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병 대산세계문학총서 131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임미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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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비루하다고 생각하는 작가의 글은 언제나 황홀하다. 그들은 삶의 본질을 깨달은 몇 안되는 위인 중 하나이며 그 통찰력은 비록 보통 사람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힐 게 뻔함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려질만한 가치가 있다. 누군가는 끈기있게 그 일을 해 나가야 한다.


정 알고 싶다면 털어놓겠는데, 나는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산다는 것은 무척 피곤한 일인 것 같다. 물론 이제는 어쩔 수 없고, 이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유감은 내 마음속에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감정을 완전히 지워버리지는 못할 것이고, 그로 인해 결국 모든 것이 암울해질 것이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일은 빠르게 늙어가는 일, 양옆을 돌아보지 않고 되도록 빠른 속도로 세월을 삼켜버리는 일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로 인해 빚어지는 갖가지 자잘한 고통들은 감수해야 하고, 그러면서 너무 힘들어 하지는 말아야 한다. 삶은 불합리한 것들, 터무니없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소소한 광기일 뿐이지만, 눈을 좀더 가까이 대고 들여다보면 무시무시한 것들이다(p.5, 서문 중에서).


르 클레지오는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 하루 죽어간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나는 이 의견에 대찬성이며 삶을 비전과 희망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그만 착각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싶다. 혹자는 이같은 주장에 치가 떨럴지도 모른다. 삶은 축복이자 축제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허무와 패배감으로 채우는 건 낭비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범죄다. 당신이 허무로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오늘이지 않은가?


호통을 치는 사람들은 삶이 선물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귀한 선물이기에 조심히 포장을 벗겨 애지중지 다루리라. 그러나 나는 삶이 부당하게 주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갖겠다고 동의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삶은 강매당한 다단계 제품보다 파렴치하고 술래가 등 뒤에 두고간 수건보다 음흉하다. 우리는 뒤에 수건이 놓인 줄도 모르다 순식간에 삶으로 빨려들어왔고 성장하고 연인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섹스를 하다 그 냄새나고 더러운 수건을 또 다른 누군가의 등 뒤에 놓고 도망쳐 나온다. 번식은 기본적으로 억울함이 추동하는 복수극이다. 그것은 전혀 숭고하지 않다. 세대를 거치며 자행되는 죄의 대물림이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나는 평생 그 진실을 등지고 살겠다. 진실이 우리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진실을 과감히 폐기해야 한다. 그렇게 살고 싶다면 그렇게 살아라. 그러나 당신은 살아가면서 당신의 생각에 반하는 다양한 증거들을 만날 것이고 그 때마다 슬픔에 빠질 것이다. 슬퍼하지 않는 건 오히려 나다. 나는 애초에 이 삶이 파렴치한 사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런 증거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 당신은 불합리한 삶에 상처를 받을 수 있지만 나는 결코 상처받지 않는다. 당신은 삶이 당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게 배신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가 그렇다고 믿었던 것들이 그렇지 않았음을 깨달을 때 온다. 삶이 원래 터무니 없다는 걸 아는 자들의 마음 속엔 이러한 부조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터무니 없는 존재가 터무니 없는 모습을 드러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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