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없었던 봄, 아무도 몰랐던 학교, 사라진 마리산그날 그곳에서 멈춘 질문을 다시 시작하다저기 아파트가 생기고 사람들이 살기 시작할 때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저곳에 누군가 살았고 이야기를 들어 주던 멧돼지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산바는 진작 자기 별로 돌아가 놓고 우리 앞에 나타났던 건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없는 우리를 수다쟁이로 만들고 싶어서,
질문을 멈춘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시궁창에 처박아 놓고 콧노래를 부르며 나가 버리다니. 그토록 알아듣게 타일렀는데, 한번 더 나가면 끝이라고, 그 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림은 분명히 알아들은 눈치였다. 죽어도 좋다는 건가? 마지막으로 설득을해야 하나? 빌어야 하나? 한번 시작한 매질은 멈출 수 없다. 약해질 수도 없다. 회초리를 때려서 말을 안 들으면 몽둥이로, 몽둥이가 안 먹히면 쇠막대를 들어야 한다. 폭력은 후진을 하지 않는다. 더 세게, 더 아프게, 더 무섭게밖에 없었다. 그 끝에 뭐가있을 것인가. 결국 때리는 사람과 맞는 사람 둘 중에 하나가 죽는 수밖에 없는 거 아닌가. 아버지 생각이 났다. 생전 처음 맛보는 무력감이었다.
 

낮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새끼를 거느린 멧돼지들은 한껏 포악했다. 하지만 아무리 포악해도 이 산에서 먹을 것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얼마 전 사람이 사는 집 마당까지 들어간 멧돼지가 또잡혔다. 순서가 다르거나 종류가 다를 뿐 이 산에 있는 동물들은결국 다 그렇게 죽어 갈 것이다. 길을 건너다가 납작하게 도로에깔리거나 먹을 걸 구하러 내려갔다가 사람들 손에 잡혀 죽거나,
굶어서 죽거나, 이상한 걸 먹고 몸을 뒤틀며 토하다가 죽거나, 그렇게 죽을 것이다. 사는 것만큼 죽음이 대수롭지 않았다. 죽음이너무 흔해 빠졌다. 산바가 보기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의죽음은 오히려 동물들보다 흔해 보였다. 생각보다 자신의 순서가늦게 온다고 산바는 생각했다.

"나는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고, 이유가 있는 일에만 움직이는 편이야.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울지 않았어.
사람들은 나보고 독한 놈이라고 했지만 나는 울지 않은 이유가있어서 괜찮았어. 할머니도 아마 괜찮았을 거야."
유림이 고개를 들고 주호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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