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삶 사이에서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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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과 삶 사이에서는 지식을 다루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겨냥하는 것은 지식 이후의 태도, 다시 말해 앎이 삶을 통과하지 못할 때 벌어지는 윤리적 붕괴들이다. 저자는 수많은 불평등과 불합리 앞에서 멈추어 반복해서 묻는다. 우리는 알고 있음에도 왜 멈추지 않는가. 왜 설명은 넘치는데, 책임은 사라지는가. 이 질문은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 더욱 노골적인 현실이 되었다.

 

차별금지법은 여전히 유보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말은 십수 년째 반복되어 왔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합의의 부재가 아니라 결단의 부재이다. 정치인들은 동성애 반대, 소수자 혐오에 기대어 표를 관리하면서도 그것을 표현의 자유혹은 종교적 신념이라는 말로 포장한다. 이때 정치의 EQ는 급격히 붕괴한다. 타자의 얼굴은 사라지고, 군중의 감정만 계산된다.

 

저자의 제목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이러한 현상이야 말로 앎이 삶을 회피하는 순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알고 있으나, 그 안에서 살지 않는 상태다. 통계와 보고서는 충분하지만, 고통 앞에서 멈추지 않는 상태,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애당초 차별과 계층화를 당연시 했던 지난 정권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국회 다수당 차지에 이어 정권까지 바뀐 소위 진보를 부르짖는 현 정권에서도 사정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은 더이상 무지가 아니다. 오히려 지식을 윤리에서 분리한 상태, 냉각된 앎이며, 선택된 정치다.

 

이 책에서 특히 날카로운 비판은 갯벌 매립 문제에서 드러난다. 갯벌이 어떤 생태적 가치를 지니는지, 탄소 흡수와 생물다양성 측면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정부도 알고 있다. 연구 자료는 차고 넘친다. 그럼에도 매립은 강행된다. 이유는 단순하다. 경제성이라는 이름의 탐욕 때문이다.

 

개발이 가능한 평지, 산업단지, 항만 확장이라는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갯벌은 생명 공간이 아니라 미래 수익이 된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단호하다. 이는 성장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우선순위가 붕괴된 정치라고. 환경 파괴보다 경제적 이익이 우선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권의 단기 성과 욕망이 공동체의 장기 생존을 압도하는 구조다.

 

이 구조는 잼버리 사태에서 반복되었다. 갯벌을 매립한 땅 위에 그늘 없는 야영지를 조성하고, 국제행사를 유치하며,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경제 효과를 이야기했다. 결과는 탈진한 아이들의 몸이었다. 그러나 정치의 언어는 끝내 그 몸을 향하지 않았다. 대신 예산, 책임 주체, 전 정부 탓이 오갔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EQ 붕괴를 목격한다. 고통을 감지하지 못하는 권력, 혹은 감지해도 반응하지 않는 권력, 그것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정치적 리더들의 한심한 민낯이다.

 

앎과 삶 사이에서는 이런 상태를 설명은 가능하지만 응답하지 않는 사회라고 진단한다. 차별금지법 유보도, 혐오 발언도, 행정 무능도 같은 뿌리를 가진다. 그것은 타자의 고통을 정치적 비용으로 계산하는 태도다. 소수자는 표가 되지 않기에 미뤄지고, 환경은 당장 성과가 되지 않기에 매립되며, 아이들의 안전은 행사 성공이라는 숫자 뒤로 밀린다.

 

이는 단지 정책 실패가 아니다. 지난 세월 동안 정치권은 반복적으로 감정적 공백을 드러낸다. 사과는 형식이 되고, 공감은 연출이 되며, 책임은 법적 책임 여부로 축소된다. 이것이 바로 EQ 붕괴 정치다. 감정이 과잉된 정치가 아니라, 감정이 제거된 정치라고 해야 할까.

 

한나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음이 악을 가능하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오늘 날 대한민국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로 말할 수 있을까? 내 눈에 비친 이 사회는 느끼지 않음에 가까워 보인다. 레비나스의 언어를 빌리자면, 타자의 얼굴이 더 이상 명령하지 않는 사회다. 갯벌의 생명, 소수자의 존엄, 아이들의 안전이 모두 관리 대상으로 전락하는 순간, 정치는 기술 행정으로 퇴행한다.

 

프리모 레비가 말했듯, 증언은 살아남은 자의 특권이 아니라 남겨진 자의 의무다. 앎과 삶 사이에서는 그 의무를 독자에게 넘긴다. 알고 있는 것을 삶으로 옮길 것인가, 아니면 또 하나의 잘 아는 실패로 남길 것인가.

 

이 책을 읽고 나면, 누구도 더 이상 몰랐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을 미루는 정치, 혐오를 방치하는 권력, 갯벌을 매립하는 개발 논리, 아이들의 안전을 관리 실패로 축소하는 국가가 하나의 연속선 위에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탐욕의 정치이며, 동시에 공감 능력을 상실한 권력의 초상이다.

 

앎과 삶 사이에서는 그래서 불편하다. 저자는 행동의 무거움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에게 행동을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더 잔인한 선택지를 준다. 이제는 알면서도 외면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 질문 앞에서 독자는 더 이상 중립일 수 없다. 앎은 이미 삶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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