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시즌 모중석 스릴러 클럽 44
C. J. 박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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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우직하게 전진하는 담백한 소설을 읽고 싶다. 반전도, 상징도, 복잡한 플롯도 없이, 직선대로를 달리는 소설. 그런 걸 읽고 나면 이야기가 가진 순수한 힘을 믿게 된다. 인간을 고양시키고,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이끄는 순수한 힘 말이다.


<오픈 시즌>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소설의 담백함을 알아차렸다. 수렵감시관이 주인공이라면 광활한 대지와 산이 배경으로 등장할 건 분명했다. 이 모든 조건은 코맥 매카시에 대한 나의 향수를 지독하게 자극했다. 더 이상 그의 소설을 읽을 수 없기에 나는 그의 후계자들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지난 몇 년간 나의 독서는 그 후계자를 찾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C.J. 복스는 코맥 매카시의 후예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실망시켰냐고? 절대. 나는 새롭게 발견한 이 시리즈에 내 시간을 온전히 바칠 준비가 되어있다. <오픈 시즌>은 조 피킷(시리즈의 주인공) 시리즈의 첫 책이고, 이 책은 이미 열일곱 권이나 나와 있으니까. 내가 할 일을 그저 서재에 앉아 기다리는 것 뿐이다.


매카시의 주인공들이 늘 무거운 숙명을 짊어진 상처받는 영혼, 혹은 기어이 상처를 얻고자 발버둥치는 우울한 영혼이라면 조 피킷은 그런 고민 따위 단 한번도 해본 적 없는 맑은 남자다.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헌신하며,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박봉의 공무원. 한 마디로 옛날 사람. 이처럼 맑은 남자에게 미묘한 악의 고뇌가 파고들 여지는 없다.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잘한 건 잘한 거다. 마치 서부 개척 시대의 이상화된 남성상을 보는 것 같아 깊이에 아쉬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저 말을 타고 시원하게 초원을 달릴 때도 필요한 법이다. 단조로운 배경이 귀 뒤로 넘어가고, 상쾌한 바람이 머리를 스친다. 선과 악의 모호한 경계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내 가족에게 총질을 한 놈을 찾아, 똑같이 산탄총을 날려준다. 


뱅!


떨어져나간 악인의 팔이 공중을 날으며 카타르시스를 뿌린다.


나는 이제야 막 첫 책을 본 셈이므로 이 남자가 어떻게 변해갈지 알 수는 없다. 어른이 되가는 과정을 우울과 악으로 채워 넣은 <해리 포터>처럼 조 피킷의 시냇물도 번뇌와 어둠에 삼켜질까? 마음이 맑은 거울처럼 잔잔한 수면을 이룬 사람에게 악의 모습은 숨길 수 없는 낙인으로 나타난다. 착한 놈과 나쁜 놈은 구별할 필요도 없이 명확하다. 조 피킷이 총을 꺼낸다면 이유는 단 하나 뿐이다. 그 단순함이 감기로 막힌 내 두 코를 뻥 뚫어준다.


앞으로 그와 함께할 여행이 기대된다. 조 피킷의 암말 루시를 타고, 혹은 그의 픽업 트럭의 짐칸에 앉아, 와이오밍의 빅혼산을 질주하는 상상을 해본다. 저 멀리 석양 속으로 사라져가는, 엘크의 성난 뿔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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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의 미래 - 콘텐츠 함정에서 벗어나는 순간, 거대한 기회가 열린다
바라트 아난드 지음, 김인수 옮김 / 리더스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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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읽고나면 언제나 화가나곤 하는데, 그래서 종종 객관적이지 못한 판단을 내릴때가 있는 것 같다. 썩은 뻘에서도 진주는 나올 수 있고 더러운 응가도 비료가 될 수는 있으니, 앞으로는 최대한 진주와 비료를 찾는 일에 집중할 것이다. 욕을 해봐야 남는 건 없으니까.


콘텐츠의 미래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네트워크 효과'에 대한 찬양서다. 네트워크 효과란 특정 상품에 대한 어떤 사람의 수요가 다른 사람들의 수요에 영향을 받는 효과이다. 쉽게 말해 대세론 같은 것. 그래서 모든 기업들이 그렇게 점유율에 목을 매는 것이다. 점유율이 떨어지는 건 단순히 매출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는다. 급격한 매출의 감소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줄어든 사용자가 남아있는 사용자의 이탈을 더 가속화하기 때문이다.


온라인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요즘 대세는 아마도 <배틀그라운드>일 것이다. 온라인 게임은 일단 사람이 많아야 랭크 매칭도 쉽고 같이 하는 맛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deadPXsociety>라는 게임이 나와서 돌풍을 일으켰다고 하자. 사람들이 배틀그라운드를 잠시 접고 <deadPXsociety>로 몰려간다. 사용자가 줄어든 배그는 비슷한 레이팅의 사람들을 묶어 한 방을 구성하기 어려워지고, 게임 대기 시간의 증가와 유저간 실력 편차로 인한 플레이의 긴장감은 떨어진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내 친구가 더 이상 이 게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온라인 상에서 하는 행동이 사실 거의 모두 소셜 액티비티다. NETFLIX를 보는 이유도 결국엔 "너 하오카 봤어?"를 말하기 위함이고 실시간 검색어를 찾아다니는 이유도 "야 그거 알어?"를 전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래서 네트워크 효과는 아주 중요하다. 태풍 두 개가 고만 고만 경쟁하는 듯 보여도 한 쪽이 조금이라도 커지는 순간 다른 태풍을 완전히 집어 삼키는 결과가 초래된다. Facebook의 마크 주커버그는 이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를 보면 주커버그가 CFO인 새버린에게 "우리 시스템은 단 한번도 다운된 적이 없다."고 말하며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강조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그만 이탈이 결국 MySpace를 무너뜨리고 Facebook을 세웠듯이 똑같은 일이 Facebook에도 일어날 수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런 얘기를 665페이지에 걸쳐서 할 건 아니다. 저자 바라트 아난드는 네트워크 파워에 너무나 심취한 나머지 도무지 이야기를 끝낼줄을 모른다. 제목을 네트워크 파워와 관련된 걸로 지었다면 천번 양보해 알겠다, 고 넘어갈 수 있겠지만 이미 다른 책들이 선점한 키워드인지 콘텐츠를 물고 늘어진다. 콘텐츠가 제일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편견을 강타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예컨대 정말로, 네트워크 파워만 있으면 서비스가 성공하냐는 말이다. 한 예로, 저자는 애플의 성공 요인을 네트워크 파워에 눈 뜬 사업 전략 탓이라고(3rd 파티에게 자유로운 앱 개발 권한을 부여, window와 mac 모두에서 사용 가능한 기기들) 하는데 일견 맞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왜 애플은 더 큰 네트워크 파워를 가진 Android에게 먹히지 않고 살아남는 걸까? 두 OS간 점유율 차이는 1.5배나 되는데도 말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론을 강조하기위해 몇가지 중요한 질문을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첫째, 형성된 네트워크의 힘을 찬양하면서도 애초에 그 네트워크를 이루게 하는 힘이 뭔지에 대해선 설명을 생략한다. 네트워크 파워가 전부라면 애초에 Facebook이 MySpace를 무너뜨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태풍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거기엔 어떤 이유가 존재한다. 저자의 찬양론은 이미 네트워크 파워를 이룬 기업들이 그것을 이용해 더욱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어도 애초에 어떻게 그걸 형성하는지에 대해선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둘째, 네트워크 파워를 확보한 뒤에 무엇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광범위한 전략을 내놓지 못한다. 그저 자신의 사업 요소를 더 철저하게 연결하라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면 그 힘을 어디까지 키워야할까? iPhone같은 창조적 파괴자를 숨도 못 쉬게 할만큼 짓밟아버리려면 얼마나 커야 하냐는 말이다. 온 우주를 덮을 정도로? 한때 나는 MS가 세계를 지배할 거라 생각했다. 온 세상 모든 컴퓨터에 윈도우와 오피스가 깔려 있었으니까. 저자도 인정하듯이 그 미국놈들보다 네트워크 파워를 잘 이해하는 조직은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 책을 읽으며 확실히 배운 점 한가지는 뭔가에 심취해 극단적인 판단을 내리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을 단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이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만능키를 원한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창. 하지만 그 창이 언제든 우리의 목을 찌를 수도 있다는 걸 알아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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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리지 않는 법 - 수학적 사고의 힘
조던 앨런버그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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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을 이야기로 가르칠 수는 없을까? 영희가 빨간공 2개를 철수가 검은공 3개를 가졌다. 철수와 영희가 가진 공은 모두 몇 개인가 수준이 아니라, 진짜 이야기로 된 수학 말이다. 그러니까 MMORPG의 퀘스트 같은 걸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학습자가 단계별로 원리를 파악하고 스스로 생각해 문제를 해결한 뒤 마침내 계산을 하는 것. 세상이 이토록 많이 변했음에도 우리의 교육은 20세기 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는 건 정말 놀라운 사실이다.


아마도 효율이 문제였을 것이다. 정해진 시간 안에 배워야 할 걸 모두 가르치기 위해선 수학을 '개념화'해 상자 안에 담아야 했을 것이다. 이야기는 너무 길고 거창하다. 어떻게 평가를 해야하는지도 마땅치 않고. 그렇다고 백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문제를 그대로 방치해왔다는 건 이 업계의 근무태만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드론이 날고, 운전자없는 자동차가 다니는 시대가 아닌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들을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게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깊이 있는 지식보다 별거 아닌 상식이나 명언 따위에 오히려 열광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이런 분야의 지식들은 확실히 뭔가 하나를 '알았다'는 느낌이 든다. 어디가서 아는 척이라도 할 수 있는 것, 결국 쓸모가 있다는 것. 결국은 이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다.


배워도 아무 쓸모가 없는 교육 중 최고를 꼽으라면 아마 수학일 것이다. 지겹도록 외웠던 근의 공식은 지금 어디에 있지? 2차원 평면에 눈이 빠져라 좌표를 찍어 기울기와 절편을 구했던 경험은? 가방 안에서 그 빌어먹을 빨간공과 검은공을 꺼내는 일은 또 어떤가? 나는 그 대목에서 거의 실신할 뻔했다! 수포자가 생기는 이유는 전적으로 교육의 문제다.


그런데 여기 메사추세츠 복권 사업에 뛰어든 MIT 학생들이 있다. 그들이 매주 30만장씩 로또를 사서 구매 금액의 3배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면 믿겠는가? 그들은 각 등수의 당첨금에 당첨 확률을 곱해 기대값을 계산했다. 그 기대값이 충분한 수익이라는 게 밝혀지자 이 천하의 운빨 게임은 예측이 가능한 '일'로 바뀌었다. 그들은 최초의 전업 로또 구매자가 됐다.


이들이 사용한 방법이 바로 수학이다. 곱셉만 알면 누구나 적용 가능한 평범한 이론이었다. MIT 학생이어서 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수학이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를 설명하는 학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 본질을 스스로 꿰뚫은 반면 우리는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결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 누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기만 하면 우리도 그들처럼 될 수 있다. 근대의 공교육은 원래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깨우치는 천재들을 위한 게 아니다. 알려주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둔재들을 일깨워 그들을 똘똘한 아이로 만드는 것이다. 이는 경제 발전을 위해 튼튼한 '중산층'이 필요하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틀리지 않는법 - 수학적 사고의 힘>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수학에 '대한' 책이다. 모든 이야기들이 실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어 수학이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는 이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은 어떤 물질이 암을 일으키는 것과 무관함이 밝혀졌다는 연구 발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흡연이 폐암을 일으킨다는 말이(상관관계) 왜 흡연을 하면 폐암이 생긴다(인과관계)와 다른지를 알려준다. 무려 600쪽에 달하는 책이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이런 사람에게 수학을 배웠다면 우리 모두의 인생은 확실히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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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취향을 설계하는 곳, 츠타야 - 혁신의 아이콘 마스다 무네아키 34년간의 비즈니스 인사이트
마스다 무네아키 지음, 장은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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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얘기에 앞서 우선 이 책의 저자 마스다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겠다.


마스다는 컬쳐 컨비니언스 클럽이라는(CCC) 기획 회사의 사장이다. 라이프 스타일을 기획한다. 가장 유명한 기획은 츠타야일 것이다. 츠타야는 사양 산업의 대명사인 '책'을 파는 곳이다. 그가 고급 주택가가 모여 있는 다이칸야마에 츠타야를 연다고 했을 때 전문가들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우선 입지가 나빴다. 다이칸야마는 고급 주택가가 몰려 있는 한적한 곳으로 사람들이 모일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동 인구가 많은 동네와 거리가 떨어져 있기도 했다. 대부분의 서점은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역과 도심 한복판에 있었다. 그렇게 해도 힘든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외진 곳에? 고급 카페나 레스토랑도 아닌 서점을? 게다가 이 서점의 진열 방식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소설, 에세이, 실용서 등의 카테고리로 나눈 것이 아니다. 요리, 등산, 애견 등의 라이프 스타일로 묶인다. 예컨대 애견이라는 카테고리 안에는 분야를 막론한 각종 서적, 즉 개와 관련된 소설, 에세이, 잡지에 관련 용품까지 함께 담겨 있는 것이다. 판매자의 입장에서 이런 진열 방법은 매우 불편하다. 전시하는 사람은 책의 내용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하며 그 책을 어떤 식으로 어떻게 전시해야할지 매번 생각해야 한다. 어느 소설가의 낚시 이야기는 어디에 있어야 할까? 낚시일까? 아웃도어 라이프? 아니면 작가의 사생활?


하지만 츠타야는 대성공을 거둔다. 개점 2년 만에 수십 년간 서점의 왕으로 군림하던 도심 중의 도심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의 매출을 넘어섰다. 다이칸야마의 유동인구는 3배가 늘었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음은 말은 안 해도 알 것이다.


결과를 보면 매우 독특해 보이지만 사실 CCC의 기획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정보의 홍수로 넘치는 세계라는 상투어를 굳이 써야 할까? 과거엔 정보를 얻기 위해서 동네 도서관이나 서점을 들르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인터넷의 폭발적 성장으로 정보는 넘쳐나고 사람들은 표류하기 시작했다. 자유의 증가는 언제나 행동의 제약을 낳는다.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찾아야 할지 무한한 조합이 가능한 세계는 역설적으로 어떠한 선택도 어렵게 만든다. 과거에는 사용자가 정보를 탐색했지만 이제는 정보가 사용자를 탐색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늘어난 여가에서도 변화의 흐름은 나타난다. 사람들은 더 이상 특정한 목적을 갖고 인터넷을 키거나 서점에 들르는 것이 아니다. '뭐 재미있는 거 없나' 하며 '기웃거리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정보는 적극적 탐색과 사냥의 대상이 아닌 브라우징의 대상이다. 앞으로 뒤로 위로 아래로 자유롭게 왔다갔다하며 눈길을 끌만한 것들을 찾는다. 소파에 몸을 묻고 리모콘을 든 채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 것처럼.


CCC의 마스다는 츠타야가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는 곳이라고 했다. 콘텐츠 업계에 몸 담았던 사람들은 최근 이 업계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 하나를 기억할 것이다. 큐레이션. 수 많은 정보 중에 입맛에 맞는 걸 쏙쏙 골라 맞춤형 패키지를 내놓는 것. 이른바 '대 편집의 시대.' 마스다는 누구보다 먼저 이 변화를 파악한 선구자였던 것이다.


이 책은 마스다가 CCC를 운영하며 틈틈히 적은 블로그의 글들을 모아 놓았다. 기업가로서 가져야하는 마음가짐부터 거래 업체를 대하는 태도까지 각양의 생각들이 단편적으로 늘어서 있다. 이런 책을 읽을 때 조심해야 하는 건 내 생각이 마스다와 일치한다고 해서 내 행동을 합리화 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공한 사업가와 내 생각이 같다니, 역시 나는 옳았어. 더욱 정진하자.


마스다는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을 뿐 그 생각을 현실화 하는 과정과 방법을 세세하게 기록한 것은 아니다. 결국 차이는 생각이 아니라 행위에서 드러난다. 본디 근본적 신념이나 이상은 사람마다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사업은 신뢰가 중요하다, 무엇보다 고객의 가치를 생각해야 한다, 등등. 하지만 이를 달성하기 위한 행동은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이상이 같다고 방심해선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을 철저히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끝없이 시험해 보고, 끈질기게 바꿔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책을 읽은 꼰대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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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비하인드 도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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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였나, 아무튼 뭐 그런 류의 장르 소설을 읽으며 새롭게 깨우친 독서 기술이 있다. 한 번에 두 페이지 씩 넘기는 거. 그리고 페이지의 첫, 중간, 마지막 문장만 읽는 것. 그런 망나니 짓을해도 줄거리를 따라잡는데는 아무런 장애가 없다. 하루에 책을 한 권씩 읽는다는 사람들을 보며 도대체 어떻게? 라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얼추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두번째 의문이다. 그렇게 읽는 게 의미가 있냐는 것이다. 책은 원래 꼭꼭 씹어 완전히 소화를 시켜야 정신에 이로운 게 아니냐는 것이지. 결론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왜? 


재미있기 때문이다.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맛이 있다. 흥미는 퇴색되지 않는다. 고조된다. 열매를 갈아 고농도의 압축액을 마시는 것 같다. 왜 그런게 있지 않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잠시 쉬는 시간. 버스는 15분 뒤에 출발하고 주문한 잔치국수가 3분만에 나온다. 후루룩 국물까지 다 마셔도 시간은 남아 화장실까지 다녀온다. 버스에 앉으니 뜨거워진 뱃가죽의 열기에 노곤 노곤 행복한 기분이 든다. 모든 음식이 미슐랭 스타를 받을 필요는 없다. 휴게소의 잔치국수는 그 나름의 가치와 맛이 있는 것이다.


<비하이드 도어>는 잘생긴 싸이코패스의 완벽한 함정에 걸린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다. 여자에겐 누구보다도 소중한 여동생이 하나 있다. 다운증후군. 부모는 아이를 버리려고했지만 언니는 자신의 인생을 포기해가며 기꺼이 그 책임을 맡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무게가 느껴진다. 평생 책임져야 할 장애인 여동생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들과 헤어져야만 했다. 쌓이는 나이가 단순한 숫자로 느껴지지 않는다. 바로 그 때 조지 클루니를 닮은 마흔살의 유명 변호사가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놀라운 외모에 탄탄한 재력, 완벽한 매너까지. 여기서 팁 하나. 누군가 우리에게 제안을 했을 때 그게 사기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가진 것에 비해, 내가 줄 수 있는 것에 비해 더 많은 보상을 제공하는가. 그렇다면 그건 100% 함정이다. 여자도 어렴풋이 그런 의심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랑이 개입됐을 때 주고 받음의 크기는 좀처럼 가늠이 되지 않는다. 과도한 배려, 과도한 희생, 과도한 지원은 종종 사랑과 얽혀 숭고한 정신으로 오해된다. 인간이 가진 감정 중 가장 보안이 취약한 게 바로 사랑이다. 그 또는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 불행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신과 같았던 남자가 다소 허무하게 무너져버려 아쉬운 점은 있지만 꽤 재미 있게 읽은 소설이다. 특히 맥빠진 결말을 붙잡는 마지막 장은 전율이 돋기에 충분하다. 기대했던 맛은 아니지만, 충분히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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