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한 미래 사회 한편에는 첨단 기술을 활용하면서 고소득과 많은 여가를누리는 소수가, 한편에는 기술의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실업과 저임금불안정 노동을 오가는 다수가 존재하게 된다. 어떤 이에겐 일이 자아실현의수단이지만 대다수에겐 보람도 안정도 없는 생계수단으로 남는다. 이집단들 사이에 불평등이 커지면서 사회적 갈등 역시 늘어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건 포스트휴머니즘이건, 어떤 ‘포스트‘ 슬로건을내걸어도 우리는 여전히 생각하는 주체, 코기토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아마도 인류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발전 가능한 지점, 모두가 건강하고행복한 삶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은 자신과 주변 그리고 자연이 공동운명체임을 받아들이고, 서로 인정하고 보살피며 보조를 맞춰나갈 마음의여유를 갖추는 데 있을 것이다.
최근 인공지능 발달과 맞물려 등장한 ‘포스트 휴먼 논의도 같은 맥락에있는 것으로 보인다. 혹시 우리는 ‘사물에 지능을 부여 하고 기계가생각한다고 너무 쉽게 말하는 것은 아닌지 되묻고 싶다. 인공지능의 아버지격인 튜링 스스로도 생각한다는 것에는 일면 튜링 테스트 식으로 해명될부분이 있다고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튜링도 그렇게 간단히 설명할 수있다고는 여기지 않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인간은 아직도 ‘지능‘이무엇이고 ‘생각‘이라는 게 무엇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