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 맹자 : 유학의 변신은 무죄 지식인마을 3
강신주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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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말한 적 있는데 강신주는 말보다 글이 좋은 사람이다. <감정수업>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책으로 경력에 오점을 남기긴 했지만 동양철학에 대한 강신주의 깊이는 정말 대단하다. 특히 해석의 독창성 이라는 면에서 강신주의 견해는 반짝 반짝 빛이 난다.


김영사의 <지식인 마을 시리즈>는 이제 막 인문학을 접한 사람들에게 보석같은 전집이다. 어렵고 두려워 엄두도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라면 이 시리즈로 인문학을 공부해 볼 것을 추천한다.


내 기억에 강신주는 이 시리즈에서 두 권을 집필했다. 하나는 <노자&장자>, 또 하나가 이 <공자&맹자>다. 처음 읽은 건 <노자&장자>였는데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노장 사상을 송두리째 찢어발기는 충격적 경험이었다. 그래서 <공자&맹자>의 저자가 강신주라는 걸 보는 순간 곧바로 집어 들었다.


<공자&맹자>를 강신주가 썼다는 건 공맹의 말씀에 "네네"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특히 나와 타인의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이자, 그래서 장자의 사상을 소통의 철학으로 해석한 강신주에게 공맹의 무자비한 자기 중심주의는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지난번 <맹자>의 리뷰에서 나는 유학이 전란을 평정하기엔 너무 이상적이지만 평화의 시대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쓴 바 있다. 왜일까? 그것은 유학이 신분의 차별을 정당화함으로써 체제를 안정화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유학의 전통적 관습 규범인 삼강을 살펴보자. 군위신강, 군주는 신하의 법칙이 되야 한다. 부위자강, 아버지는 자식의 법칙이 되야 한다. 부위부강, 남편은 아내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이게 뭐?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가부장지수가 10점 만점에 8점은 나올 것이다.


유학은 근본적으로 군주, 아버지, 남편 중심적 사유 편향을 보여 준다. 가진 사람, 힘 있는 사람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 다워야 하고, 남편은 남편 다워야 한다. 신하가 군주 다울 순 없고 자식이 아버지 다울 순 없으며 아내가 남편 다울 순 없다. 고상한 척 얘기하지만 사실은 절대 내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엄포가 숨어 있다. 누구든 이 규범을 거스르면 예를 모르는 사람이 되는 거고 예를 모르는 사람은 금수와 같은 자니까 마을에서 내쫓든 때려 죽이든 상관 없다. 유학의 예는 그 어떤 폭력도 정당화 시키는 마력을 갖는다.


공자의 예와 맹자의 인은 인류의 역사를 꿰뚫는 보편적 윤리 규범이 되기 어렵다. 특히 공자의 예는 주나라 시대에 정립된 예 즉 '주례'의 복원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사상은 당시에도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춘추. 수 많은 제후들이 쏟아져 나와 세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상황에서 옛 나라의 법도를 복원하자니, 그 어떤 군주가 따를 수 있었겠는가? 공맹의 사상이 당시에 큰 영향을 발휘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 때문에 누구나 이 마음을 갈고 닦으면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한 모두에게 군자의 길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나름 보편성을 갖췄다고 볼 수도 있지만, 과연 선함이 인간의 본성일까 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맹자는 우물에 떨어지려는 아이를 봤을 때 사람들이 하나 같이 달려가 아이를 구한다는 예시로 성선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 우물 앞에 성인이 아닌 아기가 있었다고 해보자. 아기는 우물에 떨어지려는 아이를 보고 달려가 구해줬을까? 오히려 재미있는 피카부(Peekaboo) 놀이라고 생각해 박수를 치며 웃지 않았을까? 어른이 아이를 구한 건 죽음의 의미와 그 고통의 크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 결코 본성이 선해서가 아니다. 같은 예시를 통해 우리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여기는 공감의 철학을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거기서 성선을 봤고 오늘날 세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공맹 이후의 유학이 그들의 사상을 신성화해 창의적 논의를 말살하고 반대자를 잔인한 방법으로 숙청하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맹의 사상은 자기가 임의로 설정한 준거가 인간의 보편적 특성이라 믿는 착각에 기반한다는 점에서 폭력적 오만이 내재되어 있다. 흔히 기독교가 지배한 유럽의 중세를 다크 에이지라 부르며 조롱하는데, 과연 그 다크 에이지가 유럽에만 있었을까? 아주 오래 전 부터 유학은 혁신적 사상가들을 사문난적으로 찍어 끔찍한 형벌로 죽이는 야만을 부렸다. 유럽의 중세는 천 년, 동양의 유교는 이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다. 유럽을 보고 웃을 일이 아니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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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이어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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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유명한 <아웃라이어>를 지금에서야 봤다. 물론 그 내용은 풍문으로 들었고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소설가 모파상은 "재능이란 기나긴 인내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20대의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모른다. 나는 무언가를 잘 할 자신은 눈꼽 만큼도 없었는데 그 일을 끝까지 해낼 자신은 누구보다 충만했다. 이후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꾸준히 시간을 적립하고 있다. 땡큐 모파상.


그래서 이 책의 주제는 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준다. 내 삶의 방식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웃라이어>는 성공이 타고난 재능에서 오는 게 아니라 1만 시간의 노력과 엄청난 운의 조합으로 탄생한다고 말한다. 설득력 있는 사례와 통계가 주장의 근거로 제시되는데, 이를 읽고 있으면 저절로 고개가 끄떡여지기도, 때로는 "와 진짜 성공은 그냥 걸려드는 거에 불과하잖아?"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혁신적 주장은 좀 더 냉철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사상의 파격은 상당 부분 과대 포장된 케이블 광고 상품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1만 시간의 법칙을 생각해보자. 각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을 조사해 봤더니 대부분 1만 시간의 연습이 끝난 시점부터 두각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재능이란 일정한 시간의 노력이란 공식이 여기서 나온다. 그런데 조사 방법을 바꾸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러니까 1만 시간의 노력을 달성한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공했는지 조사해보자는 말이다.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1만 시간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면 1만 시간을 노력하면 '모두가'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통계의 함정이다. 캐나다 아이스 하키 팀의 베스트 플레이어들이 대부분 1월 생이라는 통계도 마찬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들 중에 1월 생이 많은 건 사실이야. 그렇다면 캐나다의 1월 생 남자들이 모두 하키 선수가 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말콤 글래드웰은 재능이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아시아 청소년들의 수학 성적을 거론한다. 아시아 청소년들이 수학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이유는 언어 체계(동양은 11을 십+일로 인지하지만 서양은 그냥 eleven. Ten으로 부터 eleven을 추론할 근거가 없다는 한계가 수에 대한 이해를 느리게 한다)에 있기도 하지만 쌀 농사를 지으면서 몸에 밴 인내와 성실의 결과라는 것이다(물론 인내가 수학 능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는 선 제시된다).


일단 인과 관계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서양인 특유의 태도에 주먹을 날리고 싶을 정도로 짜증이 나는 것도 나는 거지만 근거 자체도 터무니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수학을 잘하는 국가는 싱가포르, 한국, 대만, 홍콩 그리고 일본이다. 이것이 과연 쌀 농사의 영향일까? 이들 국가는 대부분 최근에 비약적 산업 발전을 이룬 나라들이다. 가난한 국민들이 좋은 직장을 얻어 중산층이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지옥과도 같은 학구열이 형성됐다. 그래도 아직 쌀농사의 영향을 믿고 싶다면 똑같이 쌀 농사를 짓는 베트남, 라오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마다가스카르, 이집트, 브라질은 왜 순위에 없냐고 묻고 싶다. 한가지 더, 말콤 글래드웰의 말이 맞다면 아시아 청소년들은 대학에 간 뒤 모두 자신의 수학적 DNA를 논 밑에 파묻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위대한 수학 연구가 대부분 미국에서 나오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성공이 때마친 조성된 시대의 흐름 때문이라는 주장엔 어느 정도 동의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그토록 오랜 세월 최고의 전문직으로 롱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산업 혁명의 여파로 수 많은 기업이 탄생하고 공업 노동자가 급증하고 이로 인해 대도시가 형성됨으로써 아주 복잡한 사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걸 변호사가 만든 건 아니잖아. 이같은 생각은 분배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하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시대의 혜택을 입었던 건 아니다. 역사를 보면 분명 시대 자체를 만들어 내는 창조자들이 있었다. 말콤 글래드웰은 스티브 잡스가 때마침 형성된 실리콘 벨리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하이테크 제조업 회사를 창업하는데 유리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실리콘 벨리는 저절로 생긴걸까? HP가 처음으로 그곳에 발을 디디지 않았어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캘리포니아에 실리콘 벨리가 생겼을까? 스마트폰 혁명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은 시대의 요구가 아니었다. 시대는 그 존재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을 간과하는 건 오히려 우리를 시대의 수동적 대응자로 만드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다. 시대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의 멱살을 잡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성공을 보장하는 게 1만 시간이아니라 개인의 특출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1만 시간을 노력했어도 그 중에서 성공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나온다면 성공의 진짜 조건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여전히 인정하고 싶지 않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시간은 똑같이 주어진다. 그런데 왜 우리 중 일부 만이 그 시간을 뭔가를 열심히 연습하는 데 사용하는 걸까? 진정 1만 시간의 법칙이 맞는 말이라면 국가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도입해야 한다. 아이들을 학교에 가둬 놓고 하루에 3시간 씩 딱 10년 만 교육하자. 그러면 최초로 천재를 대량생산하는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목에서 뭔가 데자뷰가 느껴지는가? 당신의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이런 교육 제도를 가진 나라를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바로 우리가 나고 자란 국가다.


이쯤에서 솔직해지자. 1만 시간 동안 무언가 열심히 노력하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능력이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모두 젊음이란 종잣돈을 쥐고 나왔지만 먹고 마시고 노는 새에 그 돈은 휘리릭, 날아가버렸다. 그 돈을 모두 어디에 썼니? 비록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이거 하나 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노력을 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노력하는 것 사이엔, 어마어마한 심연이 존재한다는 사실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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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어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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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 이라는 생소한 작가의 책을 아무 고민 없이 집어든 이유는 역시 그 제목 때문이었다. <호랑이 싸움꾼은 찾기 힘들어>. 하진도 알고 있겠지. 좋은 책을 찾는 것도 어마어마하게 힘들다는 사실을.


1956년 중국 리아오닝에서 태어난 하진은 이십 대 후반까지 중국에서 살다가 영문학 박사과정을 밟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다. 논문도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자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볼까 하는 찰나 "톈안먼 사태'가 발생하고 말지. 학생 한 명이 거대한 탱크 앞을 가로 막고 선 그 유명한 사진을 낳은 '천안문 사태'. 2,000명이 넘는 죽음에 분노한 하진은 미국에 남기로 결심한다.


그런 결정을 한 순간 평생을 이고 갈 작품의 주제가 결정된 걸지도 모른다. 이 책에 담긴 10편의 소설은 그야말로 속수무책, 비인간성과 비효율, 무지와 폭력 속에 빠져 허우적 대는 중국의 현대를 그린다. 쉽게 말해 공산주의의 최후를 그린다는 말이다.


당연히 중국은 하진을 싫어했고 미국은 좋아했다. 하진은 가장 적극적이고 가장 반중국적인 방식으로 미국 문학계에 스며들었다. 바로 영어로 소설을 쓴 것이다. 역시 목구멍이 포도청이야, 참으로 쩨쩨한 전략이로군 쌀과 반찬을 얻기 위해 모국어를 팔다니 하고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한 작가에게 있어 모국어를 포기한다는 것은 한 남자에게 자신의 남성을 잘라내는 것과 같은 강도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아두시길. 물론 미국 문학계에 편입할 방법으로 작품 활동을 영어로 하는 것 이상의 것이 없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로 중국과 미국이 세계 경제의 패권을 두고 옥신각신 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하진이 중국어로 작품을 썼다 하더라도 너무나 반중국적인 그 내용으로 인해 미국 사회의 관심을 끌 기회는 충분했을 것이다. 단순히 방편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선택한 건 일종의 미학적 결정이 아니었을까? 사실 하진의 문장은 <전미도서상>, <플레너리오코너상>, <펜/헤밍웨이상>, <펜/포크너상>, <푸시카트상>, <칸 문학상>, <타운젠트상>, <아시아아메리칸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고, 두 차례에 걸쳐 <퓰리쳐상> 후보에 오른 작가의 것이라고 보기엔 거의 아무런 특색이 없다. 그의 문장은 매우 간략하고, 평범하고, 밋밋하다. 뉴스 보도도 이런 식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엔 아주 고차원적인 전략이 있다고 보는 게 맞지 않을까?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건 수 많은 단어가 서로 종이 위를 차지 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는 말이다. 작가 입장에선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담아야 할지 혼란스럽다. 그래서 단어는 쓸데 없는 수식을 식객으로 들이고 문장은 그저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내기 위해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것은 너무 많이 알기에 저지를 수 있는 실수들이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는 이같은 실수를 생략하게 만들어준다. 남자가 죽었다. 이 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죽음이다. 이런 문장은 읽는 이를 거추장스러운 통관 없이 곧장 핵심으로 이끄는 위력을 발휘한다. 도정에 도정을 거듭한 쌀 한 톨이 최고의 사케로 변하듯 핵심을 향한 논스톱 질주가 우리를 묵직한 감정의 덩어리들과 충돌하게 만든다.


순도 높은 감정을 선사하기 위한 하진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작품 하나하나는 "적어도 스무 차례"에 걸친 교정을 통해 완성된다고 한다. 작가에게 있어 가장 괴로운 순간은 어렵게 끝낸 글을 다시 꺼내 고쳐 쓰는 일이다. 퇴고를 거듭하는 작가의 고통은 가히 시지프스의 형벌과 비견할 만하다. 그러니 하진의 평범한 문장은 미학적 선택과 치열한 노력으로 만들어진 의도된 산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호랑이 사냥꾼은 찾기 힘들어>에는 10편의 소설이 있다. 인간의 허위와 허세, 자존심 때문에 벌어지는 촌극은 모파상의 단편을, 평범한 일상을 해학적으로 드러내는 점에선 안톤 체호프를 떠올리게 한다. 하진은 두 위대한 작가가 쌓아 올린 현대 단편 소설의 초석 위에 자신의 작품을 올린다. 그것은 아주 반가운 일이기도, 아주 슬픈 일이기도 하다. 나는 단편을 아주 사랑하는데, 그 단편은 이제 세계에서 밀려나 까마득히 먼 곳으로 날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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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행동의 심리학 - 말보다 정직한 7가지 몸의 단서
조 내버로 & 마빈 칼린스 지음, 박정길 옮김 / 리더스북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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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마음을 읽고자 하는 바람은 인류의 오랜 숙원이었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알려 주기 전에도 이미 인간의 속마음과 겉마음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이걸 아는 사람이 협상을 지배하고 권력을 차지한다. 당신이 하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수 없다는 믿음. 그래서 기어이 그 속내를 펼쳐 보고 싶다는 욕망. 심리학에 대한 열망은 세상에 뿌려진 불신의 씨앗에서 싹을 틔운다.


<FBI 행동의 심리학>은 이 열망이 가장 치열하게 발휘되는 분야의 사례를 모아 놓은 책이다. 직업적 거짓말쟁이, 바로 범죄자들을 심문하는 일 말이다. 저자 조 내버로는 25년간 FBI 대적첩보 특별 수사관으로 활동, 고도로 훈련된 스파이들을 상대해 왔다. 거짓말을 할 땐 반드시 무의식적 행동 변화가 수반된다. 눈동자의 작은 흔들림,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느닷없이 찾아오는 침묵. 숙련된 수사관은 현미경으로 세포를 훑듯 아무리 작은 행동의 변화라도 놓치지 않는다. 물론 승부가 항상 수사관의 승리로 끝나는 건 아니다. 왜? 적들도 내가 무엇을 아는지 알기 때문에. 바로 여기서부터 아주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진다. 무의식적 행동 변화를 충분히 인지하는 범죄자라면 진실을 얘기하면서 의식적으로 눈동자와 목소리를 떨리게 할 수도, 느닷 없이 침묵을 꺼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정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조작된 건 그의 행동일까, 아니면 그의 말일까?


바로 여기에 대한 대답이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책이었다면 아주 많은 재미를 얻었을 것이다. 물론 14,000원 짜리 책 한권에 30년 경력의 수사관이 지닌 모든 경험과 노하우를 담을 수는 없다. 그런 걸 바라면 도둑놈이지. 그런데 초판 72쇄를 찍은 책 치고는 어이 없을 정도로 당연한 얘기가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인간 거짓말탐지기' 조 내버로가 밝히는 커뮤니케이션의 비밀!


첫째, 스트레스를 받거나 초조해지면 사람들은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릎 위에 손바닥을 문지르는 경향이 있다. 와우! 정말 몰랐네.


둘째, 실눈을 뜨고 이마를 주름지게 하면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고통과 불편함의 표시다. 세상에 난 이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짓는 표정인 줄 알았는데.


셋째, 비웃음은 순간적으로 경멸 또는 경시를 나타낸다. 그것은 "나는 당신의 생각에 신경쓰고 싶지 않습니다."라는 의미다. 하하하하!


최근에 취업이 어렵다고 하니 면접 시 하지 말아야 할 행동도 몇 가지 가르쳐 주겠다.


첫째, 의자에 앉아 엉덩이를 쭉 뺀 뒤 다리를 쩍 벌리고 늘어져 있지 마라. 면접관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것이다.


둘째,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 깐 채 어깨를 귀쪽으로 올려 축 쳐진 자세를 하지 말라. 면접관에게 자신감이 없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렇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선 굳이 행동 변화 같은 걸 유심히 관찰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당신의 태도가 어떤 반응을 불러 일으킬지, 나와 대화하는 상대가 어떤 기분과 마음을 갖고 있는 지 충분히 알 수 있다. 감정이란 많은 경우 직관적으로 느껴지지 분석해서 알아내는 게 아니다. "저 사람이 나한테 화난 것 같아, 왜냐하면 허리에 손을 올린 채 턱을 쳐 들고 큰 소리로 얘기했기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조 내버로를 최고의 수사관으로 만든 건 이런 행동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능력이 아니라 아주 작은 행동의 변화도 포착하는 뛰어난 관찰력과 그러한 반응을 유도하는 질문을 찾아내는 능력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까 당신이 정말 누군가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이런 책을 읽고 연구하기 보다는 그냥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유심히 지켜보는 게 더 낫다. 뛰어난 관찰력이란 본디 애정을 갖고 오래 지켜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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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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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의 책을 읽는 건 쉽지 않다. 그것이 별 재미가 없을 때는 더더욱.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무려 1천 3백만 부가 팔린 소설이다. 한 번도 쓰기 어려운 대하 소설을 세 번이나 써낸 작가가 내놓은 200페이지 짜리 단편(조정래의 기준으로 단편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이 바로 <인간 연습>이다.


<인간 연습>의 가장 큰 특징은 고루함이다. 미전향 장기수들이 주인공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법도 하지만 똑같이 옛날 사람이 나오는 황석영의 작품을 읽을 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걸 기억하자. 시대를 탈주한 문장은 성의없이 쓴 문장과 마찬가지로 손발을 오그라들게 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행복의 조건은 사상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 어떤 위대한 사상이라도 인간성을 잃는 순간 사람을 불태우는 재앙이 된다. 이것이 <인간 연습>의 주제다. 그래서 미전향 장기수들이 등장한다. 끝까지 공산주의를 버리지 못해 몇 십 년을 감옥에 갇혀야만 했던 불행한 사람들. 이들만큼 작가의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더 불행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이 소설이다. 똑같은 모양의 블록 중에 원하는 색깔을 찾아 끼워 맞춘 듯한 피상적 인물들. 대가는 장난 삼아 블록 놀이를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박동건과 윤혁이다. 두 사람은 모두 비전향 장기수였지만 박동건 쪽이 더 지독했다. 그 결과 박동건은 나라도, 가족도, 친척도 외면하는 외로운 죽음을 맞는다. 반면 윤혁은 변화된 세상에서 나름대로 살아야 할 이유를 모색하는 사람이었고 그 해답을 자신이 돌보는 고아 두 명과 보육원장 최선숙에게서 찾아낸다. 여기에 치열한 내면 갈등과 고뇌는 없다. 두 인물은 그저 작가의 손에 등 떠밀려 찍 소리도 못하고 정해진 길을 따라 가는 꼭두각시처럼 보인다. 인물은 작가의 의도가 아니라 작가가 부여해준 성격에 따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어색했던 것 이리라.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한 인물들의 피상적 연기. 그건 마치 재연 배우들의 <서프라이즈>를 보는 것처럼 어색함을 선사한다.


그렇다면 각본은 어떨까? 박동건의 죽음을 앞당긴건 소련의 붕괴였다. '사상의 조국'이 맥 없이 무너지는 걸 보고 '헛 살았다'라는 공허함이 밀려 들어 살려는 의지가 완전히 박살난 것이다. 그런데 박동건이 꿈꿔왔던 건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아니었던가? 소련이 붕괴한 건 공산주의라는 이름을 걸고 독재를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소련의 붕괴를 보고 박동건은 오히려 힘을 냈어야 한다. 소련의 붕괴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가 디렉션을 거부할 수 없는 이 연약한 늙은이는 떨어지는 마지막 잎새와 함께 영원히 눈을 감는다.


한편 윤혁은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를 놓은 손에 자본주의를 움켜쥐는 우를 범한다. 그는 자신이 출판한 책의 성공과 함께 두 고아를 데리고 최선숙의 보육원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마치 유토피아적 소규모 공동체를 연상케 하지만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 비춰볼 때 이는 언제 박살날지 모르는 위험한 공동체에 불과하다. 윤혁은 언제까지 두 고아를 보살필 수 있을까? 그저 재우고 입히고 가끔 삼겹살이나 짜장면을 먹이는 걸로 충분할까? 치솟는 사교육비는 어떻게 할 생각일까? 아이들이 대학을 갈 수는 있을까?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면 취업도 안 될텐데, 설령 좋은 대학을 간다 한들 등록금은 또 어떻게 하지? 윤혁의 행복을 산산 조각 내기 위해 기다리는 건 이것 뿐만이 아니다. 최선숙은 언제까지 이 식객들을 말없이 보살펴 줄까? 운영비가 떨어져가는 상황에서도 최선숙은 윤혁과 두 고아를 처음과 똑같은 미소로 맞을 수 있을까? 잔인하지만 이것이 현실이다. 자본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기란 공산주의가 인간의 모습을 하기 보다 수 백 배는 힘들다. 공산주의에게 인간의 얼굴을 하는 게 선택의 문제였다면 자본은 그 자체가 비인간적이라 아예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조정래는 얼핏 해피엔딩으로 보이는 윤혁의 선택 속에 아주 잔인한 진실을 숨겨둔 것이리라. 윤혁은 결국 또 실패할 것이다. 인간은 그저 끊임없이 실패하고 그로인해 고통을 당할 뿐. 고통의 결실은 없다. 바로 그 고통이야 말로 우리 삶의 본질이다. 이게 아니라면 나에게 <인간 연습> 해피엔딩은 완전히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대문호의 뜻을 온전히 펼치기에 200페이지는 너무나 짧았던 것 같다. 아무리 대작가라도, 주어진 원고지가 다 한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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