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알려주는 것들
김유정 지음 / 자유정신사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인들은 사색에 인색하다. 아니 세상이 고뇌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그래도 잘 산다? 아니 잘 죽는다. 사색과 인생에 대한 고찰 없이 살다가 결국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삶을 포기하고 있다. 살기 위해 죽는다. 죽기 위해 산다. 살기 위해 여름밤의 서늘한 바람이 필요하다. 잘 살기 위해 즐거운 여름밤의 사색이 필요하다. 저자 김유정은 그런 시간을 아주 많이 보낸 것 같다. 어떤 사상가나, 책이나, 주장을 읽고 쓴 책이 아니라 그야말로 ‘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알려준 것’을 써 내려 가고 있다. 주제는 [나]다.

 

저자는 [나]를 찾아 떠났다. [나]를 통해 나를 찾았다. [나]를 찾는데 다른 무엇, 어떤 이가 필요하지 않았다. 내 속에 이미 충분한 [나]가 있다. 내 안에 이미 행복(幸福)도 있다. 내 안에 즐거움도, 의미도, 창조도, 영생도 있다. [나]속에 도덕(道德)과 철학(哲學)도 있다. [나] 속에 문명도, 시간도, 미(美)도, 안식도 있다. 신(神)을 찾을 필요도 없다. [나]가 이미 신(神)이다. 따라서 [나]를 찾으면 된다. 모든 것을 관계에서, 책에서,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서 온다고 한다. 물론 다른 어떤 것들이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나]가 분명하지 않으면 더 혼란스러울 수 있다고 한다. 그 [나]를 찾는 방법은 ‘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알려 준’다고 한다.

 

굿맨이라고 여겨지는 인권운동가, 환경학자, 사회사업가, 호스피스, 종교의 사제 등등을 찾았지만 이들은 실망에 젖는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만 이면의 죄들을 보면서 현대인들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어가는 사람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아니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누군가가 굿맨이 되어 주겠지라고 서로 떠넘기는 심리적 현상을 고발하고 있기도 하다. 그 라스트 굿맨이 바로 나여야 하지 않을까 라는 강력한 멧세지를 보내고 있다.

 

작가는 p109에 “인식 주체에 의해 의지되고 인식되는 것입니다. 진리는 나에 의해 창조됩니다.”

p111에 ‘진리는 인식 주체의 의지에 따라 변화합니다. 이것이 존재 [나]를 발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p175에 ‘무지한 자들이 자구 삶을 이끌어 간다. 인간 일반은 혼란스럽다. 그래도 걱정 없다. 진리와 [나]는 이미 여기 있으니.’

p195에 ‘이와 같이 인간의 필연적 불완전성으로부터 신은 존재합니다. 신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인식)의 대상입니다.’

p274에 ‘[나]의 발견을 통하여 존재의 한계인 죽음에 대한 경계를 허문다. [나]는 시간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경계를 완전히 극복하려면 [나]의 발견 후에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런 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작가는 인간을 철저히 신뢰하고 있다. 여러 가지 불안한 요소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깊은 사색을 통해 [나]를 발견하면 그 불안을 다 떠난다고 한다. 지나친 공부와 경험과 인관 관계가 [나]를 흐리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이미 관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현대에 와서는 지나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저자는 [나]라는 말을 수도 없이 나열하고 있다. 모든 답이 나에게 있고, 내가 할 수 있고, [나]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저자를 이런 사상을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나]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혹시 현대의 포스트모던적 사상에서 얻은 것은 아닐까? 인간이 최고이고, 각 개인이 진리이고, 절대 진리도, 절대 선도 없다는 사상에서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쨌든 ‘즐거운 여름밤 서늘한 바람’이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젠 한 여름이다. 사색하기 좋은 계절이 왔다. 정말 되돌아 봐야 할 것 같다. 그냥 가다가는 낭떨어지 일 수도 있다. 좋은 글 하나 인용하며 마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문을 비추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쉴 때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