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케티의 사회주의 시급하다
토마 피케티 지음, 이민주 옮김 / 은행나무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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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1990년을 사는 나에게 "당신은 2020년이 되면 <사회주의 시급하다>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할 거요"라고 말했다면 난 웬 말 같지 않은 소리냐고 했을 거다.(p.9)


토마 피케티가 막 성인이 되던 해에 동유럽 공산주의 독재국가와 함께 '진짜 사회주의'가 몰락해버렸다. 모든 인간에게 평등을 주장했던 공산주의의 숭고한 정신은 무능한 독재자들에 의해 오해를 사고 더럽혀졌지만 실패와 몰락이라는 조롱은 모두 그 멍청이들이 아닌 공산주의에 달려가 붙었다.


이후 자본의 폭주를 막아 세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아니 심지어 분배라는 말만 들어도 저 끔찍한 정치범 수용소나 보잘것없는 배급으로 가난에 시달리는 인민들을 떠올리며 경기를 일으켰다. 정부의 개입은 무조건 악이었고 복지 예산의 증가와 공공의료보험의 도입은 공산주의의 재림으로 여겨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복지 예산으로 먹고사는 빈곤층이 '공산주의 꺼져라'라는 피켓을 들고 복지 예산을 증액하려는 정부 방침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토마 피케티는 이런 세상에서 다시 '사회주의'를 외치는 용기 있는 경제학자다. 그의 주 관심사는 자본의 폭주가 시작된 이래 늘어만 가는 부의 불평등이다. 이런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일명 참여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를 주장하는데, 그 근간은 교육의 평등과 사회보장 국가, 권력과 소유권의 순환, 친환경, 사회 연방주의 그리고 지속 가능하며 공정한 세계화 등이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국가들이 한데 모여 연방을 이룬다는 게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한 일이지만 이미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느슨한 연방 체계를 구축한 유럽에서는 완전히 꿈같은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유럽 의회가 지금과는 달리 주도적으로 법을 만들고 그것을 전 유럽에 강제하며 예산을 승인하고 집행해 평등한 독일, 평등한 프랑스, 평등한 이탈리아가 아닌 평등한 유럽을 만드는 것. 피케티 교수가 주장하는 정책이 현실이 되려면 강력한 유럽 의회의 설립은 필수다. 클릭 한 번으로 자산이 자유롭게 국경을 넘는 오늘날 한 국가가 높은 부유세와 법인세를 부과하는 법을 통과시킨다 한들 부는 얼마든지 도망을 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연합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자국의 이득을 극대화하려는 셈법이 치열한 판국에 인구 규모도, 가진 자산도 다른 나라가 자기의 운명을 좌우할 의회 설립에 선뜻 합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관전하는 입장에서 매우 흥미로운 건 사실이다.


<사회주의 시급하다>는 피케티가 르몽드 지에 게재한 칼럼을 모아 놓은 책이다. 위에서 언급한 이야기들이 파편적으로 등장하지만, 그 특성상 주장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한국인에겐 생소한 내용도, 무관한 내용도 많다. 사실 그렇게 인상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책이다. <21세기 자본>의 위엄을 들어 만지작만지작했으나 번역의 질과 두께에 질려 엄두도 내지 못했던 사람이, '그래도 피케티의 글을 한번 읽어 봤다'는 만족을 얻는 것 이상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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