시작한다. 장기 하나하나가 아니라 연결과 순환, 기능과 관계가 중요해진 것이다.


데카르트의 등장은 의학사가 단순히 해부와 혈액순환의 발견에 머물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나는 데카르트를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철학자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 속의 데카르트는 인간의 몸과 생명, 작동 원리와 건강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신이 만든 정교한 기계로 설명하면서도, 인간을 단순한 기계로만 환원하지 않았다. 몸과 영혼을 구분한 그의 사유는 오늘날에는 이분법적 한계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중요한 전환이었다. 몸은 더 이상 신비와 금기의 영역에만 갇혀 있지 않고, 구조와 기능의 단위로 분석될 수 있는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영혼과 의미의 문제는 철학과 신학의 영역에 남겨짐으로써, 믿음과 과학이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


데카르트에게 철학은 추상적 사고의 놀이가 아니라 몸과 삶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적 학문이었다. 이 대목에서 나는 공부가 깊어지면 왜 여러 분야로 관심이 확장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몸을 이해하려면 해부학만으로는 부족하다. 생리학이 필요하고, 철학이 필요하고, 종교와 역사, 기술과 예술까지 필요하다. 하나의 질문을 깊이 파고들면 결국 세계 전체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복잡계와 통섭이라는 말이 멀리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인간의 몸 하나를 이해하려 해도 이미 세계는 연결되어 있었다.


이후 의학사는 보이는 몸에서 보이지 않는 생명으로 나아간다. 현미경을 통해 인간은 눈으로 볼 수 없던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레이우엔훅은 작은 렌즈를 통해 미생물의 세계를 보았고, 정자와 미세한 생명체를 관찰했다. 그가 만든 렌즈 하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보는 방식을 바꾼 장치였다. 몸 밖에서 몸 안으로, 장기에서 세포로, 세포에서 미생물로 시선이 깊어지면서 의학은 다시 한 번 확장되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기 시작하자, 병의 원인도 새롭게 질문될 수밖에 없었다.


미생물학의 역사는 세균을 발견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다. 필터로 세균을 걸러냈는데도 병은 남았고, 감염성은 다음 숙주로 건너갔다. 그 빈칸에서 인간은 바이러스를 만났다. 세균보다 작고, 세포보다 단순하며, 생명과 물질의 경계에 놓인 존재. 특히 박테리오파지는 내게 익숙한 생명과학의 개념과 맞닿아 있어 더 흥미로웠다. 세균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 유전물질을 주입하고 증식하는 존재. 의학사는 여기서 다시 확장된다. 인간은 장기와 혈액, 세균을 넘어 이제 생명을 움직이는 정보의 층위까지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의학은 적을 없애는 방식으로만 발전하지 않았다. 때로는 적의 적을 발견하고, 그 생물학적 전략을 치료의 언어로 바꾸었다. 박테리오파지는 그 극적인 사례다. 세균을 감염시키는 바이러스를 이용해 병원균만 선택적으로 겨냥하려는 발상은, 의학이 점점 더 거칠고 넓은 공격에서 정밀한 표적 치료로 이동해왔음을 보여준다. 몸의 구조를 보던 의학은 이제 생명체 사이의 관계와 정보, 숙주와 감염의 전략까지 치료의 자원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CRISPR 대목에서 의학사의 방향이 한 번 더 크게 꺾이는 것을 느꼈다. 이전의 의학이 몸을 보고, 기록하고, 설명하고, 치료하는 역사였다면, CRISPR 이후의 의학은 생명의 문장 자체를 고칠 수 있는 가능성 앞에 선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출발점이 인간의 발명이 아니라 세균의 면역 기억이었다는 사실이다. 세균은 바이러스의 침입 흔적을 자기 유전체 안에 저장했고, 같은 적이 다시 침입하면 그 서열을 알아보고 잘라냈다. 인간은 그 오래된 생존 전략을 발견해 유전자 편집 도구로 바꾸었다. 세균이 살아남기 위해 진화시킨 무기가, 인간에게는 생명의 문장을 고치는 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경이는 곧바로 두려움과 만난다. 유전자 편집은 유전 질환 치료의 희망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인간이 어디까지 생명을 고쳐도 되는가라는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의학사는 고통을 줄이려는 인간의 역사였지만, CRISPR는 그 선의가 언제든 인간 자체를 설계하려는 욕망으로 넘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기술 앞에서 필요한 것은 흥분만이 아니다. 생명을 고칠 수 있는 힘만큼,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않을 윤리의 감각도 함께 자라야 한다.


MRI의 원리도 뜻밖의 지적 즐거움을 주었다. 나는 MRI가 자기력을 이용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몸속 수소 원자핵이 작은 자석처럼 반응하고, 자기장과 고주파 자극 속에서 발생한 미세한 신호를 읽어 영상으로 재구성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MRI는 몸을 직접 “보는” 장치라기보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해석하는 장치였다. 수소 원자핵의 흔들림과 공명, 회복 속도의 차이를 읽어내고, 그 차이를 영상으로 바꾸는 기술. 몸은 이제 칼로 열어야만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물리학적 신호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세계가 되었다.


이 대목에서 의학사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실감했다. 고대의 의사는 상처를 보았고, 베살리우스는 시체를 열었고, 하비는 피의 흐름을 계산했다. 레이우엔훅은 렌즈로 보이지 않는 생명을 보았고, 현대 의학은 원자핵의 신호를 읽어 몸속을 영상으로 재구성한다. 의학은 신비에서 관찰로, 관찰에서 구조로, 구조에서 시스템으로, 시스템에서 정보와 신호의 해석으로 나아갔다. 몸은 점점 더 깊이 읽히는 텍스트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지식을 얻는 기쁨을 자주 느꼈다.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기쁨, 내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상식의 뒤편에 수천 년의 관찰과 오류와 용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기쁨이었다. 고대 의학을 무시하고 있던 나의 편견이 깨졌고, 히포크라테스 한 사람으로만 기억하던 의학의 뿌리가 이집트와 그리스, 이슬람 세계와 중세 대학, 르네상스 해부학과 근대 생리학, 미생물학과 유전학, 영상의학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흐름 속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책의 장점은 바로 그 흐름을 눈으로 보게 해준다는 데 있다. 제목 그대로 비주얼 자료가 풍부하다. 파피루스, 중세 필사본, 해부도, 실험 그림, 의학자들의 초상과 도판, 현미경 이미지와 MRI 원리도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그것들은 지식이 어떻게 기록되고 전승되고 수정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그림 하나, 도표 하나를 따라가다 보면 의학의 역사가 더 이상 추상적인 설명이 아니라 생생한 장면으로 다가온다. 누군가는 시체 앞에 섰고, 누군가는 동맥을 묶었고, 누군가는 심장의 혈류를 계산했으며, 누군가는 렌즈 앞에서 미지의 생명체를 보았고, 누군가는 세균의 면역 기억에서 유전자 편집의 가능성을 읽어냈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수의학을 향한 내 마음도 다시 떠올렸다. 인간의 의학이든 동물의 의학이든 출발점은 같다. 아픈 몸을 자세히 보는 것.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읽으려 하는 것. 증상을 운명이나 성격이나 약함으로 돌리지 않고, 그 안에 어떤 신호가 있는지 묻는 것. 고대 이집트의 의사들이 상처를 기록하고, 히포크라테스가 환자를 관찰하고, 갈레노스가 몸속 구조를 설명하려 하고, 베살리우스가 직접 해부하고, 하비가 혈액의 흐름을 계산한 일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다. 고통을 이해하려는 방향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단순한 의학사가 아니다. 인간이 자기 몸을 신비에서 지식으로, 금기에서 관찰로, 구조에서 시스템으로, 다시 정보와 신호와 정신의 관계로 확장해온 역사다. 인간은 몸을 몰랐고, 그래서 두려워했다. 그러나 동시에 알고 싶어 했다. 병을 이해하고 싶었고, 고통을 줄이고 싶었으며, 죽음 앞에서 조금이라도 더 정확한 판단을 하고 싶었다. 그 욕망이 의학을 만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책의 마지막 장은 결말이라기보다 다시 시작점처럼 느껴졌다. 역사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현미경 앞에 앉아 있고, 누군가는 데이터 속에서 패턴을 찾고 있으며, 누군가는 오래 붙들어 온 질문의 답에 막 다가서고 있다. 의학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인간은 여전히 몸을 모르고, 그래서 계속 묻는다. 어디가 아픈가. 왜 아픈가. 어떻게 하면 덜 고통받고 더 살릴 수 있는가.


《비주얼 의과학사》가 내게 남긴 감정은 바로 그 질문의 생생함이었다. 미지의 세계가 열릴 때의 기쁨, 내가 당연하게 여긴 상식 뒤에 수많은 사람의 관찰과 오류와 용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이. 이 책을 읽고 나니 의학사는 차갑고 딱딱한 과학의 연대기가 아니라, 고통을 운명으로 두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이 남긴 가장 오래되고 치열한 질문의 기록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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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끝
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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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이 부서진 세계, 멸망과 일상의 간극을 헤아리다


— 김성일, 《시간의 끝》을 읽고



최근 SF나 판타지 계열의 소설을 거의 읽지 않았다. 그래서 김성일의 《시간의 끝》을 펼쳤을 때도 처음에는 장르적 재미를 기대했다. 달이 파괴되고, 사교도들이 출몰하며, 수학자가 시간의 비밀을 추적하고, 형사가 사건의 뒤를 쫓는 이야기. 설정만 놓고 보면 종말을 배경으로 한 SF 미스터리처럼 보였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니 이 소설은 우주의 끝보다 더 오래 남는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다가왔다. 세계가 해석되지 않을 때 인간은 무엇을 믿는가. 멸망이 끝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지키려 하는가.


《시간의 끝》의 세계는 처음부터 정상적이지 않다. 달은 파괴되었고, 밤하늘에는 온전한 달이 아니라 부서진 파편이 떠 있다. 테러가 벌어지고, 괴물에 대한 목격담이 떠돌며, 사교도들은 혼란을 자신들의 언어로 해석한다. 좋은 소식은 사라지고 세계는 점점 흉한 곳이 되어간다. 이 세계의 무서움은 단순히 멸망이 가까워졌다는 데 있지 않다. 더 두려운 것은 아무도 이 세계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과학도, 수사도, 종교도, 개인의 기억도 현실의 균열을 완전히 붙잡지 못한다.


이런 세계에서 종교적 광신은 단순한 배경 장치가 아니다. 사교도 집단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해석 체계의 어두운 형식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혼란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결론을 오래 버티지 못한다. 달이 부서졌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계시라고 부르고, 시간이 뒤틀렸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예언이라고 부르며, 멸망이 가까워졌다면 누군가는 그 멸망의 의미를 독점하려 한다. 광신은 비이성의 산물이지만, 동시에 설명되지 않는 세계를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인간 욕망의 뒤틀린 결과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시간의 끝》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를 떠올리게 한다. 두 작품은 전혀 다른 결의 소설이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하늘 아래 놓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1Q84》에서는 두 개의 달이 뜨고, 《시간의 끝》에서는 달이 파괴된다. 하나는 세계가 어긋났다는 신호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가 이미 부서졌다는 증거다. 달이 달라진 세계에서 인간은 더 이상 이전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현실이 믿을 수 없게 되는 순간, 사람들은 새로운 믿음을 만든다. 그 믿음은 사랑이 될 수도 있고, 구원이 될 수도 있으며, 때로는 종교적 폭력과 광신이 될 수도 있다.


《시간의 끝》이 흥미로운 것은 멸망을 단순한 최종 사건으로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많은 이야기에서 멸망은 막아야 할 대상이고, 결말은 그 멸망을 막았는지 실패했는지로 결정된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멸망은 직선적인 끝이라기보다 되돌아오는 구조에 가깝다. 시작은 끝을 낳고, 끝은 다시 시작의 조건이 된다. 누군가의 죽음은 세계를 막아 세우지만, 동시에 다른 믿음과 세계관이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 파국은 종결되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재배치된다.


처음에는 이 구조가 거대한 SF적 장치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읽을수록 이것이 삶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도 한 번의 결심이나 한 번의 사건으로 완전히 바뀌지 않는다. 오늘 수영장에 가면 내일도 수영장에 갈 확률이 높아지고, 오늘 책상 앞에 앉으면 내일의 공부가 조금 덜 낯설어진다. 반대로 오늘 흐름이 끊기면 내일도 그 끊김 위에서 시작하게 된다. 오늘 글을 쓰면 내일의 문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오늘 미루면 내일의 미룸은 더 자연스러워진다. 삶은 극적인 전환보다 이런 작은 관성들에 의해 더 많이 움직인다.


물론 되풀이되는 일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우리 집 고양이들의 구토와 방뇨로 인한 청소는 끝나지 않는 굴레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매일 약을 먹이고, 오줌과 똥을 치우고, 아무 데나 방뇨한 자리를 닦고, 토사물을 치우고, 깨진 그릇 조각을 쓸어 담는다. 그 순간에는 당연히 투덜대고 지친다. 겨우 치웠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곳에서 냄새가 나고, 겨우 정리했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사고가 벌어진다. 돌봄은 종종 숭고한 마음보다 먼저 몸을 숙여 닦고 치우는 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지겨운 반복이 아주 귀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아이들이 사고칠 만큼 건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말썽은 살아 있음의 다른 이름일 때가 있다. 오늘 또 치워야 할 일이 생겼다는 것은, 오늘도 내 곁에 돌봐야 할 생명들이 있다는 뜻이다. 매일의 청소는 끝나지 않는 노동이지만, 동시에 내가 지키고 싶은 삶의 내용이기도 하다. 나는 지치면서도 안도한다. 투덜대면서도 고맙다. 아이들이 여전히 뛰고, 먹고, 아프고, 사고치며, 내 생활을 어지럽힐 만큼 살아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생각하면 《시간의 끝》 속 인물들이 여러 사람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면서까지 멸망을 막으려 하는 이유도 조금 다르게 보인다. 그들이 지키려는 것은 대단히 찬란한 미래만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다시 반복될 평범한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밥을 먹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익숙한 길을 걷고, 지겹다고 말하면서도 다시 살아가는 시간. 멸망을 막는다는 것은 세계 전체를 구한다는 거창한 말 이전에, 그런 아무렇지 않은 일상을 하루 더 가능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희생은 허무하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완전한 구원을 만들지 못한다. 희생을 치러 막은 세계의 멸망은 다른 시간축 위에서 또 다른 파국을 불러올 수 있다. 시작은 결백하지 않고, 끝은 완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점에서 이 소설은 이상하게 현실적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일상의 안정도 어쩌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선택과 손실, 돌봄과 버팀 위에 잠시 허락된 시간일 수 있다. 평범한 하루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다. 반복되는 일상은 지겨운 굴레이면서 동시에 비싼 대가를 치르고 얻은 귀한 유예다.


《시간의 끝》을 읽고 남은 것은 멸망의 공포만이 아니었다. 끝나지 않는 세계 속에서도 사람들이 왜 다시 멸망을 막으려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었다. 그들은 완벽한 희망을 믿어서가 아니라, 다시 돌아올 하루의 가치를 알기 때문에 필사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거대한 구원의 확신이 있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도 밥을 먹이고, 약을 먹이고, 바닥을 닦고, 책상 앞에 앉고, 수영장에 가고, 문장을 잇는다. 사소하고 지겹고 때로는 버거운 그 반복 속에 삶의 아름다움이 있다.


어쩌면 인간이 멸망 앞에서 끝내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희망이 분명해서가 아니라, 아무렇지 않게 이어지는 하루가 사실은 너무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의 끝》은 세계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결국 일상의 가치를 묻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달이 부서지고, 시간이 뒤틀리고, 광신이 세계를 해석하려 들 때에도 인간이 지키려는 것은 어쩌면 가장 평범한 삶이다. 다시 아침이 오고, 누군가가 살아 있고, 투덜대며 치워야 할 일이 남아 있는 세계. 그 지루하고 아름다운 유예를 위해 사람들은 끝내 멸망을 막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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