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이슈 한국사 - 둘만 모여도 의견이 갈리는 현대사 쟁점
박태균 지음 / 창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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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 교육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 요즘 들어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역사는 늘 천대받는 종목이다. 아무래도 역사는 실용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많은 것 같다. 훨씬 모호하고 어려운 인문학이 나름 각광을 받으며 명맥을 유지한 이유도 출세에 유용하다는 느낌을 절묘하게 포장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역사는 뭐가 없다. 역사를 잘 안다는 건, 그저 과거에 벌어진 일들을 달달 외우는 것에 불과하다. 역사 얘기를 하는 사람은 지식을 자랑하고 싶은 꼰대 부장님 뿐이다. 지루에 고루를 더했으니, 무슨 수로 살아남겠는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역사는 이제 종교와 마찬가지로 금기가 되어버렸다. 역사를 그저 사실로 여기는 건 굉장히 순진한 생각이다. 현대인이 점점 탈역사화되고 있다면 관심 가진 이들의 역사는 '정치화'되고 있다. 무엇이 맞고 틀린 지, 저마다의 이념에 따라 마음껏 구부리고 찢고, 갖다 붙인다. 대한민국의 근대사는 여기에 종교화까지 더해지고 있다.


2024년 광복절은 정말 슬펐다. 어디서부터 대한민국인가 하는 문제로 두 집단이 첨예하게 대립한다는 사실을, 그 사람들이 같은 나라의 국민으로,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고, 이 골이 얼마나 깊은지 경험했다. 나는 일본이 정말 미웠다. 미국도 미웠다. 소련도 미웠다. 북한도 미웠다. 그러나 가장 미운건 그 수많은 시간 동안 과거를 말끔하게 매듭짓지 못한 우리 자신이었다.


대한민국 근대사는 청산과 인정, 반론이 어렵다. 모두 정치화, 종교화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이는 잘못된 사실 관계에 기인한 것이 많다. 그것이 그대로 확정되어 교육을 통해, 동일한 이념을 지지하는 집단을 통해 확산한다. IS가 광신도들을 모집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렇게 모인 사람들에겐 '성전'말고 할 게 없다.


<박태균의 이슈 한국사>는 근대사 중에서도 하나하나가 리히터 규모 10의 파괴력을 갖는 쟁점만을 다룬다. 너무 두려워 입이 아니라, 마음속에 올리기조차 어려운 이야기들. 우리가 쉬쉬하고 외면할수록 더 더럽고, 더 냄새나고, 더 추악해질 이야기들. 이런 이야기를 이토록 차분하고 우아하게 논했던 책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저자는 유려하게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그래서 재미는 좀 덜할 수 있겠지만.


내 말이 맞다는 걸 광속으로 확증해 주는 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평양냉면 같은 글 맛에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 번 읽고 따져보자. 나의 생각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말로 뭐가 맞고, 뭐가 틀린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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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찰리와 폭스트롯 로미오 아작 YA 9
존 발리 지음, 최세진 옮김 / 아작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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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찰리와 폭스트롯 로미오>의 저자 존 발리는 휴고상을 3회, 네뷸러상 2회, 로커스상을 10회나 수상한 유명 SF 작가임에도 한국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나도 처음이다. 책 표지가 캐주얼하고 220p밖에 되지 않아 골랐다. 심지어 신인인 줄 알았다.


존 발리 얘기를 좀 더 하면 보수의 왕국 텍사스에서 태어나 지금은 낙후한 러스티 벨트 중 하나이나 당시에는 잘 나갔을 공업주 미시간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 전공은 물리학.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영문학으로 전과했으나 그마저도 끝내지 못한 채 친구와 미국 횡단 여행에 나선다. 바야흐로 대 히피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런 자유분방한 태도와 진보적 사고가 작품에도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다. 자유와 사랑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탐구하고 독특한 세계관으로 독자를 매료시키며 복잡한 현실 세계의 문제를 다루는 휴머니스트. 이 책의 내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잉글리시 쉽독이 수십 마리 등장하고 어린 여자애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배경은 건담에서 볼 법한 우주 콜로니 같은 곳인데, 달 궤도를 돌고 있다. 번역이 '바퀴'로 된 탓에 좀 깨긴 하지만 어쨌든 '돈다'는 속성만큼은 정확히 반영하고 있으니 넘어가주자.


이 바퀴는 몇 년 전 알 수 없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아 그 안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근처에 다가오는 물체는 모두 레이저로 파괴하기 때문에 접근할 방법이 없고, 원격 조종은 고장 났다. 이렇게 저렇게 머리를 굴려 들어갈 방법을 찾는다 해도 살아 돌아오는 건 불가하다. 바이러스는, 달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그 위를 도는 최첨단 콜로니를 만들 정도로 뛰어난 문명을 이룬 미래인에게도 여전히 미지의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바퀴가 점점 달의 인력에 끌려 궤도를 이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대참사를 피할 수 없다. 달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니까. 달의 행정 기관은 다량의 미사일을 쏟아부어 바퀴를 산산조각 낼 생각이었다. 그런데 세상에, 그 안에 어린 소녀 한 명이 생존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존 발리 얘기를 길게 했으니 이 뒤 이야기들이 어떻게 전개될지 얼추 그려질 것이다. 막 흥미롭고, 막 짜릿하고,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책은 아니지만 짧은 길이만큼 속도는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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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미래 - 코로나가 가속화시킨 공간 변화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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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코로나 시기에 나와 공간의 미래에 대해 얘기한다. 이 대단한 전염병은 우리의 시대를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 시대로 바꿔놓았다. 상업 중심지에 불멸의 성전처럼 서 있던 대형 쇼핑몰들은 폐허가 되었고 일 년에 일조씩 적자를 내던 쿠팡은 유통 거물 신세계를 가뿐히 즈려밟았다. 공간이 해체되면서 권력이 재분배된 것이다.


코로나가 몰고 온 재택근무 열풍은 꿈에 그리던 일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처럼 보였다. 출퇴근이 사라지면 기업은 더 이상 중심가의 노른자땅 위에 서 있을 필요가 없어진다. 직주가 얼마나 근접하냐에 따라 수억 원씩 차이가 나는 아파트의 가치도 재평가가 불가피하다. 대도시에 모여있을 필요가 사라진 사람들은 한적하고 조용한 곳을 찾아 점점이 흩어져 살아갈 것이다.


그래서 도시는 사라졌는가? 많은 기업들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여전히 재택근무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도시는 전보다 더 북적거린다. 우리가 도시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직주근접과 부동산 투자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은 여러 가지의 생각이 부딪히고 융합하는 용광로의 역할도 한다. 시골보다 도시가 역동적이고, 흥미롭고, 더 많은 기회가 생성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정적으로 도시는 젊은 남녀의 더 많은 만남을 보장한다. 대 코로나 시대에도 강남과 홍대의 클럽은 다른 나라 이야기가 펼쳐졌었다. 연애를 아무리 틴더로 시작하더라도 그 완성은 오프라인 만남에서 이뤄지는 법이다. AI는커녕 AI할아버지가 와도 강릉에 사는 상철과 목포에 사는 현숙의 연애는 오래갈 수가 없다. 돌이켜보면 인류 역사에는 우리를 멸망시킬 수도 있었던 팬데믹이 몇 번이나 존재했었다. 그럼에도 도시는 귀신같이 부활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도시는 위기를 맞을 때마다 해체가 아닌 재구성을 택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공간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논의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유현준 교수가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팬데믹 이후와 결을 맞추고 있는지는 솔직히 좀 의심스럽다. 코로나는 핑계일 뿐이고, 유현준의 상상극장을 팬데믹에 끼워 팔고 있는 건 아닌가? 이 책은 유현준 교수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곳곳에서 빛을 발함에도 불구하고 산만함을 지울 수가 없다.


도보도시와 발코니가 있는 집, 낡은 건축법을 없애고 다양성과 창의력을 발휘하는 건설사에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자는 주장, 그리고 지하에 하이퍼루프나 로봇들이 운영하는 물류 시스템을 만들자는 이야기. 이런 것들은 사실 저자의 유튜브나 다른 책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하는 이야기다. 딱히 코로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이리저리, 여러모로 돌려봐야 끼워 맞출 수가 있다.


여의도에는 유현준 건축사무소가 맡은 재건축 단지가 있다. 건물 외벽에 그 사실을 홍보하는 대형 현수막을 걸어놔 지나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볼 수 있다. 여의도라는 입지에 유현준이라는 브랜드가 추가됐으니 얼마나 좋은 아파트가 나오겠는가! 사실 나도 너무너무 기대가 된다. 하나같이 똑같은 디자인, 그걸 탈피하겠다고 수두 환자처럼 들쭉날쭉 발코니를 빼놓은 아파트들. 생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답답한 건축계에 유현준의 아파트가 벼락같은 깨달음을 내려주길 바라면서, 한편으론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 똑똑한 교수님이 어떤 선택을 할지, 정말로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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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피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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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피플>은 전형적인 하루키 소설이다.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는데 등장인물들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 '환상'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루키는 단단하게만 보이는 우리 세계가 실제로는 얼마나 놀라운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메타포를 이용하여 알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예컨대 우리 지구는 초속 30km로 우주 공간을 떠돌고 있는데 약간의 덜컹거림은커녕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도 받지 못한다. 초속 30km라니. 총알의 속도가 초속 300m니까, 이보다 100배 빠른 공 위에 올라 우주를 달리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멈춰 서서 곰곰이 따져봐야 한다. 인식의 성긴 그물망을 촘촘히 당겨 당연하게 흘러나가던 것들을 잡아채야 한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이야기로 바꿔낸다. 알쏭달쏭한 메타포를 입혀서. 그럴듯하게. 때로는 충격적으로. 때로는 공포스럽게. 때로는 미궁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TV피플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 거실에 등장한다. 가구를 재배치한 뒤 들고 온 TV를 설치한다. TV피플은 나의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나는 TV피플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에게 나의 존재를 알리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본다. 바라만 볼 뿐이다. 텔레비전은 말끔한 신품이었다. 취급설명서와 보증서까지 비닐 주머니에 담겨 TV옆에 셀로판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TV피플이 벽 콘센트에 플러그를 꽂고 스위치를 눌렀다. 지글지글한 하얀 화면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들은 TV를 점검하는 듯했다.


그리고는 하나가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내 위치에 앉아, 텔레비전이 어떻게 보이는지 확인했다.


이윽고 일을 마친 아내가 집에 돌아온다. 나는 아내가 새  TV의 출현을 눈치챘는지,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 건지 알지 못한다. 아내는 예민한 여자다. 장식장에 쌓아놓은 잡지의 순서를 기억할 정도로. 가구의 배치가 조금이라도 달라진다면 모를 리가 없다. 하지만 아내는 그 TV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얘기하지 않는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TV를 켜고 리모컨을 이리저리 돌려본다. 지글지글한 흰 화면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TV피플>은 여러 개의 단편을 엮어 만든 책이다. 맨 마지막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하루키의 단편인 <잠>도 수록되어 있다. 나는 이 <잠>을 단행본으로도 갖고 있다. 평온해 보이는 일상 아래 자리 잡은 불안을 절제된 문장으로 포착하는 절묘한 소설이다. 평탄하다 못해 밋밋하기까지 한 전개 뒤에 갑작스러운 균열이 나타나 빨아들일 때, 추락할 때 맞닥뜨리는 그 느낌, 안전벨트가 나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막을 수 없는, 순수한 공포가 몸속에 스며든다.


그 밖에는 뭐, 그냥 하루키 소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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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거네
요나스 하센 케미리 지음, 홍재웅 옮김 / 민음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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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에 살고 있는 아랍계 청년 아모르가 있다. 클럽에서 밤새 놀고 다음 날 깼더니 전화와 메시지가 수십 통 와 있었다.


"너 봤어? 자동차 폭탄이 있었대. 다이너마이트로 꽉 차 있었대"


스톡홀름 시내 한 복판에서 폭탄테러가 벌어졌다. 용의자는 작고 긴 머리에 턱수염이 있는 아랍계 남자였다.


"너 어젯밤에 뭐 했어?"


"기억이 안 나. 클럽에서 술을 마시고, 춤을 추고, 토를 좀 했지"


"아모르? 아모르?"


아모르에게 수십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절친 샤비에게서, 사촌에게서, 카롤리나에게서. 카롤리나의 동물권익보호 단체에서 일하는 여자였다. 카롤리나는 아모르에게 정기 기부를 권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아모르는 카롤리나라는 이름이 가짜라는 걸 알았다. 아모르가 카롤리나에게 물었다.


"진짜 이름이 뭐예요?"


카롤리나는 아모르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놀랐다.


"내 이름은, 골바리..."


거봐, 당신은 거짓말했어. 아모르는 의기양양해진다. 그러다가 곧 난관에 봉착한다. 골바리가 아모르의 목소리를 기억해 낸 것이다.


"아모르, 당신 마리아 학교를 다닌 거 맞죠? 샤비라는 사람을 알죠?"


"이런. 완전히 조용해졌네? 아모르, 거기 있어? 나는 널 기억해. 네가 같은 반 여자애를 스토킹 했던 것 기억나, 그 여자애가..."

(p. 116)


아모르는 전화를 끊었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놓친 통화가 2개 있었다. 모두 샤비에게서 온 것이었다.


"아모르 전화 좀 줘."


아모르는 샤비가 아니라 외할머니에게 전화를 건다.


"어떻게 지내세요?"


"안 좋아."


"왜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못했니?"


오랜만에 전화를 한 외할머니는 자꾸 딴 소리를 한다. 아모르는 외할머니의 건강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는다. 외할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묻는다.


"아모르? 거기 있니?"


길을 걷던 아모르의 앞에 경찰차가 한 대 선다. 나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건다.


"알았어. 알았어."


"뭐가?"


"그러니까 그거..."


"그게 뭐?"


"그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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