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03

요며칠 부암동에 가고 싶었다. 서울 한복판 산동네(?)의 맑고 쨍한 공기를 콧구멍에 넣어주고 싶었고, 김환기 작품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고, 겨울 볕 좋은 창가에 앉아서 커피한잔에 책도 읽고 싶었다.

 

부암동 갈 때마다 스쳐지나기만 했던 윤동주문학관. 오늘 드디어 들어갔다. 듣던 대로 정말 작구나. 세 개의 우물을 영접할 수 있는 곳. 어쩌다보니 나는 거꾸로 3전시관(닫힌 우물), 2전시관(열린 우물), 1전시관(진짜 우물) 순서로 들르게 되었다. 춥고 외로운 형무소 같았던 ‘닫힌 우물’ 속에서 시린 손 주머니 속에 꽉 쥐고, 거친 벽에 투사된 윤동주 영상을 감상했다. 닫힌 우물에서 다시 1 전시관으로 돌아오는 동안 지나게 되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짧은 통로. 예전에 물탱크였다는데, 윗부분은 개방하여 내가 우물 속에 들어와 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열린 우물’이라 이름 지어졌단다. 물이 흐른 흔적이 유독 거칠게 남아있는 벽을 따라 올려다보니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부는” 겨울이 있다. 다시 돌아온 1전시관. 진짜 좁다. 일반 전시관의 작은 방 한 칸의 크기보다 작지만 윤동주의 일생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전시관 내부에 사진촬영이 금지되어있다 보니까 오히려 안내문 한 글자 한 글자 모조리 정독하고, 누렇게 바랜 원고지 속 그의 필체를 하나하나 눈으로 따라 썼다. 정지용 시인의 말처럼 “추운 동섣달 눈 속에 핀 꽃처럼” 아름다운 시인이 일본땅 차가운 형무소에서 눈을 감다니. 얼마나 무섭고 원통했을까. 마지막 순간 외마디 비명을 길게 내뱉고 그리 갔다니 가슴이 너무 아팠다. 영화 동주를 보지 않았었는데,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그의 시집도 이번기회에 소장하련다. 그의 생가에서 가져왔다는 낡은 우물 앞에 써져 있는 「자화상」을 가만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핑그르르.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 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댓글(9)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0-01-15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암동이라는 곳이 서울에 있는 줄도 몰랐는데 한 번 가보고 싶어지네요. 아 이번 주 금요일에 가볼까...무님 저랑 같은 써울쌀람이세요?!

무식쟁이 2020-01-15 23:40   좋아요 1 | URL
예아. 암썰쌀왐

반유행열반인 2020-01-16 05:57   좋아요 0 | URL
우와 겨우 천만 인구인 같은 썰쌀람이라니 왜 반갑죠 ㅋㅋㅋㅋ

무식쟁이 2020-01-16 17:52   좋아요 1 | URL
ㅋㅋㅋ 이게 벌써 추억의 풋풋한 댓글. 하루만에 성지순례 기분이 들다니.. ㅋ

반유행열반인 2020-01-16 19:54   좋아요 0 | URL
계속 좋은 책 읽고 좋은 글 많이 남겨주세요. 여기가 센스 맛집이라더니 역시나 소문대로네요.

2020-01-15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5 2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1-16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식쟁이 2020-01-16 17:54   좋아요 0 | URL
네.. 조만간 다녀와야 겠어요. 추천해주셔서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