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알려주는 것들
김유정 지음 / 자유정신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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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현대인들은 사색에 인색하다. 아니 세상이 고뇌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래도 잘 산다? 아니 잘 죽는다. 사색과 인생에 대한 고찰 없이 살다가 결국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고 있다. 살기 위해 죽는다. 죽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여름밤의 서늘한 바람이 필요하다. 잘 살기 위해 즐거운 여름밤의 사색이 필요하다. 저자 김유정은 그런 시간을 아주 많이 보낸 것 같다. 어떤 사상가나, 책이나, 주장을 읽고 쓴 책이 아니라 그야말로 ‘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알려준 것’을 써 내려 가고 있다. 주제는 [나]다.

 

저자는 [나]를 찾아 떠났다. [나]를 통해 나를 찾았다. [나]를 찾는데 다른 무엇, 어떤 이가 필요하지 않았다. 내 속에 이미 충분한 [나]가 있다. 내 안에 이미 행복(幸福)도 있다. 내 안에 즐거움도, 의미도, 창조도, 영생도 있다. [나]속에 도덕(道德)과 철학(哲學)도 있다. [나] 속에 문명도, 시간도, 미(美)도, 안식도 있다. 신(神)을 찾을 필요도 없다. [나]가 이미 신(神)이다. 따라서 [나]를 찾으면 된다. 모든 것을 관계에서, 책에서,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 온다고 한다. 물론 다른 어떤 것들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나]가 분명하지 않으면 더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한다. 그 [나]를 찾는 방법은 ‘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알려 준’다고 한다.

 

굿맨이라고 여겨지는 인권운동가, 환경학자, 사회사업가, 호스피스, 종교의 사제 등등을 찾았지만 이들은 실망에 젖는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만 이면의 죄들을 보면서 현대인들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어가는 사람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아니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누군가가 굿맨이 되어 주겠지라고 서로 떠넘기는 심리적 현상을 고발하고 있기도 하다. 그 라스트 굿맨이 바로 나여야 하지 않을까 라는 강력한 멧세지를 보내고 있다.

 

작가는 p109에 “인식 주체에 의해 의지되고 인식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나에 의해 창조됩니다.”

p111에 ‘진리는 인식 주체의 의지에 따라 변화합니다. 이것이 존재 [나]를 발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p175에 ‘무지한 자들이 자구 삶을 이끌어 간다. 인간 일반은 혼란스럽다. 그래도 걱정 없다. 진리와 [나]는 이미 여기 있으니.’

p195에 ‘이와 같이 인간의 필연적 불완전성으로부터 신은 존재합니다. 신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인식)의 대상입니다.’

p274에 ‘[나]의 발견을 통하여 존재의 한계인 죽음에 대한 경계를 허문다. [나]는 시간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계를 완전히 극복하려면 [나]의 발견 후에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작가는 인간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다. 여러 가지 불안한 요소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깊은 사색을 통해 [나]를 발견하면 그 불안을 다 떠난다고 한다. 지나친 공부와 경험과 인관 관계가 [나]를 흐리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이미 관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현대에 와서는 지나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저자는 [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나열하고 있다. 모든 답이 나에게 있고, 내가 할 수 있고, [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저자를 이런 사상을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나]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혹시 현대의 포스트모던적 사상에서 얻은 것은 아닐까? 인간이 최고이고, 각 개인이 진리이고, 절대 진리도, 절대 선도 없다는 사상에서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쨌든 ‘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젠 한 여름이다. 사색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정말 되돌아 봐야 할 것 같다. 그냥 가다가는 낭떨어지 일 수도 있다. 좋은 글 하나 인용하며 마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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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는 포스트모던시대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란 자기 생각이 옳다는 주의다. 그러니 선의 기준도 없고, 선하게 살려는 사람도 없는 시대다. 광고 카피에 “니 생각대로 해” “니가 옳아”라고 외쳐 댄다. 어떤 기준을 들이대도 쉽게 공감하거나 설득당하지 않는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다. 이런 포스트모던 시대에 젊은 작가가 선에 대한 주제로 소설을 쓴다는 자체가 대단한 용기라 생각한다. 그것도 선인이 세상을 구한다는 주제로 써내려 가고 있다. 아직은 사람들 속에 선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있음을 느끼며 소망을 가져본다.

 

탈무드에 나오는 36명의 굿맨, 한 명씩 죽어가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의 굿맨을 구하기 위해 정의감이 투철한 베니스의 형사 토마소와 불의를 견디지 못하는 코펜하겐 경찰국 소속의 교섭전문가 닐스, 천체물리학자 한나가 나섰다. 연쇄 살인 사건을 종교적으로, 천체물리학적으로, 범죄 심리학적으로 풀어가고 있다. 그 마지막 남은 한 명의 굿맨을 찾아 나선다. 어렵사리 찾은 굿맨은 외부적으로만 그렇지 실제 찾아보니 불륜과 탐욕에 젖어 사는 속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이들은 실망하고 또 실망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 굿맨 만이 희망인 것을 생각하며 끝까지 추적한다.

 

굿맨이라고 여겨지는 인권운동가, 환경학자, 사회사업가, 호스피스, 종교의 사제 등등을 찾았지만 이들은 실망에 젖는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만 이면의 죄들을 보면서 현대인들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어가는 사람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아니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누군가가 굿맨이 되어 주겠지라고 서로 떠넘기는 심리적 현상을 고발하고 있기도 하다. 그 라스트 굿맨이 바로 나여야 하지 않을까 라는 강력한 멧세지를 보내고 있다.

 

작가는

(욥 16:18)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창 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창 18: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창 22: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위의 세 성경구절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의인 50이 필요하다. 그 의인만 있으면 성이 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의인이 이삭처럼 죽어야 한다. 죽어서 제물이 되어야 할 그 굿맨이 필요하다. 제물이 아닌 살아서 선한 일을 할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한 사람의 굿맨은 누구일까? 누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굿맨이라고 찾아간 사람들은 실망만 줄 뿐이다. 그런 사실을 소설을 읽으면서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은근히 자신이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마음을 먹게 만든다. 작가의 기지가 보인다. 어쨌든 절대 선이 무너진 21세기에 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만으로도 좋은 작품이라 생각된다. 환경, 경제, 사회사업, 정치, 의학 등등의 분야에서 선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던진 좋은 작품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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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보 심리학 - 기분 좋은 매일을 만드는 행동의 기술 만사형통 萬事亨通 시리즈 7
사이토 이사무 지음, 최선임 옮김 / 스카이출판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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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떤 모임이나 회의에 아주 정확히 맞추거나 5분 늦는 스타일이다. 늘 조금 일찍 가서 준비하는 스타일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쉽지 않다. 또한 무엇을 하든 미리 준비하기 보다는 늘 임박해야만 하는 중학생 때 많이 하던 당일치기를 즐겨하는 편이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여러 사항을 고려하다가 결국 시기를 놓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행동이 먼저 나가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실수는 줄일 수 있지만 추진은 마음처럼 진척이 되지를 않는다. 이런 느림보 스타일의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면들을 고쳐 나가면 더욱 나의 삶이 나아질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이 책은 그 원인을, 그 답을 명쾌하고 쉽게 정리하고 있다. 내가 더욱 더 나아지는 느낌이다.

 

느림보 심리는 완벽주의라는 것이다. 정확한 진단이다. 늦어지는 중요한 이유는 완벽하게 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조금만 더 하면, 이것을 추가하면 하는 생각이 결국 일을 늦추고야 마는 것이다. 적당한 완벽주의는 긍정적이지만 지나친 완벽주의가 여러 사람들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다들 그 사람의 일을 기다리는데 정작 완벽하게 하겠다는 선의가 전부를 늦어지게 하며, 심지어는 일을 망치게 만든다. 나는 무엇을 완벽하게 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무슨 일이든 세밀하고, 꼼꼼한 편이라 작은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다가 큰 것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과감히 생략해 버리기를 연습하고 있다.

 

느림보 심리를 가진 사람들은 남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뭇 놀랐다. 그런데 그런 심리를 보면 다분히 이해가 간다. 나부터도 “내가 얼마나 노력을 했고, 이 일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밤을 새웠는데 아침에 조금 늦은 걸로 나를 이상하게 생각해 그건 말도 안돼”라는 생각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자꾸 늦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완벽을 원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원한다는 것을 잊은 것 같다. 완벽하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다 녹아서 가져오는 것보다 맛이 떨어지더라도 타는 목마름을 시원케할 적절한 시간에 도착한 아이스크림이 더 행복을 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겠다.

 

행동의 느림보는 귀엽게 봐주지만, 마음 느림보는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음까지 느림보인 사람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느림보 성격을 고치는 방법은 의욕을 불태울 뭔가를 찾는 것이다. 특히 자기 주도적인 사람이 남들이 시키는 일을 할 경우 심각하게 느림보 성향이 되는데 뭐든 스스로 주도할 일을 찾아보는 것이 좋을 듯싶다. 마음으로라도 내가 주도적으로 한다는 생각으로 해 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느림보 탈출법 중 또 하나는 이벤트이다. 나를 흥분시킬 만한 뭔가를 찾아 기분을 좋게 하여 능동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다. 느림보 성향이 나타나는 사람 중에는 목표 지향적 사람이다. 즉 보상이 주워져야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작은 것이라도 나에게 스스로 보상을 줘보는 것이다.

 

나 스스로 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모임에 지각하고, 일이 늦어지고, 매사에 수동적이며, 의욕이 없는 사람들이 왜 그런가 늘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지각하는 습관을 이겨내고, 미리미리 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을까 고민했었다. 이제부터라도 완벽보다는 시간을, 남이 시켜서 보다는 스스로, 남들에게 보조를 잘 맞추는 습관을 가져야 겠다. 이것이 나의 이미지에 아주 종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도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일상에서 있는 일들을 심리적으로 정확한 통찰력으로 자신을 보게 하고 있다. 얇은 책이지만 삶에는 정말 영양가 있는 책이다. 이 책의 조언을 잘만 받아들이면 나를 대단한 매력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자기 개발서이다. 저자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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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엔 몰랐던 내한민국
이숲 지음 / 예옥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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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은 최고봉은 나에게는 “한국의 미” 이다. 한국의 예술 특히 그림을 통한 한국인의 위대성을 읽으면서 너무나 감탄을 했다. 그 외에도 여러 책을 통해 한국의 위대성에 대한 자긍심을 가져왔지만 20대의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의 위대함을 확신하고 외국인들이 써 놓은 자료를 토대로 한민족의 당당함을 써내려간 탁월함과 용기에 찬사를 보냈다. 저자의 외국인들이 써 놓은 자료를 통해 어떻게 보고 있는가? 알아보자.

 

첫째, 저자는 당시의 조선에 대한 자료 자체가 왜곡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서구적인 관점, 일본의 식민지로서 조선, 일본인의 눈으로 본 조선 등의 관점을 당연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서구인들의 조선에 대한 자료를 새롭게 발굴하고, 재해석함으로 조선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해 줬다. 우리 스스로도 일본의 한국에 대한 왜곡된 교육정책이 그대로 학교에 남아 그것이 대물림됨으로 현재 이른 것들이 너무 많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다시 보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은 기독교가 자발적으로 뿌리내린 유일한 나라다. 이승훈은 1783년 아버지가 북경의 사신으로 주재하고 있을 때 함께 따라가 그곳의 선교사 그라몽 신부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고 한국인 최초의 영세자가 되었다. 그 후 이벽, 이가환, 정약전, 정약종 등 많은 학자들이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국의 기독교는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1790년경에는 신자들의 수가 4천여 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북경의 가톨릭 주교에게 한국인이 스스로 뽑은 사제와 주교를 인정해 줄 것을 청원하기되 했다. 기독교는 한국의 제1종교가 되었다. 어떻게 기독교가 한국에서 ‘주류 종교’가 되었는가? 한국에는 왜 이리 교회가 많은가? 미국보다 기독교인의 수가 적은 한국이 어떻게 미국보다 더 많은 선교사를 해외로 파송하는가? 이런 면들을 볼 때 한국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민족임을 알 수 있다.

 

어떤 스웨덴 기자가 목격한 놀라운 현장이 있었다. 스웨덴의 그렙스트라는 기자는 서울에 있는 동안 윤산갈이라는 한국인 청년이 통역을 해주며 그렙스트의 여정을 도와주고 있었다. 윤산갈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당시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서구 교육을 받고 있었다. 윤산갈과 그렙스트 사이에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가 보이지 않았다. ‘고용인-피고용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친구’로 대하는 것 같았다. 그렙스트가 기생을 보고 싶다고 하자 윤산갈은 반대하였고, 보수를 두둑이 주겠다고 했지만 자신은 기독교인이라면서 거절했다. 그렙스트의 책에 등장하는 한국인 안내자는 감정과 판단력이 있고 고집을 피우는 생동감 넘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여행하는 내내 윤산갈은 제2의 주인공이었고, 그렙스트가 이 주인공을 통해 한국인의 정서 속으로 점점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장님이 코끼리의 어디를 만졌느냐에 따라 묘사가 다르듯 한국의 누구를 보았느냐에 따라 달랐을 것이다. 어쨌든 천민출신 윤산갈 같은 이가 당당하게 민족애를 가지고 안내하는 모습은 분명 우리 한국의 모습이다.

 

19세기 말까지 한국에 대해서 알 수 있는 방법은 단지 몇 권의 책에서이다. 하멜 표류기, 한국교회사 서론(한국에서 비밀리에 선교하면서 겪은 내용들은 다블레 주교가 프랑스로 보낸 편지를 모아 엮은 것)이 두 권 외에는 몇 권의 단행본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한국은 주로 ‘미개하고, 더럽고, 풍속이 부패했고, 거짓말과 도둑질을 하며, 완고하고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한국인, 잔인한 고문이 자행되는 나라’와 같은 이미지로 그려지고 있었다. 이런 선지식이 편견을 낳고 편견 속에 방문한 한국 방문자는 또 다른 편견을 기록했을 것이다. 이것이 19세기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 시대의 이미지는 지속적으로 주변국에 전해졌고 결국 왜곡된 한국에 대한 지식을 해소하기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지식을 우리가 우리 스스로 가지고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껏 이어지는 영호남, 동서지역, 진보 보수가 조선 시대의 당파싸움에서 이어졌다고 한다. 물론 좋은 면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할 수 있는 토론의 문화, 언론의 자유 등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잘 발전만 시킨다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긍정적인 성향이라 할 것이다. 너무 억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우리 스스로 한국에 대한 좋은 관점이 나쁜 것 조차도 좋은 면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힘이 될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이 일본을 넘어 중국과 나란히 하여 러시아와 미국을 능가하는 위대한 민족이 될 것을 확신한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을 우리 젊은이들이 그것도 외국에서 공부한 청년이 생각했다는 것은 나의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는 근거가 된다. 위대한 대한민국이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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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행복을 복습하는 시간
김경집 지음 / 지식의숲(넥서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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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네잎 클로버의 행운을 찾기에 그토록 애를 씁니다. 로또 복권, 부동산 투기, 주식 투기 등등으로 부산하면서도 불안한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런데 정작 세잎 클로버의 의미는 행복이랍니다. 수많은 세 잎 클로버의 행복은 다 내 팽개치고 행운만을 찾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김경집 작가의 행복을 복습하는 시간을 쓰신 목적이 바로 이런 취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책을 보면서 이미 있는 행복을 찾아서 복습을 해 봅시다.

 

기적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죠 아무 일 없이 순탄하게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아무 일도 없이 지내는 순간들을 얼마나 많이 보내고 있습니까? 모든 분들게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워 하며 살아야 겠지요. 앱뷸런스란 글짜가 보는 사람에게는 거꾸러 보이지만 백밀러로 보면 제대로 보인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지요.

 

대학들 마다 건축 공학과가 다 있는데 정작 대학들이 모든 자연 환경을 파괴하면서 건물을 지었으니 누구를 탓하고 뭘라할 것이겠습니까? 대학 마다 그 좋은 경관을 다 훼손하면서 건물을 짓고 그곳에서 자연을 위한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아이러니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양손에 모두 다 쥐고 있으면 다른 걸 잡을 수 없지요. 너는 한 손에 제 인생을 던진 신념이 있으니 행복합니다. 게다가 다른 한 손은 여전히 빈손이거든요. 이건 다른 걸 쥘 게 아니라 제 손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내어줄 수 있으니 제일부자지요” 한 제자의 사제가 되겠다는 신념의 변이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금과 은을 앞에 놓고 하나를 고르라 하면 당연히 금을 집어들지요. 그것은 은의 가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금의 가치를 제대로 알기 때문이지요” 나는 금의 가치를 알고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미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 가운데 하나가 시애틀이다. 시애틀은 원래 인디언의 추장의 이름이다. 1885년 미국 14대 대통령 플랭클린 피어스가 수꾸아미족 추장 시애틀에게 땅을 팔라는 요청에 그가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하늘을, 땅의 체온을 사고팔 수가 있습니까? 그런 생각은 우리에게는 매우 생소합니다. 더욱이 우리는 신선한 공기도 반짝이는 물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떠허게 당신이 그것을 우리한테서 살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성스러운 것입니다.” 사람이 땅의 일부이며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달콤한 향기 피워올리는 꽃, 산과 초원을 달리는 말, 들판에서 풀 뜯는 소- 이 인간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시애틀 추잧의 말은 탐욕과 무지에 쌓인 우리의 부끄러움을 그대로 폭로합니다. 미국에 가면 시애틀에 가고 싶습니다.(저자의 말) 나도 가고 싶습니다. 반드시 갈 것입니다. 시애틀 추장의 말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보지만 말고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이것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일 주일에 한 번씩 아들과 목욕탕을 갑니다. 나도 별로 말이 없고, 아들은 더 말이 없어 별 말을 주고 받지 않고 돌아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가끔 말이 통해 대화가 길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화를 하면서 이상하게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이게 행복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으며 대화를 이어갑니다. 그렇죠. 이게 행복이죠. 이런 지나치는 행복을 잃어버리지 말고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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