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포스트모던시대이다. 포스트모던 시대란 자기 생각이 옳다는 주의다. 그러니 선의 기준도 없고, 선하게 살려는 사람도 없는 시대다. 광고 카피에 “니 생각대로 해” “니가 옳아”라고 외쳐 댄다. 어떤 기준을 들이대도 쉽게 공감하거나 설득당하지 않는다. 참으로 어려운 시대다. 이런 포스트모던 시대에 젊은 작가가 선에 대한 주제로 소설을 쓴다는 자체가 대단한 용기라 생각한다. 그것도 선인이 세상을 구한다는 주제로 써내려 가고 있다. 아직은 사람들 속에 선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있음을 느끼며 소망을 가져본다.

 

탈무드에 나오는 36명의 굿맨, 한 명씩 죽어가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의 굿맨을 구하기 위해 정의감이 투철한 베니스의 형사 토마소와 불의를 견디지 못하는 코펜하겐 경찰국 소속의 교섭전문가 닐스, 천체물리학자 한나가 나섰다. 연쇄 살인 사건을 종교적으로, 천체물리학적으로, 범죄 심리학적으로 풀어가고 있다. 그 마지막 남은 한 명의 굿맨을 찾아 나선다. 어렵사리 찾은 굿맨은 외부적으로만 그렇지 실제 찾아보니 불륜과 탐욕에 젖어 사는 속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이들은 실망하고 또 실망한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그 굿맨 만이 희망인 것을 생각하며 끝까지 추적한다.

 

굿맨이라고 여겨지는 인권운동가, 환경학자, 사회사업가, 호스피스, 종교의 사제 등등을 찾았지만 이들은 실망에 젖는다.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만 이면의 죄들을 보면서 현대인들의 이중성을 고발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어가는 사람들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아니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누군가가 굿맨이 되어 주겠지라고 서로 떠넘기는 심리적 현상을 고발하고 있기도 하다. 그 라스트 굿맨이 바로 나여야 하지 않을까 라는 강력한 멧세지를 보내고 있다.

 

작가는

(욥 16:18)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창 18:23)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창 18:24) 그 성 중에 의인 오십 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창 18:25)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창 18:2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

 

(창 22: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창 22: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위의 세 성경구절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의인 50이 필요하다. 그 의인만 있으면 성이 망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의인이 이삭처럼 죽어야 한다. 죽어서 제물이 되어야 할 그 굿맨이 필요하다. 제물이 아닌 살아서 선한 일을 할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한 사람의 굿맨은 누구일까? 누가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굿맨이라고 찾아간 사람들은 실망만 줄 뿐이다. 그런 사실을 소설을 읽으면서 개개인이 느끼는 감정은 은근히 자신이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마음을 먹게 만든다. 작가의 기지가 보인다. 어쨌든 절대 선이 무너진 21세기에 선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만으로도 좋은 작품이라 생각된다. 환경, 경제, 사회사업, 정치, 의학 등등의 분야에서 선을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던진 좋은 작품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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