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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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국어교사였던 알콜중독자 영경과 매일 자살을 생각하며 살던 류머티즘 중증환자 수환. 서로의 ‘없음‘을 알아보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관계. 현실에 이런 순수한 관계가 있을까. 문학이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상상의 관계 아닌가. 현실에서 우리는 ‘있음’으로 관계가 시작된다. 경제적 여유, 사회적 지위, 이상적인 외모, 배려심, 유머감각 등 좋은 성격, 섹시한 지성 등등. 뭐든 상대가 갖추고 ‘있음’으로 매력을 느낀다. 내게 ‘없는’ 것이 그에게 ‘있을’ 경우에 더 큰 매력으로 다가오는 법. 일상에서 초추의 양광을 운운하는 박사과정 중인 예연이 헬스트레이너 인태에게 특별하게 느껴지고, 박사과정까지 아르바이트 한번 없이 곱게 자란 예연이 낮에는 헬스트레이터 밤에는 초밥집에서 일하는 성실하고 자상한 인태에게 끌리는 것.(「층」) 이렇게 우리는 ‘있음’을 서로에게서 알아보고 관계가 시작된다.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는 절대 아니라고 눈알을 번뜩이며 뭐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쥐뿔도 없고 무식한 울애인님을 오직 사랑하나만 보고 결혼했다규!! 워워.. 찬찬히 생각해 보시라. 그 쥐뿔도 없음을 순수하게 사랑했냐고. 그 무식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냐고. 쥐뿔도 없고 무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또 다른 ‘있음’의 영향으로 ‘없음’을 참아주거나 넘어 가주는 것 아니었는지. 그의 ‘있음’으로 그의 ‘없음’을 덮은 것이 아니었는지.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시라. 그리고 우리는 조만간 그 ‘있음’에 익숙해지면 신비한 매력은 사라질지니 이를 식물학적 전문용어로 '콩깍지가 벗겨졌다'라고 한다. 

 

없음을 함께 견디어내는 「봄밤」을 읽다보니 엄청엄청 오래전에 본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Leaving Lasvegas)가 떠올랐다. 와.. 그 버릴 곡 하나 없이 훌륭했던 그 OST..(또 옆길..) 술 먹다 죽기위해 라스베가스로 온 알콜중독자 벤과 그런 벤에게 술병을 선물해주는 매춘부 세라의 사랑. 이런 관계가 현실에서는 비극인지 사랑인지 모르겠다 난. 현실에서는 어차피 불가능한 사랑 같지만, 아무튼 봄밤에서 수환과 영경의 사랑은 슬프도록 아름답다.


‘있음’ 아닌 ‘없음’을 이해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관계라면 내 하찮은 수준으로는 언감생심 꿈도 못 꾸겠네. 난 가진 게 너무 많아서 사랑도 못하겠어요. 난 상대의 ‘없음’ 까지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그럴까. 상대도 그럴까. -_-+ 의심의 눈초리.. 이러니 내가 이 세상 사랑을 믿을 수가 있겠냐고. 역시 이번 생엔 사랑은 글렀다. 

 

p.53
영경은 컵라면과 소주 한 병을 더 샀다.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그녀는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서둘지 말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영경은 작게 읊조렸다.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영경은 자신의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며 소주와 컵라면을 먹는 그녀를 사람들이 곁눈질했다.
영경은 컵라면과 소주 한 병을 비우고 과자 한 봉지와 페트 소주와 생수를 사가지고 편의점을 나왔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 같이! 영경은 큰 소리로 외치며 걸었다.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영경은 작은 모텔 입구에 멈춰 섰다.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갑자기 수환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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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1-15 0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봄밤은 단권으로 된 걸 봤어요. 너에겐 뭐가 없어도 (다른 게 있으니까) 사랑해. 괄호 안 조건문이 필수 요소겠네요. 무님 글에 끄덕끄덕 하다 가네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