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확천금을 꿈꾸다 아내를 잃은 주인공이나 사무라이가 되긴했으나 아내를 사창굴에 떨어트린 매부가 모두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줄거리는 언뜻 교훈적인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를 살아가는 서민들의 고통, 군사들의 약탈과 만행이 전경화되어 있고 망자가 살고 있는 저택이나 가무의 정경이 독특한 영상미를 통해 제시되고 있다. 초자연적인 사건이 전개될 때의 수상찍은 전통 음악의 울림도 아주 독특하여 인상적이다. 특히 망자와 그녀의 몸종이 풍기는 요상한 분위기는 그야말로 귀기를
오즈(小津) 감독은 가정이라는 틀 안에서의 가족들의 삶을 섬세하고 정감 있게 다루었다. 거기서 가족의 분산은 자연 주요 모티프가 된다. 만춘」에서 부친은 과년한 딸을 시집보내려 애쓰고 거짓 재혼 놀음까지 벌인다. 그러나 딸의 결혼은 가족 이산이고 그래서 과일을 깎다 마는 장면이나 밤바다의 마지막 장면은이산에 따른 고독에 대한 예사로우면서도 절실한 영상 언어가되어 있다. 그 뒤에 나온 맥추(麥秋)」 또한 과년한 딸의 결혼이라는 해피 엔드로 끝나지만 그것은 친정 가정의 이산을 수반하는것이다.
노부부로서는 처음 상경길이요 또 죽음이란 큰 사건이 있으니오즈 영화치고는 사건과 기복이 많은 셈이다. 그러나 대체로 잔잔하고 섬세하게 일상을 다루는 그의 작풍(風)의 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과장이나 허풍이 없이 예사로운 듯이 대화와 줄거리를 전개하기 때문에 초심자들은 단조하고 진부하다고 오해할 소지가 많다. 특히 폭력이나 범죄 영화에 길든 세대에겐 그럴 공산이 크다. 하지만 우리에게 삶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여운과 깊이를 두루 갖춘 영화이다. 미국의 대중문화 비평가가 특히 이 영화를 염두에 두고 제인 오스틴과 비교하면서 호평하는것도 무리가 아니다.
잔바라‘는 큰 칼싸움을 가리키는 일본 말이다. 그래서 사무라이들의 큰 칼싸움을 다룬 영화를 ‘잔바라 영화‘라 하고 일본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는 잔바라 영화와 미국 서부극의 규모를 접합시킨 명작이요 대작이다. 1960년대 초에 상영되었던 율 브린너 주연 「황야의 7인을 통해 그 소문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구로사와 영화를 구경하고 나니 황야의 7인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모조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압도적으로 재미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앞에서 보낸 시간도 많았다. 마침 동구권이 붕괴하던 시기여서 시엔에 방송을 즐겨 시청했다. 차우셰스쿠의 말로를 담은 뉴스는 너무 현장감이 넘쳐 몇 번이고 되풀이해 보았다. 그러다가 케이블 텔레비전으로 영화도 보게 되었다. 이름만 듣고 보지 못했던 영화를 보게 된 것이다. 「시민 케인, 같은 것은 모임에 참석했다가 밤늦게 시간에 맞춰 오느라 부산을 피웠다. 「민들레」, 「스물네 개의 눈동자」 같은 일본 영화도 보았는데 전만 같지 못했다. 그때 본 영화는 짤막한 소감을 적어 놓은 것도 있다.
고전의 특징은 반복적 향수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 반복적인 향수가 필요하기도 하다. 읽을 때마다 전에 간과한 것을 발견하고 새로운 의미 차원을 접하게 된다. 또 문체 자체의 매력 때문에 다시 읽게 된다. 이에 반해 통속적인 작품은 반복적 향수를견디지 못한다. 줄거리에 거의 전부를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줄거리를 알고 나면 또 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진다. 영상미나 연기가 탁월하면 그 때문에 다시 보고싶은 경우도 있다. 그러나 광적인 영화 팬이 아니고선 같은 영화를 두 번 보고 싶은 생각은 없을 것이다. 회고 취향이 아니고선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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