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종말은 없다 - 세계 부와 권력의 지형을 뒤바꾼 석유 160년 역사와 미래
로버트 맥널리 지음, 김나연 옮김 / 페이지2(page2)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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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짧은 서평들을 보다 보면 내가 그들과 같은 책을 읽은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석유의 종말은 없다>는 거창한 제목을 달았지만, 이는 저자의 논지와 너무 거리가 멀다. 이 책은 최초의 석유 시추 시대부터 최근에 이르는 유가의 변동을 지루할 정도로 세세히 늘어놓는다. 어떤 의견을 뚜렷이 제시하기보다는 최대한 정확한 사실을 수집하여 박물관처럼 전시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 같다. 출판사도 초월 번역을 의식했는지 원제 <Crude Volatility>(유가 변동성)을 더 크게 써놨다.


석유도 시장의 다른 상품들과 마찬가지로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변한다. 그런데 석유에는 좀 특별한 점이 있다. 우선 수요의 측면에서 보면, 유가가 수요의 영향을 받는 건 맞지만, 수요가 반드시 유가에 따라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점이 그렇다. 이유는 석유가 '필수재'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자. 유가가 오른다고 갑자기 자동차를 안 탈 수 있나? 석유 부산물로 만들어내는 각종 생필품은? 유가가 소비 패턴을 완전히 바꿀 임계점에 도달한다 한들 석유 위에 띄운 이 사회를 순식간에 바꾸기는 어렵다. 가격이 하락할 때도 수요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기름값이 떨어졌다고 갑자기 출퇴근 거리를 두 배로 늘리고 가스보일러를 석유로 대체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수요는 오히려 소득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최근 수십 년간 석유 수요를 이끌어 온 건 빠르게 성장하는 중국의 경제였다. 반대로 자가용 대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연비가 좋은 차가 인기를 얻는 시기는 경기가 침체되어 소득이 줄어들 때였다. 2008년으로 돌아가보자. 그 해 1월 유가는 배럴 당 100달러를 넘어섰고 7월이 되자 150달러를 돌파했다. 그러나 불과 3개월 뒤 가격은 60달러로 폭락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세계 경제를 묘지에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공급면에서도 석유는 특별하다. 그게 어디에 얼마나 묻혀있는지 아무도 모를뿐더러 시추 설비를 만들어 진짜 퍼올리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기존 유정의 최대 산유량을 넘어 수요가 폭증한들 어디선가 새유정이 곧장 나타나 은혜의 비를 내려주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한편 한 번 구멍을 낸 유정은 병뚜껑을 닫듯 산유량을 0으로 만들 수 없다. 일단 뽑아놓고 나중에 파는데도 한계는 있다. 석유 보관 시설도 무한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유가는 오를 때나 내릴 때나 브레이크가 없다.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으로 수요가 급증한들 기존 국가가 수요를 늦추지는 않으므로 가격은 폭발적으로 상승하고, 이제는 거의 한 덩이가 된 지구 경제가 동시에 침체를 겪을 땐 이미 파 놓은 유정을 닫을 방법이 없어 가격은 미친 듯이 떨어진다.


그래도 이런 가격을 어느 정도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는 게 바로 '스윙 프로듀서'라 불리는 대장 산유국이다. 자신이 산유량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국제 유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절대자! 저자는 그 유명한 록펠러가 강력한 카르텔을 형성해 미국 시장을 독점했을 때와 OPEC의 석유 공급 점유율이 최고였을 때 오히려 유가는 안정적이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독점은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니라고는 하지만, 역사적 사실이 정반대의 대답을 하는 상황에서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석유의 종말은 없다>는 내 독서 인생을 통틀어도 견줄 데가 없는 최악의 번역을 자랑한다. 사실 오타도 너무 많고, 문장이 뚝뚝 끊길 뿐만 아니라 의미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 편집자가 존재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 엉망이다. 출판 문외한이 원저를 읽고 감명받아 마음만 앞서 내놓은 책 같다. 나는 평소 알라딘의 추천 도서 목록에 깊은 신뢰를 가져왔고 이번에도 그 추천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책으로 인해 그 믿음은 완전히 박살 났다.


빵점을 줘도 아까운 번역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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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바야가의 밤 - 각성하는 시스터후드 첩혈쌍녀
오타니 아키라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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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 출신의 신도 요리코는 야쿠자 수십 명을 한꺼번에 박살 내는 괴력의 여자다. 폭력을 갈구하는 욕망이 핏 속에 흐르고 있다. 화장이나 쇼핑, 자신을 가꾸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주먹이 뼈에 닿아 부러지는 느낌, 오로지 그것만이 신도 요리코를 살아있게 한다. 그녀는 괴물이다.


독보적인 캐릭터와는 달리 이야기는 좀 갸우뚱하다. 야쿠자와 시비가 붙어 본거지에 잡혀온 요리코는 그곳에서도 한 바탕 난리를 치며 진실로 살아있는 야생의 짐승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준다. 그녀를 제압한 건 40킬로그램이 넘는 도베르만이었다. 개가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요리코가 개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를 써도 말을 듣지 않던 요리코는 야쿠자가 기르는, 처음 본 개를 죽인다고 협박하자 마침내 마음을 꺾는다. 맡겨진 일은 오야붕의 외동딸을 수행하라는 것. 이렇게 요리코는 보디가드이자 운전기사가 된다.


일본의 장르 소설이라는 게 본래 개연성을 주특기로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너무할 때가 좀 있는데 <바바야가의 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오야붕의 딸과 요리코가 처음 만나 삐걱대는 대목에서부터 이 소설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물론 장르 소설의 결말은 어차피 다 똑같다. 차이를 만드는 건 그 과정을 기술하는 방식이다. 그런 관점에서 183페이지 밖에 안 되는 <바바야가의 밤>은 우려스러운 점이 많았다. 완전히 다른 삶을 살던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여자라는 존재를 움켜쥐고 옭아매는 세상을 깨고 나오는 모습을 보여주기에는 종이의 양이 너무 적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바바야가의 밤>은 한 페이지 안에서 수십 년을 건너뛰는 필살기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이 책은 소설 자체보다 그 뒤에 딸린 편집자 후기가 훨씬 뛰어나다. 나는 이 편집자를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통해서 만났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도 인상이 깊었다. 구매한 책 사이에 본인이 출간했으나 파본으로 반품된 소설의 일부를 잘라 견본처럼 끼워줬기 때문이다. 그 견본을 읽고 새 책을 사기까지 했다.


<바바야가의 밤>은 삼송의 김사장이라 불리는 이 출판인이 '첩혈쌍녀'라는 시리즈를 기획하며 내보낸 선봉이다. 첩혈쌍녀란 무엇인가? 재잘거릴 첩 + 피 혈 + 짝 쌍 + 여자 녀다. 즉 재잘거리며 핏빛 사건을 해결하는 두 여자,라는 뜻이다. 남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통적 모험, 탐정물의 서사를 탈피한 낯선 소설들을 소개할 요량. 좋은 기획과는 달리 따라 나온 장수들이 변변치 못한 게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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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그들의 정치 - 파시즘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이슨 스탠리 지음, 김정훈 옮김 / 솔출판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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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 극우가 만발하고 있다. 이유가 뭘까? <우리와 그들의 정치>는 파시즘 정치가 동작하는 방식, 그들이 어떻게 멀쩡한 시민들을 극단으로 이끄는지를 분석한다.


파시즘 정치의 시작은 구별이다. 그들과 우리를 구별하기 위해선 우리가 특별해야 하므로 한 민족의 역사가 완전한 허구에 기반해 신화화된다. 보통 순혈에 대한 망상은 히틀러가 거의 모든 악명을 뒤집어쓴 덕분에 내로남불에 빠지기 쉬운데, 사실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다. 심지어 왕까지 외국인과 결혼한 사례가 수두룩한 역사를 보고도 우리 배달인이 단일민족이라는 환상을 갖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국가는 조작된 신화를 교육, 문화에 대대적으로 침투시켜 선전을 시작한다. 이에 딴지를 거는 사람은 민족혼을 부정하는 배신자. 진실은 매도, 비판은 폭력의 대상이다. 허구를 중심으로 우리와 그들의 역할이 정해지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이 신화가 주로 근현대사를 중심으로 형성된다. '우리'를 자극하는 건 '피해의식'이다. 우리는 군말 않고 열심히 일해 대한민국을 여기까지 끌어올렸는데 '너희'는 우리가 이룬 걸 뺏어가려고만 한다. 노동조합은 귀족노조로 둔갑하고 복지 혜택의 증가는 '게으름'의 증거로 제시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인 탓에 분배와 경제 정의는 아주 쉽게 공산주의와 연결되어 땀 흘려 가꾼 국가의 근본을 통째로 북쪽에 넘기려 한다는 망상에 공격당한다. 이런 공격을 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바로 그 공격 대상의 가장 큰 수혜자인데도 말이다.


파시즘 정치가 지키고 퍼뜨리려는 거짓 역사는 사실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유지하려는 욕망과 맞닿아 있으며, 파시즘은 그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는 공포심을 이용해 강력한 지지자들을 포섭한다.


사실 자유와 민주주의가 넘치는 요즘 세상은 전통적 가부장들에게 그리 안전한 사회가 아니다. 늘어난 성평등은 오랜 시간 경제 주체로서 군림했던 가부장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페미니즘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고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들은 내 일자리를 뺏어가는 적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기름을 붓는 건 바로 성적 불안이다. 성소수자의 등장은 가뜩이나 사회에서 역할을 잃고 불안에 빠진 가부장이 그나마 유일하게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에서조차 역할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민자를 강간범으로 묘사하는 것도 바로 이 불안을 추동하려는 파시즘 정치의 전형적 현상이다. 그들로부터 나의 아내, 딸, 누이를 지켜 더러운 피가 섞이지 않게 하는 것은 오랜 시간 가부장의 역할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여성, 이민자는 파시즘 정치의 주요한 먹잇감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가부장적 질서를 지키는 한 축에는 항상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나라에서 퀴어 축제가 열렸을 때 가장 열렬히 반대했던 건 '엄마'들이었다. 뿐만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무너지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도 바로 '엄마부대'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지정된 역할을 수행하는 한, 가부장적 위계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도 여성은 추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열녀, 효부, 현모, 양처라는 역할이 바로 여기에서 탄생한다. 나는 이것을 사회적으로 행해지는 가스라이팅이라고 정의한다.


파시즘 정치는 지금까지 언급한 것들이 모두 연결되어 단단한 토대를 형성한다. 완전한 허구에서 탄생한 신화가 '우리'와 '그들'을 구분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자리를 찾아가며 손쉽게 한 국가를 찢어놓는다. 중요한 건 이성을 지키는 일이고, 만연한 비정상을 어느새 정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을 경계하는 것인데, 말은 참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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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
S. A. 코스비 지음, 박영인 옮김 / 네버모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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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제목에 홀려 집어든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는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피 비린내가 진동하는 폭력 소설이었다. 이 소설에 비하면 <존 윅>은 발레에 가깝다. 피를 쏟는 방식이 상어와 독수리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다 읽고 나서야 원제인 <Razorblade Tears>를 발견했는데, 번역계에 노벨상이 있다면 이 소설의 옮긴이 박영인 씨에게 수여되리라.


<내 눈물이 너를 베리라>는 LGBTQ에 인종 문제까지 섞는다. 주인공 아이크와 버디는 각각 흑인과 백인이다. 두 사람에게는 모두 아들이 있다. 이 아들 둘이 결혼, 아이까지 입양해 가정을 꾸린다. 아들들은 기자 생활을 하며 LGBTQ의 수호자로 살아가다 우연히 위기에 빠진 트랜스젠더 여성을 돕게 되는데, 그녀에게 얻은 정보로 폭로 기사를 준비하던 중 총에 맞아 뇌수와 장기를 도로 위에 흩뿌리고 죽는다.


이제 아버지들의 차례다. 당연히 두 사람은 자기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살아있는 동안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러나 죽고 나면 세상이 달리 보이는 법이다. 아이크와 버디는 의기투합해 아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선다. 두 남자는 모두 범죄가 익숙한 사람들이었고 특히 아이크는 수감 시절 교도소 내 갱단 두목을 할 정도로 소싯적에 이름깨나 날리던 작자였다. 두 사람에게 걸린 놈들은 마체테에 목이 베이거나 땅을 다지는 기계로 얼굴을 짓이겨진 뒤 톱밥 기계 속으로 들어가 곱게 다진 고기가 된다. <존 윅>은 발레라고 하지 않았는가!


소설은 다른 인종의 두 아버지가 삐걱대던 첫 만남을 지나 진정한 친구가 되어가는 과정과, 혐오만 하던 LGBTQ의 세상을 하나씩 알아가며 인종과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닫는 성장기를 밑 판에 깔고, 복수의 환희와 광기, 피와 살점, 뼈와 내장을 골고루 올려 피자를 굽는다. 맛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식 아니랄까 봐 푸짐~한 건 사실이다. 파인 다이닝처럼 정교한 코스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이 고칼로리 인스턴트가 입에 맞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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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충돌 -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훙호펑 지음, 하남석 옮김 / 글항아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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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충돌>은 '차이메리카'에서 '신냉전'으로 급랭한 미중 관계 파국의 원인을 분석한다. 현재 주류 평론은 그 원인을 이데올로기의 차이에서 찾는 것 같다. 자유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독재 사이의 충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중국이 독재국가가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물론 시황제가 3연임을 강행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주석만 바꿔가며 당이 독재를 감행한 게 현대 중국의 역사 아니던가!? 게다가 경직성으로만 따지면 1989년 천안문의 인민을 '인민해방군'이 탱크로 깔아 죽인 덩샤오핑의 중국이 훨씬 권위주의적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미국과 중국은 공존을 넘어 단일경제체로 향할 만큼 달콤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훙호평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자본이 문제라고 말한다. 1990년대 미국의 외교 엘리트들은 인권과 환경을 지키지 않는 중국 기업에 제재를 가하려 했다. 당시 그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로비를 벌인 건 AT&T와 모토로라 같은 가장 미국적인 기업들이었다. 시장 개방을 약속한 중국 정부의 사주를 받아 해당 기업들은 총력전을 벌였고 그에 힘입어 중국은 현재 지구 최악의 환경 파괴국이자 인권 탄압국이 됐다.


중국이 얻은 건 세계 제2의 경제국이라는 위상이었지만 미국 기업들은 대부분 배신을 당한다. 약속은 많은 부분 파기되었고 진출에 성공한 기업들도 지적재산권 침해를 당하거나 사업체를 강제로 중국 기업에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수출로 제국을 완성한 중국은 미친 듯이 물건을 팔아 달러를 쓸어 모으고 미국이 발행한 채권을 사들여 다시 그 돈을 돌려줬기 때문이다.


'차이메리카'에 균열을 낸 건 2008년에 폭발한 서브프라임 모기지였다. 미국은 천문학적인 달러를 찍어내 구제 금융을 제공했고 전 세계 경제는 붕괴했다(탈중앙화를 모토로 내 건 비트코인이 바로 이때 탄생했다). 쏟아져 들어온 달러에 화폐 가치가 하락하니, 달러를 많이 보유했거나, 수출로 먹고사는 국가는 어려워졌고 두 조건 모두에 해당하는 중국의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침체된 경기를 살리기 위해 대출을 풀었고 이 돈은 기업으로 흘러가 가짜 수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실수요가 받쳐주지 않으면 이 거품은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주변의 개발도상국으로 눈을 돌렸다. 차관을 제공하고 해당 국가가 추진하는 대규모 사업들에 중국 기업의 기술과 상품을 이용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중국은 국내에 쌓인 잉여 생산물을 개발도상국에 떠넘겨 자국의 거품을 꺼뜨리려 했다. 이것이 바로 '일대일로'라 불리는 중국몽의 본질이다.


자본의 확장과 함께 중국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요충지에 군대를 파견할 수 있었다. 중국과 미국 모두에게 중요한 위치에 두 국가 간 군사적 갈등이 조성됐다. 바야흐로 '신냉전'이 시작된 것이다.


훙호평은 이 갈등의 해결을 위해선 빈부격차 해소가 답이라고 말한다. 개념적으로만 보면 최근 중국이 선언한 '공동부유'나 미국의 '리쇼어링'이 중요한 열쇠라는 말이다. 빈부격차가 해소되어 내수 소비가 증가하면 잉여 생산물과 자본은 모두 국내에서 소비될 수 있다. 굳이 해외로 나가 타국과 충돌하지 않아도 지속적인 경제 발전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둘 모두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다.


훙호평은 '공동부유'가 중국이 알리바바나 텐센트 같은 초거대 민간 기업을 탄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말한다. 리쇼어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중국과 미국의 디커플링은 가속화하겠지만 그렇다고 그 생산 기지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기(리쇼어링) 보다는 다른 개발도상국으로 이전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제국의 충돌>은 두께만큼 명쾌하고 간략한 책이다. 어려운 내용도 하나 없고 앉은자리에서 해치울 만큼 짧기도 하다. 심지어 번역까지 괜찮다. 깊은 내용에 쉬운 독해, 훌륭한 번역까지 3박자를 갖춘 책은 일단 읽고 봐야 한다. 지금부터 훙호평 정주행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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