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쉬고 싶을 때, 책을 편안하게 오래 읽고 싶을 때. 집에서 자꾸 나가게 된다. 책 읽기 좋은 공간을 찾아다니고, 그런 공간을 만나면 마음이 설레어 다른 시공에서도 그 곳을 자꾸 그리워하게 된다. 근데 사실 난 집순이. 청춘팔팔했을 때에도 밖에서 빨빨거리고 다니는건 다니는거고, 나홀로 집에서만 먹고자고놀아도 즐겁게 몇박몇일 가능한 인간. 집은 그렇게 밖에서 소진된 나의 에너지를 충전해 주는 곳. 밧데리 자동충전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의 집은 내게 더 이상 그런 공간이 아니게 되었다. 티비를 켜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는데 그저 시끄럽다. 소곤소곤 말을 건네던, 또는 고요하게 멍 때릴수 있는 나의 집이 아니라, 상처와 부담, 후회와 방임이 집구석 여기저기 덕지덕지 붙어 내게 소리친다. 빨리 어떻게 좀 하라고. 아.. 시끄럽고 답답해. 그래서 집에서 적당히 떨어진 카페나 공원, 도서관으로 돌아다니고, 여유가 좀더 있을 때면 3-40분 차를 타고나가 조용한 파주의 도서관에 가서 가져간 책을 읽는다.
친구가 이런 내게 말한다. 이상해. 무슨 책을 거기까지 가서 읽어?
그러게. 집 안에 숨겨둔 내 꼬라지가 맘에 안드나봐. 그럼 밖에 나오면 그럴싸해 보이나. 그건 아니구, 집구석에 묻어 있는 나의 고민들로부터 도망가는거지. 잠시라도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나도 좀더 적극적으로 뭔가 다른 형태의 삶을 찾고 싶다. 간단히 말하면 다시 혼자 살고 싶다는 거지. 나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여자 혼자 자알 살고 있습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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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2 (술이 인생을 바꾼 순간, 아무튼 술)
지금까지 가본 어떤 집보다도 말이 많은 집이었다. 책이 많아서도, 낡고 오래돼서도 아니었다. 그런 집들은 살면서 얼마든지 가봤다. 이 집이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있는 게 없다는 점이었다. (… ) 그러니까, 그 집은 최선을 다하고 있는 집이었다. 별생각 없이 적당히 구색만 맞추고 살 뿐 물건 하나하나에 딱히 애정이 없고, 사놓고 안 쓰는 물건과 써야 하는데 안 사둔 물건들이 항시 생기는 나태한 나의 집과는 전혀 다른 집. 단정한 삶을 꾸려가는 주인의 심지가 중심에 단단히 박힌 집. (…) 이 집이 소곤대는 이야기들이 나는 무척 좋았다.
p.64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中, 여행의 이유>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리되어 있으며, 설령 어질러진다 해도 떠나면 그만이다. 호텔 청소의 기본 원칙은 이미 다녀간 투숙객의 흔적을 완벽히 제거하는 것이다.
호텔은 집요하게 기억을 지운다. 이전 투숙객의 기억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전날 남겼던 생활의 흔적도 지워지거나 살짝 달라져 있다. (…) 어제와 다르지 않은 오늘이 끝없이 반복되는 듯하다. 그래서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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