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브루너는 말했다. 복음은 그 시대의 언어로번역되어야 한다고, 바르트 또한 그의 저서 《교리개론》에서, 문제는 번역이라고, 예를 들자면 신문언어로의 번역이라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교회언어의 형태로 말하는 것도 결국 세속의 말과 다를바 없다는 것이다.



신들도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없으므로인간은 결국 심연에 다다른 다. 그리하여인간과 함께 반향이 되 돌아온다. 시 간 은길고, 그러나 진실은발생한다.
(횔덜린)

하지만 시인은 이 이상의 일을 한다. 창조자가 창조한것을 분명히 보았다고 알리는 것을 넘어서, 자신 주변의사물을 말로 포착해내고, 시인 자신의 말로 묘사하여다시 창조자에게 되돌려보내는 일을 한다.



많은 아프리카 말들은 오직 현재시제만을 다룬다.
미래나 과거는 모두 한꺼번에 "현재 아닌 것"으로몰아서 표현할 뿐, 그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객체와마주치는 그 순간은 너무도 강렬하여, 현재에서 과거나미래로 떨어져나갈 수가 없다.


말이 객체를 잃으면, 말은 단순한 기호에 불과해진다.
그냥 스치고 지나가버리는 것, 스치고 지나가는 다른것으로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존재로,

인간은 말을 가짐으로써, 언어가 없는 피조물들과구분된다.


수동성도 인간 안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수동성은침묵을 필요로 하는 데, 오늘날의 말과 인간은 침묵을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침묵, 비역동적이며 정적인말들은 놀이처럼 오직 아이들에게만 남아 있다.


사랑은 분리되어 흐르는 시간의 외부에 있다. 그래서연인들은 시간의 흐름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연인들은사랑하면서 시간을 창조해낸다. 사랑의 영역인분리되지 않은 시간에는 연인들 스스로가 사용할 수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얼굴의 형상은, 인간이 최초의 말을 하기 이전,
아직은 감히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던 그 태초의순간을 기억한다. 모든 침묵에는 자신의 말 앞에서수줍어하던 그때의 흔적이 들어 있다. 그것이 침묵을깊게 만든다. 침묵은 태초로의 회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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