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씽 The One Thing - 복잡한 세상을 이기는 단순함의 힘
게리 켈러 & 제이 파파산 지음, 구세희 옮김 / 비즈니스북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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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좋은 말로 하면 잡기에 능하다. 운동도, 축구도 조금, 배드민턴도 조금, 족구도 조금 한다. 스포츠도 야구도, 농구도, 축구도 다 좋아 한다. 일도 한 가지만 집중적으로 하기 보다는 축구 보면서 책 읽고, 밥먹으면서 텔레비전 본다. 썩 좋아 보이지 않는데 잘 안 된다. 만약 하나에 집중했다면 많은 성과가 있었을텐데 정말 잘 안 된다. 그래서 이 책 <원씽>에 필이 꽂혔다. 하나에 집중한다 참 매력적이다. 이 책을 통해 나의 습관 중 수리해야 할 부분의 목록을 적어보자.

 

도미노 효과, 하나를 넘어뜨리면 더 큰 것이 넘어가면서 나중에는 에베레스트 산도 넘어뜨린다. 절대로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 단 하나를 찾아야 한다. 성공은 반드시 단서를 남긴다. 그 시작, 그 하나가 분명히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 하나를 찾아야 하고, 그 하나에 집중해야 한다.

 

성공에 대한 말 중 의심해야 할 6가지가 있다. 1)모든 일은 다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 다 중요하다는 말은 물리적으로 다 할 수 없으니 한 가지도 제대로 못한다는 의미이다. 2)멀티스테킹은 곧 능력이다. 다중, 다기능을 말하는 의미의 멀티스테킹은 결국 어느 하나를 크게 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3)성공을 철저한 자기 관리에서 온다. 일면 반드시 맞는 말이다. 철저한 자기 관리라는 말 속에는 자기를 분산시킨다는 의미이다. 이것도저것도, 이사람저사람에게 다 잘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고,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이다.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그 사람은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이고, 어떤 사람에게도 제대로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다. 4)의지만 있다면 못할 일은 없다. 의지도 베터리가 방전되듯 소멸된다. 다시 충전해야 쓸 수 있다. 그런데 의지를 여러 개에 사용한다면 집중 능력이 없어진다. 가석방 심사관들이 오전 처음 시작할 때 65%였던 것이 피곤이 쌓일 때는 0%에 가까웠다. 의지를 집중할 수 있는 체력과 시간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의지력이 가장 높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을 우선으로 처리해야 한다. 5)일과 삶의 균형이 필요하다. 기적은 항상 극단에서 일어난다. 균형잡힌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도 극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균형이 아니라 한 쪽의 희생, 양보가 필요하다. 물론 시기에 맞게 희생해 줄 때 희생하고, 보상 받을 때는 보상 받는 자세다. 예를 들면 남자가 젊어서는 밖을 향해 나갈 때 아내가 희생해주고, 늙어서는 가정으로 돌아와 아내를 위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현대에 잘 이해를 해줄까? 6)크게 벌이는 일은 위험하다. 누가 큰 것을 두려워하는가> 크다는 것은 힘들다, 복잡하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크게 벌리면 위험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힘들이지 않으려고,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오래동안 수고하지 않으려는 속셈에서 나오는 말이다. 내 안에 거인을 깨워야 한다. 큰 일을 두려워하지 말라. 평범한 이류에 그치는 것을 두려워하라. 재능의 낭비를 두러워하라. 삶을 최대한으로 살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라. 큰 일을 두려워하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려고 애쓰게 된다. 크게 생각하고 그게 살아야만 자신의 삶과 일에서 진짜 잠재력을 경험할 수 있다.

 

성공한 사람들을 흉내내 보라. 발전은 모방에서 나온다. 탁월한 인물들을 흉내내기는 나를 그런 인물들의 반열에 올려 놓는다. 인생은 질문이다. 미래의 크기를 바꾸는 초점탐색 질문을 하라. 투자 기법 중에 “닭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고 한다. 그러나 저자는 “달걀을 모두 한 바구니에 담고 그 바구니를 잘 지켜라”고 한다. 초탐색적 질문은 내 인생을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도록 도와줄 것이다. 볼테르는 “사람을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 판단하라”고 했다. 베이컨은 “신중한 질문은 지혜의 절반을 차지한다.” 인도의 여성 총리 인디라 간디는 “질문할 수 있는 힘은 인류 진보의 첫 걸음이다.”라고 했다.

 

도미노를 세워라. 성공은 간단하다. 옳은 일을 옳은 방식으로, 옳은 타이밍에 하면 된다. 나의 필요 분야는 어떤 것이 있으며, 그 단초가 되는 첫 도미노를 세워야 한다. 1)정신적 행복을 위하여: 다른 이들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무엇인가? 2)신체적 건강을 위하여: 운동을 꾸준히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무엇인가? 3)개인적 삶을 위하여: 능력을 키우기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는 무엇인가? 4)핵심 간관계를 위하여: 배우자, 자녀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무엇인가?(우리 가정은 일요일 저녁에 꼭 모여 식사하고 예배하고, 대화하고, 가족회의를 한다.) 5)일을 위하여: 목표 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무엇인가? 6)회사를 위하여: 우리 회사의 경쟁력을 더욱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무엇인가? 7)재정적 문제를 위하여: 나의 자산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은 무엇인가?(나는 카드를 너무 많이 써서 종류가 수도 없이 많았는데 카드를 다 죽였다.)

 

도전의식에서 목적의식으로 이동하라. 시간 확보하기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려면 자신의 일하는 방식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것은 ‘도전에서 목적의식으로의 이동“이라 한다. 색다른 결과를 얻어 내려면 뭔가 색다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정도면 충분해‘라는 OK고원을 만들어 놓고 그 수준에 도달하면 안주한다. 타이핑 속도를 분당 100단어로 하면 100단어가 되면 안주한다. 일정 수준에 올랐다고 판단되면 배움의 스위치를 내려 버린다. 도전적 접근법은 ”쉽고 자연스럽게 일을 한다.“ 카고난 성취의 한계를 정해 놓고 하다가 실망하고, 안주하고, 포기하고 이런 주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목적의식을 가진 접근법은 ’어렵고 부자연스러운 일에 도전한다.‘ 집중하고, 시스템을 만들어 그대로 시행하고, 모델을 세워 그대로 따라하고 결국 돌파구를 연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독서모임 8년까지 일주일에 한 권 읽기를 어렵사리 정착시켰는데 김병완 작가의 <48분 기적의 독서법>을 읽고 나의 한계를 돌파하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일주일에 4-5권을 충분히 읽어내고, 독후감을 써 올린다. 나는 아직 부족하다. 원씽, 하나를 더 확실하게 찾아야 한다. 그리고 더 원씽에 집중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서 완전 돌파의 기적을 이뤄내야 한다. 탄력을 받았으니 반드시 뚫고 나갈 것이다. 기적에 도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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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書 - 부를 경영하는 전략적 책읽기
이채윤 지음 / 큰나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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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70대 중반인 여성분이 계신다. 지역의 유지로, 꽤 많은 땅을 소유하고, 건물도 지어 임대 사업을 하고, 은행 자본도 꽤 있는 분이다. 그야말로 부자다. 그런데 그 분을 보면서 부자가 된 이유를 느낀다. 부자들은 돈을 쓸줄 안다. 돈은 돌고 돌아서 돈이라고 했는데 그 분을 보면 정말 돈은 돌고 돈다. 돈을 돌리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 그 분을 보면서 돈을 돌리려고 나도 애쓰고 있다. <부자의 서> 부자들은 무슨 책을 읽는가 궁금했다. 대부분의 유명한 인물들은 하나도 예외없이 책을 읽었다. 부자들은 더욱 책을 읽은 사람들이다. 부자들을 선정하여 그들은 어떤 책을 읽었는지 발표자들이 나와서 강연한 내용이다. 큰나무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독서경영 조찬 세미나’의 내용을 그대로 책으로 묶은 것이다. 회원이 3,000명, 연회비 120만원, 매번 500명 이상이 참석한다. 새벽 시간인데도 장소에 꽉들어차 열기가 대단하다. 부자는 아무나 되나. 이런 부지런함, 배우려는 열심, 무엇보다 책읽기를 철저히 실행에 옮기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인물 대부분 돈을 돌리고 있다. 즉 기부에 부자다. 자신은 검소하다 못해 빈한하다 할 정도로 근검 절약정신이 배어 있지만 정작 남을 위해 쓰는데는 절제가 없다. 빌 게이츠가 자신의 아내와 만든 재단 빌 &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220억불, 거기에 워런 버핏이 370억불을 기부해 아프리카 등의 의료, 식량, 미국 도서관의 책 기부 사업에 쓰고 있다. 홍콩의 부자 리커창 역시 기부의 대가이다. 부자들은 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증명된 셈이다. 그 돈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고 공헌하고, 자녀들도 부모들의 의견에 적극 공감하고 있다. 나는 어떻게 더 많이 돈을 돌릴 것인가를 연구해야 겠다.

 

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철저히 독서광이었다. 빌게이츠의 백과사전 암기, 워런 버핏의 책읽기로 성공, 지금도 자기 전에 30분이상 책을 읽어야 잠을 잔다. 손정의의 1년 입원 시기에 4000권의 책을 읽어내려간 점등은 놀라울 뿐이다. 오프라 윈프리도 19세에 텔레비전 쇼를 진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책읽기에서 온 것이었다. 아예 출판사와 독서싸이트를 운영하고 독서의 붐을 조성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책을 읽기 않고 성공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책을 읽지 않고 성공하겠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뭔가를 원한다면 책읽기부터 도전하라.

 

나는 지금 독서모임을 참석한지 9년째다. 일주일에 한 권씩 읽고 독후감을 써가서 서로 나눈다. 9년이니까 약 450권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독서력이 늘어 일주일에 3-4권을 읽게 되었다. 김병완의 48분 기적의 독서법을 읽고 과연 이게 사실인가를 의심했지만 내가 경험해 보니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확신한다. 앞으로 독서량을 더 늘려야 겠다. 독서가 취미가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전에는 스포츠를 좋아해 중계를 시청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책 읽기에 바빠 거의 보지 못한다. 나의 닉네임은 독서특기이다. 독서가 특기가 되어 오직 독서로 승부수를 띄우는 것이 나의 바램이다. 자녀들에게 강조를 하고 있는데 큰 아이와 둘째는 필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직 막내가 힘들어 한다. 앞으로 독서학교를 설립해서 일주일 코스부터, 한달, 3개월, 6개월, 1년 등의 다양한 코스로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전문적으로 읽을 수 있는 장을 만들 계획이다. 한국 교육계의 새로운 변화의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학교들도 독서로 승부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독서상을 제정하여 더욱 분발하게 하는 방법이 이 나라와 민족을 살리는 길일 것이다. 독서로 일본을 넘어, 중국을 딛고, 세계를 주름잡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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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중심의 제자도
조나단 도슨 지음, 전의우 옮김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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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가 80년대를 전후하여 제자훈련을 해 왔다. 이 제자훈련이 성숙인가? 복음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개 교회, 각 단체마다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각 개인의 훈련에 임하는 자세에 따라서도 많이 다를 것이다. 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제자훈련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제자훈련 안한 단체가 없었고, 교회마다 제자훈련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그런데 결과는 한국 교회의 쇠퇴로 돌아 왔다. 무엇때문인가? 제자훈련의 문제는 없었는가? 그나마 제자훈련을 했으니까 이정도만 줄었다고 항변할 것인가? 그렇게도 많은 훈련생들이 영혼구원에 포커스가 맞춰진 훈련을 받았다면 분명 이런 참담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보완점을 무엇으로 삼아야 하는가? 내가 느끼기는 최종 꼭지점의 차이였다고 생각한다. 전도도, 영혼구원도, 생명을 살리는 것도 강조했고, 중요시 여겼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개인의 성숙에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있었을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제자훈련의 중심축을 바꾸어야 한다. 영혼구원으로, 생명 살리는 축으로 변환시키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소망이 없다.

 

이 책은 제자훈련에 있어서 더 근본적인 면들을 파헤치고 있다. 제자훈련 하는 목적인 배가인가? 성숙인가? 저자는 청년 시절에 한 여성을 알게 됨으로 성적 범죄를 저지르고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여 방황하는 경험을 하였다.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무던 애를 썼지만 결코 되지 않았다. 즉 제자도를 성숙으로 본 것이었다. 그러나 성숙도 일어나지 않았다. 반면 어떤 사람은 배가로 본다. 즉 전도로 본다. 제자훈련 하는 목적이 오직 전도라는 것이다. 영적 성결 따위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직 전도만 되면 되지 그 사람의 경건과 도덕과 영성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분리를 ‘복음 나누기’라 부른다. 성경은 신자를 가리켜 ‘그리스도인’보다 ‘제자’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제자는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기본 범주다. 우리는 먼저 제자이고, 그다음에 부모이거나 피고용인, 목사이거나 집사, 배우자다. 제자는 신분(정체성)이다. 나머지는 모두 역할이다. 우리의 역할을 일시적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분은 영원하며 경이롭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제자를 확실히 정의하는 게 더없이 중요하다. 제자라는 의미에서 전도와 제자도를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려 한다. 즉 전도 아니면 제자도를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식이다. 제자도에서 은혜의 복음을 제거하고, 전도에서도 복음의 능력은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제자라는 의미를 도덕적 성적표를 받는 것으로나, 복음을 천국을 보증하는 예약 티켓으로 전락시킨다. 이러한 잘못된 복음관을 제자도에 적용하면, 복음은 전도 활동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 결과 제자도는 뭔가 다른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의 신학이나 경건, 사회정의 같은 뭔가 더 ‘진보된’ 것ㅇ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제자도를 전도와 분리한다. 이처럼 전도와 제자도를 분리해서 본 것은 지상명령을 크게 오해한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이든, 그리스도인을 성숙시키는 사명이든, 이 둘 중 하나가 지상 명령의 중심이다”라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해석은 빈혈에 걸린 복음을 낳는다. 지상 명령은 바로 복음 중심이다. 이젠 통합하는 복음이 되어야 한다. ‘복음 중심의 제자도’는 전도와 제자도를 분리하기보다 통합해야 한다. 복음을 제자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는 것을 수직적 제자도로 볼 수 있다. 즉 복음으로 변화된 제자들이 경건, 기도, 예배, 성숙에 기쁨을 느끼는 삶이다. 다음은 수평적 제자도, 즉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하는 것이다. 즉 선교 중심의 제자도를 말한다. 이젠 통합형 제자도로 나아가야 한다. 통합형 제자도는 경건이나 선교가 아닌 예수님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도는 허물어지고, 해체되며, 실망스럽게 된다. 복음은 제자도의 중심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복음의 좋은 소식을 믿을 때, 제자도는 우리를 그분의 생명 가운데로 인도하고 깊이 통합한다. 그분의 주 되심을 인정할 때, 우리는 만물이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 그분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나아가서는 경건한 행위나 선교적 행위가 아닌 삶 전체를 드려 그분께 헌신하게 된다.

 

제자도는 형상을 위한 싸움이다. 남자나 여자나 싸우는 것을 좋아 한다. 남자는 스포츠, 격투기, 죽이는 게임 등등, 여자는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 다른 여자보다 더 예뻐 보이고자 하는 욕망, 인기를 끌고자 하는 시기심 등이 싸움에 갈망을 보여준다. 그런데 인간적인 보이는 형상을 위한 싸움을 우리를 더욱 더 괴롭게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고자 하는 것은 닮아도 닮아도 기쁘고 행복하다.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도로 나아가야 진정 행복할 수 있다. 성경은 그래서 곳곳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가르치고 있다. 즉 세상의 것들과 싸워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싸우라는 것이다. 즉 악한 영들과 싸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루고 보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뒤틀린 동기가 있다. 제자도란 의미를 지나치게 율법을 적용하여 정죄한다. 아니면 자신의 죄를 고해성사하고 회개하고 용서받았다고 하며 서로를 위로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제자도를 죄짓지 않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자들끼리 사실 책임관계를 맺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격려하며, 서로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등의 고상한 목적에서 시작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책임 관계가 빈번히 규범 지키기 혹은 규범 깨기에 기초한 관계로 전락한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규범을 지키지 못했다며 사람들에게 벌을 준다. 반면 반항적인 사람들은 서로의 실패를 못 본척하며 은근슬쩍 넘겨 버린다. 둘 모두 규범 중심이다. 종교적인 사람은 규범을 지키려 들고, 반항적인 사람은 규범을 깨려 든다. 우리는 ‘책임을 일삼는 모임’에 속했던 경험이 있든 없든, 모두 규범을 지키거나 깨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모든 제자는 ‘종교적 행위’ 혹은 ‘영적 방종’으로 기운다. 어떤 제자는 두 극단을 오간다. 우리가 경건한 삶을 열심히 살면 인정해주실 것을 기대하거나, 선교적 관점에서 전도를 열심히 하면 좋아 하실 것을 기대하는 착각에 빠진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게 아니다. 이것은 치명적이다. 우리가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주인 삼으려한다면, 제자도의 중심에서 복음을 제거한 셈이다. 복음의 하나님께 가까이 갈 때, 그분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섬긴다.

 

복음은 제자도의 중심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지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신 게 아니라 진정한 선은 마음에서 나온다고 가르치셨다. 왜 마음인가? 마음은 인간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중심이다.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우리의 마음이 선하든 악하든 이는 동기의 창고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바로 이곳, 곧 동기에서 시작된다. 실제로 동기가 행동보다 중요하다. 시34:8에서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고 했다. 맛본다는 말은 미친 듯한 감정에 빠져든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감정, 곧 하나님을 진심으로 흠모하는 것으로 우리는 변화시킨다. 종교 감정과 복음을 분리하기란 쉽지 않다. 거저 주시는 복음의 능력을 맛본 사람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분을 좋아 하고 이유 없이 존경한다. 그분을 따른다. 이런 사랑과 존경의 감정을 가진 제자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운다.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사람들에게는 회개의 선물을 주신다. 회개는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죄에서 돌이키는 일은 우리의 일이고,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고 분리해서 생각해서는 안된다. 회개는 믿음과 동떨어진 다른 무엇이 아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는 성령님이 임하신다. 성령이 없이는 복음적 거룩도 없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이 모든 제자로서의 경건과 복음 전파의 삶의 핵심이다. 성령님은 ‘결정하기’와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도우신다. 즉 어떤 일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세밀하게 역사하신다. 내가 경험하고, 합리적인 결정을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즉, 어제 설거지를 했으니까 오늘은 하지 않아도 돼) 또 다시 하기를 원하시는 음성을 구체적으로 들려주신다. 또한 어떤 죄악의 유혹에서도 벗어나게 하시는 능력을 주신다.

 

공동체적 제자도를 형성해야 한다. 즉 교회 공동체 전체가 주님의 제자로를 실천함으로 그 공동체에 소속된 제자들이 주님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제자가 되어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더욱 적극적으로 제자도가 실행되게 해야 한다. 공동체가 부분적 제자도로 그쳐서는 안된다. 즉 경건, 선교, 주님을 본받기 등에서 모든 부분에 제자도를 실행해야 한다. 이것은 그 공동체가 주님을 마음으로 사랑하는 운동을 벌이면 된다. 그러기 위해 파이트 클럽을 만들어라. 즉 세상과 악의 세력과 함께 싸울 수 있는 클럽을 만들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돕고, 협력하고 격려하며 죄와, 세상과 보이는 형상을 찾아가는 유혹과 싸워 이기게 하는 그런 클럽을 만들어 세상과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것이다. 영적 싸움은 주님이 기뻐하시고 도와주신다.

 

결론적으로 제자도란 한 쪽에 치우지면 안 된다. 즉 경건도, 전도도 다 부분적일 수 있다. 그 중심이 율법적이거나, 규율로부터 방종이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을 마음 중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하여 그분과 교제하며 그 분이 주시는 성령님의 힘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는 삶을 살면 경건으로 영광 돌리고, 전도도 하는 진정한 제자가 된다. 이것이 복음 중심의 제자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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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한국 베스트 단편소설
김동인 외 지음 / 책만드는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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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읽었던 감동의 한국 단편들이 다시 내 손에 쥐어졌다. 감자, 배따라기, 메밀 꽃 필 무렵, 백치 아다다, 날개 등등 주옥같은 단편들이다. 그러나 너무 오래 되어 줄거리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읽어 내려가면서 옛날의 감동이 되살아나 참 좋았다. 요즘 소설의 팍팍함이 없이 저미어 오는 아픔과 잔잔한 미소를 띠게 하는 감동이 있다. 그냥 막 지나가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기대가 되는 그런 작품들이다. 아마 이런 쓰린 아픔 속에 오는 감동이란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속에 그 원인을 찾게 된다. 옛날 배경이라 그런지, 아니면 작가가 그런 배경에서 살아서 그런지 왜 그렇게 고생들이 많고, 몹쓸 모습들이 많은가? 왜 그렇게 아내들을 때렸으며, 욕지거리로 아내를 대했는가? 왜들 그렇게 급했으며, 극단적인 생각과 결단을 했는가? 그 시대의 작품들은 모두 자연의 묘사들이 너무 아름답고 싱그럽다. 아마 자연 속에서 산 작가들이 저절로 만들어진 감성일 것이다. 사계절을 보고, 봄의 새싹 돋는 신비로움을 보고, 여름 날의 뜨거운 열기를 몸에 듬북 받아 넣었으며, 가을의 높은 하늘의 청명함을 눈에 기록했으니 어찌 이런 표현들이 나오지 않았겠는가? 겨울의 추위, 추위 속에서도 방안의 온돌의 맘까지 누그러뜨리는 따스함, 그 속에서 가족들과 함께한 가족의 사랑의 온기는 결코 잊을래 잊을 수 없는 작가들 속에 내재된 DNA였을 것이다.

 

한국 근대 소설의 흡사 비슷한 주제의 모습을 보게 된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에 아내가 죽는다. 이상의 ‘날개’에서도 아내가 죽는다. 김동인의 ‘감자’에서도, ‘배따라기’도 왜 그리 아내들이 죽는가? 사실 그 당시의 아내들은 이렇게 맞으며, 죽으며 피가 솟는 그런 삶을 살았다. 남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쌍욕을 하고, 짐승 다루듯 몸에 손지검을 해댔던 시절이었다. 그런 아내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 시대였지 않았나 생각된다. 남성들의 반성적 소설이기도 한 것 같다. 같은 의미로 아내들의 소중함을 깨닫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내들의 말없는 헌신과 억울해도 참는 인내를 당연시 여기던 남자들이 정신을 차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아내의 소중함이 알려진 때가 수십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 전쟁은 진행중이다. 여성의 지위가 올라갔다 하지만 그 정서는 여전한 것은 한국의 남존여비의 DNA는 피에 녹아 전해지고 있는 듯 싶다.

 

베스트 소설들에서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압제 당하는 계층들의 질곡 같은 삶이다. 나도향의 ‘벙어리 삼룡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속에서 등장하는 일력거 꾼의 비애, 장돌뱅이의 고단한 삶, 남의 집 머슴의 매맞고 사는 인생, 지능이 모자라 사람 대접 받지 못하는 절절한 삶 등이 그것이다. 당시는 아내들만 고통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장애인, 머슴, 빈민 계층의 장돌뱅이나 인력거 꾼의 삶은 너무나 가난에 찌든 삶이었다. 이들의 인권이나 찌든 삶을 누구도 대변하지 못하던 시대를 벗어나 작가들은 감동의 스토리 속에 이들의 아픔을 전하고픈 애정이 보여진다. 당시 지식층인 작가들의 사회를 바라보는 아름다운 감동의 시선을 느껴보게 되어 기쁘다.

 

한국 초기의 소설들은 왜 그렇게 애잔한 감동이 넘치는가? 침을 꼴딱 삼키게 하는 그 순간이 있다. 진부하지 않고, 질질 끌지 않고, 주저리 주저리 늘어 놓지 않고 그냥 그 한 순간이 감동이다. 뭐라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영상으로 잔뜩 보여주지 않아도 깊고 오랜 감동은 두고두고 이어지게 되는 그런 작품들이다. 가난하고, 아프고, 짓눌리는 삶 속에서도 그들이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바로 이런 감동이었을 것이다. 겉으로 표현되지 않는 애정일 것이다. 파헤쳐지지 않은 땅에서 사는 당시의 사람들 속에서 나오는 사람냄새 일 것이다. 인위적인 회색 빛의 콘크리트에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인간미일 것이다. 나는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나를 찾은 느낌이다. 내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이런 이야기들에 아직은 감동을 받는 가슴을 가진 인간이었구나 하며 감사했다.

 

좋은 책을 다시 한 번 지어주셔서 감사한다. 읽은 책이라 다시 손에 쥐기는 쉽지 않았는데 이런 편집을 단행해 줌으로 옛추억 속으로 시간 여행을 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의 글감, 시감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시골 산 길의 야생초 같은 책을 선사해준 출판사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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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것과의 조우
김창훈.홍승동 지음 / 좋은책만들기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나는 나와 주변 사람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 한다고 생각하라” 물론 안 좋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 나를 좋아 할 것이라 생각하고 그를 대하면 나를 좋아 하는 사람에게 대할 때 내가 좋게 대할 것이고, 결국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게 될 것이다. 혹시 나를 싫어하여 떠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계속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그 사람도 나를 좋아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낯선 것과의 조우>를 저자는 이것을 프레임이라고 한다. 즉 자아, 세상을 보는 창이란 의미이다. 우리가 360도를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고 치자 우리가 그 카메라를 사용하여 360도를 찍어낼 수 있을까? 절대로 없다. 내 생각 속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정짓고 있는데 어떻게 그 카메라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실제로 어르신들은 스마트폰이 있어도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왜? 내가 그 스마트폰을 볼 때 그런 기능이 있는지, 그런 기능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믿음과 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전화나 시계로만 사용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프레임이다. 우리는 이 프레임대로 산다. 나는 기기에 있어서 얼리 어답터이다. 최신 것들, 최신의 기능들을 받아들이는 편이다. 타자기도, 전동타자기도, 컴퓨터도, 노트북도, 스마트폰도 항상 앞선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생각이 젊은이들과 잘 통한다. 어른들, 옛 생각에 머물러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면 답답하다.

 

왜 프레임 전환이 필요한가? 우리가 보는 세상대로 세상은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는 것이 진실이지 않을 수 있다. 생각의 프레임을 전환시키지 않고는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지도를 제대로 가져야 한다. 지도 없이는 길을 찾아갈 수 없다. 사람의 성격을 형용사로 붙여보자. 가족들을 좋은 형용사를 붙여서 불러보자. 어느 순간에 가족이 그렇게 되어 있을 것이다. 내 아내는 막내를(아들) 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이라고 불렀다. 사실 눈도 작고, 키도 작고, 잘생긴 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불렀는데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정말 멋진 아이가 되었다. 남들이 다 그렇다고 인정한다. 좋은 형용사를 붙이면 그렇게 된다. 좋은 이름을 붙여라. 과거 공장에 다니는 사람들은 공순이, 공돌이라고 불렀다. 좋지 않은 이미지로 부르니 그런 계층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를 공돌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보았다. 이왕이면 엔지니어가 더 낫지 않은가?

 

성공하는 사람들은 어떤 프레임을 갖고 있는가?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장기적인 프레임을 갖고 있다. 즉 단기에 승부를 보려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생각하고 결국 반드시 성공한다는 프레임을 갖고 있다. 그래서 단기적으로 실패를 해도 견뎌낸다. 결국은 장기적으로 볼 때 성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연하라, 더욱 유연하라. 즉 생각을 유연하게 가져야 새로운 것에 적응하고 익숙해져 성공할 수 있다. 자신만의 생각에 틀을 만들어 다른 것들을 받아 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대표적인 기업이 노키아이다. 먼저 터치폰을 성공시키고도 장기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유연하게 기다리지 못함으로 스마트폰 시장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확률이 말하는 대수의 법칙을 생각하라. 처음에 50%의 확률이면 4번 시도하면 97%의 성공확률로 올라간다. 이것은 실제이다.

 

프레임을 바꾸면 무엇이 달라지나? 사회 구조의 프레임이 바뀌고 있다. 바뀌는 프레임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거대한 전환이 초래하는 위기는 절호의 기회가 된다. 학교에서 공부만 잘하는 아이가 성공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젠 영업, 인간관계만 잘해도 성공하는 사회다. 사회가 전환되었다. 적응하고, 프레임을 바꾸면 된다. 스티브 잡스도 비싼 등록금 주고 왜 학교를 다니냐 하면서 그만두었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을 하고 결국 성공에 이르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프레임의 전환의 힘이다.

 

피터 드러거의 네이밍 훈련은 참으로 멋진 말이다. 돈이 없어서 고생하는 대학생활-돈의 중요성을 체화하는 훈련의 시간, 신입직원으로 고생-사회적응의 완충지대, 대기업 정규직 같은 철밥통은 아니지만 임금은 비슷하고 대신 안정성은 좀 떨어지는 직업-플라스틱 밥통, 술만 들어가면 조폭으로 거칠어져 서민의 입장에선 조폭과 똑같은 두려움의 대상-주폭. 좋은 표현들이다. 내가 아는 어느 어르신은 아이들이 말을 안들을 때 이런 욕을 자주 하셨다. “이 빌어먹을 놈아!”가 아니라 “이 부자가 되다가 억만장자가 될 놈아!” 욕도 멋지게 하면 축복이 된다. 욕도 네이밍 작업이 되면 좋겠다. 사춘기 아이들은 문제아가 아니라 자기를 찾아가는 숭고한 시간으로 표현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공부를 못하는 아이가 아니라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라는 표현으로 하면 어떨까? ‘엄마의 잔소리’가 아니라 ‘엄마의 단소리’로 명명하면 어떨까 생각이 든다.

 

프레임의 전환, 내 생각의 창대로 산다는 것, 생각의 틀을 전환하라는 말, 너무 중요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우리 뇌는 익숙한 것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으니 어찌하란 말인가? 낯 선 것을 기피하는 우리의 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오직 한 가지 밖에는 없다. 지속 반복 그래서 뇌가 익숙하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낯설지 않게 느끼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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