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지구를 먹어치우는가 - 초가공식품과 식품산업이 만들어낸 게걸스러운 인류의 탄생
헨리 딤블비.제미마 루이스 지음, 김선영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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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지구를 먹어치우는가>를 읽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여러 번 무너졌다. 환경 문제를 다룬 책은 많았지만, 이 책은 나를 설득하거나 가르치려 않았다. 대신 내가 서 있던 바닥 자체를 흔들었다. 문제는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아니라, 내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 들여온 풍요라는 개념이 무엇을 갈아 넣어 만들어진 결과였는지를 끝까지 보게 만들었다는 데 있었다.

 

우리들은 늘 성과만 배워왔다. 질소비료는 인류를 먹여 살렸고,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늘렸으며, 기근을 해결한 기술로 흔히 설명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아산화질소의 온실효과에 대해서는 배운 적이 없었다. 이 선택적 무지는 개인의 태만이라기보다 시스템의 구조에 가깝다. 효과는 명시되고, 대가는 지워진다. 그렇게 인간은 풍요를 축적하면서도 파괴의 비용을 감각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 책이 보여주는 환경 파괴는 누군가의 악의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모두가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결정들의 축적이다. 효율을 따지고, 생산성을 높이고,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놓여 있는 이 시스템은 더 무섭다. 책임은 분산되고, 결과는 누적되며, 시스템은 감정 없이 작동한다. 그 안에서 개인은 점점 작아지고,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너무 쉽게 반복된다.

 

이탄 습지에 대한 서술은 특히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비옥한 토지라 여겨 개간되었을 자리들이 사실은 수천 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저장고였다는 사실을 나는 미처 몰랐다. 이탄습지는 고유명사가 아닌 분류명이지만, 그 개념이 주는 무게는 특정 장소의 이름처럼 또렷했다. 이탄은 한 번 산소에 노출되면 되돌릴 수 없다. 수천 년의 시간이 수십 년 만에 공기로 흩어진다. 우리는 땅을 쓸모로만 평가하면서, 그 안에 축적된 시간을 갈아버렸다.

 

우리 나라의 새만금은 이탄습지는 아니지만, 파괴의 방식과 결과는 놀라울 만큼 닮아있다. 갯벌 역시 블루카본을 저장하는 탄소 저장고이고, 방조제와 배수로를 통해 산소가 유입되자 그 역할을 잃었다. 건드리지 않았을 때는 가치가 보이지 않던 공간들이, 사라진 뒤에야 무엇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그간 완성된 생태를 늘 미개발로 오해해왔다.

 

이 책을 읽으며 인간이 무서워졌다. 인간이 잔인해서가 아니라, 너무 영리해서 자기에게 불리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지워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보지 않기로 선택해왔는지, 무엇을 배우지 않기로 합의해왔는지를 깨닫는 순간, 누구라도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절망을 강요하는 건 아니다. 시장에 맡길 것인가, 규제할 것인가, 개인의 윤리에 기대야 하는가 같은 질문들은 모두 불완전한 해답을 품고 있다. 어설픈 개혁은 위험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복잡함을 견디는 일 자체가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태도임을 이 책은 말없이 보여준다.

 

개인은 이 무서운 파괴를 막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책은 행동 지침을 주지 않는다. 대신 감각을 바꾼다. 이전처럼 먹고, 소비하고, 선택할 수 없게 만든다. 풍요를 누릴 때마다 그 비용을 떠올리게 하고, 싸고 편한 선택 앞에서 한 번 더 멈칫하게 만든다. 이는 세상을 구하겠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더 이상 덜 보며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자각에 가깝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자주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무력감에 화가 나고, 슬퍼졌다. 하지만 동시에 이 감각을 외면하지 않고 기록하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환경 문제는 숫자와 보고서로만 존재할 때 쉽게 잊힌다. 그러나 누군가의 몸과 선택, 일상 속 감각으로 내려올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이 책이 남긴 가장 큰 변화는 바로 그 지점에 있었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이전보다 느리게 선택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완벽하게 살겠다는 다짐도,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결심도 아니다. 다만 풍요의 이면을 알고 살아가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우리는 지구를 갈아서 먹고 살아왔다. 이제 적어도, 그 사실을 알고 살아가게 되었다. 그 인식 변화 하나만으로도 이 책은 존재 가치가 충분하다.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의 손에 들려서 함께 읽고 함께 걱정하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무서워하면서 어제보다 나은 선택을 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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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객관 - 과잉 정보의 시대, 본질을 보는 8가지 규칙
키코 야네라스 지음, 이소영 옮김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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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꾸 잘못 생각하는가

 

<직관과 객관>은 인간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판단 방식, 특히 직관이 얼마나 체계적인 오류에 취약한지를 분석하는 책이다. 이 책의 핵심 문제의식은 명확하다.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적인 존재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확률·통계·논리적 추론에서 반복적으로 동일한 실수를 저지른다. 저자는 이 실수가 개인의 지능이나 성향 때문이 아니라, 인간 인지 구조 자체의 특성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책의 전반부에서 다루는 대표적인 개념은 기저율 오류(base rate fallacy). 사람들은 특정 사건이 발생할 확률을 판단할 때, 해당 사건이 전체 집단에서 얼마나 빈번한지를 나타내는 기저율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검사 결과가 양성이라는 정보는 즉각적인 정서 반응을 유발하지만, 그 결과가 어떤 분포 속에서 나왔는지를 고려하지 않으면 판단은 왜곡된다. 이 책은 이러한 오류가 의료 판단, 범죄 추론, 사회적 낙인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반복된다는 점을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이와 연결되는 개념이 베이즈 정리다. 베이즈 정리는 새로운 정보가 주어졌을 때 기존의 믿음을 어떻게 갱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수학적 원리지만, 책에서는 이를 사고 태도의 문제로 확장한다. 사람들은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도 기존 신념을 수정하기보다, 그 신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보를 해석한다. 이는 저자가 말하는 망치형 사고의 특징이다. 반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 두고 판단을 조정하는 태도는 스펀지형 사고로 설명된다. 이 대비는 사고 방식의 차이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정보 처리 구조의 차이임을 분명히 한다.

 

중반부 이후 책의 논의는 단일한 판단 오류를 넘어 복잡계적 사고로 확장된다. 저자는 현실 세계의 많은 문제들이 단순한 원인-결과 관계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작은 변수의 차이가 장기적으로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으며, 선택의 비용과 효과는 즉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직관은 단기적 이득과 눈에 보이는 결과에 과도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문제의 일부만 보고 결정을 내리는 경향을 보인다.

 

이 지점에서 트레이드오프와 파레토 최적 개념이 등장한다. 모든 선택에는 비용과 이익이 동시에 존재하며, 모든 이해관계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해답은 거의 없다. 파레토 최적은 누군가의 상태를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누군가의 상태를 개선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지만, 이는 현실에서의 갈등을 해결하는 도구라기보다 판단의 기준점에 가깝다. 저자는 이와 같은 개념을 통해 완벽한 선택에 대한 기대 자체가 비현실적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후반부에서 내가 인상 깊게 본 또 하나의 주제는 에너지와 자원의 배분에 대한 논고였다. 저자는 균형을 모든 영역에 동일한 노력을 분배하는 상태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어디에 집중하고 무엇을 포기할지를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 판단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이는 파레토 법칙과도 연결되며, 인간이 제한된 인지 자원과 시간 속에서 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정보 과잉 시대의 판단 문제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현대적인 시사점이 아주 큰 책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도한 정보 속에서 판단 오류를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더 자주 그릇된 확신에 빠지곤 한다. 이 책은 문제의 원인을 정보 부족이 아니라 사고 방식에 두며, 기저율을 확인하는 습관, 반대 논리를 검토하는 태도, 확률을 단정이 아닌 경고 신호로 해석하는 관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책은 직관을 배제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직관을 무비판적으로 신뢰하는 태도가 얼마나 많은 오류를 낳는지를 구조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따름이다. <직관과 객관>은 더 똑똑해지기 위한 책이라기보다, 복잡계 속에서 우리가 자칫 너무 성급한 확신에 빠지는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책에 가깝다. 판단을 유예하고, 정보를 맥락 속에 배치하며, 자신의 신념을 수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태도는 현대 사회에서 합리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 조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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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왕국 - 식물은 어떻게 문명과 권력을 설계했는가
데이비드 스펜서 지음, 배명자 옮김 / 흐름출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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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식물을 둘러싼 방대한 시간을 한 권의 연대기로 엮어낸다. 저자는 식물을 단순한 배경이나 자원이 아닌, 지구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선택하고 적응해온 주체로 다룬다. 광합성을 통해 대기를 바꾸고, 균류와의 공생으로 육상에 정착하며, 수억 년에 걸쳐 생태계의 토대를 형성해온 과정은 식물이 얼마나 능동적으로 환경에 개입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제시하는 식물의 역사는 느리고 수동적인 생명이라는 통념을 뒤집는다.

 

인상적인 부분은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일방적 지배의 서사가 아니라 공진화의 역사로 재구성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농업을 시작하며 식물을 길들였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진화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 역시 식물이 제공한 조건 안에서 선택을 해온 존재였다. 인간의 이동 경로와 정착지는 식물의 생태와 깊이 맞물려 있었고, 씨앗의 확산과 재배의 역사는 식물에게도 생존 전략이 되었다. 이 책은 누가 누구를 길들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 중심적 사고에 균열을 낸다.

 

식물의 주체성에 대한 논의는 생리학과 생태학의 성과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전개된다. 식물은 신경계를 갖고 있지 않지만, 자극을 감지하고 기억하며 반응한다. 뿌리와 균류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교환, 화학 신호를 통한 경고와 협력은 식물이 환경을 수동적으로 견디는 존재가 아님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러한 특성을 과도하게 의인화하지 않으면서도, 인간만이 유일한 행위자라는 관점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재배와 개량의 윤리다. 멘델의 유전 법칙에서 현대의 유전자 편집 기술에 이르기까지, 식물 개량의 역사는 과학 발전의 상징처럼 다뤄져왔다. 그러나 저자는 이 과정이 언제나 긍정적이지만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 지역에 축적된 재배 지식과 토착 종자의 다양성은 산업화 과정에서 급격히 축소되었고, 생물 자원의 상업적 이용은 종종 그 기원과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전통의 이름으로 이어져 내려온 재배 기술에 대한 보상에 대한 논의조차 없이 진행되어 왔다. 저자가 식물 해적 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지점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이자 윤리적 경고로 읽힌다.

 

공리주의적 효율 논리가 농업과 생명공학 영역에서 얼마나 쉽게 윤리적 질문을 밀어내는지를 짚는 대목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수확량과 생산성은 분명 중요한 기준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생물 다양성의 상실, 지역 공동체의 지식 붕괴, 그리고 장기적 생태 불안정성은 결국 인간 사회로 되돌아온다. 이 책은 재배를 기술적 행위가 아닌 관계적 행위로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공생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 문명은 식물의 협력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다. 식량뿐 아니라 의약, 주거, 문화적 상징까지 식물은 인간 삶 전반에 깊숙이 관여해왔다. 그렇기에 저자가 강조하는 윤리는 식물을 보호하자는 도덕적 선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지속 가능성을 다시 묻는 질문에 가깝다. 어떤 방식으로 재배하고, 어떤 가치를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선택하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식물을 신비화하지도, 인간을 일방적으로 비판하지도 않는다. 대신 긴 시간의 스케일 위에서 인간과 식물이 맺어온 관계를 차분히 복원하며, 그 관계를 앞으로 어떻게 이어갈 것인지를 독자에게 묻는다. 저자가 그려내는 식물의 연대기를 따라가다 보면,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기보다는 상호 의존적 구성원임을 인정하는 태도가 왜 필요한지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 책은 식물에 대한 과학서이자, 동시에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성찰하게 하는 윤리적 사유의 장으로 읽힐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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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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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님의 <간단후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탈출도 허락하지 않는 소설이다. 읽는 동안 독자는 끊임없이 숨이 막히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이 작품이 왜 희망을 배제한 채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여성의 몸에 새겨진 폭력 역시 종료되지 않는다. 주인공 요코는 끝내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임신한 몸으로 오늘도 군인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준비한다. 이 엔딩은 잔혹하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정확하다. 이 작품의 핵심은 전쟁 중 벌어진 비극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봉합된 역사, 그리고 그 봉합 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겪어야 했던 이중의 폭력이다. 요코는 살아남았지만 구원받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남았기 때문에 더 오래, 더 깊이 고통 속에 놓인다. 그녀의 생존은 기적이 아니라 형벌에 가깝다.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임신과 출산의 문제는 단순한 모성 서사가 아니다. 요코가 아이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아이의 기저귀를 마련할 각반을 모으는 장면은 독자를 윤리적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이 욕망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라, 이 세계에 아이를 들여보내지 않으려는 마지막 방어다. 아이를 낳는 순간, 그 아이 역시 전쟁의 연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이 아이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몸처럼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렇기에 엔딩에서 유코의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 미완의 임신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은유다. 전쟁은 총성이 멎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책임지지 않은 순간, 사죄하지 않은 순간,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전쟁은 다른 형태로 지속된다. 요코가 여전히 군인을 데리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장면은, 전쟁이 그녀의 몸을 통해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사적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조국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온전히 공론화하지 않은 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고,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덮었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국가의 외교 논리 앞에서 지워졌다. 살아 있는 증언자들은 침묵을 강요받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몇 해 전,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의 수가 한 자릿수로 줄었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우리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간단후쿠>의 엔딩은 바로 이 현실을 상징한다. 요코의 삶이 멈춰 있듯, 이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은 채 정지되어 있다. 국가로부터도, 가해국으로부터도 제대로 된 사죄를 받지 못한 이상, 이 서사는 과거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애써 위로하지 않는다.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는다. 대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인물이 끝내 구원 서사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요코는 투사가 되지도, 증언자가 되지도, 새로운 삶을 찾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저 오늘을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 하루는 어제와 다르지 않다. 이 반복은 지옥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지옥을 벗어나게 하는 대신, 독자를 그 안에 남겨 둔다. 이는 잔인함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다. 독자가 쉽게 감동하고, 슬퍼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 이 역사는 다시 한번 소비재로 쓰이고 잊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답장은 마세요.”라는 문장은, 단순한 문장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이것은 독자에게 보내는 경고다. 섣부른 위로, 쉽게 하는 이해, 감정의 정리조차 이 서사 앞에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알고 있다. 이 작품은 해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을 요구한다. 끝내 태어나지 않는 아이처럼,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질문을 독자의 마음속에 남겨 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고, 죄송하고, 분노를 일으킨다. 읽고 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바로 그 감정이 이 작품의 윤리다.

 

<간단후쿠>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지만, 책임을 돌려준다.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아직 이 문제를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요코는 오늘도 준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의무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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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작가님의 <간단후쿠>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 치의 탈출도 허락하지 않는 소설이다. 읽는 동안 독자는 끊임없이 숨이 막히고,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이 작품이 왜 희망을 배제한 채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여성의 몸에 새겨진 폭력 역시 종료되지 않는다. 주인공 요코는 끝내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임신한 몸으로 오늘도 군인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준비한다. 이 엔딩은 잔혹하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도 정확하다. 이 작품의 핵심은 전쟁 중 벌어진 비극이 아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봉합된 역사, 그리고 그 봉합 위에서 살아남은 자들이 겪어야 했던 이중의 폭력이다. 요코는 살아남았지만 구원받지 못했다. 오히려 살아남았기 때문에 더 오래, 더 깊이 고통 속에 놓인다. 그녀의 생존은 기적이 아니라 형벌에 가깝다.


소설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임신과 출산의 문제는 단순한 모성 서사가 아니다. 요코가 아이가 죽기를 바라면서도 아이의 기저귀를 마련할 각반을 모으는 장면은 독자를 윤리적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러나 이 욕망은 생명의 부정이 아니라, 이 세계에 아이를 들여보내지 않으려는 마지막 방어다. 아이를 낳는 순간, 그 아이 역시 전쟁의 연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알고 있다. 이 아이는 보호받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몸처럼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렇기에 엔딩에서 유코의 아이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 미완의 임신은 끝나지 않은 전쟁의 은유다. 전쟁은 총성이 멎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국가가 책임지지 않은 순간, 사죄하지 않은 순간, 기억하지 않기로 선택한 순간부터 전쟁은 다른 형태로 지속된다. 요코가 여전히 군인을 데리고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장면은, 전쟁이 그녀의 몸을 통해 여전히 현재형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역사적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조국으로 돌아온 생존자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한국 사회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온전히 공론화하지 않은 채,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했고, ‘독립축하금이라는 이름으로 문제를 덮었다. 피해자의 목소리는 국가의 외교 논리 앞에서 지워졌다. 살아 있는 증언자들은 침묵을 강요받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관심은 사라졌다. 몇 해 전, 생존해 있는 위안부 할머니의 수가 한 자릿수로 줄었다는 기사가 나왔을 때, 우리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간단후쿠>의 엔딩은 바로 이 현실을 상징한다. 요코의 삶이 멈춰 있듯, 이 문제 역시 해결되지 않은 채 정지되어 있다. 국가로부터도, 가해국으로부터도 제대로 된 사죄를 받지 못한 이상, 이 서사는 과거가 될 수 없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애써 위로하지 않는다.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는다. 대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끝낼 수 있는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인물이 끝내 구원 서사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요코는 투사가 되지도, 증언자가 되지도, 새로운 삶을 찾지도 않는다. 그녀는 그저 오늘을 살아갈 따름이다. 그리고 그 하루는 어제와 다르지 않다. 이 반복은 지옥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지옥을 벗어나게 하는 대신, 독자를 그 안에 남겨 둔다. 이는 잔인함이 아니라 윤리적 선택이다. 독자가 쉽게 감동하고, 슬퍼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순간, 이 역사는 다시 한번 소비재로 쓰이고 잊히기 때문이다.

 

마지막 페이지에 적힌 답장은 마세요.”라는 문장은, 단순한 문장 이상의 무게를 지닌다. 이것은 독자에게 보내는 경고다. 섣부른 위로, 쉽게 하는 이해, 감정의 정리조차 이 서사 앞에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저자는 알고 있다. 이 작품은 해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을 요구한다. 끝내 태어나지 않는 아이처럼, 끝내 마무리되지 않는 질문을 독자의 마음속에 남겨 둔다. 그래서 이 소설은 슬프고, 죄송하고, 분노를 일으킨다. 읽고 나면 마음이 아프다. 그러나 바로 그 감정이 이 작품의 윤리다.

 

<간단후쿠>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않지만, 책임을 돌려준다.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아직 이 문제를 끝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요코는 오늘도 준비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현재를 외면하지 말아야 할 의무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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