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의 재구성 -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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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봐도 나쁜 놈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판사를 보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인터넷 기사를 읽다보면 법조인과 대중의 온도차가 여실히 드러나는 사건들이 넘쳐난다. 최근의 고유정 사건만 해도 그렇다. 그녀의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들은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다 결국 변호를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한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고유정. 그녀를 변호하는 일은 그녀의 범죄 행위를 부인하거나 옹호하는 걸까? 변호사들이 그녀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들은 그저 돈에 눈이 먼 인간 쓰레기인 걸까?


모든 피의자는 재판을 받는 동안에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해 보호 받을 권리가 있다. 아무리 범죄 사실이 확실해 보여도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심지어 피의자의 자백이 있어도 아직은 무죄다(과거 한국에는 끔찍한 고문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일이 빈번했고 이러한 범죄 행위를 막기 위해 자백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는 법을 만들었다). 우리의 눈에는 이런 것들이 거추장스러운 법적 절차로 보일지 모르지만 형사 사건의 경우 원심의 유죄가 상고심에서 뒤집히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왜 그럴까?


도진기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판사가 제일 싫어하는 일은 '나쁜 사람을 풀어주는 게 아니라 무고한 사람을 벌 주는 거' 라고 한다. 형사 사건의 경우, 특히 살인이 벌어져 피의자가 극형을 면하기 어려운 경우 판사들은 '합리적 의심'이 추호도 발생하지 않을때까지 증거와 논증을 요구한다. 밤사이 둘만 있었던 것이 확실하고, 인근 마트에서 범행 도구를 구매하는 영상이 찍히고, 피의자가 토막 낸 시체를 바다에 버리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면을 목격한 증인이 나타나더라도, 외부의 침입자가 동일한 범죄 도구로 피해자를 살해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드는 순간 피의자는 무죄다. 범죄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할 수 있는 건 DNA 정도가 유일하다. 강간 피해자의 몸 안에서 피의자의 정액이 발견되는 수준의 증거 말이다.


사람들은 판사의 '합리적 의심'이 지나치게 편집증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난생 처음 방문한 놀이 공원에서 총기 난사가 발생했는데 그 범인이 내 첫사랑일 확률보다도 희박한 가정을 과연 '합리적 의심'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판결이란 결국 증거와 증언을 종합하여 고려한 판사의 '주관적' 해석에 불과하다. 대단히 부조리해 보이지만 법 자체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리고 그 법은 오랜 기간 매우 타당한 이유에서 그런 형태를 갖춘 것이다.


이 책에는 대중의 감정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판결이 내려진 형사 사건들이 등장한다. 오랜 기간 판사로 재직했던 도진기 변호사는 판결의 근거를 설명하는 동시에 이제는 조직을 떠난 자유인 답게 사법 체계의 한계와 비판을 덧붙인다. 변호사님의 소설에는 상당히 실망했던 나도 이 책은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흥미로운 형사사건도 사건이지만 도진기 변호사의 필력이 대단함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법과 대중의 괴리를 이토록 훌륭하게 메우는 책이 과거에 또 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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