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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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나는 폴 오스터를 끔찍이도 싫어한다. <환상의 책> 이후로 다시는 읽지 않기로 결심할 정도니까.


이 책을 만난 건 찌는 듯이 타오르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내가 일하는 곳은 출판사들을 한데 때려 놓고 '출판도시'라는 이름을 붙인 곳인데 서울보다는 개성이 더 가까운 곳으로, 아마도 그래서인지 근처 롯데 아울렛에 단체 쇼핑을 하러 오는 중국인 관광객들 말고는 흔히 사람이라 부르는 동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출판인이라 부르는 '비인'이 득실득실하다.


출판인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완고한 턱을 가진 종과 찌푸린 이마를 가진 종. 그들은 둘 혹은 셋씩 짝지어 돌아다니는데 넷이나 다섯 혹은 여섯이 뭉쳐 시끌벅적하게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들은 늘 조곤조곤 조용히 말하며 서로를 향해 동의의 고갯짓을 끄덕이지만 이는 상대방의 말을 존중해야한다는 교양인의 미덕을 실천하는 것일 뿐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시작되는 진정한 수긍은 아니다. 그래서 처음 겪는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의 말에 동의를 해준다고 믿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출판인들을 상대할 땐 어금니 뒤로 숨겨 물은 완고한 자의식과 십수년을 혼자 일하며 갈고 닦은 단단한 편견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실 그들은 다른 출판인 혹은 작가를 만나는 것보다 책 더미가 지저분하게 쌓인 책상에 파고 들어가 좋아하는 펜 하나를 손에 들고 구겨진 원고를 읽는 걸 더 선호한다. 이때만큼은 그들도 숨기는 것이 없다. 그들은 마치 절대로 보여줘선 안되는 고급 보석인양 마음 속 깊이 넣고 꽁꽁 가둬 놨던 자의식과 편견, 직업적 긍지를 원고 위에 풀어 놓고는 문장을 유린하고 난도질하며 웃음짓는 음흉한 악어같다. 물론 받아온 원고가 너무 구릴 땐 예민한 코끼리가 되어 사무실을 전부 뒤집어 엎을만한 신경질을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도 교양인의 미덕을 지키느라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단지 그렇게 할 것 같은 분위기만 잔뜩 풍겨 주변 사람을 초조하게 만든다. 이렇듯 그들은 자기 주변의 비인보다는 흰 종이 위에 늘어선 글자를 더 좋아하는 동물이다. 그리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다시 찌는 듯한 어느 여름날로 돌아가자. 나는 사람이 싫어 혼자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바로 옆의 도서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습기를 머금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이 황홀한 냄새의 유혹을 따라 열린책들의 책들이 쌓인 서가로 이동한다. 익숙한 전집들. 그 수 많은 책들 중에서도 나는 단박에 미스터 버티고(이 책의 원제), 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를 낚아 올린다. 이것이 바로 폴 오스터가 끊임없이 자신의 작품에 우겨 넣는 그 우연의 미학일까? 말했지만 나는 폴 오스터라면 질겁을 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빵 굽는 타자기>였다면 이해가 간다. 유독 그 책 만큼은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중 곡예사>를 <빵 굽는 타자기>로 오해하기 위해선 몇몇 인지 장애와 심각한 심리불안이 필요하다. 그 날 나는 찌는 듯한 더위에 짜증이 좀 나 있긴 했지만 사물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미스터 버티고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바로 그 책을 사버렸다.


이 책은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폴 오스터와의 책과는 완전히 다른 소설이다. 이야기 속에 촘촘히 새겨 넣은 난해한 상징과 사건은 없다. <공중 곡예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이야기의 실타래다. 불우했던 한 남자의 흥망성쇠과 슬픔과 기쁨을 넘나들며 소용돌이 친다. 줄거리를 말해주는 건 의미가 없다. 그저 딱 한 마디만 하면, 새옹지마. <빵 굽는 타자기>가 폴 오스터 자신의 인생을 고백한 수필이었다면 <공중 곡예사>는 이를 소설화 한 것 같은 작품이다. 여기엔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청년 시절, 성공이라 믿었지만 그 뒤에 칼날처럼 도사리던 반복된 몰락의 기록이 있다.


인생의 부침을 여러번 겪다보면 인생을 꿰뚫는 진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건, 원하는 것을 얻으면 얻는대로, 얻지 못하면 얻지 못하는대로 여전히 인생이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중요한 건 일희일비하지 않는 태도다. 새 말을 얻었을 때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 말이 떠나갔을 때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삶을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이러쿵 저러쿵 논쟁을 벌여봐야 당신은 동의하지 않을 테니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이 논쟁을 끝내겠다. 해보면 안다. 진짜로.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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